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03화 (30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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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

고양이에게 여자들을 빼앗긴 느낌이다.

한 마리가 세아에게 다가오고 나서 몇 마리가 더 우리 곁으로 다가왔고 승희와 미나, 세아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움직이지도 못한 채 고양이들을 바라봤다.

큰 용기를 낸 세아가 천천히 자세를 낮췄고 마침내 고양이가 도망가지 않은 채로 쭈그려 앉을 수 있었다.

아주 천천히, 조심조심 손을 내미는 세아.

그런 세아가 기특했는지 고양이 하나가 세아의 손에 머리를 비빈다.

"!!!!!"

차마 소리도 못 내고 행복에 겨워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세아.

더 웃긴 건 승희와 미나는 그런 세아를 엄청나게 부러운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거다.

그런 세아의 모습에 용기를 얻은 승희와 미나 역시 천천히 자세를 낮췄고 결국은 둘 다 쭈그려 앉을 수 있었다.

오랜 노력 끝에 손까지 내밀었고 마침내 둘에게도 고양이들이 다가와 머리를 비볐다.

"크흑…."

"행복해…."

"여기서 발을 굴러 고양이들을 전부 도망가게 하면…. 난 살해당하겠지?"

작게 중얼거렸는데 그걸 들었는지 세 여자가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무섭네…. 어떻게 저런 표정들을 지을 수 있지?

실수로라도 고양이들을 겁주지 않기 위해서 죽은 듯이 서 있는 나는 역시 가만히 서 있는 안나를 보았다.

고양이가 다리에 몸을 비벼도 별 반응이 없는 안나.

귀여워하는 표정이긴 한데 저 세 명처럼 좋아죽겠다는 표정은 아니다.

그냥 귀엽네. 하는 수준?

"안나는 고양이 별로야?"

"고양이? 야옹."

"미안해.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렇게 한참을 서 있으니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서 있어야 하나.

이 여자들은 안 춥나?

언제쯤 집에 들어갈 수 있을까?

대체 저 고양이들이 뭐가 귀엽다고 얘들은 이렇게 안달이 나 있는 걸까?

그러다가 고양이 하나가 털푸덕 땅에 몸을 뉘었다.

용기를 낸 승희가 손으로 고양이의 등을 살짝 만졌고 녀석은 몸을 틀며 조금 귀여운 포즈를 짓는다.

"꺄아아아."

"아으으으…."

"귀…. 귀여워."

어…. 좀 귀엽긴 하네. 쟤들이 저렇게 좋아하는 이유를 약간 알 거 같긴 하다.

굳이 좋은 시간을 방해하기 싫으니 서 있기 지겨워도 조금 더 기다렸다.

마음 같아선 페이즈 아웃을 써서 이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지만…. 괜히 그랬다가 고양이가 도망가면 큰일 나잖아.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무념무상으로 서 있는데 갑자기 고양이들이 재빨리 몸을 일으키더니 어느 한 곳을 바라본다.

그리고 어? 하는 사이에 모두 후다닥 도망간다.

"아…."

"어어?"

"어디가!"

"나….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혹시나 해서 급하게 말했지만, 아무도 내 말엔 관심이 없다.

그저 고양이들이 떠난 것을 안타까워하는 여자들이 있을 뿐.

"왜 갔지!?"

"아까워…."

"또…. 오려나?"

몸을 일으키며 아쉽다는 티를 팍팍 내는 세 여자.

그런 셋과는 다르게 나와 안 나는 고양이들이 마지막으로 바라본 곳을 쳐다봤다.

대체…. 뭘보고 도망간 거지?

어둠.

가로등 불빛이 없는 곳이라 제법 어두컴컴한 골목.

분명 고양이들은 그쪽을 바라보더니 도망갔다.

동물들의 감각은 예민하다. 인간들보다 훨씬 더.

분명 뭔가가 있을 텐데…. 눈에는 안 보인다. 밤을 낮처럼 볼 수 있는 스킬이 있으면 모를까.

"썽철…."

안나가 내 이름을 나지막하게 부른다. 안나는 뭔가를 본 건가?

그렇게 시선을 떼지 않고 어둠을 바라보고 있으니…. 뭔가가 움직였다.

뭐지? 제법…. 큰데?

푸르르릉

소리. 뭔가 거대한 것이 숨을 내쉬며 살이 떨리는 소리.

그리고 다가오던 것이 편의점에서 새어 나온 불빛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멧돼지. 거의 작은 소형차만 한 크기.

그걸 바라본 나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이야…."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다.

비무장지대에 가면 저만한 크기의 멧돼지나 성인이 두 팔을 벌린 것보다 큰 독수리 같은 것들이 산다고.

세상이 멸망한 지 5년. 그동안 이런 한적한 곳은 비무장지대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래서 저런 엄청난 멧돼지가 이런 곳까지 나타나게 된 거겠지.

"썽철…."

안나가 다시 내 이름을 작게 중얼거린다.

그렇다고 해도 그녀의 목소리에 불안감이나 걱정 같은 것은 없다. 온전히 나를 믿는다는 느낌?

"으아…."

"저건 뭐야."

"뭐가 저렇게 크지…?"

승희나 미나, 세아도 놀란 표정을 짓긴 하지만 역시 걱정 같은 건 없어 보인다.

나와 비슷하게 감탄하는 모습?

사실 이들의 반응이 이런 건 당연하다.

아무리 집채만 한 멧돼지라도 크게 위협적이진 않으니까.

스킬이 없던 시절이라면 잔뜩 쫄아서 도망가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잖아?

그렇기에 저렇게 태평한 모습으로 놀랄 수도 있는 거다.

"아까 녀석들의 대장인가 보네?"

진짜 그런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아무런 관련이 없진 않겠지.

복수인가? 아니면 자신의 부하, 혹은 가족들을 찾으러 온 건가?

뭐가 됐든 멍청한 짓이다. 모습을 드러낸 이상 끝이지.

컹컹컹! 컹컹!!!

그런데 의외의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맹렬하게 짖으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들개 보스.

멧돼지 역시 그런 보스 녀석을 보더니 잔뜩 긴장하며 자세를 낮춘다.

아무리 봐도 저건 공격하겠다는 뜻인데.

컹!

번개같이 뛰어온 들개 보스가 멧돼지와 우리 사이에 와서 멈추더니 멧돼지를 향해 짖는다.

주둥이에 멧돼지의 피를 잔뜩 묻히고 있는 채로 맹렬하게 짖어대는 녀석.

와. 설마 이 녀석 지금 우리를 지키려고 온 거야?

제법 기특하네?

분명 이놈은 우리가 멧돼지들을 쉽게 즉사시킨 걸 봤다.

우리가 힘이 있는 걸 뻔히 알면서도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다고? 그것참 신기하네.

하지만 들개 보스의 위협에도 멧돼지는 별다른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듯 낮춘 자세를 바꾸지 않는다.

그리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으로 들개 보스와 우리를 바라보는 멧돼지 대장.

당장이라도 우리 쪽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은 모습.

그리고 아직도 짖으면서 그런 멧돼지를 쫓아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녀석.

그래. 이만하면 됐다. 네 녀석이 얼마나 충성스러운지는 알겠어.

아니 충성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떤 뜻인지는 충분히 전해졌다.

이다음은 인간님이 알아서 해결할 차례.

기존의 30미터에서 60퍼센트의 범위가 증가하여 48미터까지 늘어난 나의 수면.

사실 아까도 굳이 비행을 쓸 필요는 없었다.

그저 조금 더 극적인 연출을 하고 싶었을 뿐이지.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 그저 간단하게 멧돼지를 제압한다.

"자라."

네놈이 불면증에 걸린 멧돼지가 아닌 이상 이걸 막을 수는 없을 거다.

역시 내 스킬 한방에 멧돼지 녀석의 눈이 감기며 그 육중한 몸이 아스팔트 도로로 쓰러진다.

짖는 것을 멈추고 나를 바라보는 들개 보스.

분명 쓰러진 걸 봤는데도 긴장을 풀지 않고 우리 사이에서 떠나질 않는다.

"세아야?"

"응."

그러더니 멧돼지를 향해 저벅저벅 다가가는 세아.

괴력을 쓴 그녀는 이번에도 머리 한가운데에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크기고 뭐고 없다. 어차피 두개골 두께가 그리 큰 차이가 나진 않을 테니까.

단 한방에 머리가 깨져 절명한 멧돼지.

그리고 그런 우릴 바라보는 들개 보스.

"역시 이 녀석은 아까랑 느낌이 다르네."

손을 탁탁 털고 별거 아니라는 듯 중얼거리는 세아.

졸지에 보스 멧돼지 슬레이어가 되어버린 그녀는 뿌듯한 듯 입가를 실룩거린다.

그리고 웃긴 건 들개 보스가 세아를 보는 눈빛이 달라졌다는 거다.

재운 건 난데…. 왜 세아를 저렇게 보는 거야? 하긴, 개는 내가 재운 걸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려나. 세아가 멧돼지를 죽인 건 확실하게 봤으니 아는 거고?

"잠깐 있어 봐. 다른 놈들이 더 있나 보고 올게."

뭐, 개한테 존경 같은 걸 받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다.

어차피 데리고 살 것도 아닌데.

여자들만 놓고 가는 건 살짝 불안하긴 하지만, 어차피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주변을 빙글 돌뿐이니 괜찮겠지.

게다가 괴력을 쓸 수 있는 세아도 있고 힐을 쓸 수 있는 승희도 있잖아? 크게 위험은 없을 거다. 없겠지?

인간이라면 탐지가 있으니 접근을 얼마든지 알아챌 수 있지만, 동물은 다르다.

그저 맨눈으로 찾아볼 수밖에 없다.

어차피 저만한 멧돼지는 육안으로도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그래도 탐지에 너무 길들여져 버린 것 같다.

생각해보니 비행을 쓰고 맨눈으로 정찰하는 건 거의 안 해본 거 같네. 이런 것도 연습을 좀 해야 하긴 할 텐데.

주변을 둘러봐도 멧돼지나 다른 위험 사항은 없어 보인다.

뭐, 있다고 해도 들개 보스 녀석이 알아서 해결하겠지. 보니까 쉽게 당할 것 같지는 않아 보였으니까.

그렇게 한 10분 정도 주변을 돌고 내려오자 밑은 조금 희한한 상황이 됐다.

잔뜩 무게 잡고 카리스마 있어 보이던 들개 보스 녀석이 꼬리를 열심히 흔들며 세아에게 재롱을 떨고 있는 모습.

"뭐지? 잠깐 한바퀴 돌고 왔는데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되어있다?"

"오빠. 얘 이름은 이제 렉스야. 아니지. 원래 렉스였나 봐. 말도 잘 들어. 이것 봐라? 빵!"

세아가 총 쏘는 시늉을 하자 발라당 몸을 뒤집더니 죽은 척을 하는 들개 보스.

"하…. 제법 멋진 녀석인 줄 알았는데…."

"아냐! 멋진 거 맞아! 거기에 충성심과 애교가 늘었을 뿐이지!"

"아니…. 근데 그걸 왜 너한테 보이느냐고. 게다가 렉스는 또 뭐야?"

"여기 봐봐. 목걸이. 여기 목걸이에 쓰여 있어. REX."

"아…."

"이걸 발견하고 이름을 불러주니까 갑자기 엄청 친근해졌어!"

"아니 근데…. 어휴. 모르겠다. 설마 지금 여기에서 니가 제일 센 거 같아서 니 말을 따르는 건가?"

"어? 그런가? 암튼 난 그런 건 모르겠고. 어디 보자. 이런것도 하나?"

주변에 나뭇가지 하나를 줍더니 렉스의 눈 앞에 몇번 흔들고는 그대로 냅다 던지는 세아.

괴력을 쓰고 있어서 그런지 나뭇가지는 가벼워 보였는데도 핑핑 돌면서 엄청나게 멀리 날아간다.

그리고 그걸 보고 전력 질주를 하면서 쫓아가는 렉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오더니 세아의 앞에 앉아서 꼬리를 풍차처럼 돌린다.

"와. 잘했다. 렉스. 잘했다."

나뭇가지를 받아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세아.

"정말…. 누가 보면 몇 년은 같이 자란 사이 같다?"

"오빠. 얘들은 뭘 먹지?"

"설마."

"우리 벙커 있는 집 마당에서 얘들 살 수 있을까?"

뭔가가 너무 급전개되는 느낌인데…. 지금 세아와 렉스의 관계를 보면 차마 하지 말라는 소리를 할 수가 없다.

아니…. 하지말라는 소리를 할 필요가 없지. 어차피 마당에서 키우는 건 상관없잖아.

게다가 개들이 있으면 뭐 어느 정도 쓸데없는 위협은 알아서 처리해 줄지도 모르고.

"근데 너희는 무슨 꿍꿍이가 있는데 그렇게 세아를 그렇게 응원하듯이 보고 있는 거야?"

승희와 미나에게 말하자 뜨끔한 듯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여자.

"아니…. 그게."

"음…."

조금만 생각해보니 이유를 알 거 같다.

"강아지?"

"억…."

"읏. 어떻게 알았지?"

"너희 생각하는 건 머릿속이 투명하게 보이니까 그렇지."

"으…. 그 정도인가."

승희가 자기의 머리를 가리듯이 두 손으로 감싼다.

어휴. 그렇게 해서 가려지겠냐?

"나야 상관없어. 집 안에만 들이지 않으면 돼. 마당에서 개를 키우든 고양이를 키우든 무슨 상관이야. 마당이면 코끼리나 방울뱀 같은 것도 상관없다."

"오!?"

"뭐가 오!? 야! 말이 그렇다는 이야기지!"

세아가 '남자가 한 입으로 왜 두말하냐'는 식으로 투덜거리지만 깔끔하게 무시한다.

이 가스나. 언제 한번 뱀 보여주면 어떤 반응을 보이나 봐야겠어.

무섭다고 도망갈 거면서….

"암튼. 마음대로 해. 그러면…. 세아."

"으…. 응?"

"그거 멧돼지 사체 들고 와. 아니. 굳이 들 필요는 없고 질질 끌고 와."

"어디로?"

"키운다며!"

"아. 알았어. 집까지지?"

세아는 멧돼지에게 다가가더니 잠시 잡을 곳을 고민하는 듯하다가 어금니를 덥석 잡았다.

그러더니 질질 끌고 가기 시작하는 세아.

"쟤 뭐냐. 렉스? 암튼 쟤도 따라오라고 해봐."

"렉스. 따라와!"

세아가 말하자 바로 따라오는 렉스.

하. 거참 서열 관계 희한하게 잡혔네.

질병 치료해준 미나나 부하들을 치료해준 승희보다 눈앞의 적을 처리해 준 세아를 따르는 거야?

동물의 세계는 참 알 수가 없어.

그렇게 벙커까지 멧돼지 사체를 끌고 돌아온 우리.

"그럼…. 쟤보고 여기로 자기 부하들 다 데리고 오라고 해."

"어? 잠깐만. 그런 걸 어떻게 말해야 하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어떻게든 말해봐."

"엥? 아니! 그렇게 무책임한 게 어딨어!?"

"무책임하다니. 나는 이놈들 키우는 거에 아무런 책임이 없어. 그러니 무책임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 책임을 져야 하는 건 너라고. 너."

내 말에 할 말이 없어진 세아. 뭔가를 고민하는지 자리에 서서 렉스와 멧돼지 사체를 번갈아 바라본다.

"나는 들어갈 테니 알아서 해봐. 승희와 미나도 바라는 게 있으면 옆에서 돕고. 그리고 전부 벙커 들어 올 때는 깨끗이 씻어. 아무리 질병 해제가 있다고 해도 벙커 더러워지는 건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고 벙커로 들어가기 위해 돌아섰다가 빼먹은 말이 있어서 다시 세아를 바라봤다.

나를 향해 웃기는 표정으로 메롱을 하고 있다가 딱 걸린 세아.

"에휴. 어린애네 어린애야."

"캬악! 애 취급하지 말라고!"

"하는 짓이 애인데 어떻게 안 하냐!"

그렇게 말하고 나는 벙커로 들어왔다.

뭘 말하려고 했는데 까먹어버렸네. 에이. 가스나. 나중에 생각나면 말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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