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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차로 가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약간 헤맸는데도 한 시간 정도? 탐지를 계속해서 썼는데도 주변에는 기척 걸리는 게 아무도 없다.
어떻게 보면 이 근처도 전부 캐슬의 영향권이긴 하니까…. 사람이 없는 것은 이해가 간다.
남양주 동쪽부터는 뭐, 사람이 있는 게 힘들기도 하고.
네비가 없어도 막힘없이 운전하는 승규가 참 신기하다.
길눈 밝은 사람이 있긴 있나 봐. 너무 궁금해서 운전하고 있는 승규에게 넌지시 물어봤다.
"길을 왜 이리 잘 알아요?"
"어차피 양양고속도로는 꽤 타봤으니까. 만들어진 다음부터 바로 잘 탔지. 유정이 처가가 동해 쪽이라."
순간 양양에서 쳐 죽였던 노인들이 생각났다. 설마? 아니겠지?
"동해…. 어디쯤이요?"
"속초."
"양양이랑은 상관없죠…?"
"엄연히 다른 곳인걸."
"아아. 다행이에요."
"음? 왜?"
"아. 아니에요. 이제 거의 다 온 거 같네요?"
비행으로 날아가면서 보는 청평호와 차에서 보는 청평호는 느낌이 조금 달랐다.
그리고 비행으론 정말 금방인데, 차로 가니 우리가 가려는 연수원은 상당히 외진 곳에 있다고 느껴졌다.
이 정도면 뭐, 진짜 우연히 발견하지 않는 한 힘들겠어.
"이쪽인가보다?"
도롯가에 작게 간판이 보였다. 200미터 앞 우회전. 능숙하게 차선을 바꾼 다음 속도를 줄이고 뒤차들을 위해 깜빡이를 넣는다.
나무가 잔뜩 자라있는 길. 불은 켜있지만, 풀들이 무성하게 자란 식당. 을씨년스러운 분위기의 공장.
그리고 연수원 입구.
"오. 역시 대기업 답네."
승규의 반응은 내 반응이랑 비슷했다. 식물이 번지긴 했지만, 대기업의 손길은 때깔이 다르다.
안으로 들어가 건물 앞에서 차를 세웠고, 뒤따라오던 승합차 세대는 나란히 우리 뒤에 섰다.
"와. 여기에요? 건물 좋은데요!?"
차에서 내린 진영이가 해맑은 표정으로 주변을 바라본다.
한 시간 남짓이지만 오랜만에 운전해서 그런지 약간 굳어있는 유정 형수를 승규가 다독여준다.
그 모습을 부럽게 바라보는 연서. 동생인 미연이가 내리면서 수고했다고 말하지만 조금 부족해 보이는 모습.
나는 슬그머니 다가가서 어깨를 툭툭 쳐주며 한마디 했다.
"고생했어."
내 말에 표정이 환해지는 연서. 나 참…. 어쩌다 내가 이렇게 인기가 좋아진 것인지.
뒤차로 가서 소희에게도 가볍게 수고했다고 하니 소희 역시 표정이 밝아진다.
으음…. 설마? 음….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마치 수련회에 온 학생들을 인도하는 것처럼 모두를 이끌고 연수원 지하로 향했다.
상당히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내부.
창고나 다름없는 물류센터에서 지내던 이들에겐 이 정도도 괜찮아 보이는지 다들 설레는 표정이다.
후후. 아래 내려가 보면 눈이 휘둥그레지겠지?
왠지 기대되는데?
지하 1층. 그리고 계단 옆의 문을 열고 육중한 철문이 나오자 다들 눈이 크게 떠진다.
이제 시작인데 벌써 놀라면 안 되지.
카드를 찍고 비밀번호를 누른 뒤 철문을 열었다.
안쪽에 깔린 대리석을 보자 얼굴에 떠 있는 표정들이 버라이어티하게 바뀌고, 안쪽으로 들어가자 내가 바라던 대로 다들 눈이 휘둥그레진다.
"오오오오…."
대략 반응들을 요약하면 저런 느낌이다.
홀린 듯 안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그건 승규나 유정도 마찬가지인 듯 하율이를 안고 바로 안으로 들어간다.
로비 안쪽에 꾸며진 것들을 보니 다들 걸음이 빨라졌고 누가 먼저라고 할 거 없이 빠르게 더 안쪽으로 향한다.
그 후의 반응은 한 단어로 요약하면 '축제' 였다.
그들의 머릿속엔 이미 물류센터는 잊힌 것 같은데? 방문들을 열어보며 감탄하기 바쁘잖아?
저마다 얼굴이 환한 게 보기 좋다.
특히 방이 넘쳐나서 각자 1인 1실을 쓸 수 있다는 게 가장 맘에 드나 보다.
게다가 방마다 화장실이 있는 것도 정말 맘에 드는 듯하다.
하긴…. 이 이원이면 여자들은 아침마다 고생 좀 했겠지.
서둘러 다른 곳을 구경하러 가면서 내 앞을 지나다가 나를 보며 엄지를 치켜세우는 민준이와 유진이.
진짜 웃기네. 그 정도인 거야?
하긴 저놈들도 커플인데 물류센터에서는 맘대로 섹스도 못 했겠지. 눈치 보이니까.
여기라면 이젠 원하는 만큼 할 수 있을 거다. 게다가 방에 화장실도 있으니 아주 살 맛이 나겠지.
방도 어지간한 4성급 호텔 수준은 되니까.
다들 구경하느라 정신없기에 나는 중앙에 있는 소파에 앉아서 느긋하게 주변을 바라봤다.
리스트에 이런 50인 벙커가 또 있긴 하던데…. 거기도 이런 곳이려나? 거기는 대기업까진 아니었는데.
나중에 여유 있을 때 벙커들 순회공연 한번 싹 해야겠어.
지금까진 전부 비어있었지만, 사람 사는 곳이 없진 않겠지.
다들 구경이 길어지기에 시간이 아까워서 가만히 앉아 페이즈 아웃 스킬 숙련을 했다.
뿌옇게 변했다가 다시 현실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데 그런 내 옆에 승규가 다가온다.
"이런 자투리 시간에도 숙련 하는 거야?"
"네. 다들 구경이 길어지니까요."
"이렇게 좋으니 다들 신날 만하지.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저도 보고 놀랐어요. 그러니 바로 오자고 했죠."
"그러게. 너무 서두르는 게 아닌가 싶었는데 절대 그런 게 아니었네."
그렇게 이야기 하는 우리 쪽으로 유정과 하율이가 다가온다.
유정의 표정이 굉장히 밝네? 뭐 좋은 곳이라도 발견했나?
"성철 씨. 여기 진짜 좋네요."
"맘에 들었으면 다행이죠."
"여기 주방이…. 와. 정말 좋아요. 한 번도 안 쓴 거 같은데."
아아. 역시 그렇구나. 여자들은 주방이 좋으면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건가.
"밥맛이 더 좋아질 거 같아요?"
"그럼요. 이런 곳이면 밥 먹을 때마다 호텔식 먹는 느낌이 날 거 같은데."
"하하. 그럼 좋죠. 다들 행복해지겠네."
"근데 신기한 건 안에 집기랑 식기 이런 것들도 다 있어요. 침구류랑 하다못해 수건들도 넘치게 있다니까요? 당장 여기서 사는 데 문제가 없을 정도예요."
"아. 그래요? 그런 건 자세하게 못 봤는데."
"여기 원래 쓰임새가 뭐였을까요? 어떻게 이렇게 다 갖춰놨지?"
"대기업에서 만들어 놓은 거니까. 아마 무슨 일 나면 그쪽 회장이나 이런 사람들이 피신 오는 용이 아니었을까 싶네요."
"아아. 그러면 말이 되겠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유정은 하율이를 안고 다시 구경하러 자리를 떠났고, 나와 승규만 남게 됐다.
"닭이랑 돼지들 옮기려면 고생 좀 하겠어요."
"그러게. 옮기려면 한참 걸리겠지. 이쪽에 닭장도 축사도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것부터 준비해야겠네."
"뭐, 어려운 건 저는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난 이제 도망갈 거야."
"하하. 그래. 그런 것 정도는 우리가 알아서 해야지. 이 정도 해줬는데 그런 것까지 부려먹을 수는 없지."
"그…. 탐지요."
"어."
"아직 중급이죠?"
"그렇지. 아직 멀었어."
"형, 방 어디로 정했어요? 아직 안정했죠?"
"응. 알다시피 나도 방금 왔잖아."
"그럼…. 일단 이리 와 봐요."
나는 가운데에 있는 가장 큰 방으로 들어갔다.
아마 여기가 VVIP의 방인지 저번에 W호텔 방에 들어온 느낌이 난다.
럭셔리하고 고급스러운 방. 나는 거기 테이블 위에 포션들을 사서 잔뜩 쌓아 놓았다.
체력 회복 포션 소, 50개. 10만 코인 분량.
내가 포션을 또 꺼내자 승규의 표정이 살짝 굳는다.
승규도 포션 먹는 게 그리 쉬운 건 아닌가 보네.
"이거 써서 탐지 고급 만들고 움직여요."
"아아. 결국엔 그렇게 되나."
"75미터랑 100미터도 차이가 커요. 하물며 50미터는 더 그렇죠. 최대한 빨리 마스터 하는게 중요하지만…. 그건 아직 멀었고."
"그렇지. 5천 번이라니 으휴."
"암튼 어차피 이동하면서도 계속 쓰면서 다녀야 할거에요. 아. 그럼 이거론 부족하겠네. 좀 더 사놔야겠다."
포션 50개를 더 사서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포션 100개를 보는 암울한 승규의 표정.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지만.
"닭이랑 돼지 밥은 어떻게 주죠? 하루 안주면 바로 죽는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하지."
"그럼 숙련 다 하고 가면 안 되겠네. 그냥 오가면서 쓰세요."
"그래. 그렇게 해야겠다. 어차피 내일 아침에도 바로 가봐야 하니까."
"그래도 그렇게 먼 게 아니니까 다행이네요. 보니까 형 혼자 오면 이렇게까진 안 걸릴 거 같던데."
"아무래도 그렇지. 오늘은 느긋하게 천천히 온 거니까."
"다닐 때 꼭 최소한 하나는 데리고 다녀요. 민준이나 동현이가 낫겠죠. 이 중에서 제일 전투에 쓸만한 건 둘이니까."
"그래. 그래야겠다."
"물류센터는 제가 수납 배우면 좀 뒤적거릴 테니까, 그건 신경 쓰지 마시고요."
"어디? MRE?"
"네. 냉동창고."
"그래. 알았어."
"아 참. 다 같이 이름 하나 생각해봐요."
"이름?"
"여기 이름요. 처음엔 마트였고, 다음은 물류센터였는데 이번엔 수련원이잖아요. 수련원이라 부르긴 조금 그래서. 좀 좋은 이름 하나 생각해봐요. 기왕이면 부르기 쉽게 두 글자로."
"이름이라. 알겠어. 다들 생각해보라고 하고 투표해보면 되겠지."
"그렇게 해요. 그럼…. 전 갈게요."
"맨날 자기 멋대로 왔다가 멋대로 가는구나.“
”그게 제 특권 아니겠어요? 갈게요.“
나는 더 별말 안 하고 그대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퇴장할 때 이보다 더 좋은 스킬은 없다. 탐지에도 걸리지 않으니 말 그대로 뿅 하고 사라지는 거잖아.
그렇게 천장을 뚫고 나온다는 느낌으로 올라오자 지하 1층이 나왔다. 다시 한번 더 해서 지상으로 나오고 바로 해제한다.
으. 이놈의 추위. 정말…. 어휴. 그만 투덜거려야지.
투명화, 반사, 비행을 바로 걸고 하늘로 솟구친다.
이거 뭐 매크로 없나? 매번 이렇게 걸기 귀찮아 죽겠네.
페이즈 아웃은 비행하면서 스킬 숙련이 안되는 게 조금 아쉽다.
이렇게 날아가면서 숙련을 하면 상당히 시간도 아끼고 좋을 텐데.
아니다. 그러다가 물약 때문에 어지럼증이 생기면 그대로 추락사잖아. 낮게 날면서 해야 하나?
수납 같은 건 날면서 할 수 있을 텐데. 음…. 모르겠다. 그건 나중에 가서 생각하고.
저기가 이름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다들 좋아하니 다행이다.
그리고 저기로 가게 된 건 나한테도 좋은 일이다.
지연이나, 식물 자매인 연서나 미연. 그녀들이랑 좋은 시간을 보내려면 저렇게 개인 방이 있는 게 좋겠지.
게다가 연수원이었던 만큼 위에도 방 같은 게 제법 있을 거다. 뭐든 물류센터보단 훨씬 낫다.
어쩌면…. 시선에서 자유로워진 만큼 나중에 들어온 민주나 소희하고도 그런 관계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진영이 동생 현정이하고도.
보니까 그녀들도 마음에 없는 게 아니야. 둔해 빠진 나도 알겠어.
결국은 미래가 문제인데.
솔직히 저기에 있는 여승 미래가 가장 문제다. 다른 여자들은 어차피 자신의 몸이고 본인이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근데 미래는 같이 보육원에서 온 승주와 중현이가 있다.
걔들이 미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잘 모르겠다.
엄마나 누나처럼 생각하고 있다면 그냥 잘해주면 되겠지만, 만약 걔들이 미래를 이성으로 생각하고 있다면 살짝 골치 아파진다.
5년이 사라져버린 20대. 그런 애들의 질투는 무섭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기잖아.
그 애들이 미래에게 마음이 있는데 내가 미래를 안게 되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모르겠다.
어우. 생각만 해도 머리 아프네.
이런 걸 고민하는 건 정말 딱 질색이다. 그래서 애초에 미래를 여자로 대하지 않은 거고.
일단…. 조금 지켜보자.
이런 걸 누구 눈치 보면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이제는 저들을 모두 신경 쓰겠다고 결정했으니까…. 이런 것도 따져봐야지.
근데 그놈들도 참 이상하단 말야. 지연이나 연서, 미연이, 민주나 소희, 그리고 진영이 동생 현정이까지.
따지고 보면 내가 엄선한 여자들이다. 망하기 전 세상이었으면 최상위권의 외모를 가진 여자들.
젊은 놈들이니 저런 여자들 틈바구니에서 있으면 막 충동이 벌떡벌떡 생길 텐데…. 어떻게 참지?
개인적으로는 그놈들이 물류센터의 카사노바가 됐었으면 참 좋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면 굶주린 여자들이 걔들을 살살 꼬시든가.
에휴. 모르겠다. 일단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하자.
지금은 빨리 집에 들어가서 내 여자들 끌어안는 게 먼저야.
그리고 편히 누워서 스킬 숙련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