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88화 (28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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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혹하지만 일상이 된 것들

나는 남자이기에 강간당한다는 느낌을 모른다.

그리고 오히려 나는 하는 쪽이었다. 그런 내가 민희를 윤간한 저놈들을 파렴치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연히 있다.

저런 병신들과 나는 다르니까. 나는 이제 이런 거로 죄책감을 느끼거나 자기 비하를 하지 않는다.

저들과 내가 다른 점은 명확하다. 나는 힘이 있고 저들은 없다는 점.

힘도 없는 것들이 주제넘은 짓을 하니 보복당하는 거다.

나처럼 힘이 있다면, 그래서 보복할 거리를 만들지 않고 아예 싹을 끊어 놓은 다면 저런 꼴은 안 당하겠지.

민희는 고영준이라는 의사에게 남자친구를 잃고 2년 정도를 노리개로 살았다.

이번에 당한 강간이 처음은 아니라는 소리.

하지만 처음 당한 강간이 아니라고 충격이 없을까? 그렇지는 않을 거다. 그런 미친 소리를 하는 놈은 뚝배기를 깨버려야지.

가지런히 이쁘게 제압되어있는 녀석들을 보며 민희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비록 더러운 꼴을 당했지만, 결국 최후의 승자는 민희다. 저들은 뒷마무리를 확실하게 하지 않았다.

모든 일을 할 때는 뒷정리까지 꼼꼼하게 해야지. 제대로 안 하니까 이런 꼴이 나는 거잖아.

내 팔짱을 끼고 입구에 쓰러져 있는 남자 둘을 바라보는 민희.

"민희."

"네."

"지금 코인 얼마나 있지?"

"74만 정도요."

"그 정도면 널널하긴 한데…. 뭐 하나만 물어볼까?"

"네?"

"저 셋. 믿을 만한가?"

나와 민희의 뒤를 따라오고 있는 여자 둘과 남자 하나.

컨테이너에 함께 갇혀있던 이들.

여자 둘은 아마 민희와 같이 윤간당했을 거고…. 남자는 그저 고문만 당한 거 같다. 뭐, 그것도 매우 괴로웠겠지만.

"이들은 끝까지 내 편을 들어준 이들이에요. 개인적으로 고맙게 여기고 있어요."

"너희들. 내 질문에 대답해."

자신들을 구해준 데다가 핍박하던 놈들까지 전부 제압해버린 걸 알아서 그런지 셋은 나에게 제법 공손한 모습을 보이는 셋.

쓰러져서 테이프에 감긴 남자들을 발로 툭툭 차거나 마체테로 쿡쿡 찌르면서 세 명에게 몇 가지들을 간단하게 물어봤다.

"각자 이름이랑 나이, 스킬부터 말해봐."

"홍경아. 27세입니다. 마비랑 비행이에요."

"최정민. 28살입니다. 감전이랑 반사를 가지고 있어요."

"정용훈입니다. 26살이고 바람 칼날이랑 투명화 있습니다."

컴퍼니 소속이었어서 그런지 다들 스킬 구성은 괜찮은 편이다.

실전 경험도 꽤 있고, 무엇보다 실패의 경험을 겪었다.

그 점이 가장 맘에 든다. 실패의 경험은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잖아.

적어도 한번 저런 식으로 뜨겁게 데였으면 다시는 방심하거나 실수하진 않겠지.

게다가 민희는 보좌할 사람이 필요하다.

어지간한 놈들이 와도 바로바로 요격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갖춰야지.

그리고 그게 아직 혼자 힘으로 부족하다면, 크게 도움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일단 옆에 누군가 있는 건 나쁘지 않을 거다.

"홍경아. 너부터 대답해봐. 넌 왜 민희의 편을 들었지?"

"조 상무가 하는 짓은 옳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그게 그렇게 몸을 버릴 정도로 못 참을 일이었나?"

"이 정도…. 까지 할 줄 몰랐습니다. 이 정도로 쓰레기 놈이었는지 몰랐던 제 실수입니다."

나쁘지 않다. 자기의 실수를 바로바로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은 좋은거지.

게다가 자신의 소신도 있고. 물론 힘이 없을 때는 소신이란 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지만.

"최정민. 너는?"

"민희 언니는 예전부터 몇 번 봤던데다가 홍 대리님 말대로 조 상무는 정상이 아니었어요. 저희는 소 부장님에게 받은 지시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캐슬에 있는 사람들은 노예가 아니에요."

소 부장. 그 소 부장이라는 사람은 내가 죽이지 않았다. 정종찬 그 새끼가 죽였지. 그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들은 소 부장에 대해 약간 존경 가까운 감정을 보이고 있다.

그러니 내가 소 부장을 죽였었다면, 아무리 구해줬다고 한들 이들이 내게 이런 식으로 고분고분 굴지는 않았을 거다.

어차피 그거야 나와 민희만 입 다물고 있으면 아무도 모르긴 하지만.

어쨌든 이들은 나름 정의로운 구석이 있다.

그게 위선인지 진심인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위선이라고 해도 실제로 그렇게 행한다면 결국 그들의 성향이 되는 거잖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위선이라는 단어는 웃긴 단어라고. 위선도 선이다.

결과만 보면 그렇다. 그리고 세상 모든 일은 보통 결과로 모든걸 말한다.

"정용훈? 넌 왜 이들과 민희를 도왔지? 조 상무 편에 서서 함께 이들을 강간하는 게 좀 더 너에겐 쾌적한 삶이 되지 않았을까?"

내가 가장 궁금한 건 이 남자다.

왜 이 여자들 편을 들어서 고생을 자처했을까?

내 말대로 조 상무 편에 섰으면 호의호식하면서 원할 때 여자와 섹스도 할 수 있고 잘 살았을 텐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좋아 보인다고 해도…. 그게 짐승의 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지 않습니까. 사람의 탈을 쓰고 그런 짓은 할 수 없습니다."

하…. 그래. 애새끼였네. 아니면 정의감이 넘치는 히어로님이시거나.

나이도 나랑 같은데…. 이렇게 다르다.

짐승의 길이라니? 사람의 탈이라니? 맙소사. 씨발. 그런 소리를 아직 하는 놈이 남아있다니.

근데…. 기특하긴 하다.

적어도 나는 지키지 못했던 사람의 구실을…. 아직 유지하고 있다는 거잖아?

좋게 말하면 강직한 거고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 한 거고….

그런데 그런 강직함도 본인의 능력이 있어야 유지할 수 있는 거다.

능력이 없는 놈들은 쉽게 죽으니까. 적어도 나는 그런 놈들을 수도 없이 죽여왔다.

"좋아. 너희 셋의 의견은 잘 알았어. 민희?"

"네."

"이 세 명을 부하로 삼아. 저번에 말했듯 네가 캐슬의 주인이 돼. 조 뭐시긴지 나발인지는 지금 가서 죽이면 되니까 이 자리는 네 자리야. 알겠지?"

"네."

"너희 셋. 너희에게 다시는 이런 꼴 안 당하게 힘을 기를 기회를 줄게. 그러니 민희의 밑에서 함께 여기를 지켜. 그렇게 하고 싶으면 지금 바로 대답해. 이런 것들은 입으로 확실하게 이야기 해야 해. 은근슬쩍 흐지부지 넘어가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그런 건 안 돼."

"네. 하겠습니다."

"저도 하겠습니다."

"질문이 있어요."

정용훈이 나를 보고 말했고 나는 그를 향해 해보라는 식으로 바라봤다.

"당신은…. 뭡니까?"

"나?"

"네. 당신이 정 과장님 옆에 있으면 저희고 뭐고 필요 없는 거 아닙니까?"

"좋은 질문이네. 내가 늘 민희 곁에 있을 수 없으니 너희들에게 기회를 주는 거겠지?"

"어째서입니까?"

"어째서냐니. 그야 세상에 죽일 놈들이 너무 많아서 그렇지."

"네?"

"아냐. 그것까진 네가 알 필요 없어. 어쨌든 할지 말지만 정해."

"음…. 하겠습니다."

"좋아. 그럼 셋 다 결정 된 거야. 너희는 이제부터 캐슬의 기사다. 으…. 씨발. 이 기사라는 거는 그냥 비유야. 너희들 나중에라도 서로 기사니 어쩌니 그런 식으로 부르진 마. 어쨌든 너희는 민희와 함께 여기 있는 사람들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지키고 영원히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면 되는 거야. 알겠지?"

내 표현이 그리 아름답진 않기에 다들 약간 인상은 썼지만,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기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세 명 중 두번째 스킬 마스터 못 한 사람?"

아무도 대답이 없다. 음…. 나름 충실하네?

"그럼 셋 다 코인이 없어서 세 번째 스킬을 못 찍은 거야?"

"네."

"네."

"그렇습니다."

"잘됐네. 그럼…. 민희?"

"네?"

"너는 여기 놈들 중에 꼭 죽여야 하는 사람이 있어?"

"있죠. 조 상무 그 놈은 내 손으로 죽일 거예요."

"좋아. 그럼…. 남은 놈들을 얘들이 다 죽여도 되는 거지?"

"네."

"그럼 죽이면서 올라가자. 먼저 너. 홍…."

"홍경아요."

"그래. 미안. 내가 사람 이름은 잘 못 외워."

"괜찮습니다."

"너부터 하자. 세 명이 돌아가면서 죽이고 올라간다. 한 명 죽일 때마다 코인을 얼마 얻었는지 말하면 돼. 적당히 비율을 맞추면서 올라갈 거고 그러면서 너희는 너희 나름대로 복수도 챙겨. 어렵겠지만, 오늘 이후로는 다시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마무리했으면 좋겠어."

세 명이 모두 고개를 끄덕였고, 우리는 그렇게 녀석들을 모두 찍어 죽이며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홍경아와 최정민, 두 여자의 원한은 생각보다 깊었고 복수는 잔인했다.

그래. 윤간이란 그렇다. 육체와 정신을 모두 상하게 하는 짓.

이 세상이 임신이 안 되는 곳이라 그나마 다행인 거지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은 아니다.

정신에 아로새겨진 상처는 어떤 짓을 해도 복구되지 않는다.

아…. 자꾸 내가 이런 말 하니까 존나 좀 그렇네.

그만 아는 척해야지. 내가 나 자신이 역겨우니까.

그렇게 녀석들을 하나하나 죽이고 올라가는데, 이놈들이 생각보다 코인이 많았다.

세 명 다 60만 코인 이상씩 얻고 나서도 아직 안죽인 이가 4명이나 남은 상황.

이걸 어쩌지? 내가 데리고 가서 스킬 마스터 직전인 승희에게 딱 코인 먹여주면 좋은 상황이긴 한데…. 조금 쉽지 않다.

일단 벙커까지 데려가기도 쉽지 않고, 민희에게 그런 것을 별로 보이고 싶진 않다.

민희와 있을 때는 민희에게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이니까.

"아. 그래. 용훈이 너 가서 그…. 서 뭐시긴데. 아. 그래 서예준. 그런 애가 있을 거야. 걔 데리고 와봐."

"서예준이요. 이름 말고 다른 정보는 없습니까?"

"어…. 아직 어린애야. 밑에 내려가서 아무나 잡고 물어보면 알려줄 거야."

그렇게 말하니 바로 내려가는 용훈.

"그 애는…. 왜요?"

민희가 나를 보고 물었고, 나는 생각하고 있는 걸 말했다.

"스킬도 질병 해제고 애가 정의감도 있고, 기회를 줘보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세 명은 너무 적잖아?"

"근데…. 어리잖아요."

"미래를 생각해야지. 그리고 이 세상에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어."

예준이를 생각하고 말한 거지만, 민희에게도 적용되는 말이다.

은근히 자기가 나이 많은 것에 대해 묘하게 신경 쓰는 민희다. 하긴, 여자니까 그럴 수는 있겠지만.

"데려왔습니다."

"어…. 저는 왜…."

"예준아."

"네??"

"너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불렀어. 예전에 성채 놈이나 조 상무, 이런 놈들을 겪으면서 느낀 게 있을 거야. 너는 그런 놈들이 제멋대로 굴 때 힘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 했지. 그거에 대해 억울하거나 분한 적이 있니?"

얼굴을 굳히며 고개를 끄덕이는 예준.

"그럼, 또 그런 상황이 온다면 너는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더라도 니 손으로 막고 싶은 생각이 있어?"

"솔직히 말씀드리면…. 네."

"사람을 죽이기는 쉽지 않아. 괜찮겠어?"

"사람은…. 이미 죽여본 적 있어요."

"그래? 언제?"

"캐슬 들어오기 전에요…."

"그래? 그럼, 결국 네게 필요한 건 코인뿐이구나. 각오는 이미 있는 거네?"

"네."

"좋아. 그럼 이 녀석들 죽여."

나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를 보고 말했다.

"네!?"

"이놈들은 글쎄…. 간단하게 말하면 죽어도 싼 녀석들이야. 여기 이 누나들을 강간하고 이 형을 고문했지."

"성철씨!"

민희가 애한테 무슨 소리를 하냐는 식으로 나의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무시했다.

"뭐, 이건 죄책감을 덜어내는 핑계일 뿐이지. 결국, 이놈들도 너도 똑같아. 그냥 사람을 죽이면 코인을 얻는 거야. 힘을 얻기 위해선 사람을 죽여야 하는 거고. 나는 너에게 그저 힘을 얻을 기회를 주는 거야. 그 기회를 잡을지 말지 정하는 것은 네 자유."

"후우…. 어떻게 하면 되죠?"

"자."

마체테를 내밀었고, 예준이는 그걸 받아들었다.

칼을 잡아 든 모습이 어설프지만, 표정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사람을 죽이는 것에 대해 갈등은 없어 보이는 모습.

"원하는 대로 죽여. 피가 튀어도 어차피 죽으면 다 사라지니…. 아. 이런 건 이미 알고 있지?"

아직 성인도 되지 않은 아이에게 살인을 종용하는 나.

그리고 그걸 지켜보는 어른들.

예준이는 그런 우리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테이프에 묶여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마체테를 내리쳤다. 알려주지 않았는데도 제법 괜찮은 궤적으로 목을 찍는 녀석.

순식간에 망설임 없이 네 명을 죽인 예준이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역시…. 애들은 무서워. 변해가는 세상에 적응하는 속도가 성인들과 비교할 수 없다.

공손하게 나에게 마체테를 돌려주는 예준.

"얼마나 들어왔지? 코인?"

"지금…. 49만 정도 나왔습니다."

"음. 어중간 한 코인이네. 뭐, 기회가 또 오겠지. 일단 그 정도면 됐어. 일단 너는 질병 해제부터 마스터 해. 자세한 건 민희에게 배워. 민희? 너는 내가 알려준 것들 모두에게 공유하고 얘가 질병 해제 마스터 할 수 있게 도와줘. 기왕이면 남자들에게 많이 쓰라고 하고. 알지?"

"그걸…. 내가 설명하라고요?"

"왜. 부끄러워?"

"하아. 진짜 어떨 때는 섬세하더니 어떨 때는 투박하기 그지없다니까."

"그런 것 정도는 알아서 해. 자. 이제 조 상무인지 그 새끼 하나만 남았지? 올라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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