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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후기]
300! 스파르타!!
산책
사람을 죽이는 훈련이 필요한가?
정말 좆같은 질문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훈련은 필요하다.
필요한 순간에 내가 죽지 않기 위해서 누군가를 망설임 없이 죽이는 훈련. 이미 있잖아? 군대라는 이름으로.
하지만 지금 군대는 없다.
그리고 군인은 누군가를 죽이는 사람이 아니다. 지키는 사람이지.
죽이는 것은 지키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과정일 뿐이다.
필요에 의해서, 상황에 의해서 죽인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밖에 없는 거지 군인이 사람을 죽이는 살인마들은 아니잖아.
그런데 지금 세상은 그렇지 않다.
살인 자체가 목적이 된 세상.
자신의 안전을 위해, 코인을 위해, 식량을 위해.
물론 모든 사람이 살인을 할 필요는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승미세안 네 여자가 굳이 누군가의 목숨을 취할 필요는 없다. 죽이는 것은 내가, 평화는 그녀들이 누리면 된다.
하지만…. 그건 내 생각일 뿐이지. 우리와 마주친 상대도 같은 생각인 건 아니잖아.
'뭐? 니가 전투원이고 저 여자들은 전리품이라고? 그럼 너만 죽이면 돼? 싸우자!'
이런 병신 같은 소리를 찍찍하는 놈들은 없을 거다. 뭐…. 전리품으로 삼고 싶기는 하겠지만.
싸움이든 전투든 전쟁이든 상대의 약점을 파고드는 것이 핵심이고 그 수단과 방법에 대해서 비겁함이라는 단어 같은 건 없다.
찌를 수 있는 약점은 찔러야지. 어떤 병신이 약점은 놔두고 정면으로 정정당당하게 대결하겠어?
나는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
가장 약한 부분, 가장 허술한 부분을 찾아내서 찌르는 게 내 방식이다.
빈틈, 방심, 사각지대, 의식의 허점, 얄팍한 도덕심, 버리지 못한 옛 시대의 법.
내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은 상대도 그럴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그런 걸 막기 위해 내 여자들을 단련시키는 거다. 한 명의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
"...라는 거지."
"그러니까 얌전히 포션 먹으라는 소리잖아."
"정답."
길게 일장 연설 한 게 한 문장으로 축약됐지만, 틀린 말은 아니기에 할 말이 없네.
"으. 알아. 안다고. 나도 스킬 좋은 줄 알고 빨리 다음 스킬도 배우고 싶어. 사람 죽이는 건 싫지만 그게 필요하다는 것도 충분히 알고. 근데 이 포션 후유증이 드럽게 짜증 나는 걸 어떻게 해! 육지에서 뱃멀미 느끼는 게 얼마나 끔찍한데!"
"뱃멀미 정도는 아니다."
"난 그렇게 느낀다고! 아니면 술을 잔뜩 먹고 만취한 느낌!"
"술도 제대로 먹어본 적 없으면서."
"캬악!"
세아의 절규에 승희와 미나는 어느 정도 이해하는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든지 말든지 묵묵히 스킬을 쓰면서 포션을 먹고 있는 안나와는 다른 모습.
"근데 안나는 왜 저렇게 잘 먹지? 나 쟤가 포션 먹고 어지러워하는 건 본적 없는 거 같아."
"안나는…. 보드카를 물처럼 마시는 나라 사람이잖아."
"어. 그런가. 유전자의 힘인가?"
자기 이름이 나오자 우리를 바라보며 생긋 웃는 안나.
투덜거리던 세아도 안나가 웃자 그저 입을 다문다.
역시, 모든 불만을 잠재우는 천사의 미소…. 그런 건가.
"근데 스킬 숙련은 밤에 하는 거잖아? 왜 낮부터 이러냐고!"
"낮에 한 열 개 정도 먹고 멀미가 오기 전에 멈춘 다음 밤에 또 먹게 해보려고."
"크윽…. 임상 시험 중인가!"
"뭐, 극한의 효율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거지. 너희도 스킬을 빨리 올리면 좋잖아."
구시렁거리면서도 숙련을 하는 세아. 승희와 미나도 묵묵히 포션을 먹기 시작한다.
"근데 안나. 너 이미 열 개 넘게 먹지 않았니?"
안나를 보면 마치 안주 없이 소주를 쌩으로 들이키는 주당 같은 느낌이 든다.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는 모습, 또렷한 ‘투명’이라는 발음.
그러면서 나를 바라보더니 포션 병을 들고 건배한다.
정말…. 뭐하는 여자야 대체.
"너무 무리하진 마. 안나."
"무리? 아니야. 아니야."
"이따가 밤에도 더 먹어야 한다고."
"걱정 아니야. 노노노."
"그래. 뭐 알아서 잘 하겠지."
내 말을 들어서 그런가 스킬 쓰고 포션 마시는 속도를 조금 늦춘다.
그러면서 다른 여자들이 숙련하는 걸 구경하는 여유까지 보이는 모습.
포션 열 개라고 해봐야 스킬 200번. 쓰는 데는 순식간이다.
다들 포션을 다 마시고 적당히 알딸딸해 하는 모습.
그렇다고 거동이 힘들거나 한 수준은 아니다. 그냥 조금 격하게 운동한 정도?
"어. 그럼…. 오랜만에 산책하러 갈까?"
"이 날씨에?"
"밖에 춥지 않아요?"
"상관은 없는데…. 꼭 나가야 해요?"
"산책?"
다들 별로 내키지 않아 하는 모습.
그래. 이런 성격들이니 벙커 안에 꼭꼭 숨어있는 게 가능한 거겠지.
하지만 안나는 산책이라는 단어를 듣자 말없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옷을 갈아입고 나온다.
"산책 소리를 들은 골든래트리버…."
내가 중얼거리자 다른 여자 셋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크게 내색은 안 해도 이미 산책하러 나갈 의욕이 만땅인 안나를 보면서 승희나 미나, 세아는 별수 없이 몸을 일으킨다.
하긴, 지금 안 나간다고 하면 안나가 엄청 실망할 분위기잖아. 그건 보기 힘들겠지.
결국, 두툼하게 차려입고 나온 세 여자. 그녀들이 나오자 안나는 말없이 벙커 입구로 향한다.
은근히 나가길 기대하고 있었나 보네. 한시도 지체할 수 없다는 듯한 모습이야.
"안나야! 나 아직 옷 안 입었어!"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간다.
차가운 공기를 쐬면서 기분 좋은 듯 하얀 입김을 내뿜는 안나. 기분이 좋은지 상당히 활기차 보이는 모습.
추운 동네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모두가 몸을 움츠리고 벌벌 떨고 있는데 혼자서만 아무렇지도 않는 것 같다.
"산책!"
그런 안나를 보는 세아의 표정은 아무리 봐도 이해가 안 간다는 모습이다.
산책 나가서 즐거운 골든래트리버를 보는 까만 고양이 같은 느낌이네.
한숨만 쉬면 무슨 만화의 한 장면 같겠어.
"에휴."
내가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세아가 한숨을 쉰다.
큭큭. 진짜 한숨 쉬네. 하긴 세아는 저런 이미지긴 하지.
"뭐가 그리 재밌어요?"
내가 안나와 세아를 보고 웃고 있자 승희가 내 팔짱을 끼며 물어본다.
"아니. 저 둘이 웃겨서."
"안나랑 세아요?"
"응. 골든래트리버랑 까만 고양이 같잖아."
"푸핫. 진짜 그런 느낌이네요."
"뭐가요? 무슨 이야기 해요?"
이번엔 미나가 반대편 팔짱을 끼면서 이야기에 껴든다.
승희랑 미나는 은근히 이런 거에 신경 쓴단 말야.
서열이나 집착 같은 건 아니고, 그냥 성격? 약간 이런 것에 욕심부리는 정도?
어차피 나에겐 뭐가 됐든 좋은 일이라 잠자코 양쪽 팔을 내어준다.
앞서서 신나는 듯 사뿐사뿐 걸어가는 안나. 그 뒤를 따라 조용히 걸어가는 세아.
내 양팔을 잡은 승희와 미나. 단란한 모습들.
"근데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어…. 그러게요?"
우리는 안나가 가는 데로 마냥 따라가고 있었고, 막상 안나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다.
아무리 봐도 목적지가 별로 없어 보이는데.
결국은 그냥 무작정 걸어가는 우리들.
"뭐, 목적지 없이 이렇게 걷는 것도 나쁘진 않지."
"그쵸?"
"그치."
그래. 언제나 결승점만 생각하고 무작정 달리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이렇게 목적지 없이 무작정 걷는 것도 필요할 거다. 어…. 필요하겠지?
그렇게 안나는 시내 쪽으로 걸어갔고, 우리는 그걸 따라갔다.
쟤는 지금 가고 있는 게 어딘지 아는 걸까? 생각해보니 안나랑 밖에 나온 적이 거의 없던 거 같은데.
안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속도를 조금 높여 거리를 좁혔다.
덕분에 우리와 안나 사이에 끼어있던 세아도 가까이 붙게 됐는데…. 세아의 표정이 조금 웃겼다.
웃음을 참고 있는 모습?
그리고 그 이유는 금방 알 수 있었다.
"비니루. 라랄랄라라."
"순대국. 흐응흐응."
"회전 초밥. 초밥? 스시?"
"내과. 내과? @[email protected]%&!$% 내과? 아! 병원!"
"중국전토…. 통? 전통마사지. 중국? Китай? #%@%@#$%@."
혼자서 간판을 보면서 중얼거리는 안나. 그 집중력과 진지함, 귀여움이 합쳐져서 계속 보게 된다.
세아가 웃고 있는 게 이해가 가네.
"참 열심이야. 그치?"
"그래도 한국어 읽는 건 많이 좋아졌어요. 뜻까지는 몰라도 어찌어찌 읽을 수는 있잖아요."
"그러게. 다들 옆에서 잘 도와준 덕분이겠지?"
"윽. 솔직히 나는 별로 한 거 없는데."
찔리는지 중얼거리는 승희. 그런 승희를 포근한 미소로 바라보는 미나.
이들은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재밌다.
근데 안나 얘는 어디까지 가려는 거야?
"안나!?"
"응?"
내가 부르자 돌아보는 안나. 그런데 그때 저 멀리에서 요란하게 개 짖는 소리가 난다.
"뭐지?"
"개들끼리 싸우는 거에요?"
"그런가? 그런데 소리가 좀 요란한데?"
어느새 안나가 개 짖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딱히 할 것도 없는 데다 궁금하기도 한 우리도 그쪽으로 향했다.
적당히 걸어가자 도로 한가운데에 개들이 잔뜩 모여서 무언가를 바라보며 잔뜩 경계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지난번에 봤었던 들개의 보스. 도베르만과 뭔가가 섞여 있는 듯한 커다란 놈.
그놈이 이를 잔뜩 드러내고 맨 앞에서 으르렁대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는 멧돼지들이 있었다.
하. 멧돼지라니. 그것도 꽤 많다.
거의 스쿠터보다 큰 멧돼지 세 마리. 그리고 그보다 조금 작은 멧돼지 네 마리. 합이 일곱.
그리고 들개들은 거의 30마리 정도 되긴 하는데…. 약간 들개들이 불리해 보인다.
멧돼지들이 씩씩거리긴 하고 있지만 거의 멀쩡한 데 비해 들개들은 두 마리가 벌써 바닥에 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네 마리 정도가 상처를 입었는지 옆구리랑 엉덩이 쪽에 피를 철철 흘리고 있다.
"아아…. 이게 무슨…."
들개들을 치료해주면서 나름 정이 들었는지 미나가 안타까운 탄식을 낸다.
솔직히 말해서 별로 끼어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래도 저 들개들은 예의를 아는 놈들이다.
제어가 안 되는 멧돼지보단 들개들이 낫지. 한 이백 배 정도.
나는 바로 투명화를 쓰고 비행을 썼다.
그리고 펼쳐진 급가속.
기척이 느껴졌는지 들개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고 멧돼지들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리고 내 수면이 커다란 멧돼지 세 마리와 조금 작은 한 마리에게 펼쳐졌다.
쿵 소리가 날 정도로 육중한 몸이 도로에 쓰러지는 모습.
그렇게 덩치 큰 멧돼지들이 쓰러지자 아직 남아있는 녀석들은 깜짝 놀라더니 그대로 줄행랑을 친다.
그리고 그걸 놓치지 않는 들개들.
컹! 컹컹!
들개 보스가 짧게 외치자 열 마리 정도가 도망가는 멧돼지를 따라 쫓는다.
"어? 나 뭐 해봐도 돼?"
세아가 나를 보고 말했고, 나는 그런 세아에게 물었다.
"뭐 하려고."
"저거…. 멧돼지 죽여야 하잖아. 괴력 한번 써봐도 되냐고."
"아아. 그래. 해봐."
세아가 쓰러져 있는 멧돼지에 다가갔고, 들개 보스는 꼼짝도 않은 채 그런 세아를 바라본다.
아직 쓰러진 멧돼지에 대한 경계를 제대로 풀지 않은 모습.
그렇게 멧돼지에 다가간 세아는 얼굴을 한번 찡그리더니 멧돼지의 얼굴을 자세히 살펴본다.
"우리 뭐 고사 지낼 일 없지!?"
"갑자기 웬 고사!?"
"아니야! 헛소리였어!"
그렇게 말하곤 멧돼지의 머리 앞에서 자세를 잡더니 그대로 주먹을 휘두른다.
콰직
멧돼지의 머리가 함몰되고 멧돼지는 주먹 단 한방에 즉사했다.
"으음…. 이런 느낌이구나."
그렇게 중얼거린 세아는 남은 멧돼지들에게도 한주먹씩 날렸고, 멧돼지들은 전부 멧돼지였던 것들이 되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네."
"사체가 남아서 그럴 거야. 사람이었으면 죽는 순간 사라졌을 테니까."
"세아야. 손 내밀어봐. 손."
미나가 세아에게 말하자 순순히 손을 내밀었고. 미나는 거기에 질병 해제를 썼다.
"질병 해제는 왜?"
"야생동물이잖아요. 함부로 만지면 안 된다고요."
"그런가. 꽤 철저하네."
그렇게 세아를 보고 있는데 나 말고도 세아를 지켜보고 있는 존재가 있는 게 느껴졌다.
바로 대장 들개. 나와 세아를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는 녀석.
아마…. 저 멧돼지 사체에 볼일이 있는 거겠지?
"멧돼지 고기 먹어볼 사람?"
내 질문에 아무도 대답이 없다. 하긴, 음식이 귀한 세상이지만 우리가 멧돼지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급한 상황은 아니니까.
근데 우리가 필요 없다는 뜻을 어떻게 전하지? 개랑 대화하는 방법 같은 건 모르는데.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들개 보스에게 고개를 끄덕였고, 녀석은 내 제스쳐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자신들의 무리를 바라본다.
컹! 컹!
그러자 녀석들이 우르르 멧돼지로 달려든다.
골고루 나뉘어서 멧돼지를 뜯어먹기 시작하는 들개들. 저렇게 보니 늑대랑 다를 게 없어 보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