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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하기 힘든 여자
무슨 스킬을 고를지 심도 있게 토론하는 남자들을 두고 밖으로 나왔다.
겨울. 아직도 겨울.
올해 겨울은 유난히 길다.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고, 그건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다.
빨리 겨울이 지나갔으면 좋겠어. 봄이 왔으면 좋겠다고.
느긋함을 느끼고 싶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약동하는 생명. 멸망한 세상에서도 새로운 싹이 돋는 걸 보고 싶어.
그렇게 밖에서 차가운 바람을 폐부에 집어넣는다.
정신이 바짝 날 선 칼날이 된 느낌이야. 이럴 때 복잡한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한 것을 후회했다.
"뭐 해."
항상 탐지를 돌리지만, 물류센터 안쪽이라 약간 방심하고 있었나 보다.
주변의 기척이 많으니 안 돌리고 있어서 그랬긴 했지만…. 이렇게까지 누가 다가오는 것을 못 느끼고 있었다니.
물론, 반사는 항시 켜놓고 있기에 상관없지만…. 다가온 이가 지연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반사가 막을 수 없는 스킬. 번개 파동을 가지고 있는 여자.
온갖 못된 짓은 다 한 다음 결국 물류창고로 보낸 여자.
이 안에서 유일하게 나에게 증오를 가지고 있는 여자.
"탄식."
"탄식?"
"어."
"무슨 탄식?"
"아직도 겨울인 것에 대해서."
"모르겠네."
"나도 몰라."
나도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그냥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있는 기분.
왜 하필 지연이지? 솔직히 말해서…. 껄끄럽다.
다른 여자들이라면 내가 알량하게 베푼 게 있기에 조금이라도 안심할 구석이 있지만, 이 여자는 다르다.
잘한 짓이 없으니까. 아무리 과실비율을 따져봐도 100대0이 나오는 일방적인 관계.
그런 여자가 내 옆에 서 있다. 나랑 같은 방향을 보면서 입으로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한마디라도 한다면 나는 짜릿한 감각을 느끼며 바닥에 쓰러지게 되겠지.
이 여자를 미끼로 뒀을 때 봤던 걸 생각하면 번개 파동은 그래도 단번에 사람을 죽이진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짧은 시간에 포션 같은 것을 먹을 정도로 여유롭지는 않다.
분명 그런 여자인데…. 나를 바로 죽일 수 있는 그런 여잔데…. 이상하게 긴장이 되지 않는다.
왜일까? 왜 이 여자가 나를 죽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고마워."
"어?"
예상치 못한 말에 등신 같은 표정으로 반문했다.
하…. 씨발. 이렇게 한심한 모습이라니.
"여기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그때 제대로 인사도 못 했어."
"아…."
그녀의 모습은 뭐라고 해야 하나. 그래. 비구니. 혹은 수녀. 그런 모습 같다.
뭔가에 초탈해진 모습이다. 뭔가를 깨달은 사람? 마음의 짐을 모두 벗어버린 사람?
내가 지연이에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게 그것 때문인 것 같다.
약간…. 신성한 느낌이 들 정도의 모습. 신성하다기보단…. 정갈한? 모르겠네.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정리가 된 기분? 그런 건가?
"나랑 이야기 좀 하지 않을래?"
"그래."
그녀의 제안은 거절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승낙했고, 앞장서서 걸어가는 그녀의 뒤를 따라 걸었다.
수확했는지 비어있는 비닐하우스. 그 안에 들어온 지연이의 옆에 섰다.
왠지 마주 보고설 용기가 안 난다. 딱 이 자리가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 같다.
아니 사실 이 자리도 아니지…. 번개 파동 범위 바깥으로 나가야지.
근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는 걸까?
"나 말이야."
"응."
"네가 어제 오지 않았으면 내가 나가려고 했어."
"뭐?"
"그 중국인들. 내가 나가서 죽이려고 했다고."
"네가 어떻게…. 네가 나갔으면 너는 스킬 한번 못 쓰고 죽었을 거야."
"글쎄. 그건 모르지. 운 좋게 몇 명 정도는 죽이고 죽었을지도."
"죽을 걸 알고 나간다고?"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어떻게 그 많은 녀석을 다 죽이고 살아남아.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아니…. 그게 무슨 소리야? 자살이잖아?"
"맞아."
"대체 왜!?"
"뭐가?"
"왜 죽으려 한 건데!?"
"왜 죽으면 안 되는데?"
지연이의 말에 할 말이 없어졌다. 그러게. 지연이가 자신의 목숨을 어떻게 하는 것에 대해 내가 참견할 권리가 있나?
이미 한번 내 맘대로 구해놓고 이곳에 버리듯 방치했다. 그래놓고 인제 와서?
내가 그렇게 입을 다물고 있자 지연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웃기지? 이 스킬이란 거? 여기 와서 네가 구해준 여자들과 이야기 하면서 많은 것을 들었어. 생산 스킬들. 비공격 스킬들. 그런 걸 고른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들. 물론 다들 아픈 부분이 많아서 그런지 전부 속 시원히 이야기는 하지 않더라. 근데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부끄러워졌지. 나는 참 편하게 살았구나. 그래서 내가 할 게 없나 하고 생각하고 있었어."
그저 아무 말 없이 듣는다. 아니. 할 말이 없지.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기영이랑 창호. 네가 걔들을 죽인 거 원망 안 해."
그때 그 투명 듀오…. 그 녀석들 말하는 건가.
"혹시나 오해하고 있을까 봐 하는 말이야. 그 녀석들은 나랑 그렇게 오래 알던 애들도 아니니까. 그저 서로 거래를 하고 있던 사이일 뿐이지."
"나는 네가 나를 싫어하는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너를 싫어했던 건 네가 종잡을 수가 없어서야."
"아…. 그래. 그건 미안하다. 내가 할 말이 없네."
지연이에 대한 건…. 내가 정말 할 말이 없다. 나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냥 정말로 내키는 대로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때는 뭐랄까…. 미쳐서 방황하던 때였지.
"대체…. 왜 그런 거야?"
"뭐가."
"나를 가지고 놀고 그렇다고 죽이는 것도 아니고 그러면서도 보살피고 그러다가 버려놓고 다시 또 구해주고 이런 곳에 방치해놓고…."
"그건…."
"그리고…. 죽으려고 마음먹었는데 왜 또 나타나서 나를 구하냐고."
"아니…. 어제 온건 우연이었어."
"내가 상동에서 죽을 뻔했을 때 구해준 건?"
"그건…. 내가 일부러 풀어놓고 지켜본 거라고…."
"어제는 아니고?"
"하아…. 아니야. 어제는 우연이었다고. 내가 어떻게 네가 나갈 걸 알겠어."
"그래도…. 너는 나를 구했어."
뭔가 조금 많이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오해라기보단…. 뭐라고 해야 하나 과대평가? 착각?
아무 의미 없이 한 행동들을 자기 멋대로 재단해서 마구 끼워 맞추는 느낌이다.
상당히 많은 것들을 자기 마음대로 해석한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 알려줘야 할지도 막막한 수준.
"난…. 그게 궁금한 거야. 왜 죽게 내버려 두지 않지? 왜 나를 살리는 거야?"
"뭐?"
"무슨 짓을 했던지 그건 상관없어. 중요한 건 내 목숨이니까. 네가 나에게 장난질을 했든 강간을 했든 그건…. 물론 별거 아닌 일은 아니지만…. 어쨌든 목숨보다 중요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 그런데 왜 자꾸 나를 살려? 왜 죽는 걸 막아? 나는 그게 궁금해."
"하아. 대체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는지 답답하긴 한데…."
"아니야. 내 질문에 대답해 주면 돼. 왜 나를 살려놓은 거냐고."
"너는 지금 니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거 같은데…. 솔직히 말하면 그냥 변덕이었어. 죽는 게 아깝다고 생각했을 뿐이라고."
"하…. 진짜 모르겠어. 너란 사람을."
씨발…. 나도 모르겠다. 대체 어떻게 생각하면 이렇게 미화가 되는 건데.
"나하고 섹스는 왜 한 거야?"
"뭐?
약간 어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이 여자는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연서 언니나 미연 언니, 미래, 민주 언니나 소희 언니. 나보다 뒤에 들어온 사람들. 전부. 너랑 했다는 사람 없었어. 유진이나 지원이도 그래. 서현이나 현정이도 그렇고. 아무도 너랑 한사람이 없어. 근데 왜 나하고는 한 거야?"
착각이…. 점점 산으로 간다. 물론 진영이 동생 현정이에게 한 건 아무도 모르니 그렇다 치고…. 서현이는…. 말을 안 한 건가? 그냥 구해줬다고만 한 거야? 진영이 때문인가? 지연이 뒤에 온 여자들이야 그럴 경황이 아니었긴 했지만…. 하. 미치겠네.
"지연아. 뭔가 착각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네가 싫지 않아."
아…. 미쳐버리겠네. 껄끄러운 증오는 사라진 거 같은데…. 더 귀찮은 상태가 된 거 같다. 이걸 뭐라고 부르지? 편집증? 아니 그런 것까진 아니고…. 아오. 머리 아프네.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거 같은데.
폭주하는 기관차를 보는 느낌이다. 망상과 자기합리화. 보고 싶은 것만 확대해서 끼워 맞추는 모습.
이게 이 여자의 자기합리화인가? 아. 모르겠다. 너무 복잡한데.
분명 지연이는 매력적인 여자다. 그래서 살려둔 건 맞고. 하지만 스킬도 그렇고 내가 한 짓이 있기에 모질게 대하지 못했던 거다.
원래라면 죽였어도 됐지만…. 정말 변덕이었을 뿐이다. 그저 살아갈 기회를 주고 싶었을 뿐.
게다가 공격 스킬이니 혹시나 물류센터의 방어에 도움이 될까 해서 보냈던 거고.
단지 그것뿐인데 어떻게 그게 이렇게 됐는지 잘 모르겠다. 너무 어려워.
"지연아."
"말해."
"솔직하게 물어볼게. 나는 복잡한 거 싫어. 네가 원하는 게 뭐야?"
잠시 아무 말이 없는 지연. 발로 바닥의 흙을 한참 이리저리 비비다가 겨우 입을 연다.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그건 말했잖아. 죽는 게 아깝다고 생각한다고."
"그것뿐이야?"
"매력적이라고도 생각하고 있어."
그건 사실이다. 나는 아무 여자하고 하지 않으니까.
내 말을 들은 지연이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티 나지 않게 보이려는 것 같지만…. 뻔히 보인다. 하. 이것 참.
"안고 싶을 정도로?"
미치겠네. 결국은 그건가.
대체…. 어떻게 하면 이런 사고구조를 가질 수 있는 거지?
"내가 그렇게 쓰레기 같은 짓을 한데다가 너랑 같이 살았던 사람들까지 죽였는데, 안기고 싶다고?"
"말했잖아. 걔들의 죽음에 대해서 너에게 원망하지 않는다고."
"그래. 그건 내가 지레짐작했다고 쳐. 근데 내가 한 짓이 있는데? 그런 걸 당하고서도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건…. 네 취향이 별났을 수도 있지."
뭐지…. 어떻게 그렇게 결론이 나는 거야?
"하아…. 변명하는 것도 이상하네. 내가 잘못한 게 맞으니 뭐라고 할 말도 없고."
"그리고…. 그렇게 싫지만은 않았어. 그때는 상황이 그래서 반발했긴 했지만."
눈을 질끈 감았다.
미쳤어. 그래. 이 여자도 미친 여자야. 그래. 그렇게 생각하니까 편하다.
괜히 어렵게 뭔가를 정의하려고 하니까 힘들었던 거야.
내가 변덕이 심한 미친놈이었던 것만큼, 이 여자도 자신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미친 여자였던 거야.
아. 속 시원하다. 해결 끝.
하아…. 씨발. 이랬으면 좋겠는데.
"설령…. 그렇다고 할지라도, 나는 너와 할 수 없어."
"왜?"
나를 바라보는 표정. 처음에 느꼈던 초탈한 모습 같은 건 이미 사라졌다.
약간…. 기이한 열망 같은 게 자리 잡은 표정. 살짝…. 무서울 정도로.
"네 스킬. 너는 나를 언제든지 죽일 수 있어. 지금 내가 니 옆에 있는 것도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나는 니 옆에 있는 것 자체가 불안해."
"내가 너를 왜 죽여."
"니가 나를 왜 못 죽여?"
아무 말이 없는 지연. 다시 발끝으로 흙을 비빈다.
대체….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다. 솔직히 말해서 당장이라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그렇지 않는 건 내가 뿌린 씨앗이기에…. 조금의 책임감이라도 느끼고 있기에 이러고 있는 것뿐이다.
"내가…. 입이라도 틀어막고 있으면 괜찮은 거야? 아니…. 손까지 묶어야 하나?"
다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미치겠네. 이 여자…. 진심인 거야?
그렇게 나를 원하는 거야? 그렇게 나에게 당해놓고 그걸 또 바라는 거야?
스스로 당하는 걸 원하는…. 맙소사. 그런 거였어?
"너도 단단히 미쳤구나?"
어이없어하는 나의 말에 지연이는 옅게 미소지었다.
진심인가 보네. 근데…. 왜 끌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