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300화 (30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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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매

"여기서 오른쪽?"

"네! 아! 아뇨! 이 다음에서 오른쪽!"

"똑바로 안내해."

"바람 때문에 눈을 제대로 못 뜬단 말이에요!"

"지아 말고 지원이가 말해. 얘는 더 못 믿겠어."

"으…. 저는 무서워서 눈을 못 뜨겠는데요…."

비행이 무서워 눈도 못 뜨는 지원이와 자꾸 엉뚱한 곳으로 안내하는 지아.

덕분에 지아가 살던 곳까지 온건 한참을 헤매고 난 뒤였다.

땅에 발이 닿고 나서야 겨우 안도하는 지원이. 그리고 자신이 살던 곳에 돌아와서 기뻐하는 지아.

지아가 살고 있던 곳은 산으로 둘러싸인 작은 마을이었다.

확실히 어지간한 이들이 아니라면 이런 곳까지 들어올 생각은 안 할 것 같다.

아마 그래서 지아가 얼마 전까지 여기에서 무사히 살 수 있던 거겠지.

"어!? 어디 갔지!?"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는 지아.

나와 지원이는 그런 지아에게 다가가 물었다.

"왜? 뭐가 없어?"

"내 곶감요…."

"난 또 뭐라고!"

지원이가 지아에게 호들갑 떨지 말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고 지아에게 물었다.

"지아야."

"네?"

"곶감이 많았어?"

"네! 요 앞에 이 나무 보이죠? 요거랑 요고. 요것도. 저거랑 저거랑 저것."

"응."

"이거 다 감나무거든요? 가을이 되면 정말 감이 엄청나게 많이 열려요. 그러면 그거 잔뜩 따다가 곶감 만들거든요. 그럼 겨우내 먹을 수 있어요. 달콤하고 먹으면 든든하기도 하고. 물론 많이 먹으면 변비는 걸리지만…."

"많았어?"

"네! 당연하죠! 여기 한가득 있었다고요! 이것들 보여요? 이거."

지아가 들고 보여준 것은 옷걸이가 잔뜩 달린 것처럼 생긴 플라스틱 걸이.

"이게 곶감 걸이거든요? 이걸로 여기 처마부터 여기까지 쫙 걸어놨단 말이에요. 근데 누가 다 가져가 버렸네. 히잉."

"까마귀나 그런 새들 소행은 아니고?"

"그럴 수도 있지만…. 모르겠어요. 이 계절엔 여기에 새들이 날아들진 않는데."

나는 곶감 걸이들이 잔뜩 떨어진 곳들을 살펴봤다.

어지러이 찍혀있는 발자국들. 지아의 발자국에 비하면 조금 크다.

확실히…. 누군가가 와서 가져가긴 한 거 같네.

"혹시 여기 누구 아는 사람 있니?"

"아는 사람요? 있긴 있었는데…. 지금은 없어요.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2년이 넘었는데."

그렇다면…. 지아가 떠난 다음에 누군가가 온 건가? 이거…. 상당히 타이밍이 위험했네.

지아가 혼자 있었을 때 누군가 왔었더라면….

"지아야."

"네?"

"그럼 지원이가 네 음식 가져다줄 때 말고는 쭉 혼자 있던 거야?"

"네. 거의 혼자 있었죠. 앞집 할머니 돌아가시고 그 집 아주머니 떠난 게 2년 전이니까."

"그럼…. 그 사이에 누군가 온 적은 없었어?"

"한번? 아니다. 두번. 두번 있었어요."

"있었다고? 그래서?"

"그래서라뇨?"

"모르는 사람이었어? 여러 명?"

"한번은 한 명이었던 거 같아요. 밤이어서 잘 몰랐거든요. 두번째는 여러 명이었어요. 그때는 낮이었기에 잘 알죠. 네 명 정도였어요."

"그럼 그런 사람들 왔을 때 어떻게 했어? 투명화?"

"네. 그것밖에 없죠. 투명화 쓰고 저기 창고 틈바구니에 끼어서 오돌오돌 떠는 거죠."

"상당히 위험했던 순간인데…. 되게 쉽게 말하네."

"헤헤. 그래도 지금까지 무사했잖아요."

이런…. 대책없이 해맑은 아이네. 여길 온 놈들이 탐지가 없었으니 망정이지.

그렇다면 이곳이 아주 인적이 드문 곳은 아니라는 소린데.

"잠시 있어 봐."

투명화와 비행을 쓰고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산 사이에 있는 작은 마을.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로 사람들이 올 이유가 없다.

혹시나 있을 생존자를 찾아서 샅샅이 뒤진다? 물론 그럴 수는 있지만, 상당히 효율이 떨어지는 짓이다.

물론 뭐 탐지나 비행이 없으면 쌩으로 뒤져야 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긴 하지만.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더는 도심에서 식량을 구할 수 없는 이들이 야생 동물화된 가축들을 찾아서 이곳까지 온 것?

근데 그것도 조금 이상하다. 굳이 여기까지 들어올 필요가 없다.

고기를 목적으로 한다면 여기가 아니더라도 주변에서 생각보다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게 야생동물이다.

물론 사람이 기르던 시절만큼 살이 올라있는 건 아니지만 어디에서나 닭이나 소, 돼지, 멧돼지 같은 건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생각보다 동물들의 생존력은 뛰어났다고나 할까?

물론 한자리에서 지속해서 사냥하게 되면 금세 씨가 마르겠지만 소수의 인원이 적당히 돌아다니며 사냥을 한다면 그것만으로도 제법 끼니를 해결할 수 있을 정도?

겨울에도 이 정도니 여름이 되면 훨씬 더 수월해질 거다.

흐음…. 이유를 모르겠네. 곶감을 노리고 여기까지 들어오지는 않았을 거고.

빠르게 주변을 몇 번 더 돌아보지만 역시 탐지의 기척에 걸리는 것은 없다.

별수 없이 도로 지원이와 지아가 있는 곳으로 내려왔고, 거기엔 지아가 자신의 짐들을 잔뜩 밖에다 내놓고 있었다.

"이게 다 뭐니?"

"아. 제 태블릿이랑, 노트북이랑, 연습장들이랑, 파일이랑…."

"그건 나도 알겠는데…. 이걸 가져가는 거야?"

"네."

"이게 다야?"

"어…. 더 있긴 해요."

"다 가지고 나와. 이번에 아예 한 번에 옮겨줄 테니."

"오예!"

신난다는 표정으로 들어간 지아는 품 한가득 만화책들을 들고 나왔다.

"만화책?"

"어…. 이런 건 안 되나요."

"아냐. 안되는 건 아닌데. 많아?"

"책장 두 개 정도?"

"그럼 굳이 가지고 나올 필요 없어. 어딘데."

"이쪽이요."

방 안에 들어가니 책장엔 온갖 만화책들이 잔뜩 있었다.

"꽤 열심히 모았네?"

"그쵸? 문제는 완결작들 말고 연재 중이던 것들은 영원히 뒷내용을 알 수 없어졌다는 거죠."

"그건 그렇네. 안타까운 일이지."

"그래서 제가 그리고 있었어요. 일단 유명한 만화부터 차례차례로."

"니가? 그게 돼?"

"뭐, 아마추어의 솜씨죠. 그래도 재밌잖아요. 그럴 실력은 안 되지만 뒷 내용을 상상해서 그린다는 게."

"그런 취미가 있을 줄은 몰랐네."

"혼자서 여기에 있으면…. 할 게 없었거든요. 뭐든 오래 할 수 있고 끝이 없는 일이 필요 했어요."

"되게…. 쇼생크 탈출 같은 데서 나올법한 대사네."

"네? 쇼…. 뭐요?"

"그런 게 있어. 명작 영화."

"암튼…. 실망하거나 한 건 아니죠?"

"실망을 왜 해? 어찌 보면 대단한 일인데?"

"다행이에요. 대장이 그렇게 생각해줘서."

지아는 내 팔에 매달렸고 질세라 지원이도 내 반대파를 붙잡는다.

하하. 이런 기분도 참 좋네.

"그럼 이 책들 전부 가져갈 거지?"

"네. 갈 수 있으면요."

"그럼 책장째로 가져가자."

수납을 열어서 책장과 책들을 그대로 삼켰다.

베개를 수납으로 다루는 모습은 봤어도 이렇게 책장이 그대로 들어가는 걸 보면서 상당히 놀라는 두 사람.

그렇게 모든 짐을 수납 안에 넣자 지아의 표정이 홀가분하게 변한다.

"후우. 그동안 꼭 오고 싶었는데, 이렇게 대장 덕분에 소원을 이루네."

"더 있어?"

"아뇨. 이젠 없어요."

"그래? 그럼 이제 가자."

"집에 불이라도 질러야 하나?"

"엥? 왜?"

"아니…. 보통 그런 장면들 많잖아요.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맹세하고 자신이 살던 집을 불태우는…."

"뭐하러."

"그러네요. 그럼 가죠."

나는 지원이와 지아를 향해 팔을 벌렸다.

그런 나를 보고 울상이 된 지원이와 마땅찮은 표정을 짓는 지아.

"걸어가면…. 안 되겠죠?"

힘없는 지원이의 목소리. 나 참. 여자들은 왜 이리 비행을 무서워하는 거야?

"그럼…. 이리 와봐."

"네?"

"각자 내 발을 밟고 나를 안아."

순순히 내가 시키는 대로 하는 두 여자.

그런 그녀들을 꽉 끌어안고 지상에서 한 20센치만 몸을 띄웠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가자."

길을 바로바로 찾기 힘들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래도 안고 가는 이들이 무서워하지는 않는 방법.

지원이도 이 정도는 괜찮은지 똑바로 앞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오른쪽요!"

지원이는 캠프에 있을 때 주기적으로 걸어왔어서 그런지 길을 비교적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덕분에 문제없이 캠프까지 올 수 있었고, 거기서부터는 나도 길을 알기에 펜스까지 바로 올 수 있었다.

"자. 이제 내리고."

펜스 근처의 도로에서 지원이와 지아를 내려준다.

얼굴에 잔뜩 아쉬움이 가득가득한 두 여자.

하지만 아무리 그래 봐야 어쩔 수 없다. 나는 펜스에서 살고 있지 않으니까.

2주에 한 번. 아무리 자주 보고 싶다고 해도 그게 한계다.

이번에는 정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원이와 지아를 따로 보게 된 거지만, 앞으로는 이런 일도 쉽지 않을 거다.

그게 그녀들과 나의 거리. 딱 그 정도.

"지아 니 짐은 내가 니 방에 놓고 갈거야. 너희들이 들어갈 때쯤엔 이미 다 놓여있겠지."

"네에."

"그럼…. 투명화 풀지 말고. 조심히 들어가."

"다음엔 언제 와요?"

지원이의 약간 물기 어린 목소리.

모르겠다. 이 여자들은 대체 내가 왜 좋을까?

내가 정말 여자들의 혼을 빼놓을 정도로 잘생긴 것도 아니고 매력이 넘친다거나 그런 것도 아닌데.

물론 외모가 이성을 택하는 절대 조건은 아니라고 하지만, 얘들은 조금 이상할 정도다.

지원이는 처음에 매혹 한번, 지아는 아예 건 적도 없다.

그런데 이렇게 가까워진다고?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어.

"식량 떨어지면."

"빨리 식량이 떨어지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네요."

나는 지원이와 지아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험한 세상을 살아남은 여자들. 그리고 이제는 제법 안정된 삶을 얻은 여자들.

물론 내가 해준 것이 있다곤 하지만 그런 것들의 대가를 일일이 받고 싶은 생각은 없다.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나는 너희가 나만 보고 살지 않았으면 좋겠어."

"네?"

"무슨 소리에요?"

"너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알아. 하지만 나는 너희들 곁에 없지. 그리고 솔직하게 말하면 너희만 바라보고 살지도 않아. 게다가 언제 어디서 죽어버릴지 모르는 사람이라고. 물론 죽을 생각은 전혀 없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되는 건 아니지. 그러니까 너희는 너희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 자주 볼 수 있고 주변에서 늘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았으면 좋겠어. 너희같이 이쁘고 착한 여자들이 나만 바라보고 하염없이 기다리고 사는 건…. 별로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해."

더 길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 정도만 말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거다.

애들이 아니잖아. ㄱ부터 ㅎ까지 구구절절 이야기 할 필요는 없겠지.

"그런 건…. 제 마음이에요."

"맞아요. 뭘 어떻게 하든 그건 저희의 자유잖아요?"

"후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긴 이런 말을 한다고 쉽게 돌아서는 게 말이나 되겠냐.

"대장보고 책임져달라는 소리는 안 해요. 그러니까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맞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이고 그녀들에게 말했다.

"그래. 뭐, 너희들의 결정을 존중해주는 수밖에. 내가 너희 마음대로 잘 안될 거라는 것도 다 각오하고 한 행동들 일 테니."

그렇게 말한 나는 비행을 쓰고 몸을 살짝 띄웠다.

"알겠으니까. 어서 들어가. 나는 갈 거야."

"알겠어요. 다음에 봐요."

"조심히…. 가요."

그리고는 둘 다 투명화를 쓰고 모습을 감춘다.

나 역시 투명화를 쓰고 그대로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탐지를 키고 그녀들이 펜스 안쪽까지 잘 들어가는지 지켜보는 나.

지원이와 지아가 펜스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대로 빠르게 지아의 방 쪽으로 날아갔다.

적당한 거리에서 페이즈 아웃을 쓰고 지아의 방까지 간 나는 수납에서 그녀의 짐들을 모두 꺼내 방에다가 잘 놔뒀다.

그리고 다시 페이즈 아웃. 그대로 펜스를 벗어나 한적한 곳에서 해제한다.

누군가에게 애정을 받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게 싫을 리는 없다.

하지만 그런 것에 상당히 서투른 나다.

애정을 받으면 그만큼 돌려줘야 하는데…. 나는 그런 방법을 잘 모른다.

게다가 지금 나에겐 너무 많은 여자가 있다.

내 욕심이 빚어낸 결과들.

솔직히 말해서 승희와 미나, 세아와 안나만으로도 벅차다.

민희. 그래 민희까지는 어떻게 커버할 수 있을 거다. 자주 볼 수 있는 여자는 아니니까.

그리고 그게 내 한계다. 그 외의 여자들은…. 솔직히 말해서 없어도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물론 아무 여자들이나 실컷 가지고 놀고 픽픽 죽여버린 내가 이제 와서 여자들을 챙기는 것도 우습다.

그렇지만…. 그런 여자들과는 다르다.

제대로 끼워진 첫 단추들. 원망이나 증오 같은 것은 전혀 없는 관계.

제대로 피어나지 않은 애정. 호감. 존경과 존중.

그런 것들은 내게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다.

펜스와 청평. 그곳에 있는 여자들.

솔직히 말해서 지원이와 지아에게 했던 말들이 본심이다.

알아서 각자 원하는 삶을 살고 나 같은 건 잊어줬으면 하는 바람.

하지만 그건 또 내 마음대로 안 되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녀들에게 모질게 대하지는 못하겠고.

참으로 병신같은 일 처리다. 한심하고 답답한 행동.

아직도 어찌해야 할지를 잘 모르겠다. 그저 지금 바라는 것은 두 가지.

회피. 그리고 자연소멸.

그저 발길을 조금 줄이고 거리를 조금씩 두다 보면 알아서 관계가 정리될 거라는 생각.

왜…. 그런말도 있잖아.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아. 모르겠다. 여자에 대해 호구 짓만 하던 권성철이가 어쩌다가 이런 사람이 된 건지.

능력도 안 되는 놈이 너무 모든 걸 내 힘으로 해결하려 하고 있는 거 같다.

결국, 이러다가 탈이 날 거 같은데.

이런 것에 대해서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겠다.

정말 탈이 나서 시름시름 앓는 것보단 미리 준비하는 게 낫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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