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77화 (27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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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담

"엇. 왔습니까?"

"네. 별일 없었죠?"

"물론이죠.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평안했습니다."

"얼굴이 좀 좋아지신 거 같네요."

"물론이죠. 이사장 그놈이 없어지니 식욕이 다 좋아지는걸요. 다 성철 씨 덕분입니다."

"뭐, 좋아졌다니 다행이네요. 식량 받아갈까 하는데."

"아. 식량요. 준비해 놓으라고 전할게요. 여사님 들으면 또 좋아하겠네. 아예 같이 가시죠?"

"으음…. 아뇨. 그러고 싶진 않네요."

"에헤이. 모두에게 얼굴도 비추고 그래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이따가 점심 먹을 땐 다들 볼 거잖아요."

"아. 점심 먹고 갈 거예요? 그럼 굳이 지금 안 가셔도 되겠네."

"바쁘세요?"

"아뇨. 그리 바쁜 건 아니고…. 요즘엔 한가하죠. 그래서 집을 짓고 있어요. 전에 성철 씨가 말했던 그거."

"아. 안 그래도 양 반장님이란 분 만나고 왔어요. 이야기도 좀 하고."

"벌써 만나셨어요? 빠르기도 하시네. 그분이 사람은 좀 걸걸해도 실력은 알아주는 분이라."

나는 컨테이너에 대해서 말했고, 그러면서 캐슬에 대한 것도 말해줬다.

"네에? 캐슬…. 그 박성채 그놈을 죽였다고요?"

"네. 꼴사납게 죽었죠."

"허허…. 당신은 참…. 말도 안 되는 일을 마치 아침에 미역국 먹고 왔다는 식으로 쉽게 이야기하는군요. 캠프에 이어 동산도 박살 내고 거기에 캐슬까지."

뭐, 컴퍼니도 있지만, 그것까지 말하는 건 너무 내 자랑 같아서 굳이 말하진 않았다.

"아무튼…. 그럼 일 보세요. 저도 안에 구경 좀 하고 있겠습니다."

"같이 가시죠? 혼자 심심하잖아요?"

"아뇨. 볼일이 있어서. 할 일도 있고."

"할 일요? 어떤…."

"글쎄요. 면담? 외부조 숙소가 어디죠?"

"아하. 면담.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죠."

역시 느물느물한 아저씨야. 내가 뭘 할지 뻔히 아는구나.

뭐, 외부의 적이 없다면 나는 펜스에서 할 일이 몇 개 없다.

식량 받아가는 것, 여자들 보는 것.

게다가 오늘은 지원이랑 지아, 그리고 정현이를 봐야 하는 날이잖아. 뭐….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쪽입니다. 여기 안쪽으로 가면 그녀들의 방이에요."

그렇게 말하더니 고개를 끄덕하고 씨익 웃더니 제 갈 길을 간다.

하. 웃긴 아저씨야. 그래서 맘에 들지만.

탐지를 돌려보니 안쪽에 네 명의 기척이 느껴진다.

으음? 왜 넷밖에 없지? 아, 한 명은 외부에 나갔나?

근데 여기는 구조가 조금 특이하네. 방 안에 또 방이 있는 건가? 그럼 노크하고 들어가야 하나?

내가 언제부터 노크 같은 걸 하고 들어갔다고….

벌컥 문을 열고 들어가니 송이와 바로 눈이 마주쳤다.

"어!?"

"뭐가 어? 야."

"대장? 언제 왔어요."

"아니. 어쩌다가 다 나를 대장이라고 부르게 된 거야? 너희 때문이지?"

"글쎄요. 저희라기보단 지아 때문이죠."

"어휴. 그 가시나 뭘 얼마나 떠들고 다녔길래."

"근데 어감 괜찮지 않나요? 그보다 더 좋은 호칭이 별로 없는데."

"맨날 자리를 비우는 대장이 어딨어."

"여기 있네요. 눈앞에."

그러면서 나에게 눈웃음을 치는 송이.

역시 이 여자도 사람을 살살 녹일 줄 아는 매력이 있다.

민희와 비슷한 부류. 뭐. 매력이나 능력 전부 민희 쪽이 더 위긴 하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가 절대 부족한 것은 아니다.

민희는 뭐랄까. 조금 고혹적인 느낌이라면 송이는 약간 퇴폐적인 느낌? 아. 모르겠다. 뭐 둘 다 비슷한 거잖아.

"넷밖에 없던데, 누가 나갔나?"

"네. 지금은 지원이가 외부 정찰 나갔어요."

"그렇구나. 뭐, 할만하고?"

"네. 저희야 뭐, 다섯이서 교대하니까요. 여유롭죠."

"투명스킬 있는 사람 하나 더 구해서 삼교대를 돌려야 하는데."

"어차피 탐지가 없어서 안 돼요. 두 명씩 돌리면 탐지 있는 사람들은 이교대로 해야 하는 데요?"

"아. 그런가. 그 집행부에 탐지가 넷밖에 없었지?"

"네."

"탐지라. 찾기 쉽지 않지."

"배우기도 쉽지 않고요."

"그래. 30만 코인이니까."

내가 물어다 줄 수도 있지만…. 굳이 여기의 집행부 녀석들을 위해 그러고 싶진 않다.

이쁜 여자라도 있으면 모를까. 하지만 나는 이제 눈이 높아질 대로 높아져서 어지간한 여자는 눈에 안 찬다고.

그렇게 송이와 대화하고 있는데 갑자기 여자들이 자신들의 방인 듯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어!? 오셨어요?"

"앗…. 오…. 오셨네요."

깍듯한 윤서와 나를 보고 살짝 더듬는 정현이. 녀석…. 왜 벌써 긴장하고 그래?

"오! 대장이다! 대장!"

그리고 나에게 달려와 폴짝 안기는 지아.

하…. 얘는 뭐 이리 거리감이 없어? 게다가 정현이 쟤는 왜 그걸 부러워하는데.

"좀. 떨어져."

"아잉. 왜용. 우리 사이에."

"하아."

"아이참. 부끄러워하기는."

내가 한숨을 푹 쉬자 지아가 슬그머니 떨어지더니 한마디 한다.

역시 이런 타입은 힘들어. 귀여운 여자애가 달라붙는 게 싫거나 한 건 아닌데…. 익숙하지 않다.

언제 이런 대우를 받아봤어야지.

차라리 저렇게 낯가리는 정현이가 훨씬 낫지.

"일단, 좀 앉자."

거실이라기보단 응접실처럼 되어있는 곳.

아마 여기가 여기 외부조 여자들의 공동 공간 같은 곳인가 보다.

소파와 탁자가 있는 곳이라 자연스럽게 둘러앉게 되었고 나는 편하게 앉아 입을 열었다.

"주변에 뭐 딱히 이상 있거나 하진 않지?"

"네. 조용해요. 탐지로 둘러본 거니 정확하죠. 대장이 간 이후로 주변 일대에서 돌아다니는 사람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치?"

송이가 물어보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뭐, 조용하면 좋은거지. 그렇다고 방심하진 말고. 괜히 방심했다가는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잖아?"

"그럼요. 대장 하는 걸 봤는데."

"어지간해선 사람 마주치기 쉽지 않겠지만…. 혹여라도 마주치면 괜히 사정 봐주지 말고 죽여. 펜스엔 더는 사람의 유입이 없어도 돼. 괜히 주저하다가 너희가 죽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아."

비정하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어쩔 수 없다.

괜히 여지를 남기느라 목숨을 잃느니 바로 죽여버리는 게 낫지.

내가 그렇게 단호하게 말하자 여자들의 표정이 조금 굳어진다.

윤서나 송이는 잘 알아들은 것 같지만…. 지아나 정현이는 아직 그 정도로 단단한 여자들이 아니다.

"근데, 윤서나 송이는 적을 만나면 죽일 수 있는 능력이라도 있지만, 지아나 정현이는 어떻게 하고 있지?"

"아. 집행부에 나이프 다루는 걸 잘하는 분이 있어요. 그분에게 배우고 있긴 해요. 이제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나이프?"

"네."

"왜 하필 나이프지? 기왕이면 리치가 긴 무기를 써. 아니면 석궁 같은 걸 구하던가. 나이프는 가까이 붙어야 하잖아."

"주변에 그런 걸 전문적으로 아는 분이 그분밖에 없어서…."

윤서가 변명하듯이 대답한다. 근데 왜 변명을 윤서가 하는 거야?

"여기 그 밖에서 물건 구해오는 사람, 있지 않나?"

"네. 있어요."

"석궁 구해오라고 해. 볼트도 많이. 나이프라니…. 물론 배워두면 좋긴 한데 효과를 보려면 너무 오래 걸려. 위험도도 높고. 투명화를 가지고 있는데 굳이 거리를 좁힐 이유가 없지. 석궁을…. 아니다. 내가 직접 정 부장에게 구해달라고 말할게."

"알겠습니다."

"어차피 레저용 이런 건 구하기 쉬울 거야. 넉넉하게 구하라고 해야겠네. 구해오면 잘 연습하고. 그리고…. 하아."

이들에게 할 말이 있었는데…. 뭐였더라. 기억이 안 나네.

뭐…. 생각나면 말해주지 뭐. 오늘은 점심 이후까지 있을 거니까.

"면담할 거니까, 한 명씩 나랑 이야기 좀 하자. 지원이는 언제 오지?"

"점심때면 올 거예요."

"그래. 그럼 누구랑 교대하지?"

"저요."

윤서가 대답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일단 순서는….

"정현이부터 하자."

내가 정현이의 이름을 부르자 나머지 셋이 약간 묘한 표정으로 정현이를 바라본다.

그리고 얼굴을 붉히는 정현.

하…. 이것들 진짜 비밀 같은 건 없는 거야?

뭐 같이 다닌 지 얼마나 됐다고 이렇게 친해지는데?

"따라와."

내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정현이가 쭈뼛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지아의 짓궂은 표정.

하아. 이거 뭐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어색하게 나를 따르는 정현.

예전엔 이사장실이었고 이제는 내 방이 된 곳.

누가 장난스럽게 문 위에다가 '대장실'이라고 적어놨다.

이건 아마 최지아 고 계집애 짓인 거 같은데? 이런 건 걔 말고 할 사람이 없어.

방에 들어와 어색하게 서 있는 정현.

하. 이걸 뭐 어떻게 말해야 하나.

"정현?"

"엣, 네?"

어휴. 뭘 얼마나 긴장하고 있으면 저러는 거야.

2주. 그때 정현이에게 말하고 2주가 지났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겠지. 설마 아직 마음을 제대로 정하지 못했다면 그건 그거 나름대로 문제가 있는 거다.

우유부단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지.

"자. 매력이 있는 정현 씨."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빙긋 웃으면서 살짝 농담을 해봤다.

근데 아무 효과가 없나 보다. 오히려 더 굳는 느낌인데.

어…. 떨고 있나? 살짝 떨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긴 생각해보면 2주 전의 그때도 정현이 딴에는 상당히 큰 용기를 낸 걸 텐데.

물론 옆에서 지아가 바람 잡았을 확률이 상당히 높긴 하지만…. 그것까진 확실하진 않고.

어떻게 보면 그런 상태에서 2주나 혼자 별의별 생각을 다 하게 했을 테니 걱정이 많아 보이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젠장. 이런 건 나도 익숙하지 않다고.

에이씨. 그냥…. 직구로 던져버리자. 어차피 내가 껄끄러울 건 없잖아.

"아직 그 마음은 그대로야?"

최대한 다정하게, 부담 없도록 부드럽게 말한다.

내 물음에 눈을 감더니 작게 끄덕이는 정현.

"기쁘네. 그런데 한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물어봐도 될까?"

살포시 눈을 뜬 정현. 나를 향해 다시 끄덕인다.

"나인 이유가 있을까?"

내 질문에 음 하고 목을 가다듬는 정현이.

바로 대답하려는 거 보니 이건 생각해 놓은 게 있나 보네.

"그…. 제가…. 아직 경험이 없다고…. 말했잖아요…."

"응. 그랬지."

"그게…. 그…. 어휴. 그러니까. 좀 무서운 게 있었어요."

남자가 무섭다는 건가? 세상이 이렇게 변하기 전에는 열아홉이었을 텐데. 학창시절에도 경험이 없었나?

이 정도 이쁘장한 애라면 주변에서 가만히 두질 않았을 텐데.

"성인이…. 되기 전에는 주변에 남자들은…. 남자처럼 보이진 않았어요. 그냥…. 수컷? 그 정도밖에 안 보였어요. 그리고 기껏 성인이 됐는데…. 세상이 이렇게 되고…. 수컷들이 짐승이 됐어요. 그래서 더 무서웠어요. 그리고 가장 큰 이유가 있는데요…."

"응. 말해봐."

"저는…. 세상이 이렇게 된 이후로…. 제가 마음 준 남자가 죽어버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어요."

음…. 그건 어느 정도 이해한다. 죽음이 가까워진 세상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당연하지.

"그럼 나는 죽을 것 같지 않았어?"

"그것도 있고요…. 짐승이나 수컷 같지 않아서…. 남자로 보였어요."

"내가?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그리 썩 좋은 사람이 아닌데. 그 누구보다도 짐승 같은 놈인걸."

"적어도…. 대장은 절 욕정에 가득한 눈으로 안 봤잖아요."

아아…. 그것도 이해한다.

최근엔 여자에 굶주리지 않았으니까. 여자를 섹스의 대상으로 보는 게 아니고 순수하게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된 시점이긴 하다.

타이밍이 좀 기가 막히긴 했네.

"그렇구나. 좋게 봐줘서 고맙네."

내가 정현이까지 애틋하게 돌봐줄 생각까지는 없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용기 내준 여자한테 모질게 굴고 싶진 않다.

적당한 환상을 가지고 있고, 내가 그걸 채워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만족하게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게다가 그건 나에게도 좋은 일이잖아? 어쨌든 이쁜 여자와 섹스를 하는 일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지.

내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자 흠칫 놀라지만, 정현이는 물러나거나 하진 않았다.

나보다 머리가 하나 정도는 작은 여자.

내가 다가가자 나를 올려보는 모양새가 되었다.

살짝 올려다보는 얼굴. 이쁘네. 게다가 이 순수한 감정이 맘에 든다.

뭐랄까. 나에게 아까울 정도의 순수함?

내가 손을 뻗어 정현이의 뺨에 손을 대자 움찔하면서도 머리를 내 손에 기대어온다.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오면서 본인의 순결을 아직 지킨다는 건 참 엄청나게 힘든 일이었을 텐데.

그걸 나에게 주겠다니…. 소홀하게 대할 수는 없잖아.

적어도 나중에 생각했을 때 후회할만한 기억은 아니게 해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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