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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에 익숙해진다는 것
"진동파는 솔직히 말해서 잘 몰라. 어떤 스킬인지 제대로 본 적도 없고 효과만 겨우 알 뿐이야. 근데 이거에 눈길을 준 이유는…. 정말 나중에 쓸 수 있는 스킬인데 EMP라는 스킬이 있어."
"EMP…. 어디서 많이 들어봤는데."
"게임에서도 나오고 핵폭발 할 때도 나오는 거지. 주변의 전자기기를 전부 무력화시키는."
"아아. 그래요. 들어본 거 같아."
"지금처럼 전기가 무제한이고 전기 의존도가 높은 인간에게 그 스킬은 재앙과도 다름없어. 그래서 생각해본 거야."
"음. 그 EMP를 언제 배우는 데요?"
"스킬 여덟 개를 마스터 하면."
내 말에 다들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다.
"우엑. 패스. 다음 거요."
"하긴, 나도 그래서 약간 그렇긴 해. 그리고 다음 스킬은 암석 탄환. 돌조각이 탄환처럼 날아가는 스킬이야."
"흐음…. 그럼 결국 그건 내가 맞춰야 하는 거죠?"
"응."
"어렵네요."
"아니면 그냥 폭발 배워도 되고."
"파이어 볼은요?"
"메테오 까지 배울 생각이 아니라면 별로지. 파이어 볼도 니가 맞춰야 하는 스킬이니까."
"그럼. 그냥 비행부터 하죠."
"그럴래?"
"폭발은…. 허공에다가는 못 쓰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 타겟형 스킬은 아닌데 허공은 안됐던 거 같아."
"알겠어요. 비행부터 배울게요."
"알았어. 그럼 그렇게 하고…. 안나?"
"음? 나?"
내가 자신을 부르자 귀엽게 고개를 갸웃거리는 안나.
이쁜 애가 귀여운 짓을 하다니…. 반칙 아니냐?
"안나는 공격 스킬 생각해 둔 거 있어?"
너무 길게 말했나? 역시 못 알아듣는다.
"공격 스킬."
"공격? 스킬? 아. 아. 이해. 이해. 나. ветер лезвие. 어…. 바람 칼날."
"바람 칼날?"
"Да. 응. 바람 칼날."
"그래? 바람 칼날…. 좋지. 안나랑 어울리기도 하네."
공격 스킬은 논타겟팅 스킬일수록 좋다. 적어도 반사 당할 염려는 없으니까.
게다가 보호막이 그렇게 흔한 스킬은 아니다. 보호막 가지고 아직 살아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는 않잖아.
좋아…. 그럼 일단 다들 스킬이 나아갈 방향은 다 정해졌다.
이제 숙련만 열심히 하면 되겠네.
"나 비행 배워요?"
"응. 배워."
"알겠어요. 에…."
혼자서 꼼지락거리더니 짧게 중얼거리는 승희.
"비행."
그리고 자신의 몸을 둘러보면서 의아한 듯 말한다.
"왜 안 날지?"
"머리로 이미지를 생각해야 해. 그냥 자동으로 날아지는 스킬이 아냐."
"이미지? 생각? 오오오오!"
쿵
갑자기 몸이 떠오르는 승희. 그러더니 벙커 천장에 머리를 박았다.
"아야야야. 아. 좋아. 이해했어. 이런 거구나. 그러면…."
비록 머리를 한번 박긴 해지만, 그다음부터는 제법 능숙하게 왔다 갔다 하기 시작하는 승희.
그런 승희를 보면서 미나와 안나가 부러운 듯 바라본다.
갑자기 탐지 스킬의 숙련을 열심히 하기 시작하는 안나.
"오빠. 우리도 나가죠."
미나 역시 빨리 질병 해제 숙련을 마무리 하고 싶은지 나를 재촉한다.
"나는 이제 더 안 올라?"
"네. 오빠도 이제 안 오려오."
"더 안 오른다고? 진짜?"
"네."
"잠시만…. 그럼 불면증은? 혹시 나 잠들면 바로 좀 깨워봐? 알았지?"
"네."
"수면."
나에게 수면을 걸었지만, 역시 잠들지 않는다.
"에이…."
"안 고쳐진 거예요?"
"그런 거 같다."
"희한하네. 불면증은 질병이 아닌거에요?"
"고쳐지는 질병이 아닌 건가 보지. 솔직히 질병 해제로 정신병이나 치매가 고쳐질 것 같지도 않고."
"아아…. 그런 범주에 있는 병인가."
"치매는…. 모르겠다. 근데 정신병이나 치매, 그리고 노화. 노화도 따지고 보면 질병이잖아. 그런 건 안 고쳐지는 거지."
"어렵네요."
"어렵지. 암튼, 그럼 가서 동물들에게 걸고 오자. 우리 나갔다 올게."
"다녀와요."
인사해주는 승희와 손을 흔들어주는 안나. 시크하게 한번 바라보고 다시 숙련을 하는 세아.
벙커 밖으로 나와 롱패딩을 입은 미나를 안아 든다.
매력적인 걸그룹 출신 아가씨. 안아 들어도 별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여자.
저번처럼 그녀를 안고 동네로 도착하자 다시 또 우리의 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모여드는 들개들.
숫자는 그다지 변한 것 같지는 않다. 저번에 보이던 보스도 그대로고.
우리가 자리를 잡자 주변에 동그랗게 배를 깔고 모여 눕는 들개들.
이거 너무 웃긴 거 아냐?
그렇게 바로 스킬을 쓰는 미나. 승희가 비행을 쓰는 걸 봐서 그런지 의욕이 대단하다.
문제는…. 의욕에 비해 스킬 쓸 대상이 너무 적었다는 거다.
"어라라. 이제 더는 치료 되는 아이들이 없네요."
들개들은 미나에 의해서 자잘한 질병까지 모두 고쳐졌나 보다. 그러고 보니 녀석들 털도 좀 더 윤기가 좔좔 흐르는 거 같기도 하고.
"지금 몇퍼지?"
"고급 86퍼센트요."
"700번 정도…. 쉽지 않네."
"어쩌죠?"
"일단 더 찾아보자."
나와 미나가 일어서자 들개들 역시 우르르 일어선다.
나에게 안긴 미나, 내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자 지난번처럼 보스 놈이 컹 하고 짖었고 다들 뿔뿔이 흩어진다.
"어디로 가지?"
"저쪽!"
"응?"
"고양이 소리요!"
미나의 말에 귀를 기울여보니 발정기 고양이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뭐라 그러더라? 캣콜링?
"저게 들리는구나?"
"가보죠."
나는 미나를 안고 바로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했다.
어느 주택의 앞마당. 열댓 마리의 고양이가 우리를 보더니 흠칫하며 언제든지 튀어나갈 자세를 한다.
"뒤로요. 뒤로. 좀 더."
우리가 뒤로 물러나서 얌전히 바닥에 섰지만, 고양이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미나는 그런 고양이들을 보면서 조심스럽게 질병 해제를 쓰기 시작했다.
숙련도가 오르는지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나.
나는 고양이들이 놀라지 않게 바닥에 살그머니 앉았고, 미나를 내 다리 위에 앉혔다.
바닥이 차가웠지만, 미나가 안겨있기에 그런 냉기는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는다.
품에 안겨있는 가느다란 허리와 손을 뻗으면 바로 닿는 가슴. 이게 있는데 냉기가 대수겠어?
"귀여워라…. 해제. 해제. 해제."
우리가 얌전히 앉아있자 눈치를 계속 보는 고양이들. 그래도 떠나거나 도망가진 않는다.
마리당 한 50번 정도만 쓸 수 있으면 이 자리에서 다 숙련을 마칠 수 있을 텐데.
700번이니까 포션 35개네. 조금 힘들려나?
하지만 미나는 엄청난 의욕을 보이며 질병 해제를 마구 쓰고 있다.
마치 고양이가 언제 도망갈지 몰라서 다급해 보이는 기분?
게다가 마스터가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도 한몫 한 거겠지?
고양이들도 뭔가가 느껴지는지 경계심이 조금씩 풀어지는 모습이다.
하긴 저 새끼들은 성질이 제멋대로라서 그렇지 똑똑하긴 똑똑하잖아. 가끔 병신같은 짓을 해서 그렇지.
게다가 고양이들은 처음에 있던 녀석들만 있는 게 아니었나 보다. 몇 마리가 떠나고 몇 마리가 다시 나타나는 게 반복되는 모습.
고양이는 영역 싸움하는 동물 아니었나? 여기는 만남의 광장 같은 거야?
하긴 캣콜링을 한 거 보면 여기가 그런 장소는 맞는 거 같다.
따지고 보면 여기는 고양이 러브호텔 같은 곳이네.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미나의 포션 먹는 속도는 조금 더 빨라졌다.
와…. 얘 괜찮은 거야? 오늘 기세가 장난이 아니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아니에요…. 하악하악…. 고양이…. 하악…."
정상이 아니네. 물약에 취한데다가 고양이를 보고 있어서 그런가? 눈이 맛이 갔어.
그래도 입으로는 계속 해제를 걸고 있다. 이런 집념과 집착적인 모습을 보이는 미나는 또 처음이야.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다가 보니 바닥에 쌓인 포션 병이 제법 많아졌다.
거의 서른 개 넘은 거 같은데….
"미나 몇퍼?"
"98퍼!"
"오. 앞으로 열 번!"
미나는 거의 속사포 랩을 하듯 질병 해제를 중얼거린다. 그렇게 열 번 정도 하는 것 같더니 그대로 두 손을 번쩍 들었다.
"야옹!"
"엥? 야옹?"
"야옹! 야옹! 미야옹!"
글렀어…. 드디어 인간을 벗어났구나.
한참을 미야옹 거리면서 팔딱팔딱 뛰어다니는 미나.
그 덕분에 모여있던 고양이들은 전부 다 도망가버렸다. 하긴…. 내가 고양이라도 도망가겠다.
그렇게 질병 해제라는 끔찍한 스킬을 마스터 한걸 자축하던 미나가 바닥에 앉아있는 내 앞에 엎드렸다.
"미나야?"
"미야옹."
그러더니 마치 고양이처럼 고개를 들고 슬금슬금 나에게 기어오는 미나.
흙바닥이라…. 무릎 아플 텐데?
그런 걸 개의치 않고 나에게 다가온 미나가 내 목덜미를 살짝 핥더니 귓가에다가 작게 속삭인다.
"야옹."
대체…. 이건 무슨 플레이야? 고양이랑 혼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그러더니 아직 앉아있는 내게 안기며 몸을 동그랗게 만다.
극한의 컨셉플레이인가…. 역시 전문가가 하니까 심상치 않구나. 솔직히 방금 내 목덜미 핥을 때는 장난이 아니긴 했다.
아랫도리에 힘이 바짝 들어갈 정도였다고나 할까?
"후후후. 미안해요. 너무 좋아서 오바 한번 해봤어요."
"어…. 이런 오바는 언제나 환영이야. 기왕이면 침대에서…."
내 말을 들은 미나가 살며시 입술을 내 귓가에 가져다 댄다.
"지금?"
어우. 방금 소름 돋았어. 팔뚝에 솜털들이 잔뜩 일어서는 기분이다.
미나가 이렇게 요망한 기운을 내뿜다니. 이거 정말 참기 힘들 정도네.
근데 지금 미나는 포션을 거의 35개나 먹었다. 뭔가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겠지. 지금은 그냥 이런 기분만 느끼기로 하자.
이런 것만으로도 충분히 좋잖아. 꼭 섹스를 해야 좋은 건 아니니까.
"그래도 생각보다 정신이 멀쩡한가 보다?"
"그러게요…. 고양이를 보고 해서 그런가?"
"암튼, 고생했어. 이제는 이렇게 숙련하기 힘든 스킬은 당분간 없을 테니까."
"헤에…. 그러게요. 처음 스킬이 이래서 지금까지 정말 힘들었었는데."
"그래도 덕분에 모두가 건강해졌잖아."
"그렇게 말해주면 고맙고요. 근데…. 이제 뭐 배우죠? 당연히 투명화죠?"
"응. 투명화는 무조건 우선이야."
"네에. 그럼…. 바로 배울게요?"
"응."
미나 역시 허공에다가 뭔가 꼼지락거리더니 이내 작게 중얼거린다.
"투명."
그리고 사라진 미나의 몸.
그런 미나를 안고 있어서 신기함에 이래저래 움직이는 게 느껴진다. 곧바로 '해제'라고 말하며 모습을 드러내는 미나.
"진짜 신기하네요."
"이젠 집에서 편안하게 숙련하도록 해."
"알겠어요. 그럼…. 들어가죠."
"응."
"저 꽉 잡아주셔야 해요. 몸에 힘이 하나도 없어요."
"당연하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됩니다."
미나를 안아 들고 벙커로 도착하자 다들 생각보다 빨리 왔다며 의아해한다.
그런 그녀들에게 미나가 투명화로 대답해주었고, 승희와 세아가 오오하며 손뼉을 친다.
그리고 그런 미나를 보며 조금 더 스킬 숙련에 박차를 가하는 안나.
"안나? 안나는 몇 퍼센트야?"
"어?"
"어. 몇 퍼센트냐고. 숙련. 음…."
"아! 쑥련! 나 팔칠."
"아. 87?"
"맞아. 팔씹칠."
저 시옷 발음은 어떻게 안 되는 건가. 어쨌든 87퍼센트라. 650번이네. 오늘은 힘들겠구나.
"화이팅! 내일은 안나도 탐지 마스터 할 수 있겠다."
"탐지? 마스터? 내일? 맞아. 내일."
그러더니 다시 스킬 숙련에 집중하는 안나.
거기에 신기한 듯 비행을 써보는 승희와 투명을 써보는 미나. 묵묵히 괴력을 숙련하는 세아.
다들 최고속도로 자신들의 스킬을 올리고 있는 모습들.
안나만 투명을 배우면 다 같이 나가는 것도 가능할 거야. 적어도 모두 투명화는 있어야지. 그래야 마음이 놓이지.
그러려면 나도 빨리 파티 스킬을 얻어야겠네. 그리고 게이트쪽도.
내가 놀 틈이 없다. 나도 빨리 스킬 숙련해야지.
그런 그녀들 사이에서 나도 수납 스킬 숙련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수납이 열릴 때마다 세아가 부러운지 몇 번을 바라봤지만, 이내 다시 자신의 숙련으로 돌아가는 모습.
그래. 그런 집중력 좋아. 나도 본받아야겠어.
그런 세아를 보면서 한번 씨익 웃어주고 나 역시 수납 스킬 숙련에 몰두했다.
물론…. 그러느라 세아가 나를 보며 왜 웃었는지 어이없게 쳐다본 건 전혀 몰랐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