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83화 (28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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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

벙커를 나와 무작정 하늘로 솟구쳤다.

차가운 바람이 정신을 조금 차리게 해주기에 하이바를 쓰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있어 본다.

정세희. 저 여자를 데리고 있어야 할 이유가 대체 뭘까?

만약 매혹이 필요하다면 채원이에게 부탁해도 좋을 거다.

물론 내가 하는 일들과 내 비밀들을 알게 되겠지만, 그 정도는 뭐 상관없잖아.

어느 정도 나에게 호감도 느끼고 있는 것 같고, 아까 그녀에게 느꼈던 그 감정들은 나를 상당히 온화하게 만들어줬다.

그런 그녀라면 나를 꽤 이해해 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정세희 저년은 이제 필요 없는 게 아닐까?

분명 세희를 괴롭히러 왔지만, 오히려 아프게 된 것은 나다.

저 여자는 가시덩굴이 잔뜩 있는 쓰레기장 같다. 오물을 버리러 왔다가 상처만 생겨서 돌아가네.

어떻게 해야 저 여자를 괴롭힐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이 저열한 복수를 깔끔하게 마무리 지을 수 있을까.

모르겠다. 모르겠어. 더럽게 된통 걸렸어. 빌어먹을.

별거 아닌 상처였을 수도 있었는데…. 그걸 방치하고 곪아 썩어들어갈 때까지 놔둔 것은 나다.

이제 와서 상처 낸 사람을 나무라봐야 괴사해버린 상처는 다시 낫지 않는다.

스킬로 만들어진 비굴한 모습은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만들어진 모습, 진심이 담겨있지 않은 연극.

어떻게 하면 세희 년이 사과하게 할 수 있을까.

아니…. 그년이 나에게 뭘 사과해야 하는지는 알까?

그만하자. 계속 생각했다간 내 속만 타들어 갈 것 같다.

잘 구겨 넣어서 마음속 깊은 곳에 처박아 놓자. 누가 자극하지만 않는다면 자기 맘대로 튀어나와 나를 괴롭히거나 하진 않겠지.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그제야 추위가 느껴진다.

한겨울의 상공은 제법 춥다. 감기 같은 게 걸려도 큰 문제가 없으니 이러고 있는 거지…. 할 짓은 못돼.

침낭을 올려 입고 하이바를 쓴 뒤 자양동 쪽으로 날아가기 시작했다.

으으. 언제까지 이렇게 침낭을 둘러쓰고 살아야 하나.

날파리년이 썼던 슈트 같은 건 어디서 구해야 하냐고. 근데…. 그거 입으면 또 실내에선 더운 거 아냐?

번거롭기는 매한가지일 거 같은데.

아오. 씨발. 드럽게 귀찮네.

결정했어. 올해 9월, 아니면 10월. 그때쯤부터는 밖에 안 나올테다.

아니 순간이동이든 게이트든 배워서 따듯한 남국으로 떠나버릴 테다.

하와이든 괌이든 몰디브든 상관없어. 가서 내 여자들이랑 홀딱 벗고 풍경 좋은 해변에서 쉴 거야.

음…. 그거 나쁘지 않네.

생각해보니 그렇다. 그런 섬들, 지구상에 무수하게 많은 기후 좋고 인적 드문 섬들.

그런데 짱박혀서 자급자족만 된다면, 그 누구도 찾기 힘들 텐데?

이야….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왜 국내에서 오지로 들어가 살 생각만 했지?

그럴듯한 리조트가 있는 섬 같은 곳. 그런 데서 살면 되잖아?

크. 역시 사람은 월드와이드 해야 해. 생각을 크게 가져야지. 포부도 꿈도 크게 크게.

좋아. 괜찮은 생각이야. 일단…. 그건 천천히 해보도록 하자. 어차피 지금은 그런 곳으로 갈 수 있는 스킬도 없으니까.

근데 진짜 처음 한 번 가는 게 고통이겠네.

막 몇천 킬로 되는 거리를 비행으로 가야 해? 그건 좀…. 미친 짓 같은데.

경비행기라도 연습해볼까? 아니면 전투기? 전투기도 되지 않을까? 아…. 군사 무기라 없나?

경비행기 정도는 마음껏 타도 될 텐데.

혹시라도 실수해서 추락하면 어차피 비행으로 탈출하면 되잖아. 비행기야 꼬라박으면 아무 데서나 하나 또 가져오면 되고.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어느새 자양동에 도착했다.

아직도 꺼지지 않은 불. 씨발. 비 존나 안 오네.

시베리아 기단 개새끼.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음…. 수납으로 불 끄는 걸 한번 해볼까?

안에 음식이 있긴 한데…. 잠시 바깥에 내놓는다고 문제가 되진 않을 거다.

밖 온도는 냉장고랑 비슷한 온도니까. 잠깐 내놓는다고 문제는 없겠지.

물은 마침 눈앞에 엄청나게 많이 있다.

근데…. 저 한강 똥물을 수납에 넣어도 괜찮나?

수납 안이 막 씹창나거나 하지는 않겠지?

이거 뭐 확인할 길이 없네. 일단 한번 해보긴 하자. 일단 한강으로 가보자.

한강 쪽으로 다가가니 강변에 웬 보트들이 잔뜩 있다.

여긴 뭐지? 뭐 하는 데야? 한강에 이렇게 보트가 많아?

신기하네. 근데 뭐, 나랑은 상관없지.

강가의 도로에 수납을 열어 안에 들어있는 것들을 전부 꺼내놨다.

그런 다음 한강 위로 날아가 수납 입구를 물 위에 크게 만든 다음 아래로 쓱 내렸다.

물이 들어가는 상상을 하자 수납 안으로 콸콸 들어가는 물들.

얼마 지나지 않아 물이 전부 찼고, 수납을 닫았다.

그럼…. 이 안에는 지금 물이 가득하다는 거잖아?

그대로 하늘을 날아 아직 불이 붙어있는 건물 쪽으로 가서 수납 입구를 좁고 길게 만들었다.

그리고 물이 쏟아지는 상상.

열린 수납에서 물이 폭포처럼 쏟아지며 불을 끄기 시작했다.

오…. 된다. 되네? 이게 된다고?

이거 참…. 별게 다 가능하네. 씨발. 수납만큼 좋은 스킬이 있긴 있는 거야?

한 변이 2미터면 결국 8세제곱미터고, 수납의 물 저장량은 8,000L. 즉, 8톤이 된다.

씨발. 소방차도 이것보단 적겠다. 수납 짱짱맨이다! 씨발!

근데 문제는…. 수압이 약하다.

그리고 오래 걸린다. 결국은 나 혼자고 아무리 8톤씩 물을 퍼서 담아도 이 넓은 공간을 나 혼자 불을 끌 수는 없다.

에휴…. 지랄 같네. 결국은 비가 올 때까지 기다려야겠어.

아니면 더 탈 게 없을 때까지 기다리던가.

소규모 화재 같은 경우에는 주변에서 물만 구할 수 있다면 이런 식으로 화재진압은 가능할 것 같다.

마스터가 되면 4미터잖아. 물 64톤이라고.

그냥 한자리에 붓기만 해도 물 맞고 뒤지는 놈이 생길 수도 있을 거 같네.

어쨌든, 그렇게 수납 안에 있는 물을 모두 비웠다.

내가 불을 끈 곳은 꼴랑 건물 두어 개 정도.

역시 관두는 게 맞는 거 같다. 이 짓을 계속하는 건 미친 짓이야.

다시 식량을 뒀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제 담아야 하는데…. 수납 안에서 물비린내 나는 건 아니겠지?

뭐로 테스트해보지? 아. 종이. 종이 좋네.

배낭에서 필요 없는 종이를 하나 꺼내서 수납 안에 넣었다가 빼봤다.

역시, 젖거나 하진 않는다. 하긴. 안에서 물건들이 서로에게 간섭이 됐다면 수납 안쪽은 혼돈의 카오스가 됐겠지.

비빔밥 만들어 먹을 때나 유용한 스킬이 됐을 거야.

수납을 열어 모든 식량을 전부 다 담았다.

이제…. 물류센터로 가자. 혹시 모르니까 거기에 누가 있나 보기만 하고 집으로 가자.

빠르게 날아가 물류센터 상공까지 왔다.

조금 더 넓어진 탐지. 스킬 반경 증가3이랑 스킬 지속 시간3을 찍어서 60퍼센트씩 증가했다.

탐지 같은 경우는 지금 160미터나 된다. 미쳤지. 이 정도면.

이 패시브가 몇 가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다음 4가 있다면 반경이 200미터가 된다.

그리고 5는 250미터, 6은 310미터, 7은 380미터...

부디 계속 있었으면 좋겠다.

농담 아니고 이대로 계속 늘어난다면 가만히 앉아서 막 1킬로미터 밖에 누가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될 거 같은데.

사실 이 패시브가 스킬들의 핵심 아닐까? 물론 코인을 미친 듯이 쓰긴 하지만…. 충분히 코인값은 하잖아?

패시브 값 충당하려면 개같이 벌긴 해야겠네. 물론 아직 460만 정도 남긴 했지만.

물류센터를 크게 한 바퀴 돌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아래로 내려가 MRE가 있는 냉동창고로 향한다.

그렇게 먹어치웠는데도 아직 엄청나게 많은 상자.

이 안에 정말 약이 있을까? 있다면 여기 밖에 없을 텐데.

만약 노리는 놈들이 온다고 해도 이걸 다 확인하려면 존나 힘들긴 할 거 같다.

수납으로 옮긴다고 해도 한참 걸리겠지? 차 같은 거로 옮긴다면 더더욱 오래 걸릴 거고.

그 뭐시기냐 감시 트랩이나 감지 트랩 이런 것들만 있었어도 상당히 편했겠는데…. 그러려면 그것도 쩌리 트랩을 하나 올려야 하잖아.

정말 올릴 스킬이 너무 많다. 에휴.

아니면 아예 내가 먼저 약을 찾은 다음 거기에다가 추적 스킬 같은 걸 써놓으면 되는데.

스킬들이 다들 배우기가 힘들어서 그렇지 생각해보면 어디든 쓸만한 곳은 하나씩 있다.

그치. 분명히 있긴 해. 뭐든지 쓰기 나름인 거지.

혹시 알아? 어딘가에는 소주 생성이나 캔맥주 생성이 존나게 좋은 세상인 곳이 있을지도.

결국, 스킬은 쓰는 사람이 중요한 거다. 똑같은 스킬이라도 누가 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매혹이 그러하듯이.

그렇게 물류센터도 볼일이 끝났다.

이제 집에 가기만 하면 되는데…. 연수원 걱정이 된다.

이 사람들은 잘 하고 있으려나?

한번 안 가봐도 되나?

음…. 내일 민희한테 다녀오면 또 언제 한가해질지 모르는데….

지금 가? 말아?

에이. 가지 말자. 그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스스로 할 줄 알아야 해.

내가 책임진다고 했지만 그런 뒷수발 같은 것들을 하나하나 할 필요는 없지.

닭이랑 돼지가 없어진 거 보면 알아서 잘 하는 거 같으니 알아서 하게 두자.

과잉보호까지 할 필요는 없잖아.

그대로 내 집을 향해 날아간다.

속도가 더 빠르면 좋겠는데. 머리도 금발로 바뀌고. 푸슝하고 날아가면 좋지.

그러면서 소원을 이뤄주는 구슬들을 찾아 모험하는 거야.

에휴. 이러고 있다.

사실 50킬로는 솔직히 애매한 속도다. 빠른 것도 아니고 느린 것도 아니다.

도로에서 50킬로로 달리면 뒤에서 클락션으로 삼삼칠 박수를 칠 텐데.

패시브로 스킬 효과 증가 같은 건 왜 없지? 적용되는 스킬이 별로 없어서 그런가?

아니면 가속화 같은 건 너무 씹사기가 돼버리니까 그런가?

분명 있지 싶은데…. 모르겠다. 나오면 좋고, 나오지 않으면 말고.

으. 드디어 집이 보인다.

따듯한 내 집. 내 여자들이 있는 내 집.

가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느긋하게 쉬자.

야근 없이 퇴근하는 회사원 같네. 아까 생각했었던 거지 같은 기분들이 말끔히 사라지는 느낌.

그래. 좆같은 기억에 매몰돼서 살 필요는 없지. 내게는 축복과도 같은 여자들이 있잖아.

주어진 것에 감사하고 살아야지…. 거지 같은 것만 붙들고 끔찍하다고 소리쳐봐야 아무것도 달라지는 게 없다.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긍정적으로.

"아빠 왔다!"

"뭐래."

내가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나를 지켜보던 세아.

내 농담에 시니컬한 반응을 보인다. 뭐, 그래도 좋아. 싸랑한다. 세아야.

그렇게 술 취한 아빠가 여고생 딸을 끌어안는 것처럼 세아를 안으니 놓으라고 발버둥 치면서도 완전히 빠져나가진 않는다.

크크. 귀여운 자식. 그게 니 매력이지.

"제육은?"

"나보다 제육이 소중한 거야?"

"음…. 지금 이 순간은?"

"으휴. 기다려봐."

"어! 왔어요!"

"일찍 왔네요!"

"썽철! 와써!"

승희와 미나, 안나까지 모두 나를 반기자 벙커 안이 환해지는 느낌이다.

크. 이 맛에 사는 거지. 나는 행복합니다.

누가 보면 조울증 환자인 줄 알겠네.

"자. 또 2주 치 식량!"

수납을 열어서 식량들을 바닥에 이쁘게 깔아놨다.

그리고 역시 다들 식량보다는 수납 스킬에 눈이 더 돌아가는 모습.

아까 배우고 바로 나갔기에 다들 제대로 본적은 없으니까,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 당연하지.

"와! 씨! 뭐야! 이거! 응!? 이거 그거야!? 수납?"

특히 유난히 흥분하는 세아.

물론 수납 스킬이 좋은 건 사실이긴 한데…. 그 정도로 흥분할 정도니?

"맞아."

"와! 나! 나나! 나 곧 있으면 투명 마스터거든? 그럼 나 이거 배울 수 있지?"

"배울 수야 있지. 근데 다른 거 배워야지."

"아…. 왜! 나 이거 부터 배우면 안 돼? 완전! 완전 짱멋져!"

"무슨 로봇 변신 장면 보는 초딩 남자애 같다?"

"시끄럽고! 진짜로. 나 이거부터 배우면 안 돼?"

"안될 건 없는데. 그런 식으로 하면 배울 게 너무 많아져. 지금은 일단 한 사람 구실을 먼저 할 수 있을 준비를 해야지?"

"아씨…. 아…. 밉다."

"괜찮아. 물약을 미친 듯이 먹으면 돼. 그리 어렵지 않다고?"

"크윽…. 젠장."

세아가 유독 반응이 격렬해서 그렇지 승희와 미나, 안나도 많은 관심을 보이긴 하고 있다.

솔직히 이런 스킬은 시작하자마자 기본으로 줬어야 하는 거 아냐? 하여간 세상을 이렇게 만든 새끼들…. 근본이 없어. 근본이.

"근데. 곧 투명 마스터라고?"

"어! 고급 94프로! 얼마 남지 않았지!"

"그러네? 300번이네? 그럼…. 포션 9개네. 자."

내가 포션을 사서 바로 건네주자 똥 씹은 표정이 되는 세아.

괜히 말했다는 생각이 들겠지? 어쩔 수 없어. 이게 너희의 운명인걸.

"밉다. 진짜로."

"걱정 마. 너 말고도 다 먹게 될 거야."

내가 포션을 사서 탁자에 늘어놓기 시작하니 승희와 미나의 표정도 상당히 안 좋아졌다.

아직 말을 제대로 이해 못 하는 데다가 포션 먹는 걸 별로 힘들지 않아 하는 안나만 나를 보며 생글생글 웃는다.

"아직 먹기는 이르니까. 이따가 하자. 이따가. 자기 전에."

그렇게 말하고 나는 옷을 벗고 씻으러 들어갔다.

아. 어차피 이따가 미나랑 다시 나가야 하는데…. 괜히 씻나? 아냐. 이따 또 씻으면 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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