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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
승규는 누가 봐도 훌륭한 리더다.
지하철역에서 그를 발견하게 된 건 아마 굉장한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그저 아이를 키우고 있었기에 살려둔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좋은 사람이라거나 책임감이 뛰어난 사람인 건 아니니까.
그냥 그가 능력 있던 사람이었을 뿐이다.
하긴 세상이 멸망했는데 그런 상황까지 자기 가족을 무사히 지킨 사람이 능력 있는 건 당연하겠지.
"승규 형."
"왜 그렇게 진지하게 부르는데? 그러지 마. 네가 그렇게 무게 잡으면 무섭잖아."
"별건 아니고요. 아니다. 별거일 수도 있나."
"아 떨리네."
능청스러운 표정을 짓지만 진지함이 베이스에 깔린 사람.
그래서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말을 할 생각을 하는 거겠지.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뭐부터 들어볼래요?"
"힌트나 경중 같은 건 없어?"
"없어요. 그냥 랜덤."
"그럼 하고 싶은 말부터 해. 아무것도 모르는데 고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니."
"그러네요. 어…. 보자."
나는 잠시 멈춰서 작게 중얼거렸다. '수납.'
바닥에 수납의 입구가 열리고 차곡차곡 쌓인 MRE 박스가 모습을 드러냈다.
12개들이 MRE박스가 가로 6줄, 세로 10줄로 12층 높이로 쌓인 모습.
수납이 미친 듯이 좋은 건 이런 거다. 마구잡이로 물건을 집어넣어도 꺼낼 때 이쁘게 쌓을 수 있다는 것.
게다가 숫자도 알아서 파악된다. 뭔가를 꺼내려고 하면 그게 안에 몇 개 있는지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다.
뭐라고 해야 하나. 이미 알고 있다는 느낌?
"와…. 많네."
"이게 수납 고급이거든요? 가로, 세로, 높이 3미터 공간에 집어넣은 MRE박스죠."
"엄청나네. 고급이라고? 그럼 마스터는?"
"예상하자면 가로, 세로, 높이 4미터가 되겠죠,"
"27세제곱 미터랑 64세제곱 미터라. 2.3배인가? 엄청나게 늘어나네."
"계산 빠르시네요."
"그런가? 아무튼…. 이게 왜?"
나는 다시 수납을 열어 MRE박스들을 그대로 집어넣었다.
수납의 편리한 응용을 바라보는 승규의 눈길이 부러움으로 가득 찬다. 뭐, 그러는 게 이해가 가지.
솔직히 생활 스킬 중에 이보다 유용한 스킬은 없다시피 하니까.
"이게 거의 8천 명분이거든요? 근데 창고에 있는 양을 생각하면 정말 빙산의 일각일 뿐이에요."
"아…. 그 이야기구나."
"무슨 말 하려고 하는지 알겠죠?"
"알지. 나도 이사를 쉽게 생각하지 못한 것 중에 가장 큰 이유니까. 저 무지막지한 양의 MRE 때문이잖아."
"네. 수납이 있으니 제가 기회가 되는대로 옮길 수는 있어요. 근데 옮길 장소가 있느냐가 문제죠. 이 근처에 쓸 수 있는 냉동창고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걸 하나 찾아놔야 할 것 같아요."
"하아. 안 그래도 나 역시 그것부터 확인하긴 했었어. 근데 주변엔 없더라. 사실 여기가 냉동창고가 있을 만한 위치는 아니지."
"그렇죠?"
"거기다 계속 놓는 건 조금 그렇지?"
"네. 기왕 옮기는 거 다 깔끔하게 마무리 짓는 게 낫죠.“
”그렇지. 당연히 그렇지.“
"그럼, 전혀 엉뚱한 곳이라도 구해서 옮겨놔야겠네요."
"기왕이면 가장 가까운 곳으로 옮겨야지."
"그래요. 그럼 그건 제가 한번 찾아볼게요. 근데 여기다가 냉동창고를 짓는 건 무리겠죠?“
”사실 그 생각도 안 해본 건 아닌데…. 쉬운 기술은 아니잖아?“
”그렇긴 하죠. 암튼 그럼 그건 조금 더 알아보기로 하고…. 다음 내용.“
"아…. 떨리는데? 무슨 이야기를 더 하려고."
나는 그런 승규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능력 있는 남자. 이 남자의 역량은 어디까지일까?
나는 절대로 할 수 없는 부류의 능력이다. 펜스의 정 부장이나 승규의 능력.
사람을 다독이며 조율하는 일. 내게는 사람을 죽이는 것보다 힘든 일.
"여기 이름을 청평이라고 정했다면서요."
"응. 개인적으로는 호반이 더 맘에 들었지만."
"건설사 대표가 들었으면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겠네요."
"그렇네. 하하."
"아무튼…. 여기 청평에 사람이 더 필요해요?"
내 이야기를 들은 승규의 이마에 주름이 잡힌다.
"사람이라."
쉽지 않은 일이다.
지금 청평의 상황도 정말 기적적이라고 볼 수 있는 상황이니까.
내가 마음대로 모은 사람들이 서로 큰 반목 없이 모여 산다는 건 원숭이가 아무렇게 던진 돌멩이가 무너지지 않고 쌓여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거기엔 다들 나름대로 아픔 있던 사람들이라는 공통점과 정상적인 성격, 승규라는 좋은 접착제가 있었으니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근데 여기에서 인원을 늘린다면?
언제까지 운이 좋을 수는 없다. 사람이 많아질수록 좆같은 상황이 나올 확률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건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아무리 내가 필터링을 해서 보낸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니까.
"사람이라. 물론 더 있으면 좋긴 좋지. 좋은데…. 쉽지 않네."
승규 역시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게 뻔하다.
이런 집단에서 갈등과 반목 없이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고 사는 것은 전적으로 운에 의지할 수밖에 없으니까.
아무리 규율을 엄하게 세우고 간섭과 통제를 엄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안되는 사람은 안되는 거다.
그리고 그건 절대로 사전에 모두 다 잡아내기 어렵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가 생각이 하나 있는 데요."
"뭔데?"
"조금…. 잔인해질 생각 있어요?"
"뭐?"
"나는요. 물류 센터…. 아니 이제 청평이 된 이곳을 지키기로 마음먹었어요. 알다시피 제가 형을 비롯한 사람들을 마트에 보냈던 건…. 이 정도로 체계적인 곳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보낸 건 아니거든요?"
"음…. 그래. 그렇게 느끼긴 했지."
"근데 이렇게 됐고, 내 눈 밖에서 벗어났었고, 살짝 방치하긴 했었지만…. 결국은 내가 다시 신경 쓰기로 했어요. 그렇다고 형의 자리를 맡겠다는 건 아니에요. 뒤에서 지킬 거에요. 음흉하고 변태같이 지켜볼 셈이죠."
"음흉하고 변태적으로 지켜보는 건…. 어떻게 해야 할 수 있는 건데?"
"그건 뭐 차차 알아가도록 하시고요. 어쨌든 저도 하는 것이 많기에 늘 여길 지켜볼 수는 없어요. 그래서 형을 어느 정도는 키우고 싶어요."
"나를? 키운다고? 응애?"
"형. 점점 개그에 욕심내는 거 같은데요."
"그치? 안 어울리는 걸 하니까 역시 어색하네."
잠시 정적. 머쓱한 승규가 나를 보고 말한다.
"뭘 어찌할 생각인데."
"내 기준에서 그나마 나아 보이는 사람을 이곳 청평으로 보낼 거에요. 그리고 한 3개월 정도 지켜보는 거죠. 그런 다음 잘 녹아들면 좋고 문제가 있다 싶으면…. 코인으로 만들라고요."
내 담담한 말에 승규의 표정이 조금 기이하게 변했다.
하긴, 내가 씹새끼 같은 소리를 너무 평범하게 했나? 근데 승규는 내가 이런 사람인지 대충 알 텐데.
"그게…. 그런 일을…."
"알아요. 정말 개 쓰레기 같은 생각이죠.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그런 일이 없도록 신중하게 뽑아서 보낼 생각이에요. 하지만 무조건 괜찮은 사람이 올 리는 없잖아요? 그러니 그렇게 없던 일로 돌릴 방법이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은 거였어요. 형은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아니다 싶으면 제게 말만 해주면 되니까요. 그럼 제가 알아서 마무리 질게요."
"아니, 결국은…. 하아."
"맞아요. 형이 죽음을 선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처형은 제가 할 테지만요. 근데. 저는 형이 그 정도 비정함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청평 사람들을 위해서, 형 자신을 위해서."
"너는 정말…. 어떤 삶을 살아온 거니."
"말했잖아요. 저는 제가 아는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세상 모든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이에요. 능력이 되냐 안되냐를 떠나서 마음가짐은 그렇게 가지고 있어요. 그렇게 하는 게 찝찝하다면, 생각을 바꿔봐요. 어차피 저를 만나는 시점에서 죽을 수밖에 없던 사람인데 형이 살 기회를 주는 거라고요. 어차피 조삼모사지만."
"하아. 이거 한숨만 나오는구나."
그렇게 잠시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기는 승규.
"웃긴 건 뭔 줄 아니?"
"뭔데요."
"네가 한 제안에서 비효율적인 부분을 찾을 수가 없다는 거야. 반박할 거리가 없어. 비인도적이라는 게 있긴 한데…. 그런 건 이미 이 세상에서 사치스러운 소리잖아."
"그렇죠."
"그래서 잔인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 그게 슬프네."
"저는 헛소리는 하지 않아요. 인간 같지 않은 소리일 수는 있지만."
"하아."
한숨만 연거푸 내쉬는 승규.
그가 한숨을 내쉴 때마다 뿜어지는 입김이 하얗게 피어로는 모습이 안쓰럽다.
"어떻게든 네가 보내는 사람이 적응할 수 있게 만드는 수밖에 없나.“
"억지로 만든다고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도 세상엔 선만 있는 게 아니니까. 위선도 선이지."
"아. 그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위선도 선이죠."
또다시 말이 없어진 승규.
한참을 또 생각하더니 입을 연다.
"그러면, 언제부터?"
"당장 눈에 띄는 순간부터요. 근데 크게 기대는 하지 마요. 제 기준은 엄격하니까요."
"하하…. 그래. 부디 좋은 사람들만 왔으면 좋겠네."
"그럼 그건 그렇게 하고. 마지막 하나."
"으. 더 심각한 일이니? 조금 살살하면 안 될까?"
"안돼요. 형은 앞으로 제가 마음껏 일을 저지르면 뒷수습해줘야 해요."
"으휴. 해준 게 많으니 뭐라고 할 말도 없고. 뭔데?"
"여기 있는 여자들. 임자 있는 여자들 말고는 다 제가 하고 싶은 대로 할거에요."
"뭐?"
"제가 책임진다는 부분은 그 부분까지 포함이었어요. 다소 난잡해질 수도 있으니 미리 말해놓는 거예요."
"아아아. 그래. 뭐…. 그거야 사실 내가 개입하거나 신경 쓸 일은 아니니까."
"아니죠. 제가 난잡하고 추잡하게 굴면 형이 피곤해질 수 있을 거예요."
"다 큰 성인들인데 그 정도는 알아서 서로 잘 하겠지."
"암튼, 저는 미리 말했어요. 나중에 원망하지는 마시고요."
"뭘 대체 어떻게 하려고 원망이라는 말까지 나오는 거야."
"사실 저도 여자들의 질투 같은 건 잘 모르니까요."
"으으. 그건 나도 모르지. 나라고 그런 쪽의 전문가가 아니니."
"그래도 여기선 가장 연애 선배 아닙니까."
"유정이와의 연애 경험으로 너희들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지."
"형수 말고 다른 연애도 있었을 거 아니에요."
"없어."
"에이. 형이라면 더 있을 거 같은데?"
"없어. 결혼하면 과거의 연애 같은 건 없는 거야."
"그건 좀…."
"없다면 없는 줄 알아."
"그래요.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야죠.“
승규가 머리 아프다는 표정을 짓고 있기에 더는 귀찮게 굴기가 미안해졌다.
근데 승규 이 사람도 생각보다 형수에게 헌신적이네.
"그럼 일단 MRE 가져온 건 형수한테 드릴게요."
"아. 그래. 일단 그 정도 보관은 어떻게 될 거야. 여기도 제법 보관 공간이 크게 있으니까."
"알았어요. 그럼 들어가 볼게요."
"어? 오늘은 바로 안 가고?"
"네. 제 맘대로 굴 거라고 그랬잖아요."
"아아…. 그런 거냐."
"암튼, 들어갑니다."
나를 보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승규를 뒤로하고 벙커 입구가 있는 본관으로 향했다.
지하 1층, 활짝 열려있는 벙커 안으로 들어가며 탐지를 쓰니 역시 많은 인원이 잡힌다.
일단 느긋하게 돌아보며 아래쪽으로 내려갔고, 마침 딱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났다.
"연서. 안녕?"
"어!?"
가벼운 반바지와 티셔츠만 입은 채 손에 뭔가를 들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는 연서.
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춘다.
"어디가?"
"언제 왔어요?"
"얼마 안 됐어. 10분?"
"아아…."
"어디 가는 거야?"
"아. 미연이한테……."
"그래? 그럼 같이 갈까?"
"어…. 그래요."
상당히 당황스러워하는 모습. 대충 이해가 간다. 지난번에 말을 하다가 짱개 때문에 끊기긴 했지만…. 대충 그때 했던 말들이 있으니까.
나와 함께 미연이가 있다는 곳으로 걸어가면서도 아무 말이 없는 연서.
약간 어색한 그 모습에 내가 먼저 말을 건다.
"손에 든 건 뭐야?"
"아. 이건…. 씨앗요."
"씨앗?"
"네."
"무슨 씨앗?"
"딸기요."
"딸기?"
"네. 딸기."
"갑자기 딸기 씨앗은 왜? 근데 딸기도 씨앗이 있나?"
"딸기도 당연히 씨가 있죠. 딸기 표면에 촘촘히 박혀있는 게 씨앗인데."
"아아. 그런가? 그렇겠구나. 근데 딸기는 왜?"
"키우려고요. 스마트 팜이라고 알아요?"
"아. 알지. 주변의 누군가가 시도했다가 실패한 걸 봐서. 아아. 지금은 비닐하우스가 없어서 실내에서 뭐 키우려고?"
승희의 얼굴이 잠시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모른척했다. 미안해. 승희야!
"네. 맞아요. 성장을 놀릴 수는 없으니까."
"흠. 그렇구나. 근데 왜 딸기야?"
"아. 그건…."
"어?"
어느새 스마트 팜을 하고 있는 방에 도착했고, 나를 본 미연이도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잠시 어색해진 연서와 나, 미연이.
그리고 그 어색함은 미연이가 방문을 슬그머니 닫자 조금 더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