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97화 (29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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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스트 댄스

사람은 간사한 존재가 맞다.

분명 어제 집에 돌아올 때까지는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 세희의 빈자리가 있긴 있었다.

5년, 인생의 오분의 일을 괴롭힌 여자.

어찌 보면 철이 들고 나서 가장 신경 쓰게 만들었던 여자.

쉽게 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청평에서 있다가 돌아오는 길에도 나도 모르게 그녀의 생각을 했던 나였다.

병신 멍청이같이.

물론…. 그렇다고 후회 같은 것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저 빈자리를 느꼈을 뿐이다.

사랑니를 뽑았을 때 그 비어있는 공간에 혀를 자꾸 대보는 것처럼.

언젠간 새살이 돋아 날 때쯤에는 아마 그런 것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면 그때는 완전히 잊을 수 있겠지. 아마도.

사랑니에게 애착이나 아쉬움을 느끼는 사람은 없잖아.

벙커의 거실, 커다란 티비 앞에서 게임기를 연결하여 댄스 게임을 하고 있는 승희와 미나, 세아, 안나.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나.

"으으으. 진짜 말도 안 돼! 상대가 안 되잖아!"

나름 이 게임에 자부심이 있는 승희가 미나를 보면서 투덜거린다.

걸그룹 아이돌 출신 다운 미나. 댄스 게임 앞에서는 그녀를 이길 자가 아무도 없다.

허벅지에 컨트롤러를 달고 손에도 하나 든 채 여유 있게 화면에 나오는 춤을 똑같이 따라 하는 미나.

옆에서 따라 추는 승희와 세아가 거의 새로 창조하다시피 하며 안무를 따라 하는 것에 비해 여유가 넘치는 모습.

게다가 미나는 춤추는 모습이 굉장히 이쁘다.

내가 춤에는 거의 문외한이라고는 해도 저 춤추는 모습을 보니 알 것 같다.

춤 선이 이쁘다는 소리를 티비나 커뮤니티 글에서 몇 번 본적이 있는데 아마 미나를 보고 그런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사람을 홀리는 듯한 몸짓.

티비속에서 나오는 게임 아바타가 튀어나온 것 같은 완벽한 춤 실력과 정확한 포즈. 그리고 환한 표정.

그녀의 춤에는 느낌이 있고 생동감이 있었다. 사소한 손짓이나 약간의 살랑거리는 몸짓에도 뭔가가 있어 보이는 느낌.

그리고 의외인 건 안나도 상당히 춤을 잘 춘다는 거다.

제법 큰 키에 마른 데다가 금발 머리에 새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가 춤을 추고 있으니 그것도 참 설레는 모습이 아닐 수가 없다.

시원시원하다고 해야 하나?

전문적으로 춤을 추는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박자는 정확하다. 동작도 마찬가지고.

함께 하고 있는 미나가 놀랄 정도?

게다가 안나는 압도적인 외모라는 무기가 있다.

몸을 한번 숙였다가 고개를 치켜들 때 흩날리는 금발만으로도 가산점이 마구마구 붙는 느낌.

"아오. 힘들다."

의외로 점수가 가장 낮은 세아가 투덜거리며 소파에 털썩 앉는다.

체력은 좋은 편일 텐데…. 이런 체력이랑은 조금 다른가? 아무래도 쓰는 근육이 다른 거겠지?

"하악. 하악. 이거 은근히 힘들어요. 근데 미나 언니 진짜 너무 잘하는 거 같아."

"후후…. 잘해야지. 그래도 할 줄 아는 게 이런 거밖에 없는데."

그러면서 나를 보고 웃는 미나.

칭찬해달라고 꼬리 흔드는 강아지 같아서 귀엽네.

"나는? 나는?"

안나 역시 내게 다가와 어땠냐고 열정적으로 물어본다.

미나가 그냥 강아지라면 안나는 약간 뭐라고 해야 하나…. 비글? 아니 종류는 정확하게 모르겠네.

암튼 조금 부산스러운 느낌이다. 과하게 칭찬을 받고 싶어하는 느낌?

"안나도 잘했어."

내 칭찬에 환하게 웃는 모습.

말을 잘 못 했을 때는 차분한 겨울 여자 같은 느낌이었는데 말이 늘어갈수록 본연의 성격이 나오는 느낌이다.

"쳇. 저런 거 잘해봐야 무슨 소용 있다고…."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왠지 분한 느낌인 것 같은 세아.

나는 그런 세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줬고, 의외로 이번엔 피하질 않았다.

"오빠는 안 해볼래요?"

"어? 나?"

"오빠도 해봐요. 맨날 우리 하는 거 뒤에서 음흉하게 보고만 있지 말고."

승희의 말에 여자들의 시선이 전부 내게 집중된다.

재밌는 것을 발견한 표정의 세아, 호기심 가득한 모습의 미나, 뭔 뜻인지도 모르면서 분위기로 때려 맞추고 나를 보는 안나.

"어…. 너희들 안구의 안녕을 위해서도 내가 안 하는 게 모두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되는데."

"그건 우리가 알아서 챙길 테니 일단 해보기나 해봐."

그러더니 세아가 자신의 허벅지에 찼던 컨트롤러를 덥석 내 허벅지에 채우고 손에 들고 있던 컨트롤러를 쥐여준다.

그리고 그거에 맞춰서 승희가 쓱쓱 노래를 고르더니 바로 플레이를 해버린다.

"어. Take On Me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빨리 일어나요."

그러더니 미나가 내 손을 잡고 일으켰고, 나는 얼떨결에 일어서게 됐다.

내 왼쪽에 서서 자리 잡는 미나와 내 오른쪽에 서는 안나.

"뭐야? 같이 하는 거야?"

"저기 저 선글라스 낀 남자가 오빠예요. 헷갈리지 마요."

그리고 음악이 시작되었고, 아바타들이 부산스러운 움직임을 시작한다.

흥겨운 리듬. 익숙한 노래. 근데 대체 이 노래에 왜 저런 춤을 추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내 나름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예전부터 승희에게 게임기를 가져다줬을 때부터 게임하는 건 자주 봤었기에 허둥대거나 어리바리 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어? 뭐야. 왜 잘해?"

뒤에서 들려오는 세아의 목소리.

"그러게. 우리 몰래 연습했나 봐!"

승희도 내가 플레이하는 건 처음 봤기에 조금 놀란 목소리다.

"근데 동작은 맞는데…. 뭔가 이상하다?"

"그치? 풉. 뭐야. 억지로 동작을 때려 넣는 느낌인데?"

미나도 자기 동작을 하면서 나를 보고 키득거리고 있고 안나 역시 웃긴지 깔깔거리면서 몸을 움직인다.

"오…."

음악이 끝났고 점수가 뜨자 의외의 결과가 나왔다.

당연히 1등은 미나, 2등이 나, 그리고 안나가 3등.

"썽철! 뭐야!"

자기보다 점수가 많이 나와서 그런지 아쉬워하는 안나.

"또 해! 다시. 다시."

"뭐야. 왜 이런 거에 진심인 건데."

안나의 열화같은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번엔 아예 안나가 노래를 고른다.

"나도 해볼래!"

"그럼 나는 조금 쉬어야지."

승희가 끼어들었고, 미나가 소파에 앉았다.

이번엔 모르는 노래. 안나는 익숙한지 노래가 시작할 때부터 흥얼흥얼하기 시작한다.

"뭐야. 이번엔 자기가 유리한 노래야? 왜 이런 거에 이렇게 목숨을 거는 거야."

다소 느린 노래긴 한데 동작이 은근히 복잡하다.

게다가 한자리에서 가만히 추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자리를 바꿔가면서 춤을 추거나 서로 마주 보고 하는 동작도 있다.

그래도 게임 특성상 몇 가지 동작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패턴이기에 한번 감을 잡으니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처음엔 3등이었다가 쭉쭉 치고 올라가서 결국은 음악이 끝날 때쯤엔 내 점수가 1등이 되었다.

"뭐야!!! 오빠 진짜 혼자 밤에 연습한 거 아니에요!?"

"썽철! 이쌍해!"

세아는 웃긴다는 듯 뒤에서 캭캭대고 웃고 있고 미나도 재밌다는 듯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다.

그렇게 승희와 안나의 등쌀에 못 이겨 노래 두 곡 정도를 더 했고 역시 내가 전부 1등을 해버렸다.

"뭐야. 허접들이었잖아?"

"캬아악!!! 이상해! 이건 이상하다고! 오빠 이거 게임하는 건 본적 없는데!? 뭐에요! 이유가 뭐야!"

"썽철! 반칙. 이쌍해! 반칙이야!"

"아니…. 무슨 이런 게임 가지고 그래. 결과적으론 이 게임은 정확한 동작을 하느냐 문제잖아. 춤을 잘 추는 게 목적이 아니라고."

"맞아요. 확실히 그러네요. 오빠가 하는 몸짓이 춤이라는 데는 동의 하지 못하겠지만, 게임이라고 생각하면 완전 모범적인 동작이죠."

미나의 말에 다들 이해를 못 하겠다는 듯 의아한 얼굴로 바라본다.

나는 그런 승희와 안나, 그리고 내심 궁금해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세아를 향해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거야. 이 동작을 정확하게 하기만 하면 점수는 높게 받을 수 있어. 그리고 이 동작들을 정확하게 연결하기만 하면 이들이 원하는 춤이 되는 거지. 근데 나 같은 놈들은 그럴 필요를 못 느끼는 거야. 곡선으로 이쁘게 움직이면 알아서 춤이 될 걸 그냥 직선으로 바로 움직여버리는 거지. 그건 적당한 동체 시력과 반응 속도, 그리고 움직일 수 있는 체력만 있으면 되는 거니까."

"아니! 춤추는 게임이면 춤을 춰야죠!"

"내 꼴을 보고도 내 춤을 보고 싶은 거야?"

"어…. 아니 그건 아니지만."

의외로 쉽게 제압당한 승희. 뒤에서 세아가 '사실 그건 보고 싶지 않지'라며 중얼거렸지만, 애써 모른 척했다.

"근데 생각보다 힘드네. 이거 운동 꽤 되겠어."

"이거 생각보다 운동 많이 돼요. 괜히 삼대 운동 게임이 아니라고요."

"암튼…. 더 할 거야?"

내 물음에 다들 그다지 시원한 반응은 아니다. 하긴 재밌긴 한 데 오래 지속해서 할만한 게임은 아니지.

"그럼 치우고…. 스킬 숙련하자."

"나 게임 더 할래! 기다려봐!"

세아가 급하게 말했지만, 나는 티비랑 게임기를 꺼버렸다.

시무룩해지는 세아.

"야. 너 괴력 배우고 의욕 좀 생기는 거 같더니만, 왜 또 싫어하는데."

"의욕은 의욕이고! 물약 먹고 힘든 건 어쩔 수가 없다고…."

"물약에다가 초코가루라도 섞어줘야 하나."

"캭! 애가 아니라고! 애가! 응! 아주 그냥!"

괴력을 쓰고 내 척추를 접어버리려는 세아를 무효화로 막는 소소한 소동이 있었지만, 그런 건 금방 지나갔다.

거실을 치우고 다 같이 둘러앉아 말없이 포션을 홀짝이며 스킬을 숙련하기 시작한 우리.

"으음. 말을 계속 중얼거려야 해서 뭔가를 하면서 할 수도 없고."

비행이라고 중얼거리던 승희가 물약을 한 모금 들이키며 말한다.

"맞아. 이게 단순 반복이기만 하면 뭐라도 할 수 있을 텐데. 중얼거리는 게 신경 쓰이지."

몸이 투명해졌다가 드러나는 것을 반복하던 미나 역시 승희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블루마블 같은 거라도 할까?"

"그거 하면 네가 주사위 다 가루로 만들어 버리지 않을까?"

세아가 말했고 승희가 한마디 끼어든다. 그리고 세아는 그 말이 일리가 있는지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평상시에도 조절하기 쉽지 않은데 괜히 흥분하거나 그러면 힘 조절 안 되겠지."

뭐지. 저 녀석 저번에 나랑 섹스할 때 괴력 쓰지 않았었나? 나는 그럼 힘 조절도 안 되는 괴력녀랑 섹스를 한 거야?

생각보다 아찔한 섹스였네.

절정에 보냈다가 정말 쥐여 짜일뻔했어.

역시 복잡한 대화에는 끼어들지 못하고 그저 방긋 웃기만 하며 투명 스킬을 반복해서 쓰는 안나.

안나는 대체 언제쯤 한국어가 익숙해지려나.

나는 그렇게 대화를 하며 스킬 숙련을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빠른 속도로 수납 숙련을 했다.

얼마나 빠르게 하는지 40번 스킬을 쓰는 내가 20번 스킬을 쓰는 세아와 비슷할 정도.

"와…. 오빠 진짜 독하다."

그런 나를 보고 세아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한마디 한다.

"크으…. 뭐가?"

중급 포션을 소주잔 비우듯이 입에 털어 넣고 세아를 바라보며 물어본다.

"괜찮은 거야? 무슨 스킬이랑 원수진 사람 같아."

"아아. 이거? 이래야 스킬을 빨리 배우지."

"아니 스킬도 엄청 많으면서…."

"너희도 알잖아. 배우고 싶은 스킬은 넘쳐난다고. 게다가 스킬을 배울수록 좋은 스킬은 계속 많아져. 끝이 없다고 끝이."

"으. 그건 그렇긴 하지."

세아가 수긍했고, 그렇게 대화하는 도중에도 나는 수납을 계속 열었다 닫는 것을 반복했다.

이 빌어먹을 포션 멀미만 참아내면 숙련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 한번 각 잡고 달릴 때는 정말 먹고 뒤질 때까지 하는 게 좋다.

지금도 벌써 포션을 거의 서른 개 가까이 먹었으니 사용한 스킬이 천이백 번이 넘으니까.

지금 수납 44퍼센트. 남은 건 이천팔백 번.

아마 오늘하고 내일까지 미친 듯이 달리면 어떻게 수납은 마스터 찍을 수 있긴 할 거 같은데…. 가능하려나.

"암튼, 될 수 있으면 너희도 어서 올려. 나는 날이 풀리면 너희들이랑 기분 좋게 밖에 나가고 싶으니까."

내 말에 알았다는 듯 승희와 미나, 세아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안나도 세 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따라서 끄덕인다.

하여간 웃기다니까. 이 맛에 사는 거지.

그렇게 우리는 다시 조용히 스킬 숙련에 몰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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