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60화 (26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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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

"짱개들이…. 백 명 넘게?"

"네. 절대 적지 않은 숫자죠. 뭐…. 전부 전투원이라 생각은 안 드는데요. 어쨌든 여길 노린 놈들은 자양동 놈들이에요."

"흐음…. 80명 정도가 죽었는데…. 또 몰려올까?"

"제 생각이지만…. 전력은 아닐 것 같아요. 분명 앞에 50 정도는 쭉정이들이었지만 뒤에 30 정도는 나름대로 스킬 쓰는 놈들이었거든요? 두 개씩 가지고 있고?"

"그럼 아직 핵심 전력까지는 안 왔다?"

"제가 보기엔 그래요."

"골치네."

그래. 승규의 말대로 골치다.

만약 말이 통하는 놈들이었으면 이미 내가 쓸어버렸다.

하지만 매혹이 걸려도 말을 못 알아들으니 혼자서 뭔가를 하기가 상당히 힘들다.

그렇다고 방치해 두자니 골치 아프고.

"어떻게 생각해?"

"녀석들요?"

"응."

"뭘 어떻게 생각해요. 이미 저놈들이 여기 존재를 알고 있는 이상 우리나 저놈들 둘 중의 하나는 다 죽어야 해요."

"너무…. 과격한데. 그렇지만 그거 말고는 답이 없네."

"우리가 원하지 않아도 저놈들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거예요. 당장 오늘 다 죽어버렸으니 하루 이틀은 모르겠지만…. 곧 다시 뭔가 오긴 할거에요. 적어도 제 생각은 그래요."

"그렇네. 나라도 그럴 거야. 80명이나 들이박았는데 남김없이 죽었으면…. 허술하게 다시 오진 않겠지."

"그래서 말인데요."

"응?"

"두 가지 방법이 있어요. 들어볼래요?"

"그래야지. 전투에 있어서는 네 이야기를 안들을 수 없지."

"한가지는, 여기에서 대기 하고 있다가 오는 족족 계속 죽여버리는 방법."

"끄응…. 그리고?"

"다른 한 가지는 여기에서 저 빼고 농성하고 있고, 제가 본진을 쓸어버리는 방법. 그 후에 이쪽으로 합류하는 것."

"쉬운 건 없구나."

"형. 하나만 물어봅시다."

"말해."

"물류센터에 사는 사람 중에서…. 죽는 사람이 나오면 어떻게 할 거예요?"

잠시 말이 없는 승규.

"하아. 날마다 나를 고민하게 하는 질문이네."

잠시 말을 멈춘 승규.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누르는 그의 모습에서 피로감이 느껴진다.

그래. 저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라고 안 해봤을까? 나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 있으니까.

승희, 미나, 세아, 안나.

하지만 참…. 파렴치한 소리긴 하다.

지금까지 내가 죽여온 사람이 몇 명인데.

마체테. 지금 내가 들고 있는 마체테로 죽인 사람만 해도 백 단위가 넘는다.

그들도 일행이 있고 가족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지켜야 할 것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것들을 전부 모조리 부숴버려 놓고선 내 것만을 지키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신경 안 쓴다.

원래 사람은 이기적인 거잖아.

서로 죽이지 않는 상황이었으면 모를까 죽지 않으려면 죽여야 하는 세상이다.

난 더는 이런 거로 고민하지 않는다. 이미 이런 고민은 수도 없이 많이 했으니까.

그저 내 목숨에서 내가 지키고자 하는 몇 명으로 그 범위가 늘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라면 눈 하나 깜빡 않고 모조리 죽일 수 있어.

하지만…. 승규는 어떨까?

그 정도 각오가 돼 있을까?

지키고 싶은 이들을 지키지 못했을 때의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까?

"유정이가…. 고생이 많았지."

갑자기 엉뚱한 소리를 하는 승규.

"간혹가다 밤에 깼거든. 지금은 좀 다르지만, 처음엔 소리를 지르면서 깼지. 꿈에서…. 네가 나와서 유정이와 하율이를 죽이는 꿈을 꿨거든."

"내가요?"

"하하. 웃기는 일이지. 그때, 네 침입은…. 약간 자만하면서 살던 나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일이었거든."

강인한 사람이라고만 보였는데…. 저런 면도 있었던가.

"그래서 마트로 들어갔지. 마트에 있던 애들을 만나고 할 일이 많아지면서 그런 악몽은 별로 안 꾸게 됐어. 네가 다시 찾아오고 나서부터는 그런 꿈을 꾸지 않았어."

"이런…. 본의 아니게 피해를 줬군요."

"뭐. 네가 잘못한 건 아니니까. 어쨌든…. 그랬어. 근데 요 며칠 그 꿈들을 다시 꾸네. 꿈에서 나오는 게 너에서 짱개 새끼들로 바뀌었지만."

"하아."

"그래. 고민이지. 만약 이런 고민을 하게 될 거란 걸 알았으면 리더 같은 자리는 하지 않았어."

묵묵히 그의 말을 들어준다.

듬직하다고 느꼈던 그의 어깨가 상당히 쳐져 있는 게 보인다.

그래…. 그거구나. 아버지의 등.

진짜로 아버지이기도 하지만…. 그는 이 물류센터의 아버지다.

한없이 든든해 보이는 등이라고 생각되지만, 실상 알고 보면 잔뜩 뭉친 채 웅크려있는…. 경직된 등.

"솔직히 말해서 나에겐 유정이와 하율이의 안전이 최우선이었어. 그렇게 생각했지. 근데 이제는 그게 되지 않네. 유정이와 하율이는 물론이고 마지막으로 들어온 민주와 소희 마저도 잃을 수 없게 되었어. 근데 능력은 부족하지. 하아. 답답한 상황이야."

딱히 특별할 것 없는 고민이다.

누구든 여럿을 책임지는 자리가 된다면 하게 되는 고민이니까.

하지만 그렇기에 특별하다.

대부분이 저 고민을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하니까.

하나씩 하나씩 현실에 부딪히며 자신의 이상이 깨져나가게 된다.

그렇게 부서져 가는 자신의 이상을 보며 현실과 타협하거나 전진을 멈추게 되고 제자리에 주저앉는다.

그래. 나는 그게 싫었다.

손이 많이 가는 것, 하나하나 전부 보듬어야 하는 것, 지키고 감싸야 하는 것.

그럴 자신이 없기에 맨 앞자리를 차지하지 않았다.

물류센터, 펜스, 캐슬.

내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기에, 모두를 완벽하게 돌볼 자신이 없기에.

깨지고 부서질 것을 알기에 앞장서지 않았다.

딱 내가 내 능력으로 보듬을 수 있는 사람. 그 정도만 내 품에 안았다.

승희, 미나, 세아, 안나.

그 넷까지라면 내가 어떻게든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선택의 시간이 왔다.

나는 더는 피하면 안 되는 시간이 되었다.

승규는 물론 좋은 사람이다. 대단한 사람이고, 존경할만한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승규에게 이러한 것들을 책임지게 하는 것은…. 맨몸으로 히말라야 정상을 다녀오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는 지금까지 맨몸으로 한라산 정상 정도는 온 셈이다. 그것도 모두를 이끌고.

하지만…. 한라산이 혹독한 추위나 산소가 희박한 고산지대의 공포 같은 게 있는 곳은 아니잖아.

이대로 히말라야로 올라가라는 것은 그를 죽이는 짓이다.

그가…. 힘을 기를 수 있도록, 히말라야 정도는 높은 승률로 도전할 수 있을 때까진 기다려야 한다.

"좋아요. 잘 알겠어요."

"응? 무슨 소리야?"

"지금부터 잠시 동안은 물류센터의 리더는 접니다. 자양에 있는 짱개 새끼들이 모두 박멸될 때 다시 형에게 반환하겠어요."

환해지는 표정의 승규.

"그냥 계속 네가 리더 해도 되는데."

"아뇨. 지금 이건 그런 거예요. 전시 작전체계? 뭐, 군대도 가지 않은 놈이라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전시고 우리는 진격할 거에요. 그동안만은 제가 모든 작전 권한을 가지겠다는 소립니다."

"진격이라."

"네. 진격이요. 그리고 이건 총공격이에요.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모두 싸울 거에요."

"그러냐…. 그렇구나."

"물론…. 그 누구도 죽게 할 생각 없어요. 그렇기에 내가 직접 모두를 이끌고 가는 거예요. 99퍼센트는 내가 다하고 남은 1퍼센트만 시킬 거에요. 그러니 잘 따라와요. 모두를 불러와 줘요. 한 시간 뒤에 여기로. 명분과 사기라는 것은 중요한 일이니까."

"한 시간? 지금 바로가 아니고?"

"네. 잠시 다녀올 곳이 있어서."

"그래…. 알았어. 그렇게 할게."

"그럼 한 시간 뒤에 봐요."

"응."

나는 그대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회의실 바깥으로 나오고 바로 해제. 그리고 비행.

투명화와 반사를 키고 빠르게 하늘로 솟구친다.

주섬주섬 하이바와 침낭을 둘러쓰고 빠르게 벙커로 날아간다.

물론…. 죽을 생각은 없다.

그렇기에 벙커로 가는 거다. 승리를 위해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내 여자들의 온기를 받기 위해서.

벙커에 도착하자 돌아온 나를 미나가 반갑게 맞이한다.

"일찍왔네요! 어서 와요."

포근한 온기. 따듯한 기운.

그렇게 포옹하고 있는데 승희와 안나가 슬쩍 얼굴을 내밀더니 바로 다가온다.

"오! 안 늦었어!"

"썽철! 어…. 어…. 반가워!"

나는 피식 웃으며 승희를 꼭 안아줬다.

내 모습에 약간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승희. 역시…. 예리하네.

그렇게 안나도 꼭 끌어안았다.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저 눈을 크게 뜨고 있는 안나.

"뭐야. 벌써 왔어?"

옆구리를 긁으며 터덜터덜 나오던 세아는 뭔가 예상한 분위기가 아니란 걸 느꼈는지 그대로 우뚝 선다.

내가 다가가서 끌어안자 당황해 하는 세아.

"뭐…. 뭐야. 무슨 일이야?"

아무 말없이 꼭 끌어안은 뒤 나는 벙커 입구로 가서 네 여자를 바라봤다.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네 여자.

"다시 다녀올게."

"어디 가는 데!"

세아가 급하게 소리 질렀고, 나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물론…. 나는 죽을 생각 없어. 너희들을 놔두고 어떻게 죽니. 근데…. 다른 사람들은 아닐지 몰라. 그러니까 너희도 기도해줘. 오늘 밤 아무도 죽지 않기를."

"대체…. 뭔데!? 말을 해봐!"

그렇게 다그치는 세아를 미나가 가만히 끌어안았다.

그리고 승희가 반걸음 앞으로 나와 나에게 말한다.

"믿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그래. 다녀올게."

그리고 그대로 바깥으로 나왔다.

좋아. 네 여신의 축복을 받았으니…. 이제는 나만 잘하면 되겠지.

다시 물류센터로 날아간다.

머릿속이 헝클어진 듯 복잡하다.

누굴 데려가야 하지? 가서, 어떻게 해야 하지?

모르겠다. 복잡하다.

상대를 전혀 모르는데…. 이렇게 우르르 몰려가는 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근데…. 가서 본다고 알아?

말도 안 통하고 알아듣지도 못한다. 매혹도 안 통하고 뭐 되는 게 아무것도 없다.

상황에 맞게 임기응변으로 대처하고 이쪽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으로 공략하는 수밖에 없다.

"후우…."

크게 한숨을 내뱉자 하얀 입김이 차가운 공기에 녹아들며 빠르게 옆으로 스쳐 지나간다.

좋아. 한숨도 인제 그만 쉬자.

내가 혼자 가서 야금야금 다 죽일 수도 있지만…. 이들도 강해져야 할 필요가 있다.

남을 죽인다는 것, 살아남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아야 하고.

물론, 나는 아무도 죽게 할 생각은 없지만.

이건 물류센터에 있는 이들의 시험이자 나에 대한 시험이다.

생존의 시험과 통솔의 시험.

과연 내가 사람들을 이끌 자격이 있는가.

정확한 판단을 내리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쓸 수 있는가.

짱개들…. 그 많은 숫자가 전부 전투원은 아닐 거다.

적당한 인원, 적당한 상대.

이들도 경험치를 쌓을 필요가 있어. 그래야 성장하지.

짱개들이 모여있던 학교 체육관.

그 앞에 세워진 승합차들을 확인했다.

승합차 두 대중 한대는 차 키가 있고 다른 한대에는 없었다.

음…. 뭐 한 대는 있으니까 됐고. 다른 한 대는 앞 유리 깨진 거 있으니까. 두 대면 되겠네.

탐지가 켜진 채로 물류센터에 도착하니 사람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있다.

아…. 정말. 한 시간 뒤라니까. 뭐 벌써 모여있어.

그대로 회의실 벽까지 날아가 페이즈 아웃을 썼다.

벽을 뚫고 들어가니 다들 심각한 표정으로 앉아있다.

나참. 벌써 긴장하고 그래.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니 다들 깜짝 놀라는 모습.

음…. 이정도로 놀라면 안 되는데. 이런 건 투명화로도 가능하잖아.

"다 모이셨네요."

자연스럽게 중앙에 비워진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내가 앉자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해 모인다.

다소 부담스러운 시선들. 하지만…. 이 정도로 부담을 느껴선 안 되겠지.

"길게 말할 필요는 없겠죠. 오늘 밤 우리는 짱개 놈들의 본거지를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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