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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71화 (27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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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원래대로라면 물류센터에 이렇게 관심을 가질 생각이 없었다.

그냥 알아서 돌아가는 앞마당 멀티 정도로 생각했고, 필요할 때마다 식량을 가져오는 보관 창고 개념으로 둔 곳이니까.

이들이 서로 죽이든 주변 일대를 초토화하든 서로 난교 파티를 하든…. 상관하지 않을 셈이었다.

처음 마트를 만든 이유가 그랬잖아. 그냥 변덕에 의해서 만든 곳.

그저 내가 원할 때 맡겨둔 여자를 불러내서 섹스하는 용도.

평상시에 돌봐주기 힘드니까 은행에 예금 맡겨두듯 보관하는 느낌. 그런 거였는데….

승규가 너무 유능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방향성과 조금 달랐다.

건실하고 보수적인 남자. 책임감 있고 바른 남자.

그런 그가 MRE가 잔뜩 있는 물류센터를 맡으면서 이들은 점점 내가 손대기 힘든 독자적인 생태계로 발전해 버렸다.

식량 보급이라는 목표는 충분히 이뤄졌지만, 여자는 아니었다.

함부로 손대기 힘들어지는 상황. 그래서 손을 놨었다.

어차피 나도 승희가 생기고 미나도 있어서 여자에게 크게 아쉬움이 없게 되었으니까.

세아와 안나를 잠시 맡겼었지만, 그녀들까지 다 내가 품게 되었고, 펜스를 얻음으로 사실상 물류센터는 더는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사실 그때 신경을 껐어야 했다.

더는 필요 없는 사람들. 알아서 자기들끼리 잘 살아가는 사람들.

놔뒀어야 했어. 죽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지 말았어야 했어.

근데…. 너무 기가 막힌 타이밍에 짱개들이 덤볐다.

짱개. 씨발 년들. 그 새끼들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가 없었을 텐데.

아니면 내가 조금이라도 늦게 왔더라면, 그래서 모두 죽었더라면….

아니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아무 의미 없다.

결국, 나는 이들을 지키기로 했다. 내가 책임지고 계속 손을 대기로 마음먹었다.

하기로 했으면 해야지. 아무리 귀찮고 번거롭더라도 하는 데까진 해야지.

"봐요."

나는 승규에게 종이 한 장을 보여줬다.

"이게 뭐야?"

종이를 받아보며 내가 동그라미 쳐놓은 곳을 바라보는 승규.

"벙커? 50인용?"

"네."

"벙커라니…. 방공호의 그 벙커를 말하는 건가?"

"맞아요."

"하…. 진짜 이런 걸 짓고 사는 사람이 있구나. 근데…. 50인용…. 이걸 왜?"

"이쪽으로 이사하죠."

"어?"

"물류센터는 노출됐어요. 짱개 같은 새끼들 귀에 들어갈 정도면 한두 놈 귀에 들어간 게 아니겠죠. 그동안은 정말 운이 좋아서 살아남은 것일 수도 있어요. 아는 놈들이 귀찮아서 여길 안 쳐들어온 것일 수 있단 말이죠."

"그래. 그렇지…."

"약이 있든 없든, 소문이 돈 이상 여길 유지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그저 죽을 날을 기다릴 뿐이에요. 내가 계속 상주하면 모를까 내가 없으면 이정도 인원…. 순식간이에요."

"그래…. 그것도 맞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야."

"그러니 옮기죠. 원래는…. 하아. 원래의 나였다면 당신들을 미끼로 삼아서 오는 놈들을 하나하나 족쳤을 거예요. 이쪽의 피해가 있든지 없든지 신경 안 쓰고 말이죠. 적당히, 교묘하게 좋은 말로 버티라고 하면서 살살 달랬겠죠. 계속해서 공격해 오는 놈들을 막으려면 힘을 길러야 한다…. 뭐 이러면서 말이죠."

내 말에 승규는 약간 표정을 굳히고 내 말을 듣는다.

그라면 알 거다. 내가 정말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거라는걸.

"근데, 마음이 바뀌었어요. 당신들을 죽이고 싶지 않아요. 그러니 안전한 곳으로 가요. 굳이 사람들과 싸우지 않아도 되도록."

"솔직히 말하면 우리가 여길 고집해야 할 이유가 없지. 네 말이 맞아."

조용히 자기 생각을 말하기 시작하는 승규.

"이번에 확실히 알았어. 우리는 경험도 없고 힘도 약해. 이미 예전에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지. 네 말대로 이사하는 게 가장 좋은 방안이 맞을 거야. 문제는…. 저 MRE인데."

"티어3 스킬 중에 수납이라고 있어요."

"수납? 인벤토리?"

"네. 맞아요. 수납의 크기가 어느 정도 되는지는 모르지만, 상당히 커요. 그러니 수납을 찍으세요."

"그건…. 왜?"

"수납 안에서는 들어간 물건의 시간이 흐르지 않습니다."

"아아…. 그렇구나. 냉동 창고 같은 게 필요 없어지네."

"네. 그리고 수납은 당장 찍을 필요 없어요. 지금은 탐지부터 빨리 마스터 하세요."

"그건 왜지?"

"물류센터를 버리더라도 알차게 버려야죠."

"그건 또 무슨…."

"버려진 물류센터를 미끼 삼아 최대한 많은 놈을 끌어모아 죽일 거예요. 여러분들의 코인을 위해서."

"하…. 정말. 너는 이런 세상에 완전히 최적화되어있는 사람이구나."

"칭찬이죠?"

"글쎄. 나도 말해놓고 보니 조금 그렇네. 비정상인 세상에 최적화 돼 있는 사람이면 비정상이라는 이야기잖아."

"뭐가 됐든, 하나라도 허투루 버릴 필요는 없죠. 저들이 원하는 건 물류창고 안에 있는 약과 MRE일 테니 사람이 빠진다고 굳이 쫓아오진 않겠죠."

"그렇겠네. 그리고 어차피 우리는 MRE가 없어도 어느 정도 금방 자생은 될 테니까."

"아무튼, 그래요. 이사할 준비를 해주세요. 전 오늘 그 벙커에 다녀와 볼 거에요."

"아. 여길? 오늘? 어디 보자…. 주소가…. 가평?"

"별로 안 멀죠."

"가평에 왜 이런 커다란 벙커가…. 아. 여기 적혀있네. 대기업 연수원이라. 대기업이 잘도 이런 걸 만들었구나."

"그래서 가보는 거예요. 혹시라도 안에 누가 살고 있을까 봐."

"그렇구나."

"암튼, 그렇게 알고 계세요. 이사는 당장 내일이라도 할 수 있게 준비해주시고요."

"그렇게 급하게?"

"저놈들이 뭐 여기 사정 봐주고 쳐들어올까요?"

"하긴 그렇긴 하네. 알겠어. 그럼 빨리 준비해볼게."

"그럼, 전 다녀올게요. 오늘 아니면 내일 다시 올게요."

"그래. 고생해줘."

나는 종이를 챙기고 바로 물류센터를 나왔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지만, 어쨌든 그들을 책임지기로 했으니 끝까지 해야지.

어차피 그리 어렵지도 않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살아갈 방법은 있으니까.

성장. 성장이 넷이면 적어도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거다.

마음 같아선 그들을 캐슬로 보내고 싶었지만…. 그건 관뒀다.

캐슬은 언제라도 포기할 수 있는 곳. 무슨 일이 있어도 민희만 그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으면 된다.

괜히 그렇게 대놓고 드러난 곳에 저들을 둘 필요는 없지.

강원도의 산들 위로 독개구리 하이바가 빠르게 날아간다.

침낭을 두르고 보온 팩을 넣었는데도 춥다. 아오. 씨발. 역시 강원도라 이거지?

기왕 가는 거 남쪽으로 갈 걸 그랬나? 차라리 제주도 같은데 짱박히는 게 나으려나?

나중에…. 사람이 거의 없어지고 위험이 많이 사라지면, 그때는 그런 곳으로 가야지.

날씨 좋고 사람 살기 좋은 곳.

언제나 헐벗어지고 있어도 전혀 문제없는 곳.

아니다. 그럴 거면 아예 남국의 휴양지 같은 데로 가서 사는 게 더 낫겠지?

언제쯤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언제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살 수 있을까?

그렇게 거의 40분 정도를 날았다.

발밑에 보이는 저 호수는 이름이 뭐지? 한번 확인해 봐야겠네.

그렇게 스무스하게 지상으로 내려가 간판들을 보니 청평호인 거 같다.

아…. 저게 청평호구나. 와본 거 같은데? 언제 왔었지? 어쨌든 멋지네. 맘에 든다.

으음…. 역시 사람은 물을 봐야 마음이 편해지는 거야.

배산임수. 괜히 그런 말이 나온 게 아니지. 이런 게 바로 선조의 지혜 아니겠어?

근데 문제는…. 주소만 가지고 내가 찾는 연수원을 찾기가 힘들다.

씨발. 진짜 네비게이션 마렵네.

이걸 대체 어떻게 찾아가나….

그렇게 주변을 둘러보며 뭔가 단서가 될만한 것들을 찾아보는데 눈앞에 부동산이 보였다.

아. 부동산? 부동산이면 뭔가 지도 비스끄므리한 게 있겠지?

바로 그쪽으로 날아가 문을 열어보는데 잠겨있다.

안쪽을 살펴보니 벽에 지도 같은 것들이 잔뜩 붙어있는 게 보인다. 역시…. 예상이 맞았어.

망설임 없이 유리문을 박살 내고 안에 들어가서 벽을 바라봤다.

친절하게 지역명이랑 번지도 적혀있는 지도. 나이스. 그래. 이거야. 내가 찾던 게 바로 이거지.

대략적인 위치를 가늠하고 스마트폰으로 지도들을 잔뜩 찍었다.

지도 보려고 다시 돌아오는 멍청한 짓은 하고 싶지 않으니까.

솔직히 한번 떠났다가 다시 여기 찾아오라고 하면 그것도 못할 것 같다. 그러니 많이 찍어둬야지. 후회하지 않게.

하늘을 날아 원하는 방향으로 이동한다.

나침반 같은 건 하나 있어야겠어. 적어도 어디가 북쪽인지는 알아야지.

청평호의 모습으로 대충 위치를 가늠하고 날아간다.

어차피 연수원이면 상당히 클 거다. 좁쌀만 한 곳은 아니겠지.

한 30분 정도를 헤맨 끝에 원하는 곳을 찾을 수가 있었다.

흠. 상당히 깔끔한 건물이다. 주변이 잔뜩 숲이라는 점도 맘에 든다.

게다가 주변에 비닐하우스를 지을 만한 곳도 넉넉하고…. 아주 외진 곳이라는 게 가장 맘에 든다.

하늘을 날아가다 발견하기도 쉽지 않은 곳. 사람이 절대 실수로라도 지나가기 힘든 곳.

이정도면 훌륭하지. 벙커 상태만 괜찮으면 좋으련만.

혹시나 사는 사람이 있을까 했지만, 탐지에는 걸리는 게 없다.

하긴…. 애초에 강원도 들어와서 사람의 기척을 느낀 적이 없다. 안 그래도 사람 적은 곳인데…. 지금은 아예 없겠지.

농사를 지으려고 해도 이런 산간에선 안 할 거다. 어쨌든 여긴 사람이 있기 힘든 동네니까.

이제…. 입구를 찾아야 하는데.

어쨌든 입구는 지하겠지? 지하로 내려가는 길을 찾아본다.

밑이 비었다는 확신이 있으면 페이즈 아웃이라도 써보겠는데 무서워서 못쓰겠다.

지구 내핵까지 들어갈까 봐 겁나서 땅 밑으로는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어차피 입구는 알아둬야 하니 그냥 꼼꼼하게 찾아본다. 그렇게 꼭꼭 숨겨두진 않았겠지.

50인용 벙커라면 입구가 그렇게 작지는 않을 거다. 적당히 그럴듯하게 가려놨을 것 같은데.

의외로 입구는 쉽게 찾았다.

지하 1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옆. 지하 2층에 뭐가 있다는 소리는 없는데 문이 있다.

창고인가 싶었는데 열어보니 문이 잠겨있다. 페이즈 아웃으로 지나 가보니 그 안쪽에 문이 하나 더 있다.

딱 봐도 육중한 철문. 마치 은행 금고 같은 문.

아무리 봐도 이건 벙커로 들어가는 길이다. 문 옆쪽에 있는 익숙한 패널이 내 말에 확신을 더해준다.

가방에서 마스터키를 꺼내 찍고 000000을 누르니 잠금장치가 열리는 기계음이 들렸다. 빙고.

어디…. 안쪽 한번 구경해 볼까?

처음 들어갔을 땐, 눈을 의심했다.

마치 호텔 로비 같은 느낌.

콘크리트로 된 삭막한 안쪽을 생각하고 있던 나는 대리석으로 마감된 안쪽을 보며 적잖은 당황을 느꼈다.

아. 이건 대기업 일가의 방공호 같은 거구나.

근데…. 왜 안 썼지?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든 여기를 쓸 여건이 되지 않았나 보다.

아니면 여길 쓸 필요가 없던가.

뭐가 됐든 좋은 일이지. 필요한 사람이 쓰면 되는 거잖아?

느긋하게 안쪽을 구경해 보기로 했다.

로비를 지나 들어가니 나타난 마치 호텔 연회장 같은 안쪽.

아래쪽이 내려다보이는 2층 난간 구조. 그리고 각 층 벽에는 방들이 여러 개가 있었다.

거의 서른 개가 넘는 방들. 거기에 커다란 회의실도 있고 작은 극장 같은 곳도 있다.

게다가 아래쪽은 푹신한 소파들과 테이블이 있고 유독 커 보이는 방들도 몇 개 있다.

이거…. 상당히 좋은 곳이네. 왠지 물류센터에 주기 아까울 정도.

근데 또 내가 쓰기는 너무 크다. 여기에서 내가 살라면 하루 온종일 청소만 해야겠어. 아까워도 줘야지 뭐. 이정도면 아주 널찍하게 살겠네.

방들을 하나씩 들어가 보니 더 놀랍다. 어떻게 방마다 화장실이 있냐.

이거 뭐 정말 호텔이네? 역시 대기업 정도 되면 이정도는 준비하는 건가?

화장실 물이 잘 나오는 것과 불이 잘 켜지는 것을 확인하고 밖으로 나왔다.

이정도면 당장 내일부터 와서 살아도 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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