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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
"어…. 음…."
솔직히 말해서 이런 상황에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연서도 미연이도 모두 매력적인 여자들이다.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라면 이 자매는 아마 어지간히 인기가 있었을 것이라 생각된다.
꽃집을 하는 미인 자매라니. 인기가 없을 리가 없잖아.
게다가 지난번에 했던 말이 있으니 유난히 신경 쓰인다. 나 혼자만 신경 쓰는 건가?
아닌데, 이 자매도 신경 쓰고 있는 건 맞는 거 같은데.
어쨌든 지금 상황은 상당히 어색하고 뻘쭘하다.
뭘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나가야 할지 감도 안 잡힌다. 아무리 그래도 다짜고짜 섹스하자고 할 수는 없잖아.
게다가 사실 지금은 그다지 좋은 몸 상태는 아니다.
아까 전까지 네 번 정도를 하고 와서…. 만반의 준비가 된 상태는 아닌 상태.
물론 두어 번 정도는 어떻게 더 할 수 있긴 하겠지만 썩 만족스럽진 않겠지?
자매를 만나는 게 아니었는데. 기회를 봐서 천천히 분위기를 만들고 접근해야 했는데.
멍청했다. 이게 문제라니까.
섹스는 할 줄 알게 되었지만, 분위기를 만드는 방법 같은 건 모른다.
경험치를 상당히 불균형하게 얻었어. 어휴.
의외로 그런 나에게 미연이가 다가오더니 등 뒤에서 양쪽 어깨에 손을 올린다.
너무 자연스러운 그 손길에 살짝 풀어지는 긴장.
"당신…. 의외로 순진하군요?"
"어…. 어?"
"사람들을 통솔하고 누군가를 죽이는 모습은 한없이 매정하고 단호한 모습인데…. 이런 상황에서는 머뭇거리는 게 눈에 보일 정도네요."
역시 여자들은 이런 거를 눈치채는 게 민감한가 보다. 귀신같이 알아내네.
"그렇게 티나?"
"네. 연기인가 싶었는데 아니네요. 이런 상황에서 연기할 필요도 없고요."
"이런 연기를 능숙하게 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서."
전부 들통이 나버리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 뭔가를 조금 파악하게 되었다.
나보다 어린 여자들, 연애 경험이 별로 많지 않은 여자들. 그런 여자들 앞에서는 의외로 내가 뻔뻔했다는 것.
내 마음대로 머리를 굴리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며, 그게 은근히 잘 먹혀들어 갔다
.
아마 그런 모습들이 어린 여자애들에겐 당당하고 그럴듯하게 보였었나 보다.
아니면 서로 어설프니 내 허술한 모습들이 쉽게 보이지 않았을지도.
하지만 나보다 나이가 비슷하거나 많은 여자에겐 그러지 못했다.
아무리 반말을 하고 내 멋대로 굴긴 했지만, 은연중에 남녀관계에서는 위축되었던 거 같다.
쫄았다고 봐야지. 시작부터 겁을 먹었다고 해야 하나.
똑같이 경험이 없으면 뻔뻔한 게 장땡이지만, 이미 연애 경험이 많은 여자들에겐 그런 뻔뻔함은 한계가 있으니까.
말 그대로 뻔하게 보였겠지.
그런 잡생각을 하고 있는데, 미연이가 부드럽게 나를 향해 말한다.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의식하지도 말고요. 급하게 할 필요 없잖아요. 세상 모든 남녀 사이의 관계가 그게 목적은 아니에요. 섹스는 과정이지 목적이 아니라고요."
"맞아요. 그러니 너무 긴장하진 마요. 우리라고 당신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난 사람이 아니라고요."
그러면서 내게 다가와 내 손을 잡는 연서.
순식간에 자매에게 포위당한 모습. 하지만 자매들이 이렇게 말해주니 마음은 상당히 편해졌다.
확실히 나는 머릿속에 강박 같은 게 있긴 했다.
예전 물류 센터, 이제는 청평이 된 이곳 여자들의 성생활 만족도까지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그 얼마나 쓸데없는 참견이었는가.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오지랖이었다.
한마디로 병신 같은 걱정이라는 거지. 어휴.
"알았어. 고마워. 덕분에 조금 마음이 편해졌어. 내가 너무 조급했네."
그렇게 말하면서 조금 편안한 표정을 짓자 미연이가 빙긋 웃으면서 말한다.
"그렇다고 너무 미뤄두진 말아요. 여기서는 당신이 말했던 나무집 같은 게 필요 없잖아요? 이미 개인 공간은 충분하니까."
"그렇네."
그렇게 연서와 미연이 손을 내렸고, 나를 앞뒤로 감싸고 있던 자매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참…. 이 여자들은 특이한 관계가 되어가고 있다.
언제든지 손을 댈 수 있었으면서도 생각보다 손대기가 힘들어지는 관계.
펜스의 지원이와 지아가 생각이 났다.
안 그래도 내일이면 그녀들을 보러 가야 하는데…. 그 자매와 이쪽 자매. 자매라는 것만 같고 많은 것이 다르다.
참나…. 어쩌다가 이런 복에 겨운 여자들을 잔뜩 만나게 되었는지.
"우리는 이제 작업 할거에요. 지켜볼 거에요?"
연서가 친절하게 물러날 타이밍까지 알려준다.
저렇게 배려를 해줬으니 빠질 때는 빠져야겠지.
"아냐. 내가 지켜보면서 방해하고 싶지는 않네. 이만 가볼게."
"그래요. 다음엔 조금 느긋하게 와요. 어깨에 힘 빼고."
"맞아요. 그렇게 잔뜩 힘이 들어가 있으면 보는 사람이 부담스럽다고요."
나에게 부드럽게 조언해주는 연서와 미연. 나는 그런 그녀들이 고맙다고 느껴졌다.
"알겠어. 그럼 가볼게."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해주는 두 여자.
그녀들이 있던 곳에서 나온 나는 상당히 마음이 편해졌다.
내가 저들보다 나은 건 스킬을 좀 더 많이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밖에 없다.
아. 사람을 조금 더 잘 죽인다는 것?
그리고 그 외에는 그리 특출난 것이 없는 사람이다.
이런 내가 남들을 걱정하는 것까진 상관 없지만, 내 마음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것은 확실히 주제넘은 짓이지.
이런 것들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어야 하는데, 이렇게 뒤늦게 체득하는 게 너무나 웃기다.
아니…. 체득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런 걸 평생 못 느끼고 사는 사람들도 많을 테니까.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아. 형수님이랑 하율이를 봐서요?"
마음이 편해져서 그런가? 주방으로 가서 유정을 만나니 농담이 절로 나온다.
역시 사람은 여유가 있어야 해. 여유가 있고 없고가 차이가 크네.
"승규 씨에게 이야기는 들었어요. MRE 가져왔다면서요?"
"네. 어디다 놔요?"
"이쪽으로 와보세요."
주방, 그러니까 조리실이라고 불러야 할 정도로 커다란 곳.
50인용 벙커라서 조리실 역시 상당히 크다. 그리고 그런 조리실 한쪽에 창고처럼 있는 곳.
거기엔 주방용 냉동고와 냉장고가 잔뜩 있었다. 그리고 저온 창고도.
아무래도 50인분의 식자재를 잔뜩 저장할 수 있는 곳이니 작지는 않겠지.
"여기 안에다 넣어줄 수 있어요? 양이 꽤 될 텐데. 사람을 조금 불러와야 하나?"
"아니에요. 혼자서 가능해요. 힘쓸 필요 없는 작업이라."
MRE 자체도 유통기한이 꽤 되는 데다가 저온 창고면 충분히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다.
내가 수납으로 창고에다가 한 번에 쫙 쌓아놓으니 유정이 깜짝 놀란다.
"이게 그 수납이에요!?"
다들 수납을 보여주면 반응들이 비슷하다. 보여주는 맛이 쏠쏠하단 말이지.
"당분간은 이걸 먼저 처리하셔야겠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이걸로 응용해서 뭔가를 만드는 건 익숙해져서."
"하하. 그래요?"
"내가 토마토를 키운 이유가 있다니까요. 케첩만 있어도 이 맛없는 MRE를 얼마나 맛있게 만들 수 있는데요."
"아아. 그래서 그런 거군요."
"아무튼, 고마워요. 이런 좋은 곳도 얻어주고, 번거로운 것들도 묵묵히 해주고."
"뭘요. 이런 건 별거 아니죠."
작은 일에도 감사하다고 말해주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세상에는 이런 사소한 것들에도 감사해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무리 뭔가를 해줘도 당연한 거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으니까.
물론…. 후자 같은 사람들은 죽기 딱 좋은 세상이지만.
"그럼, 이만 가볼게요."
"맨날 자기 할 일만 쏙하고 간대. 밥 먹고 안 가요?"
"네. 할 일이 있어서."
"그럼 쉽게 잡기도 힘드네요. 알겠어요. 자주자주 들러요. 와서 맛있는 것도 먹고 가고."
"그래요. 하율아. 삼촌 간다."
나를 보고 손을 흔들어주는 하율이.
이제는 내가 꽤 익숙해졌는지 인사까지 해준다.
그렇게 청평을 떠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내가 해준 것들이 있다고는 하지만, 이 사람들은 나에게 한없이 친절하게 대해준다.
삭막하기 그지없는 나의 삶을 바꿔준 이들.
신뢰라는 단어를 사전적 의미로만 알고 있던 나에게 많은 것들을 알려준 이들.
그리고 아이.
하율이를 볼 때마다 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해서 조금 더 깊게 생각하게 된다.
아무리 좋아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회생할 수 없는 세상.
이 세상이 쓰레기 같아진 가장 큰 이유는 아이가 없어져서다.
아무리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사람들이 많아진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은 밝아질 수 없다.
아이가 빛이고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니까.
그런 아이들이 없는 세상은…. 그저 반딧불이를 잔뜩 모아서 어둠을 밝히려는 시도밖에 되지 않는다.
아이들이라는 태양이 다시 뜨지 않는데 고작 그걸로 밝아지겠냐고.
아이. 아기. 신생아.
다시는 가지지 못할 축복.
사실 그것도 웃기는 일이다.
사람 죽이기를 밥 먹듯이 하는 내가 무슨 자격으로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살인자에게 아이라니. 그건 과욕이지. 쓰레기 같은 짓이다. 아이를 가질 방법도 없지만, 가질 자격도 없다.
그래도…. 망상을 한번 해본다.
나와 승희의 아이, 미나의 아이, 세아의 아이, 안나의 아이.
엄마들을 닮는다면 그래도 외모 걱정은 안 해도 될 텐데.
물론 나를 닮게 되면 더없이 미안한 짓을 저지르는 거지만….
청평을 떠나 집으로 향하는 길은 조금 지루하다.
그래서 그런가? 아이에 대한 망상은 끊기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아이. 아이들.
정말…. 이 세계는 끝인 걸까?
애초에 처음부터 단칼에 금을 그었던 놈들이다.
새로운 플레이어. 즉, 아기가 태어나지 않게 만든 놈들.
결국, 그놈들은 이 세계를 끝낼 속셈이다. 그러니 스킬이나 편법으로 아이를 갖게 될 방법은 없을 것 같다.
녀석들의 목적에 전면으로 반하는 일인데…. 예외사항을 둘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가 생기는 일은 막아놨을 거다.
아마 이건 대충 하진 않았겠지. 상당히 꼼꼼하게 막아놨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여자들이 생리도 안 하는데 뭐…. 막아놓고 자시고 그냥 불가능 한 거지.
모르겠다. 사실…. 여자들을 신경 쓰고 사는데도 이렇게 정신없는데 아이까지 있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거다.
게다가 아이를 키우는 데는 상당히 필요한 게 많을 거다. 하다못해 기저귀도 없는 세상이잖아.
물론…. 뒤져보면 어딘가에 많이 있긴 하겠지만.
그렇게 잡생각을 하다 보니 벙커에 거의 도착했다.
탐지에 걸리는 네 명의 기척.
기척만 봐도 반가운 느낌이 든다.
어서 들어가야지. 가서 내 여자들을 안고 편히 자야지.
그래야 또 이것저것 할 일들을 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