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04화 (30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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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이상과 현실

느긋하게 벙커안에서 포션을 마시며 수납 마스터를 향해 달린다.

산책도 했으니 내 숙련을 막을 사람은 없다. 조급해하지 않고 마스터를 향해 달린다.

단거리 달리기가 아닌 마라톤. 지금 숙련은 고급 45퍼. 남은 건 2750번 정도. 먹어야 하는 포션은 69개.

오늘 먹을 만큼 먹고 한숨 자고 일어나면 마무리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기왕이면 한 번에 다 먹고 싶지만…. 아무리 나라도 거의 70개를 한자리에서 먹는 건 쉽지 않으니까.

분명한 것은 사람마다 포션을 받아들이는데 차이가 있다.

나나 안나처럼 크게 부담이 오지 않는 사람도 있고 세아나 민희처럼 포션 먹는 게 힘들어하는 사람도 있다.

이유가 뭘까? 체질 같은 건가? 뭐…. 그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그렇다 치고.

이 빌어먹을 세상에서 강해지기 위해선 결국 여러가지가 조건에 맞아야 한다.

사람을 죽이고도 괴로워하지 않을 무딘 정신.

스킬을 효율적으로 선택하고 적재적소에 쓸 수 있는 뇌지컬.

그리고 그걸 뒷받침해주는 피지컬.

어디나 똑같다. 결국, 뭐든지 하나로 귀결되는 거다.

심. 기. 체. 세 가지가 따라줘야 가능한 일들.

다행인 것은 내가 그 세 가지 전부 그리 뒤처지지는 않는다는 거다.

운이 좋았다고 볼 수도 있고 축복받은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이런 거지 같은 세상에서 오래 살아남아 있는 건 축복인가? 저주인가?

어쨌든 나는 지금의 삶에 만족한다. 그리고 쉽게 목숨을 버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치열하게 발버둥 치고 추하고 질기게 끝까지 살아남을 거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은 끝까지 지킬 거다. 그들이 겪을 고통과 불행까지 모두 내가 안는다고 할지라도.

크…. 포션을 처먹으면서 스킬을 숙련하면 이런 잡생각이 많이 난다니까.

머리를 비울 수 있으면 참 좋을 텐데.

내 옆에서 투명 스킬 숙련을 하는 안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생긋 웃어준다. 격정과 근심 포인트가 50점 정도는 그대로 증발하는 느낌.

투명 숙련을 하고 있기에 웃고 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건 조금 웃기다.

고장 난 홀로그램 같은 모습. 아. 안되지 안돼. 홀로그램이면 안 돼.

그렇게 수납 숙련을 하면서 탐지도 한 번씩 썼다.

아직도 밖에서 쿵짝거리고 있는 승희와 미나, 세아.

대체 뭘 언제까지 하려고 아직 안 들어오는 거야? 렉스인지 티라노인지는 핑계고 스킬 숙련 안 하려고 땡땡이 치는 거 아냐?

어차피 주변에 사람의 기척은 없기에 탐지로 지켜보기만 하며 스킬 숙련을 계속한다.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지났을까? 그제야 세 여자가 들어왔다.

해맑은 모습. 그리고 만족스러운 얼굴.

"뭐야. 잘 됐어?"

"네! 렉스랑 다른 개들도 전부 우리 집 앞으로 왔어요!"

붉게 상기된 볼로 신난다는 듯 말하는 승희.

미나도 그렇고 세아도 마찬가지로 싱글벙글하며 옷을 벗는다.

"뭘 어떻게 했길래 이렇게 금방?"

"렉스 걔 엄청 똑똑해! 괜히 보스가 아닌가 봐! 막막 내가 이상하게 말해도 딱 알아서 하더라니까!? 장난 아냐!"

정말 어린 아이처럼 좋아하는 세아. 어지간히 좋긴 한가 보다. 최근 들어 저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보네.

"저희 좀 씻을게요? 몸이랑 옷이랑 전부 엉망이 되어서."

"어? 그래."

전부 벗어도 되는데 벗다가 말고 각자 씻으러 들어가는 세 여자.

쩝. 왠지 아쉽네. 그리고 그런 나를 안나가 재밌다는 듯 바라본다.

"어? 왜. 내가 왜?"

괜히 찔려서 한마디 하고는 다시 스킬 숙련을 한다.

마음 같아서는 따라 들어가서 같이 씻고 싶은데.

근데 내가 그러지 않은 건 셋 중 누구에게 들어가야 할지 몰라서다. 정말…. 사치스러운 고민이 아닐 수 없구만.

한 번에 다 같이 씻을 수 있는 욕실이 필요해. 어떻게 방법이 없을까?

여기에 큰 욕실을 만드는 건 무리고. 결국엔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게이트 스킬을 빨리 배워서 시설 좋은 욕실로 연결해버리는 거지.

그러면 알몸이 된 네 명의 여자들과 게이트를 통과해서 씻고 오는 거야. 캬. 좋네.

게이트가 그런 스킬이 맞으면 좋겠는데. 설마 다른 엉뚱한 스킬은 아니겠지?

순간이동, 그리고 게이트.

상식적으로는 보통 내가 생각하는 그런 스킬이 맞을 거다.

아마 게임 조금 했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생각하겠지. 설마 저런 이름을 달고 엉뚱한 스킬을 내놓겠어?

만약 그런 스킬이 아니라면…. 이건 정말 스킬 만든 새끼 꿀밤 한 대 때리는 거로는 해결이 안 되는 일이다.

물론 꿀밤 수준은 이미 오래전에 지나긴 했지. 지금은 묶어 놓고 볼기라도 때려야지.

어쨌든…. 티어 9단계에 있는 스킬인 데다 스킬트리까지 확실한 스킬.

무조건 배워야 하는 필 수 스킬이다. 이게 생기면 정말 많은 것들이 편해질 테니까.

지금까지 나왔던 스킬들로 생각해보면 순간이동과 게이트는 어느 정도 예상이 가능하다.

지정된 장소로 순간이동/게이트 가능. 중급, 고급, 마스터 할 때마다 포인트 한군데씩 증가. 이정도?

그럼 결국엔 마스터 하면 네 군데로 이동이 가능하다는 거다.

몰디브 해변에서 종일 놀다가 일본의 료칸에서 목욕하고 잠은 센트럴 파크가 보이는 멘하튼의 호텔에서 잘 수 있다는 말.

게다가 이건 같이 다니는 사람이 많을수록 빛을 발휘한다. 세계 각지의 포인트를 찍어놓으면 얼마든지 이동할 수 있다는 소리니까.

문제는…. 어떤 변수가 있냐는 건데.

설마 쩨쩨하게 거리 제한이나 이런 게 있지는 않겠지? 그러면 정말 개씨발 소리가 절로 나올 것 같은데.

아무튼, 그렇게 순간이동과 게이트에 대해서 생각하며 스킬 숙련을 계속한다.

어차피 지금은 그 선행 스킬인 블링크도 없는 상황. 스킬을 배우려면 일단 가진 스킬들 부터 마스터하는게 먼저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다 씻은 세아가 거실로 나온다.

벙커 안이 따듯해서 그런지 가벼운 스포츠 브라에 짧은 반바지 하나만 입고 나온 세아.

아무리 서로 편한 사이라고는 하지만…. 복장이 너무 부실한 거 아냐?

고맙게.

"스킬 숙련하러 나온 거야?"

내가 말하자 내 곁으로 다가오는 세아. 잠자코 내 옆에 앉는다.

그리고는 아무 말이 없는 세아. 뭐지? 뭐 할 말 있나?

씻으러 들어갈때랑 분위기가 너무 다른데?

그렇게 세아가 뜸을 들이는 사이 승희와 미나도 어느새 거실로 나왔고 다 같이 둘러앉았다.

세아를 보더니 분위기가 약간 미묘하단 걸 깨닫고 조용히 스킬 숙련을 시작하는 승희와 미나.

나는 그런 그녀들을 위해 포션을 사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오빠."

한참 말이 없던 세아가 입을 연다.

"왜?"

"우리가 쟤들 먹이를 줄 수 있는 여유가 있나?"

"아니. 없지."

"역시 그렇지?"

아마 위에서도 자기들끼리 이런 이야기를 했겠지?

승희와 미나가 조심스럽게 세아가 하는 말을 들으며 내 눈치를 본다.

"보스 녀석 한 마리 정도였으면 얼마든지 줄 수 있겠지. 근데 다 데리고 온 거 아냐? 그놈만 혼자 왔을 리가 없는데?"

"맞아. 부하들이랑 암컷들이랑 강아지들까지 다 데리고 왔어."

"숫자 꽤 되던데? 그럼 지금 바깥은 개판이겠네."

"개판이라니…. 아. 개판 맞긴 하구나."

"개판 맞지. 아무튼, 그 정도 숫자면 우리가 전부 먹이를 줄 방법은 없어. 한두 마리여야지. 거의 서른 넘잖아?"

"훨씬 넘지…."

"세상이 망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면 충분히 가능했겠지. 여기저기 다니면서 개 사료를 가져왔으면 되니까. 근데 지금은 무리지? 그런 개 사료들은 이미 다 썩어서 말라 비틀어졌겠네."

"하아."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그냥 막 데리고 온 거야? 이제야 그런 생각이 들어?"

"아니…. 아냐. 나는 내가 아까 그런 멧돼지라도 계속 잡아서 줄 생각도 하고 있었어."

"그게 가능할까? 멧돼지가 주기적으로 자기 죽여달라고 산에서 내려오는 것도 아닐 텐데."

"혹시 오빠가…."

세아도 자기가 조금 무리한 부탁을 하는 걸 아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물론, 가능하긴 하지. 비행으로 날아다니면서 몇 마리 재우고 죽인 다음 수납에 담아오면 어려운 거 아니니까."

"그래? 그럼…."

"근데."

"응?"

"언제까지?"

"언제까지라니?"

"쟤들이 먹는 양에 대해서 나는 얼마나 되는지 잘 몰라. 그리고 쟤들이 멧돼지나 고라니나 이런 것들만 먹고 살 수 있는지도 잘 모르고. 물론 지들이 먹을 건 어느 정도 구해올 수 있긴 하겠지. 근데…. 언제까지 그렇게 해야 하는데? 지속해서 먹이를 공급하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야. 농경과 목축이란 게 인류사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 다 이유가 있다고. 너희를 위해서라면 근처에 있는 야생동물 잡아다가 저 녀석들에게 던져주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아. 하지만 그렇게 해서 주변 야생동물 씨가 마르면? 점점 멀리 나가나? 그렇게 해서 더 멀어지게 되면? 어느 순간부터는 난 개들 먹이 구하러 다니는 사람이 되지 않을까?"

조금 매정해 보일 수 있겠지만 나는 현실적인 상황을 말해주는 거다.

개. 물론 좋지. 장점만 본다면 얼마든지 곁에 두는 게 이득인 동물이다.

생체 알람 시스템이잖아. 적이 나타나면 짖어서 알려주는 충직한 놈들. 게다가 24시간 활용할 수 있는 데다가 투명까지 잡아낼 수 있는 후각을 가진 훌륭한 경비 시스템.

하지만 사람들이 그걸 알면서도 포기한 건 결국 유지비 때문이다.

자신이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든 판국에 개들을 키운다는 것은 상당히 힘든 일이니까.

"그…. 하아…."

"나는 네가 쟤들에게 정을 주는 것을 뭐라고 하는 게 아냐. 승희나 미나 너희가 강아지를 바라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해. 다만…. 너희는 아무도 쟤들의 유지비 같은 걸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막연하게 함께했으면 좋겠다. 키우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 했다고."

내 쓴소리에 여자들은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약간 숙연한 모습이 되었다.

아마…. 내가 이들에게 이런 식으로 혼내는 건 처음인 거 같다.

그동안은 어지간한 것에 대해 이렇게 혼내거나 한 적은 없었다.

생각 없는 여자들이 아니었으니까.

불편하고 힘들어도 묵묵히 참아주고 이해해주었기에 이럴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 경우는 다르다.

감성이 이성을 잡아먹은 상황.

대책 없이 지른 상황.

자신들이 책임질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선 상황.

이런 건 한소리를 해줘야 한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이런 거로 본인들이 잘못한 것을 상기시켜 줄 수 있어서.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여기서 막무가내로 빼액거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합격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여자가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만…. 대부분의 여자는 본인이 책임질 수 없는 상황이 오면 그대로 손을 놔버린다.

뒷일, 책임, 후폭풍…. 그런 건 신경 쓰지 않고 말이지.

그리고 승희나 미나, 세아와 안나가 그런 여자였다면 나는 함께 살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다.

그럴 필요가 없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건 아니다. 나는 이 여자들의 아버지가 아니잖아.

"이미 너희는 일을 벌여놨어. 뭐, 멧돼지 사체가 있으니 약간의 시간은 있겠지? 스스로 생각해봐. 어떻게 하면 저 개들의 식량을 해결해 줄 수 있을지. 생각하고 생각한 다음 최대한 그럴듯한 걸 뽑아내서 다시 이야기하자. 음…. 내일 점심까지 생각해봐. 승희랑 미나도 함께 생각해. 모두가 책임은 있는 거니까."

"알겠어."

세아는 고개를 끄덕였고 승희와 미나도 별다른 불만 없이 알았다고 대답한다.

그래. 이래서 내가 이 여자들을 좋아하는 거다.

누구나 실수는 할 수 있다. 중요한 건 그 후다.

본인의 실수를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뒤처리를 하는 것.

아주 기본적인 거지만…. 정작 상황이 닥치면 이걸 제대로 하는 사람은 드물다.

실수를 인정하지 않고, 책임을 회피하려 하고, 뒤처리를 외면하는 것.

그게 인간이 가진 기본적인 속성이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말고. 그러려고 내가 있는 거니까. 그렇다고 본인들이 해결할 방법을 안 찾아도 된다는 소리는 아냐."

내 말에 셋의 표정이 조금 밝아지긴 했다.

에휴. 나도 문제다. 엄할 때는 조금 더 엄해도 되는데. 쟤들을 보고 있으면 한없이 마음이 약해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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