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81화 (28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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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면담은 다 했고.

이제 식량만 챙겨서 가면 되겠지? 더 볼 일은 없으니까?

마음 같아선 아까 봤던 양 반장이라는 사람 옆에 가서 건물 짓는 걸 보고 싶은데…. 내일은 민희를 보러 가야 하니 일찍 들어가야 한다.

밖에 나다니는 것도 좋지만, 내 여자들하고도 뒹굴거리고 싶단 말이지. 요즘 너무 밖에만 다니는 거 같단 말이야.

근데 또 지원이, 지아랑 약속을 잡아버렸네? 어휴. 나란 새끼는….

게다가 비어있는 물류 센터도 가야 하잖아? 자양동도 봐야 하고? 게다가 세희 년까지….

씨발. 분신 스킬 나오라고! 기왕이면 팔영분신 같은 거로!

여덟 명이면…. 좋네. 하나는 캐슬에 하나는 연수원에 하나는 펜스에 하나는 밖을 사냥하면 되겠고.

남은 넷은 승희, 미나, 세아, 안나랑 일대일로 붙어서 다니는 거야. 캬. 씨발. 상상만 해도 즐겁네.

아. 정말 나오지 않나?

내놓으라고! 팔영분신! 여덟 개까진 아니더라도! 뭐든!

헛소리는 그만하고 이제 가보자. 아…. 근데 채원이는 한번 보고 가자.

몰랐으면 모르겠는데 알았으면 또 외면할 수는 없지.

그리고 그녀들은 펜스의 비밀 병기 같은 거니까. 문제는 매혹을 쓰기 전에 위험에 빠질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녀들이 나서는 일이 없어야지…. 암.

근데 채원이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겠다.

음…. 뭐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 나에겐 탐지와 페이즈 아웃이 있잖아?

이쪽 본관 건물에는 집행부와 외부조, 그리고 매혹조의 방만 있는거 같으니 슬쩍 돌아보면 되겠지?

일단 탐지를 돌렸다.

으음…. 저 밑에 있는 다섯 명은 외부조일거고, 저쪽에 있는 네 명인가? 으음…. 외부조 말고는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네.

하나씩 가봐야겠다. 페이즈 아웃은 사기니까.

그렇게 페이즈 아웃을 쓰고 방을 돌았다.

책을 읽고 있는 집행부. 게임을 하는 집행부 둘. 섹스 하는 집행부…. 오. 이 아가씨는 몸매 좀 좋네. 힘내라! 집행부!

좀 더 허리를 움직이라고! 그녀를 만족시켜!

와. 페이즈 아웃 좋은 스킬이네. 사생활 따위는 전혀 없는 훌륭한 스킬.

계속 보고 있자니 기분이 묘해진다. 가야지. 다음 방으로 가자. 음…. 조금만 더 볼까?

됐다. 변태 놈아. 아까 정현이랑 해놓고 이 지랄이네.

다음 방으로 가니 자고 있는 집행부 여자. 음…. 이 여자한테 할까? 욕정이 조금 생기는데.

수면으로 재운 다음 쓱싹 한 번만 하면…. 됐다. 괜히 걸리면 귀찮아져.

다음 방. 뭔가를 쓰고 있는 집행부. 아이씨. 여기는 다 집행부야. 귀찮으니까 빠르게 넘어가자.

노트북을 보고 있는 집행부…. 운동하는 집행부…. 화투 치는 집행부. 집행부. 집행부. 어휴.

아래층으로 내려오니 드디어 채원이를 발견했다. 에이씨 진작 내려올걸.

옷을 갈아입고 있는 채원이. 잠시 그 몸매를 감상하며 가만히 있었다.

많이 약해지긴 했는데 뿌옇게 변한 주변이 맘에 안 든다. 이런 보기 좋은 장면을. 쳇.

됐다. 보고 싶으면 직접 보면 되지. 이렇게 훔쳐볼 필요 있나.

그럼 이 옆에 세 명은 다 매혹조겠지? 이름도 아직 모르는데 이름이라도 알아놓고 갈까.

채원이의 방 앞에서 페이즈 아웃을 풀었다.

그리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채원이 방문을 노크했다.

똑똑

"네."

문이 열리고 나를 알아본 채원이의 표정이 살짝 놀라는 얼굴이 된다.

"어머. 여긴 웬일이에요?"

"웬일은. 왔는데 인사는 해야지."

"놀래라. 들어오세요."

자연스럽게 나를 방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채원. 방금 페이즈 아웃 상태에서 봤는데도 그냥 들어오니 색다른 느낌이 든다.

뿌옇게 변한 방이 아닌 생동감이 있는 방, 아까는 보이지 않았던 사소한 것들, 그리고 여자의 방 특유의 냄새.

이쪽으로 옮긴 건 얼마 안 된 거 같은데. 묘하게 달달한 여자의 냄새가 난다.

약간 가슴이 살랑살랑이는 느낌?

승희나 미나, 세아나 안나의 방에서는 이런 느낌은 아닌데…. 거기는 지하 벙커라 그런가?

아니지. 그녀들은 존재 자체가 살랑살랑이지. 후후.

"어쩐일이에요? 방엘 다 오고?"

"기껏 왔는데 얼굴 안 보고 가면 섭섭해할까 봐?"

"헤에. 그런 자상함까지 있었나요? 처음 알았네요. 앉으세요. 여기."

책상 의자를 빼서 내어주는 채원. 그리고 자신은 침대에 살짝 걸터앉는다.

올이 가는 스웨터를 입고 편안한 면바지를 입은 채원.

위로 묶은 포니테일 머리 때문인지 새하얀 목덜미가 그대로 보인다.

크. 저 목덜미. 그리고 솜털. 이게 참 좋아.

볕이 잘 들어오는 방이라 그런지 그녀의 목덜미가 새하얗게 빛나는 듯한 느낌이다.

게다가 방금 페이즈 아웃에서 본 스웨터 안쪽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저 오버핏 스웨터 안쪽의 몸매를 알고 있으니 전체적으로 더 색기 넘치는 느낌?

으음. 내가 확실히 발정이 나긴 했나 보네.

아까 집행부 새끼들 때문이야. 젠장.

"무슨 생각 하세요?"

내가 채원이를 뚫어져라 보고 있으니 그녀는 살짝 부끄러운 듯 나에게 말한다.

"아아. 아니야. 야한 생각 했어."

아. 병신. 그걸 왜 입 밖으로 내냐. 도라희니? 미쳤네! 정말? 정줄 놓고 살지?

"쿡."

다행히 채원이는 농담인 줄 알고 그냥 웃고 넘겼다. 어휴. 씨발 이거 성희롱이었다고!

뭐…. 내가 성희롱 가지고 이러는 것도 웃기긴 하지만.

그래도 펜스의 사람들에겐 멀쩡한 사람인 척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사실 그건 누구에게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람을 픽픽 죽여버리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고.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 내 추한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알릴 수 없잖아?

"진짜 왜 찾아온 거예요? 그냥 불러도 갈 텐데?"

"음…. 그냥 지금은 개별 면담 중이거든."

"면담요?"

"응. 지내면서 불편함은 없나, 개선사항은 없나, 누가 괴롭힌다거나 누구 좀 때려달라던가, 누구의 입 냄새가 고약하다던가."

"쿡쿡."

별거 아닌 농담에도 또 웃는 채원. 이게 웃긴가?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쨌든 웃는 모습은 보기 좋다. 원체 이쁜 아가씨잖아. 뭐가 됐든 웃으면 뽀너스 점수 5점이 붙는다고.

"면담이라. 불만 같은 건 없어요. 솔직히 말하면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되나 싶은 마음인데요."

"글쎄. 펜스의 생산력은 우수해. 너희 매혹 스킬을 가진 네 명이 아무것도 안 하고 있다고 해도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그리고 너희는 많은 시간을 고통받아왔어. 다들 그걸 알기에 너희가 아무것도 안 한다고 뭐라고 하는 일은 없을 거야. 만약 있다면 내가 손봐줄 수 있지."

내 말을 들은 채원이는 살짝 힘없는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침묵이 방안을 채웠다.

방 안에 있는 시계에서 나는 초침 소리만 찰칵찰칵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창으로 들어오는 겨울날의 햇볕과 그로 인해 모습이 들킨 먼지들의 느긋한 도망.

그런 침묵 사이에서 채원이의 힘없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매혹 스킬을 가진 이상…. 더는 자연스럽게 살 수는 없겠죠?"

나를 보는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는 것이 보인다.

이렇게 다르다.

매혹 스킬을 가진 여자. 정세희와 강채원.

하나는 자신의 능력을 활용하여 자기 하고 싶은 것을 다 해보다가 배신당하고 성노예로 팔렸다가 내 노리개가 됐다.

하나는 자신의 스킬 때문에 그대로 노리개로 삼아지고 고통받다가 해방되어 자유를 얻었다.

세희 년은 아직도 자신이 한 짓에 대해서 조금의 죄책감 같은 것은 없다.

채원은 자신의 잘못이 전혀 없음에도 자기가 선택한 스킬 때문에 고통받고, 자유로워진 지금까지도 아파한다.

스킬이 잘못된 게 아닌거야. 사람이 문제지.

"스킬이 네 발목을 잡고 있는 것 같아?"

"하아…. 네. 솔직히 말하면 그래요. 내가 선택한 스킬이지만…. 더없이 후회돼요. 당신도 매혹 스킬을 가져서 알잖아요? 이 스킬이 가진 문제점을?"

"맞아. 너만큼 잘 알고 있지."

"대체…. 당신은 어떻게 그걸 극복한 거죠? 나는 당신을 보면 신기해요. 당신이 매혹 스킬을 가지고 있는 걸 뻔히 아는데 어떻게 여자들은 당신 곁에 마음대로 다가가죠?"

"글쎄. 두 가지가 있지. 아예 비밀로 하거나 아예 당당하게 밝히거나. 물론 말은 이렇게 해도 이도 저도 아닌 경우가 많지만. 게다가 숨기는 건 좋은 방법이 아니긴 해."

채원이에게 말하고 있지만, 아니다. 나 자신에게 말하고 있는 거다.

승희, 미나, 세아, 안나.

그녀들은 내가 매혹 스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른다.

분명 우리는 서로를 믿고 신뢰하는 관계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 기간이 그렇게 길진 않다고 하지만 적어도 나는 그녀들을 믿는다.

하지만…. 매혹 스킬을 숨기고 있는 것은 불발탄을 끌어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야.

안 터질 거라고 믿고 있지만….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다.

그리고…. 만에 하나라도 터지게 된다면…. 그때는 그 후폭풍이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일이잖아.

"나도 당신처럼 당당해질 수 있을까요?"

"어렵겠지. 매혹은 그런 스킬이야. 동성끼리 안 통한다는 것이 정말 다행이긴 하지. 하지만 그만큼 이성에게는 거리감을 느끼게 할 수밖에 없어. 아무리 반사 스킬을 가진 이라고 해도 하루 24시간 내내 반사를 켜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겠지. 자신의 감정에 대해서."

"하아아."

"숨기고 싶어?"

"네?"

"너무나 힘들면 네가 매혹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숨기고 다른 곳에서 살게 해줄 수 있어."

쉽진 않겠지만…. 불가능 한 건 아니다.

적당히 20만 코인쯤 먹게 해주고 투명화 같은 스킬 하나 배우게 한 다음 캐슬로 보내도 되고 아니면 성장 스킬 같은 거 배우게 한 다음 연수원으로 보내도 된다.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오직 필요한 건 그녀의 결정뿐.

"그런 게 가능한가요?"

"물론이지. 내가 안 되는 게 어딨겠니? 나는 너희들을 위해서 외부조와 집행부, 매혹조가 셋이 균형을 이루게 만들어 놨어. 처음에 내가 말했지? 탐지 스킬을 가진 집행부는 투명화를 가진 외부조를 견제할 수 있고, 투명화와 여자로 구성되어있는 외부조는 너희 매혹조를 견제할 수 있지. 그리고 너희 매혹조는 남자가 훨씬 많은 집행부를 견제 할 수 있어. 그걸 노리고 이렇게 구성했지만…. 너희가 힘들다면 개편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아."

내 말에 다시 입을 다무는 채원. 그녀도 이건 알고 있다. 그리고 많은 생각을 했겠지.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몸이 따르는 것은 다른 일이다.

아무리 그럴듯하더라도 못하겠다면 어쩔 수 없는 거지.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들을 방치하고 싶지 않다. 내 담장 안에 들어온 이상 함부로 내치고 싶진 않다.

다른 매혹조 여자들은 몰라도…. 채원이는 그렇다.

"후우. 그럴 순 없죠. 저는 펜스에서 계속 있을 거예요."

조금 단단해진 듯한 그녀의 목소리. 약간의 개운함 같은 것도 느껴진다.

"그냥…. 푸념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어디에도 이런 한탄은 할 수 없잖아요? 같은 매혹조의 여자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는 하지 못하죠. 그녀들도 힘드니까요. 하지만…. 당신에게는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네요. 그래서 그런가? 속이 조금 풀렸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미소짓는 채원.

음…. 아까보다 미소가 더 이뻐졌는걸? 이 정도면 뽀너스 점수가 7점으로 올라가겠네.

"너희가 나쁜 생각을 하거나 해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거야. 사실 어떻게 보면 이 환경은 그리 나쁘지 않을 수 있어. 모두가 너희들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고 스킬도 알고 있잖아? 그러니 힘들어도 너희가 조금만 참으면 다들 너희를 의심하거나 하진 않을 거라고 봐. 일단…. 펜스 여기 사람들은 착하잖아?"

"그렇죠. 이런 사람들이 흔하진 않죠."

"그리고 혹시나 헛소리 삑삑 하는 놈이 있으면 말해. 코인으로 바꿔줄 테니까."

"으…. 정말 그런 사람이 있어도 당신에겐 아무 말 못 하겠네요."

"아냐. 괜찮아. 내가 하면 누구도 뭐라고 못할 거야."

"안돼요. 싫어요. 그럴 수는 없죠. 내가 이겨내는 수밖에 없네요."

"미안해. 힘든 사람한테 참으라는 말 밖에 못 해줘서."

"미안하긴 뭘 미안해요. 나는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데."

그러더니 침대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오는 채원.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 눈부시다.

그렇게 다가온 그녀가 나의 뺨을 감싸더니 가볍게 키스했다.

단지…. 입술과 입술이 맞닿은 것뿐인데 미칠 듯이 뛰는 심장.

짧은 키스가 끝나고 그녀의 입술이 떨어지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대로…. 손을 내밀어 그녀를 잡으면?

더 한 것도 할 수 있겠지. 아까 봤던 그녀의 몸을 안고 탐닉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그러고 싶진 않다. 지금은…. 그게 아닌거 같아.

"면담이라. 좋네요. 이런 좋은 거라면 자주 해줘요. 마음이 개운해졌네."

아까와 달리 웃음에 생기가 돌아와 있다.

하하. 나의 몇 마디 말에 사람이 저렇게 달라져 보이다니.

이건 참 새로운 경험이네. 놀랄 만큼 신비한 느낌이야.

"아참. 아직 매혹조 맴버들 이름도 제대로 모르죠?"

"어? 어어…."

"그럴 줄 알았어요. 가요. 내가 소개해줄게요. 사실 그 친구들도 정신이 없어서 당신에게 제대로 인사도 못 했다고 아쉬워하고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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