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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자요. 뽑기 시간."
나를 바라보는 네 명의 어이없는 시선.
"뭘 그렇게 봐요? 뽑기 몰라요?"
"아니…. 대체…."
승규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그의 말을 끊고 내가 말했다.
"물류센터를 건드린 짱개는 30마리가 아니고 50은 됐어요. 그리고 그놈들은 여기서 다 죽었죠. 결국, 이 네 마리는 50명의 코인 압축분이에요. 막 뒤엉키면서 싸우느라 코인을 얼마나 먹었는지는 몰라요. 그러니 뽑기에요. 코인을 양도할 수 없는 게 슬프네."
내 말을 듣고 이해했다는 표정.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쉽게 받아들여지진 않을 거다.
짱개 50마리. 일주일을 넘게 귀찮게 군 녀석들. 그런 놈들이 한 시간도 안돼서 전멸당했다.
내가 조금 과격하게 나간 것도 있지만, 사실 이렇게 되는 건 정해진 결과다.
이놈들이 나를 공격할 방법이 없잖아. 특히 투명화로 비행하고 있으면 광역 스킬 무효화가 있더라도 쓸 수 없다.
바닥을 찍어서 그 반경 안에 있는 사람의 스킬들이 모두 풀리는 건데 그런걸 맞을 리가 없지.
게다가 이제는 일대 다수가 붙으면 오히려 다수가 불리한 경우가 많다.
광역 스킬이 아군을 피해서 나가는 게 아니니까.
나 같은 경우에도 그렇다.
나를 잡으려면 광역 스킬로 아예 범위로 조지거나 물리적 공격으로 나를 맞추는 수밖에 없는데, 다수와 싸울 때면 광역 스킬 같은 건 걱정 안 하게 되니까.
상성과 약점 보완.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놈들과 싸우면 내가 질 이유가 없다.
실수하거나 우연히 얻어걸리지 않는 한 말이지.
"누구부터 할래요? 가위바위보?"
"나부터 하지."
"오. 역시 승규 형. 자요."
내가 마체테를 내밀자 담담하게 받아드는 승규.
그러더니 망설임 없이 짱개 앞으로 다가갔다.
원래도 사람 죽이는 것에 내성이 생긴 사람이다.
게다가 농사일을 하면서 근력 운동을 쉬지 않았는지 마체테를 치켜든 팔이 팽팽하게 부풀어 오른다.
"흡."
깔끔하게 목을 그은 승규.
빛이 터지고 코인이 승규에게 빨려 들어간다.
"얼마?"
"28만…."
"오. 쏠쏠하네. 총 얼마 가지고 있어요?"
"32만 정도."
"이야. 그럼 30만짜리 스킬 배울 수 있겠네. 축하해요. 다음?"
황당하다는 표정의 승규. 아무래도 그렇겠지. 28만이라는 코인이 애 이름이 아니다.
근데 이 새끼들 생각보다 코인이 많았나? 이정도 인원이 코인이 많기는 쉽지 않은데.
아이씨. 하나 정도 잡고 정보를 캐고 싶긴 한데 짱개어를 하는 사람이 없으니.
"형."
"어…?"
"형수님. 짱개어도 할 줄 알아요?"
"어…. 아니. 노어랑 영어만 할걸."
"아깝네. 센터에 짱개어 할 줄 아는 사람 없죠?"
"글쎄. 모르겠네. 그런 건 확인해 본 적이 없어서."
쩝. 됐다. 어차피 세희 년을 여기로 끌고 오는 것도 힘드니까.
이 니글거리는 짱개 새끼들은 죽여도 죽여도 어디서 기어 나오는지. 어휴. 씨발.
"다음은 누구야? 진영이 너 하려고?"
"네."
"그래. 고고."
마체테를 들고 있는 힘껏 내려치는 진영이. 짱개는 한 번에 죽었고 빛과 코인이 되었다.
"사장님 나이스 샷. 과연 얼마?"
"헉."
"왜?"
"4…. 42만."
"와우. 대박이네. 이 미친 짱개들은 대체 얼마씩 들고 있던 거야? 승규 형 얼마 나왔다고요? 28만?"
"어…."
"이야. 벌써 70만? 야야. 민준이랑 동현이도 빨리해봐라."
민준이가 바로 마체테를 집어 들었고 그대로 내리쳤다.
한 방에 죽이는 게 실패했지만 당황하지 않고 바로 내리찍는 녀석.
짱개가 죽고 민준이 역시 눈을 크게 뜬다.
"넌 얼마?"
"22만…."
"오. 나름 괜찮네. 넌 얼마나 있냐?"
"저…. 만 정도밖에 없었어요."
"아. 그래? 뭐 어때. 다음 동현? 고고씽."
동현이도 바로 짱개를 마무리했고 눈을 크게 뜬다.
"너는?"
"34만요…. 허허."
"오우. 훌륭하네. 민준이만 조금 아쉽게 됐어."
"이게 아쉽다고요…. 22만이?"
나는 어깨를 으쓱해주고 승규를 바라봤다.
"스킬. 뭐 배울 거에요?"
"글쎄. 고민해 봐야지. 또 언제 얻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함부로 정할 수야 있나."
"일단 돌아가죠. 줄 것도 있고."
"그래."
모두와 함께 일단 물류센터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짱개놈들을 쳐 잡은 흥분이 식어서 그런지 피로가 확 몰려온다.
회복 포션 중을 하나 사서 한 번에 들이키니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긴 한데…. 머릿속을 박박 긁는 듯한 피로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후우. 역시 쉽지 않아.
빨리 가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일단 버틴다.
고작 하루 안 잔 거로 앓는 소리를 낼 수는 없지.
물류센터의 회의실 같은 곳.
그리고 거기에 앉은 나와 네 명.
나는 스킬 표가 적힌 종이를 꺼내 승규에게 줬다.
"이건…. 허…."
"이런 게 있어야 스킬을 올릴 동기가 생기겠죠? 근데 코인 벌기가 쉽지 않을 테니…. 먼 미래의 일이네요. 아니면 아예 기회가 없거나."
"그렇긴…. 하지."
종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승규.
진영이와 민준이, 동현이도 승규의 뒤로 와서 종이를 보기 시작했다.
"복사기 없어요? 여기 사무실이면 복사기 정도는 하나 있을 텐데."
"아. 그러네. 갔다 올게."
"제가 다녀올게요."
진영이가 종이를 받아 후다닥 뛰어간다.
뭐가 저렇게 좋냐? 하긴…. 스킬 배울 생각에 신나겠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영이가 돌아왔고, 다들 종이에 얼굴을 파묻고 스킬들을 보느라 정신이 없어졌다.
가장 열정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은 역시 진영이.
그동안 소주 생성 따위의 스킬을 들고 있던 녀석이라 그런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스킬이 생기자 눈이 돌아가는 모습.
"혹시…. 권장하는 스킬이 있어?"
한참 종이를 바라보던 승규가 나를 향해 물어본다.
"권장 스킬이야 많죠. 배워도 배워도 모자란 게 스킬인데."
"으음…. 그러게. 좋아 보이는 게 너무 많다."
"일단 말해드릴 수 있는 것은, 여러분들은 엄청나게 늦었다는 거예요."
내 말에 다들 무슨 소리인가 하고 바라본다.
"지금 그나마 내로라하는 녀석들은 스킬 네 개, 거의 다섯 개까지 있어요."
"허…."
승규의 한탄 섞인 탄식.
"그리고 여러분들은 그들을 절대 따라잡을 수 없어요. 허구한 날 미친 듯이 나가서 사람들을 쳐 죽인다고 해도 이미 물리적인 시간을 이길 수 없으니까. 결국, 여러분들은 그 녀석들을 영원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거죠."
내 잔인할 정도로 현실을 직시하는 말에 다들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진다.
"하지만, 왜 그래야 하죠?"
"응?"
"그들과 여러분들은 아예 상황이 달라요. 돌아다니면서 사람을 죽이는 놈들은 신경 써야 할 게 많죠. 하지만 여긴 달라요. 지키는 거잖아요. 필요한 스킬과 효과가 크게 갈리는 스킬이 많아요. 그러니 굳이 전부 배울 필요가 없어요. 게다가 여기는 힘을 합칠 수 있으니까."
내 말에 다들 어느 정도는 이해했다는 표정이 된다.
하지만 말을 이렇게 해도 어쩔 수 없는 스킬들이 몇 개 있다.
그렇기에 이들에게 아무리 희망을 줘도 완벽한 방어는 불가능하다.
나는 그것을 알기에 속이 조금 쓰렸다. 그건 어쩔 수 없어. 순전히 운이지.
"아직 나도 본 적이 없지만, 거기 메테오 같은 스킬. 그런 건 이름만 봐도 뭔지 알겠죠? 어떤 미친놈이 지나가다가 여기에 그거 하나 떨어뜨리면 그냥 끝이에요. 아시겠어요?"
"그렇지…."
"짱개놈들이 일주일이나 여길 쳐들어오려고 했었죠? 근데 막은 이유가 뭘까요?"
"여기 방어가 튼튼해서?"
민준이가 말했지만, 나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그가 입을 다물었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거기에 네 개 이상 스킬을 가진 녀석이 없어서예요. 거기 티어4라고 돼 있는 스킬에 페이즈 아웃이라고 있죠?"
"응."
"그것만 있으면 이런 벽 같은 건 그냥 뚫고 들어올 수 있어요. 아니지. 저놈들 중에 기본 스킬인 폭발만 있었어도 이렇게 못 버텼을 것요?"
"폭발? 있었는데?"
"폭발이 있었다고요?"
"어. 그걸로 나무 벽 만들어 놓은 걸 부수고 들어오려고 했어. 물론 바로 성장이랑 식물 조종으로 메꿨지만."
"그래요? 그건 잘하셨네. 어쨌든, 완벽한 방어는 못 해요. 마음 같아서는…."
그래. 솔직히 말해서 이들의 생존 확률을 올리려면 오지 산간으로 보내는 게 낫다.
펜스가 생겼으니 이 사람들이 이렇게 가까이 있을 필요도 없다.
게다가 어차피 나는 비행이 있으니 얼마든지 왔다 갔다 할 수도 있고.
"마음 같아서는?"
"사람들이 거의 안 오는 시골로 보내버리고 싶어요. 평소에도 사람들이 안 오는 곳. 세상이 망하기 전에도 인적이 드물었던 곳. 나 같은 미친놈이 지나가다가 실수로라도 발견하지 못하는 곳."
"으음…."
"MRE가 아직 꽤 남았죠?"
"그렇지."
"생산된 식량 같은 것도 꽤 있고요?"
"일단은."
"자리를 옮기면 지금과 같은 식량 생산…. 가능하겠어요?"
"사실…."
승규가 자신의 목에 잠긴 단추를 하나 풀면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도 그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야. 일단 그런 생각을 한 가장 큰 이유는…. 여기는 너무 공간이 한정적이야."
"그렇긴 하죠."
"조금 더 큰 공간이 필요한 건 사실이야. 여기가 넓긴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아주 넓은 것도 아니지. 안 쓰는 건물도 많고."
"그래서요."
"하지만 내 마음대로 이사를 생각하긴 힘드니까. 무엇보다 어디가 좋은지도 모르고."
"흐음."
이들을 멀리 보내버리는 것. 좋은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더는 필요 없어진 물류센터를 내 시야에서 치워버리려는 게 아닐까? 하고.
솔직히 그런 마음이 없는 게 아니다.
여자를 원할 때마다 마음껏 취하기 위해서, 거기에 MRE를 보관해 줄 사람까지 필요해서.
그렇게 만든 물류센터다. 근데…. 이젠 필요가 없어진 건 맞다.
벙커에 있는 네 명의 여자. 그리고 민희. 펜스의 여자들.
마음껏 손댈 수 있는 여자들이 많아졌으니 물류센터의 여자들이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이 당연하지.
무엇보다 이들에게는 모질게 대하기가 어렵다.
뭐라고 해야 하나. 관계를 부수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모르겠네. 무슨 느낌인지 나도 설명이 잘 안 되네.
서현이야 이제 진영이의 애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애증의 지연이나 식물 자매, 미래, 그리고 뒤에 들어온 두 여자.
뒤에 들어온 여자들이야 어차피 그럴 목적은 아니었으니 빼도 되지만, 어쨌든 그렇다.
지연이, 식물 자매, 미래.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지연이.
아니네. 자매도. 아니…. 미래도? 어휴. 미친 새끼. 잠을 좀 자야겠구나? 제정신이 아니야.
"성철아?"
"네?"
내가 딴생각을 하고 있자 승규가 나를 부른다.
"괜찮아?"
"아. 어제 밤샘해서. 괜찮아요."
"그렇구나. 그럼 어서 가서 쉬어라. 아니면 여기서 좀 쉴래?"
"음…. 아니요. 그냥 갈게요. 대신, 내일 다시 올게요. 말짱한 정신으로."
"그럴래? 그래라. 우리도 이걸 좀 보고 스킬은 내일 정할게. 그럼."
"알았어요. 기왕이면 지금 해드리고 싶은데…. 정신이 없네요."
"그래. 그래 보인다. 어서 가."
"그럼 갈게요. 인사는 안 하고 간다고 전해줘요. 어차피 내일 또 올 거니까."
"응. 알았어."
나는 그대로 페이즈 아웃을 썼다.
뿌옇게 변한 세상에서 내가 사라진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 사람들이 보인다.
하긴 놀라겠지. 이건 투명화랑 다르니까.
그래. 이런 거다. 이들은 너무 나약하다. 하아…. 모르겠다. 이상하게 머리가 복잡하네.
그렇게 야외로 나온 나는 바로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고 투명화와 비행을 썼다.
그리고 그대로 하늘로 솟구치며 벙커로 향한다.
날아가다가 사고사가 많다고?
무슨 소리인지 알 거 같다. 지금의 나는 약간 졸음운전 같은 상황이다.
캬. 이러고 죽으면 밑에 떨어진 코인 줍는 놈은 대박이겠네. 자그마치 500만이니까.
그렇게 겨우 벙커로 돌아온 나는 나를 반겨주는 내 여자들에게 뭐라고 했는지도 제대로 기억도 못 하고 씻지도 않은 채 옷만 벗고 침대에 누웠다.
근데…. 이런 상태에서도 저절로 잠은 못 자는 거니?
하. 씨발 불면증. 개 같은 불면증.
나는 나에게 수면을 걸며 겨우겨우 잠이 들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