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82화 (28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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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광기

채원이에게 소개받은 세 명의 여자.

신예진, 고예원, 홍서영.

그렇게 이쁜 여자들은 아니다. 이사장 새끼가 매혹 스킬을 가진 여자라 모은 그녀들.

나에게 고맙다고 인사하는 그녀들을 보면서 웃으며 괜찮다고 대답은 했다.

그리고 솔직한 마음으로는 저들을 보면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냥…. 그렇구나. 그 정도.

외모의 수준으로 이렇게 반응이 크게 갈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쓰레기니까.

하지만 이건 변명이 어느 정도는 된다. 나 말고 다른 남자들이라도 보통 이랬을 거다.

에휴. 추하네. 그냥 더는 생각 말아야지.

그렇게 그녀들과 잠시 이야기를 하고, 불만이나 고충을 들어주고 하하 호호 웃다가 자리를 나섰다.

내가 나가는 곳까지 따라오는 채원. 나는 그런 그녀에게 물었다.

"그 여자는 어디 갔지? 원장에게 해방해준 매혹 여자? 미연이였나?"

"아. 미연 씨는 같이 온 여자들 두 명이랑 같이 지내고 있어요."

"그래? 왜? 그 여자는 매혹조 아니야?"

"매혹조긴 해요. 그런데 같이 온 분들이 아직 마음이 아픈 거 같아서요."

"흐음. 그래? 그럼 돌봐주고 있는 거야?"

"네. 그 둘이 미연 씨를 언니처럼 따랐다고 그래서요."

"그렇군. 그럼 뭐…. 다음에 봐야겠네."

"미연 씨가 아쉬워하겠네요. 그녀도 당신을 보면 고맙다는 인사를 더 하고 싶어했는데."

"뭐, 기회는 많으니까. 그럼 갈게. 잘 있어."

"다음에는…. 화장실 말고 제 방에서 봐요."

그러면서 매혹적으로 웃는 채원.

하. 이 여자 이거….나를 유혹하는 건가? 지금 방으로 가야 하나?

하지만 이대로 돌아가는 게 낫겠지. 내가 말한 대로 기회는 많으니까.

그렇게 채원이와 헤어지고 바로 식당으로 향했다.

마침 식당에 있는 정 부장. 나를 보더니 반갑게 말을 건다.

"여기 있으면 올 줄 알았죠. 하하. 가기 전에 식량은 가져 가야 할 테니까요."

"왜요? 저에게 할 말 있으세요?"

"아뇨. 딱히 그런 건 아닌데 인사도 안 하고 그냥 휙 가버릴까 봐요."

나는 그런 그를 보고 피식 웃었다.

하긴 어딘가를 떠날 때 요란하게 인사하고 가는 건 별로 성미에 맞질 않는다.

물류 센터에서도 그렇게 휙휙 가버려서 승규도 이제 포기했잖아.

"근데. 차는 가져왔습니까? 안보이던데요."

"차는 이제 별로 필요가 없어서요. 식량은 어딨죠?"

"아. 여기요. 여기 쌓아 놓은 거랑 여기 냉장고에 있는 것들요. 어디 보자. 여사님!? 여기 이거 주면 돼요?"

정 부장이 외쳤고 식당 여사님이 냉큼 오더니 냉장고랑 냉동고에서 이것저것을 주섬주섬 꺼내서 내어놓는다.

생각보다 상당히 많은 양의 음식.

"왠지…. 지난번보다 더 많아진 거 같아요?"

"그러게요. 여사님이 성철 씨만 너무 좋아하는 거 같은데. 근데 차가 필요 없다고요?"

나는 쌓여있는 식량들 옆에 수납 입구를 열었다.

넓은 직사각형의 입구가 나타나서 식량들을 쓰윽 먹어치우듯이 안에 담았고, 순식간에 모든 식량이 사라졌다.

"뭐…. 뭡니까? 이거 뭐에요?"

"수납요."

"허어…. 수납…. 이게 수납입니까? 인벤토리 같은 거죠? 아공간이에요?"

"잘 아시네. 게임 좀 하셨나 본데요?"

"아…. 당연하죠. 게임이야 지금도 하지만…. 어. 근데 와. 말이 됩니까?"

"좋아 보이죠?"

"당연하죠! 이런 세상이면 당연히 있길 바라는 스킬인데!"

"정말 좋아요. 저 안에 들어가면 시간도 안 흐르거든요."

"캬아…. 저건 언제 배울 수 있습니까? 제 스킬 목록엔 없던데."

"아. 마스터에요? 스킬 뭐였죠? 기절이었나?"

"네. 기절요. 마스터에요. 코인이 없어서 다음 스킬을 못 배우고 있지만."

"수납은 두번째 스킬 마스터 하면 배울 수 있어요."

"크으. 멀었네요. 어차피 코인도 없지만."

"그렇죠. 그놈의 코인이 문제죠. 양도라도 되면 모르겠는데."

굉장히 아쉬워하는 부장. 한참을 그러다가 갑자기 나를 보더니 다시 의아한 얼굴이 된다.

"아니…. 그럼 식량은 그렇게 가져간다 치고, 돌아갈 때는요? 걸어갑니까?"

나는 비행을 써서 몸을 살짝 띄웠다.

내가 공중에 뜨는 걸 보자 눈이 동그랗게 변하는 부장.

이 아저씨. 리액션 장인이네. 스킬 쓰는 보람이 있어.

"비…. 비행? 비행도 있었습니까? 아니…. 없었던 거로 아는데요? 아니 그럼…. 그때 이후로 이거 스킬 두 개나 얻은 겁니까?"

"네."

사실 세 개지만. 페이즈 아웃도 있잖아. 내가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지.

"말도 안 돼. 정말…. 당신은 사기네요."

"그만 놀라시고, 암튼 전 이제 갑니다. 자주 올 테니까 잘 지내고 계세요."

"하아. 그래요. 기왕이면 아예 일로 와서 눌러살아요."

"기대하지 마요."

그리고 나는 투명화를 쓰고 그대로 식당을 나왔다.

하늘로 솟구치며 수납에서 하이바와 침낭을 꺼낸다.

이제는 배낭을 수납 안에 넣어 놓을 수 있으니 침낭을 목까지 바짝 끌어올릴 수 있다.

한층 추위에 강해진 모습. 그렇게 탐지를 킨 다음 펜스의 상공을 한 바퀴 돌고 그대로 본진으로 향했다.

정세희. 세희 년이 보고 싶어졌다.

펜스에서 만난 사람들. 이 세상과 어울리지 않는 착한 사람들.

고작 한나절 있었지만…. 착한 사람 균이 옮은 것 같다.

물론 저 사람들도 파헤쳐보면 그리 깨끗하거나 착한 사람들만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냥 다들 이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착한 사람들일 뿐이다.

그리고…. 채원이 때문이다.

채원이를 보고 나니 정세희 그년이 너무 보고 싶어졌어.

본진에 도착해서 바로 페이즈 아웃을 쓰고 벙커로 들어간 다음 해제와 동시에 투명화와 반사를 썼다.

이건 뭐…. 페이즈 아웃 배운 이후로는 입구로 다니는 적이 없네. 맨날 이런 식이야. 신발 벗는 게 무안할 정도.

벙커 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세희의 신음.

이년은 뭐 하고 있으려나?

방안을 보니 세희는 침대 위에서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있었다.

자물쇠를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가도 아무런 반응이 없다.

머리카락을 우악스럽게 휘어잡아 그대로 당기니 비명을 지르며 일어나는 세희.

"아! 아! 아! 미친놈아! 뭐 하는 짓이야!"

세희 년의 귀에 돌돌 감긴 천 뭉텅이가 보인다.

신음이 듣기 싫어서 귀를 틀어막은 건가? 시트를 잘라서?

짜악!

나는 그런 세희의 뺨을 힘껏 후려쳤다.

내가 머리를 휘어잡고 있어서 고개는 돌아가지 않았다. 나에게 다짜고짜 얻어맞고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노려보는 모습.

"썅놈아! 왜 갑자기 때리고 지랄이야!"

짜악!

그대로 뺨을 다시 한번 때렸다. 인정사정 봐주지 않고 강하게.

그제야 뭔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듯 입을 다문다. 하지만 나는 다시 한번 뺨을 후려쳤다.

짜악!

"씨발! 왜 때리냐고! 개새끼야!"

짜악!

시원하게 네 대나 싸대기를 날렸는데도 별로 후련한 기분이 안 든다.

오히려 불쾌한 기분만 더 강해지는 느낌.

그대로 벽으로 패대기치니 벽에 한번 부딪히고는 나를 매섭게 노려보는 세희.

그런 그녀를 발로 차버렸다.

졸지에 왜 맞는지도 모르고 내 발길질을 당하는 세희는 팔로 머리를 가리고 몇 대 맞다가 갑자기 냅다 소리를 지른다.

"씨발! 그래! 죽여라! 죽여! 아예 죽여버려! 이럴 거면 뭐하러 가둬놔! 그냥 죽여!"

악에 받친 눈빛, 시끄러운 목소리.

그래. 저게 다른 점이다. 물론, 내가 때렸으니 저런 반응이 나오는 거겠지만 저 여자는 애초에 저런 여자다.

본인의 잘못, 죗값. 그런 건 안중에도 없는 여자.

그래…. 그녀는 나와 다를 게 없다.

나는 뭐 내가 한 짓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반성하고 사나? 아니지. 나는 세희보다 뻔뻔하지.

그녀와 나는 본질적으로 다를 게 없다. 뻔뻔하고 뻔뻔하며 뻔뻔하다.

채원이와 세희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됐던 거다.

사실 내가 그녀들을 비교할 자격은 없지.

나 자신이 똥통인데.

악에 받친 채 괴성을 지르는 세희가 너무나 시끄럽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녀의 목을 잡아 졸랐다.

벌거벗은 채로 정조대 하나만 차고 있는 여자.

그런 여자의 목을 양손으로 강하게 누른다. 괴로움에, 생존 본능에 내 팔을 잡고 떼어내 보려고 발버둥 치는 모습.

하지만 이 여자가 내 팔을 아무리 잡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힘을 이길 수는 없다.

세희의 손톱에 팔이 까지면서 피가 줄줄 흐르지만 나는 아랑곳 하지 않고 그녀의 목을 계속 졸랐다.

얼마 있지 않아 눈동자가 위로 까 뒤집히는 모습.

죽을 만큼 조르진 않았는데…. 의외로 쉽게 기절해버렸다.

그대로 널브러진 세희의 목에서 손을 뗐다.

팔에 난 상처가 상당히 거슬린다. 별거 아니지만…. 팔에 난 상처는 상당히 눈에 띄잖아?

바로 회복 포션을 하나 사서 팔에 살살 뿌렸다.

포션이 닿는 곳마다 상처가 바로 아물어가는 모습. 그렇게 반병 정도를 팔에 부어 모든 상처를 없애고 남은 건 그대로 마셔버린다.

추한 모습.

이 여자는 내 감정의 쓰레기통이다.

내 추한 모습을 보여주는 거울이고, 내가 다른 곳에서 착한 사람일 수 있게 해주는 샌드백이다.

배출되지 못한 악의와 더러운 감정을 한데 모아 배설하는 곳.

그런 그녀의 옆에 앉아…. 가슴을 만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미친놈 같아. 방금 목조른 여자의 옆에 앉아서 태연하게 가슴이나 만지고 있다니.

이 여자를 어쩌면 좋을까.

죽이고 싶진 않다. 그렇다고 해서 풀어주거나 하고 싶진 않다.

좋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노트북으로 틀어놓은 세희 년의 신음이 상당히 거슬려서 꺼버렸다.

그리고 무효화를 쓴 다음 매혹을 걸었다.

그렇게 다가가 세희를 흔들어 깨운다. 아까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손길로. 다정하게 부르면서.

정신이 들고 나를 바라보는 세희.

언제나 매혹을 걸면 보이는 해맑은 웃음.

나도 그런 그녀를 향해 해맑게 웃어줬다.

미친놈과 미친년이 서로를 보며 웃고 있는 모습. 정말…. 꼴불견이네.

"자. 세희야. 녹음을 할 거니까 잘 듣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해?"

"네."

"지금부터 니가 지금껏 죄를 지은 걸 기억나는 대로 말한 다음 그 끝에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거야. 알겠어?"

"네."

"순서는 상관없어. 기억나는 대로 말해도 돼. 했던 이야기를 또 해도 되고 아무튼 생각나는 대로 계속 말해. 그리고 항상 그 끝에는 '잘못했습니다.'라고만 말하면 돼. 알았지?"

"네."

"자. 그럼 시작해봐."

나는 스마트 폰의 녹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세희는 자신의 잘못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반에서 저보다 인기 있는 아이를 시기해서 없는 소문을 만들어서 흘렸습니다. 죄송합니다.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의 남자친구를 유혹한 적 있습니다. 잘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사람을 죽였다거나 한 일들을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자잘한 것들을 이야기하는 세희.

그것도 어린 시절부터 거슬러 올라온다.

나는 옆에 앉아서 그런 그녀가 말하는 것들을 찬찬히 들었다.

과연, 내 이야기는 나올까?

고등학교 시절에 잘못했던 이야기들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대학교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나와의 접점이 생긴 기간. 나는 한층 더 숨을 죽이고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 이름이 나올까? 내 이야기가 나올까? 과연?

내가 아는 이름들은 종종 나오기 시작했다. 화학과의 동기들. 이제는 아마도 한 명도 남지 않고 죽었을 이름들.

정종찬의 이름도 나왔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계속해서 잘못을 빌고 있는 정세희지만…. 끝내 내 이름은 나오지 않는다.

그녀가 마녀로 있으면서 죽였던 사람들, 매혹하고 이용하고 죽였던 사람들에 대해 나오고 있지만, 관심이 뚝 떨어졌다.

나는 뭘 기대 한 걸까. 그리고 만약 나온다 한들 그게 무슨 소용인가.

한심하다.

상당히 한심한 생각이 들어서 나는 녹음을 멈췄다.

그리고 그대로 방 바깥으로 나갔다.

아직 방에 있는 식량은 넉넉하니…. 당분간은 올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아직도 잘못을 빌고 있는 세희.

그런 그녀가 있는 방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다.

가구로 입구를 막은 뒤 노트북에 방금 녹음 파일을 옮겼다.

최대출력으로 녹음 파일을 틀어놓고 벙커를 나선다.

나는…. 대체 무슨 뻘짓을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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