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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번째 스킬
이른 아침.
펜스를 가기 위해 밖으로 나섰다.
아침부터 또 어딜 그렇게 나가냐고 세아가 도끼눈을 떴지만, 내가 식량 받아온다는 말을 하자 잘 다녀오라며 키스까지 해줬다.
웃기는 애야. 그러면서 제육 좀 더 받아오라는 소리나 하고.
하긴. 펜스 식당 여사님 솜씨는 좀 훌륭하긴 해.
처음 갈 때는 전동 휠을 타고 갔고 나중에 돌아올 때는 전기차를 타고 왔는데 이번엔 날아서 가게 되네.
다음에 갈 때는 어떻게 갈까? 순간이동? 게이트?
순간이동과 게이트. 확실히 필요한 스킬이긴 하다.
펜스, 연수원, 캐슬. 갈 곳은 많다. 그리고 아무리 비행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동시간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물론 예전에 걸어 다니던 거에 비하면 지금은 날아가고 있으니 배부른 소리긴 한데….
그래도 점점 길바닥에서 버리는 시간이 아까워지는 건 사실이다.
가는 길에 인간들이 있어서 처리하고 다니면 모를까 이제는 보이는 인간도 거의 없으니까.
스킵 할 수 있으면 스킵 하는 게 좋지. 시간은 금이잖아.
그리고 순간이동이나 게이트는 결국 꼭 있어야 하는 스킬이다.
결국은 이 수도권을 벗어나는 날이 오게 될 거다.
수도권을 벗어나 지방까지 훑어야 하는 날이 올 거고, 결국엔 이 나라를 벗어나야 하는 날도 오겠지.
비행이 물론 좋긴 하지만 속도는 시속 50킬로밖에 안 된다. 한번 나갈 때마다 몇 시간씩 날아야 한다면, 그것도 할 짓이 못되겠지.
순간이동이나 게이트의 작동 방식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있어야 할 스킬일거야.
그래도 아직은 비행만큼 좋은게 없다. 봐봐. 벌써 거의 다왔잖아.
눈앞에 보이는 펜스. 하늘에서 보니 역시 상당히 규모가 크다.
으음. 어쨌든 여기도 강화는 해야 하는데. 적어도 지나가는 미친놈한테 메테오 같은 걸 맞을 일은 거의 없어지긴 했지만….
바로 내려가지 않고 하늘에서 조금 구경을 해봤다.
비닐하우스 안쪽에서 꼬물거리는 사람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어디론가 가는 사람들.
다들 열심히 살고 있는 거 같아서 보기 좋다.
예전 성채가 운영하던 캐슬 꼬라지를 보고 다시 펜스를 보니 역시 여기는 그나마 천국이다.
개개인의 만족도는 어떨지 몰라도 일단 여기는 사람 사는 곳 같긴 하잖아.
그렇게 계속 내려다보는데 눈에 띄는 곳이 하나 보였다.
딱 봐도 공사현장. 아마 집을 짓고 있는지 이런저런 중장비들이 꽤 보인다.
호기심이 생겨서 바로 그쪽으로 내려가 봤다.
나무를 태우고 있는 드럼통, 거기 모여서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담배 피우고 잡담하는 몇몇 사람들. 휴식시간인가?
내가 투명화를 풀자 드럼통 앞에 있던 사람들이 들고 있던 커피를 쏟을 정도로 깜짝 놀란다.
"옴마야. 깜짝이야. 이기 뭐꼬!? 옴마? 대장 아이가??"
내 얼굴을 알아보는지 반장 하나가 나에게 슬금슬금 다가오면서 말한다.
근데 대장? 여기서 나는 아예 대장으로 굳어진 거야? 이게 다 지아 그 녀석 때문인가?
"잘 지냈어요?"
"오매. 대장 맞네. 뭐한다꼬 얼굴도 안비치다가 이제 와쌌노?"
말은 퉁명스러워도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반장.
얼떨결에 악수를 한 뒤 나는 당황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말했다.
"여긴 뭐 하는 건가요? 뭐 만들어요?"
"아. 이거? 전에 대장 니가 집 만들어 보라고 안했나? 캐서 집 만들고 있다 안카나."
"아아. 역시 그게 맞군요. 어때요? 잘 돼 가요?"
"하모. 빌딩 만들라 카는 것도 아이고 이 뭐 을마나 댄다꼬 어렵겠노."
확실히 건축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건물은 제법 그럴듯했다.
하긴, 세상이 이꼴이 나서 그렇지 수많은 전문가가 자기가 잘하던 일, 지금까지 해왔던 일을 못 하고 식량 생산에만 몰두했을 거다.
그런데 이렇게 집 지으라고 하니 신난다고 모여서 뚝딱뚝딱 만들어 내고 있겠지.
"이거 집 짓는 거 누가 담당하고 계세요? 반장님 혼자?"
"아이다. 두 놈 더 있는데 금마들은 자재 구하러 갔다카이."
"자재 구하는 건 그리 안 어렵죠?"
"하모. 지천에 깔맀는게 자재지. 마. 아무 건설현장 드가서 죄 가져와뿌면 되는데. 뭐, 누가 뭐라 할끼가?"
"그쵸.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죠. 자재 걱정 안 하고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니 신나는 일이네요."
"마. 쪼매만 있어 바바라. 지금이 겨울이라 땅까기 좀 그래서 이런것만 짓고 있는데. 날 풀리면 기똥찬걸로 더 지을꺼니까는."
"기대되네요. 아. 그럼 건축 쪽은 반장님께 물어보면 되는 거죠? 실례지만, 성함이?"
"이름은 마, 뭘라꼬. 걍 양 반장이라 캐라."
"네. 양 반장님. 혹시 그럼 집 다 지으면 여기 지금 숙소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들은 다 어떻게 처리하죠?"
"컨테이너? 뭐 암대나 치아 놔뿌면 되지."
"그래서 말인데요."
나는 스마트 폰을 꺼내서 캐슬의 사진을 보여줬다.
양 반장은 물론이고 주변에서도 모여들어 내가 보여주는 사진을 본다.
"컨테이너 남는 거로 이렇게 외곽을 두를 수 있을까요? 성벽처럼."
"와. 이 뭔데? 이 어딘데?"
"캐슬요. 여기서 나갔던 성채라는 놈이 만든 곳이요."
"캐슬? 캐슬이면 그 성 아이가? 성이라꼬 이리 성벽을 만들어 논기가? 와. 까리하네?"
"그쵸? 이렇게 쌓은 다음 페인트로 도장도 하고 그러면 보기도 좋고 방어용으로도 괜찮고…."
내가 말했지만 이미 이 양반들은 나는 안중에도 없고 서로 자기들끼리 토론을 하기 시작했다.
얼핏 들어서는 서로 싸우는 것 같지만, 조금 들어보니 이들은 그저 평범하게 대화를 하는 것일 뿐이었다.
"임마 이거 이리 쌓을라카면 크레인 설치해야 하나?"
"아이고. 이정도면 스카이로 다 합니다."
"아. 맞네. 하기사 이정도 쌓는데 크레인 하는 건 좀 그르치?"
"어휴. 형님 자꾸 높은 건물 욕심내서 은근슬쩍 크레인 올리고 싶으신가 본데."
"클클클. 걸맀나? 아. 기왕 할끼면, 응? 크레인 딱 박고, 응? 건물 뚝딱 올리면…."
"아이고. 됐소. 형님. 지금은 그러기 쉽지 않은 거 잘 알고 있잖소."
"에휴. 내도 안다. 뭐, 몰라서 이카는 줄 아나?"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재밌긴 하지만, 어쨌든 여기에서 더 시간을 보낼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컨테이너 이야기도 마침 했으니 이제 안으로 들어가 볼까…. 했는데, 눈앞에 쌓여있는 벽돌이 보였다.
"어. 반장님?"
하도 열띤 토론을 하고 있기에 몇 번을 부른 뒤에야 양 반장은 나를 바라봤고, 나는 벽돌을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혹시 지금 쓰는 겁니까?"
"벽돌? 쓰긴 쓰제."
"그럼…. 이거 풀어봐도 돼요? 뭐 좀 확인하려고."
내가 본건 파레트 위에 이쁘게 쌓여있는 벽돌. 이걸 수납에 넣어보면 대충 어느 정도 크기인지 알 수 있을 거 같은데.
"뭘 확인할라 카는데?"
"어…. 설명하기 좀 힘든데. 직접 보시면 알아요."
"이거 저짝으로 옮길 낀데. 괜히 흐트려싸면 옮기기 힘들데이."
"아. 옮길 거에요? 그럼 제가 옮겨드릴게요."
"이거 이래 봬도 양 엄청 될낀데? 뭐할라꼬?"
"어디다 옮기면 되는데요?"
"저…. 저 보이나? 저기 뻘건 벽돌?"
"아…. 저기 작업하는데 쓰는 거예요? 저기에다가 놓으면 돼요?"
"그카면 되긴 하는데. 아니 만다꼬 그걸 옮길라 카는데?"
"보시면 안다니까요. 수납."
나는 수납을 열고 안에 들어있던 배낭을 잠시 빼서 옆에 내려놨다.
내가 허공에서 배낭을 빼자 눈이 커지는 양 반장. 수납 스킬은 처음 보나?
마체테로 벽돌에 묶여있는 바인더 끈이랑 비닐을 뜯고 한 개를 집어 들어봤다.
음…. 이거 크기가 어느 정도 되려나?
"반장님. 줄자 있어요?"
"있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줄자를 내게 건네주는 반장.
어디 보자…. 가로가 190, 세로가 90, 높이가 57? 으음…. 그리고….
그렇게 측정을 한 다음 벽돌을 하나씩 수납에 넣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것을 신기하게 보고 있는 양 반장. 재밌어 보이는지 자기도 넣어봐도 되냐고 물어보길래 해보라고 했다.
양 반장과 함께 쌓여있는 벽돌을 신나게 집어넣는데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간다.
와. 이거 뭐냐? 하급인데 이렇게 많이 들어간다고?
양 반장도 신기한지 아무리 넣어도 끝이 없는 수납을 보며 부러운 듯한 눈빛을 하고 있다.
거의 한 파레트가 다 돼가자 드디어 더 안 들어가는 상황이 나왔다.
벽돌을 넣으려고 하니 공간 너머로 넘어가지 않는 느낌. 이야. 이거 신기한데?
"옴마야. 한 빠레뜨가 다 드가뿌네."
파레트 위에는 한 서른 개 정도의 벽돌만 남아있었고, 나는 양 반장에게 물었다.
"이거 한 파레트 벽돌 개수가 몇 개예요?"
"이거? 한 천 개 될낀데?"
"천 개요? 이게?"
"하모. 뭐. 한 백 개 될 줄 알았나?"
"아니…. 뭐가 이리 많아. 천 개? 그럼…. 지금 몇 개나 들어간 거야. 한 970개 들어간 건가?"
어디 계산해보자…. 잠시만. 굳이 계산할 거 있나? 한 파레트가 거의 다 들어갔으면 대략 처음에 벽돌 쌓인 만큼 정도의 공간이라는 거잖아?
줄자로 다른 파레트에 쌓인 벽돌의 가로 세로 높이를 재봤다.
대충…. 가로 세로 높이가 거의 1미터씩 되는 거 같은데…. 그럼 하급의 공간은 1세제곱미터라고 보면 되나?
음…. 계산이 많이 엉성하긴 한데. 얼추 맞을거 같기도 하고. 근데 1세제곱 미터면 제법 크네.
아까 양 반장이 말했던 곳으로 가서 벽돌을 꺼내려고 하는데 지난번에 W호텔 로비에서 컴퍼니 대표랑 부장들이 했던 게 떠올랐다.
그놈들은 쌀 포대를 꺼낼 때 일일이 들고 꺼내지 않았어. 분명 어떻게 한 번에 쓰윽 꺼내서 쌓인 채로 꺼냈단 말이지.
음…. 내 수납 안에 있는 벽돌은 어떻게 있지? 눈으로 보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정돈은 되는 거야? 그냥 마구잡이로 있나? 부피의 전체 총량으로 따지나?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고 쓸 필요는 없는 건가?
수납을 여는 입구. 분명 입구의 방향은 내 맘대로 조종할 수 있었다.
그럼 크기는? 한번 해볼까?
기왕이면 계산하기 편하게 네모난 모양을 생각하고 제일 크게 열어봤다.
지면과 평평하게 생겨난 커다란 수납 입구.
줄자로 재보니 가로 1미터 세로 1미터였다.
아…. 진작 이렇게 해볼걸. 이게 최대 크기가 맞나 보다.
그럼 가로 세로 높이 다 1미터가 맞나보네. 그럼…. 이 상태에서 벽돌은?
내가 벽돌이 나오도록 생각을 하니 수납 입구에서 벽돌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후두두둑두두둑
바닥에 와르르 쌓인 벽돌. 지켜보던 양 반장이 나를 황당하게 바라본다.
"뭐하는기고? 이래가 이거 쓸 수 있겠나? 아이고. 다 깨져뿟네."
다 깨진 건 아니고 몇몇 개가 모서리가 깨졌을 뿐인데 잔뜩 나를 나무라는 양 반장.
좀 민망하네. 누가 이렇게 후두둑 떨어질 줄 알았나.
기왕 이렇게 된 거 벽돌로 조금 더 연습해보기로 했다.
수납에 넣고 벽돌 꺼내는 것을 연습해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이쁘게 쌓인 채로 땅에다가 내려놓는 방법을 알아냈다.
입구가 고정이 아니었어. 입구도 움직이게 할 수 있구나.
그렇게 한참을 연습하니 별의별 방법을 써서 수납 스킬을 쓰는 방법을 알아냈다.
새 벽돌 파레트로 가서 위에 두어줄 치운 다음 파레트와 벽돌 사이에다가 수납을 열었다.
그리고 벽돌을 쓱 밀자 그 많던 벽돌들이 한 번에 쑤욱 수납 안으로 들어간다.
마치 마술사가 된 느낌이야. 옆에서 턱이 빠지라 입을 벌리고 있는 양 반장을 보니 더 그렇게 느껴진다.
그렇게 다시 옮겨야 하는 곳으로 가서 이번엔 바닥에다가 수납을 열고 아까 집어넣었던 벽돌을 그대로 생각하며 수납 입구를 위로 올렸다.
이쁘게 쌓인 채로 다시 생겨난 벽돌들.
캬. 이거 재밌네.
"니…. 니 뭐 하는 놈인데?"
"뭐 하는 놈이긴요. 그냥 평범한 스킬 사용자죠."
"그…. 그기 무슨 스킬이라꼬? 수납?"
"네. 스킬 두 개 마스터하면 배울 수 있는 스킬이에요."
"와. 미칬네. 미칬어. 내도 수납인지 뭔지 그거 배우러 갈란다. 우예 배우노?"
나는 웃으면서 양 반장에게 잘 설명해줬고, 어느새 내 옆에는 한 스무명 정도가 내 스킬 강의를 듣고 있게 되었다.
근데 이 사람들…. 일해야 하는 거 아냐?
그렇게 한참을 설명한 뒤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나를 안 놔주고 계속 붙잡는 사람들을 뿌리치고 나오느라 힘들었지만, 어쨌든 무사히 나올 수 있었으니 됐다.
게다가 수납 스킬의 활용도 많이 해볼 수 있었고.
이렇게 활용한다면…. 생각보다 쓸 수 있는 게 많다.
비행으로 날아가면서 수납 열고 안에서 벽돌 하나씩만 떨궈도…. 밑에 있는 놈들에겐 상당히 피곤한 일이 될 테니까?
게다가 가장 충격적인 건 이게 하급이라는 거다.
중급 이상으로 넘어가면 대체 얼마나 커지는 거야?
컴퍼니 대표랑 이놈들 가지고 있던 물건의 양…. 상당히 많았지? 이거 정말 찍길 잘했어.
그럼 이제 정 부장이나 만나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