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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
물류 센터.
이제는 아무도 없는 곳.
창고 안에 있는 것을 노리는 놈들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다.
이미 가져간 건가? 그럴 수도 있다.
우리가 모르는 곳. 그런 곳에 숨겨져 있던 걸 이미 가져갔을 수도 있다. 내가 24시간 여기에서 지키고 있던 건 아니니까.
그럼 나는 나대로 내가 생각한 걸 해야지 뭐.
냉동창고로 가서 창고의 문을 열었다.
추운 겨울인데도 안에서 나오는 냉기는 훨씬 더 혹독하다.
문 앞에 있는 방한복을 껴입고 창고로 들어갔다.
제법 빼먹었지만, MRE는 아직도 넘치고 넘친다.
대체…. 얼마나 있는 거야? 재고 조사 같은 건 엄두도 안 나겠지?
수납을 열어 MRE 박스를 담기 시작했다.
MRE 12개씩 들어있는 박스. 그런 박스를 차례 차례 집어넣는다.
박스가 큰 건 아니라서 수납에 제법 많이 들어간다.
거의 몇백 상자는 들어간 거 같은데…. 아직도 창고 안에는 넘치게 많이 있다.
쌓여있는 걸 적당히 계산해 봤을 땐 수납 안에 700상자는 들어갔다.
한 박스에 12개니까 이것만 해도 8천 개가 넘어간건데.
맙소사. 이렇게 생각하니 엄청나긴 하네.
8천 개라니. 스무명이 삼시 세끼를 먹어도 한 달 반은 먹을 수 있잖아? 어휴.
그렇게 수납을 채우고 밖으로 나왔다.
극저온의 냉동창고에 있다가 밖에 나오니 겨울인데도 따듯한 기분이 들 정도다.
근데 이거…. 수납으로 옮긴다고 해도 몇 번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는 거야? 돌아버리겠네. 이건 순간이동 생기기 전까진 어림없겠어.
게다가 문제는 저쪽에 이걸 보관할 곳이 없다.
한번 알아보라고 해야겠다. 그 동네에도 냉동창고는 있을 테니까.
그렇게 창고를 잘 닫아놓고 다시 탐지를 돌려본다.
조용한 동네. 진짜 안 오나?
함부로 아무나 여기를 망보라고 할 수도 없고…. 역시 구식 방법을 쓸 수밖에 없겠네.
테이프를 조금 잘라서 문 한쪽 구석에 잘 붙여놨다.
그리고 그것보다 조금 더 작고 가늘게 해서 위쪽에 안 보이게 하나 더 붙였다.
이러면 되겠지. 그럼 여기도 당분간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거고….
그렇게 하늘 위로 솟구쳐 오른다.
침낭과 하이바를 쓰고 투명을 쓴 다음 연수원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그사이 별일은 없었겠지? 설마 무슨 일이 있겠어?
지난번 이곳을 떠날 때 혹시나 추적 같은 게 걸려있을 수도 있어서 광역 스킬 무효화도 잔뜩 썼었으니 연수원의 위치는 아는 사람이 없을 거다.
만약 문제가 생긴다면 이동 시 관측됐거나, 아니면 그쪽 동네에서 뭔가를 구하러 다니다가 마주치거나…. 그런 정도?
아니지. 뭐, 방법을 찾는다면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그래도…. 예전의 그들이 아니니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 거야.
빠르게 하늘을 날아 연수원으로 향한다.
이들은 이름을 뭐로 지었을까? 이상한 거만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전에 누구였더라?
펜스 이름 지을 때 반장 하나가 '고향' 막 이런 이름 꺼내고 그랬었지?
이쪽에는 그런 사람이 부디 없기를 바란다.
그런 거로 정했다면…. 내가 뒤집어엎을 거야.
혹시나 가는 길에 사람이 있지 않을까 해서 적당히 땅에 가깝게 날아가지만…. 역시 사람은 없다.
어차피 사람이 살만한 곳도 별로 없으니까…. 당연한 거겠지.
그렇게 연수원 근처에 도착하니 드디어 기척이 잡힌다.
그리고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상당히 달라진 모습.
나무와 잔디로 제법 멋지게 꾸며져 있던 정원이 다 파헤쳐져 있다.
그리고 축구장은 어느새 축사가 되었다. 제대로 지어 놓은 것은 아니고 임시인 거 같은데….
어쨌든 축구장의 흔적은 거의 남아있는 게 없다.
그리고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몰라도 농기계들이 주차장에 잔뜩 서 있다.
하…. 이사람들 아주 농사를 본격적으로 할 셈인가 봐.
물류 센터에 있을 때는 제대로 하지 못했던 걸 여기서는 원 없이 하려나 보다.
스케일이 상당히 큰데?
근데 여기는 경계를 어떻게 서고 있나? 하긴 하는 건가?
일단 그런 건 모르겠으니 탐지에 걸리는 아무에게나 다가갔다.
공중에서 지상으로 급강하. 그리고 지면에서 한 뼘 위치에서 급정지.
비행은 중력과 관성을 무시하는 움직임이 가능하기에 이런 짓을 해도 아무런 부담이 없다.
사기야 사기. 어떻게 이런 게 가능하냐고.
"어라! 오셨어요!?"
이크. 하필이면 미래다. 나를 보고 유난히 반가워하는 미래.
이미 나를 본 이상 피할 수도 없고…. 에잉….
물류 센터에서 유일하게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 마음을 확정 짓지 못한 아이인데. 하필 딱 걸렸네.
"뭐 하고 있어? 날도 추운데."
"아아. 승규 오빠에게 가고 있어요."
"그래? 마침 잘됐네. 같이 가자. 어디 있는 데?"
"소를 잡아 와서…. 급하게 소 축사를 짓고 있어요."
"소? 소를 잡아 와?"
"네. 비닐 구하러 갔다가 소를 발견했다고 해서."
"오. 그거참 대단한데?"
"게다가 송아지도 두 마리나 있어요!"
"이 추운 계절에 어디서 그렇게 살고 있었데. 먹고 살기 힘들었을 텐데."
"그러게요. 근데 소가 우리가 알고 있던 소하고 조금 다르긴 해요. 비쩍 말랐어요."
"그렇기야 하겠지. 사람이 좋은 여물이랑 사료 줘서 키운 거랑 야생에서 살아남은 거랑은 차이가 클 테니까. 근데 너는 거기 왜 가?"
"아…. 소가 너무 흥분하는 거 같다고 그래서 기절시키러…."
"하긴. 너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긴 하네."
"그쵸. 따로 해가 되지도 않고 편하게 기절시킬 수 있죠."
"소 축사면 저쪽에 축구장 거긴가? 하늘에서 보니까 그쪽이 축사 같던데."
"네. 맞아요. 거기에요. 아무래도 분변 냄새 때문에 최대한 멀리 지었어요."
"잘 생각했네."
미래랑 조금 더 친했으면 그대로 안아 들고 바로 날아갔을 텐데, 아직 손을 댈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라 그럴 수는 없다.
뭐, 매혹을 하도 걸었었기에 말을 하면 그렇게 하자고 할 것 같기도 하지만…. 이렇게 걸어가면서 이야기하는 것도 나쁘진 않다.
생각해보니 처음에 데리고 온 이후로 이렇게 말을 많이 한 건 처음인 거 같네.
그동안 좀 외면한 건 사실이니까.
"이사 온건 맘에 들어?"
"네! 진짜! 정말! 장난 아니에요! 완전 맘에 들어요! 방도 좋고, 화장실도 각자 다 있고! 이제 소원이 없을 정도라니까요!"
유난히 좋아하는 미래. 하긴 젊은 아가씨에게 개인적인 공간은 중요하지.
"다른 애들은 어때? 승주랑 중현이?"
"음. 걔들은 뭐. 알아서 잘 살죠."
"어째 반응이 시큰둥하다?"
"네? 왜요?"
"아니…. 너랑 같이 왔잖아? 아무래도 셋은 좀 특별하게 친할 거라 생각해서."
"아무래도…. 그렇긴 하죠. 형제자매 같은 느낌이랄까? 근데 이제는 청평 사람들이 전부 가족이니까요. 걔들도 다 크긴 했고."
"그래? 난 걔들이 너를 좋아하거나 이성으로 보고 있는 줄 알았는데."
"에에엑? 으으. 말도 안 돼요. 뭐, 어렸을 때는 그렇게 생각했을 수도 있는데 지금은 아니에요. 걔들은 또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서."
"엥. 그래? 그건 또 궁금하네. 남의 연애사는 늘 흥미진진하지."
"음…."
그러더니 미래는 약간 나에게 바짝 붙어서 목소리를 낮추고 말한다.
"오빠. 입 무거운 편이죠?"
"어…. 아니? 물에 빠지면 입만 동동 뜰 텐데."
"그럼 안 되겠네."
"농담이야. 말해봐."
마치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비밀을 말하는 것처럼 주변을 한번 살피더니 조용히 입을 여는 미래.
"승주는…. 현정이 언니를 좋아해요."
"현정이? 진영이 동생?"
"으. 목소리 좀 작게요."
"어. 미안."
"그리고 중현이는 아직 내색은 안 하는데…. 아무래도 지연이 언니를 좋아하는 거 같아요."
"지연이…. 음."
흥미진진 하긴 한데…. 이거 약간 복잡해지네?
어차피 여자애들의 입장까지 들어본 건 아니지만…. 현정이는 어차피 지금 프리인 상태니 문제는 없다.
근데 지연이는…. 음…. 어…. 과연?
"아무튼, 이건 저만 아는 거니까 비밀로 해줘요. 다른 사람들은 눈치 못 챘을 거예요."
"그래. 어차피 나야 여기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
"그렇긴 하죠. 근데 왜 자주 안 와요? 자주 좀 와줘요."
그렇게 말하는 미래의 얼굴이 살짝 발그스름하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가고 있으니 바람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정도긴 하지만…. 아마 그것 때문은 아닐 거다.
흐음. 그럼 결국 미래는 방해꾼이 없다는 소린데.
근데 중현이가 너무 충격적이네. 지연이라니. 둘이 나이 차이도 꽤 될 텐데? 다섯 살? 여섯 살?
근데 뭐 상관없나? 나랑 민희도 그 정도 차이는 나니까.
"아. 근데. 아까 여길 청평이라고 그랬어?"
"네. 아. 그거 아직 모르시겠구나. 오빠가 저번에 가면서 이름 정하라고 했다며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래서 정해진 이름이에요. 청평이랑 호반이랑 박빙의 승부를 겨뤘는데 결국 청평이 이겼어요."
"청평이랑 호반? 호반도 뜻은 좋긴 한데."
"근데. 아파트 이름 같죠."
"그렇긴 하네."
"그래서 청평이 이겼어요. 어차피 여기 지명도 청평이고, 옆에 있는 것도 청평호고. 청평에 우리만 있는 거 같기도 하고."
"뭐 단순해서 좋네."
"그렇죠. 아. 저기 승규 오빠 있다. 승규 오빠!"
한창 축사를 짓고 있는 승규. 그리고 진영이와 민준이.
"미래 왔니? 빨리 저 소 좀 기절시켜줘. 빨리. 성철이도 왔네."
"네. 바쁘네요?"
"그렇지. 할 게 엄청 많으니까."
"형 왔어요!?"
"오셨어요?"
진영이와 민준이도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고, 미래는 그사이에 어미 소를 기절시켰다.
옆에 있던 송아지 두 마리는 어미 소가 쓰러지자 그 옆에 바짝 붙어 가냘프게 울기 시작한다.
"소를 주웠다면서요?"
"말도 마라. 발견하고 신나는 마음으로 잡아 왔는데…. 나중에 보니까 조금만 뒤져도 소 천지더라."
"그 정도예요? 이 겨울에 소들이 어떻게 살아간 데요?"
"모르겠어. 어쨌든 적지 않은 숫자야. 근데 너무 빨리 잡아 왔나 봐. 축사를 만들고 잡아 올 걸 그랬어."
"어차피 저 송아지들에게 성장 쓰면 여기서 불릴 수도 있잖아요?"
"그렇기도 해. 그리고 기왕 하는 거 젖소도 좀 키워보려고."
"이야. 너무 본격적이신데."
"이렇게 좋은 곳에 왔으면 꿈을 크게 가져 봐야지. 이 옆에는 양도 뛰놀더라."
"완전…. 오길 잘했네요."
"그러게. 다 네 덕이지. 진영아! 거기 잡아 당겨봐!"
"네!"
나와 이야기 하면서도 나름 능숙하게 축사를 짓고 있는 승규.
그래. 이 사람들은 싸움이나 살인 같은 걸 하지 말고 이렇게 평화롭게 사는 게 좋아 보인다.
손에 피 묻힐 일은…. 내가 하는 거지. 괜히 모두가 살인 병기가 될 필요는 없잖아.
딱 자신을 지킬 만큼만 힘을 갖고 평화롭게 사는 게 최고야.
"동현이는 안보이네요?"
"걔는 자재 가지러 갔어."
"아. 비행이라?"
"그치. 여기서 차 끌고 강 건너가려면 한참 도니까."
"그래요…. 그건 그렇고. 언제 끝나요?"
"왜?"
"이야기나 할까 해서."
"음. 그럼 좀 쉴까? 얘들아. 잠깐 쉬었다 하자. 어차피 여기 앞쪽만 막으면 임시로 완성 되는 거니까."
"형. 그럼 저희가 마무리 질게요. 둘이 이야기하세요."
진영이가 말했고 승규는 잠시 생각하더니 대답한다.
"그럴래? 그럼 부탁 좀 할게. 그 소 잘 묶어놔야 한다? 괜히 깨어나서 발버둥 치게 하면 안 돼. 그리고 마무리 다 하면 여물 꼭 줘보고."
"네. 걱정 마요."
그런 진영이를 뿌듯하게 바라보는 승규. 그러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자. 그럼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