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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
"나한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 전부 이야기해줄래요?"
담배 한 모금을 머금다 가볍게 내뿜은 민희가 말했다.
"어떤 거?"
"컴퍼니에 대해서요. 당신이 한 모든 것들."
나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민희에게 전부 이야기해줬다.
처음 정종찬을 만난 이야기부터 민희가 있었던 아울렛의 이야기. 오늘 일어난 컴퍼니의 멸망. 그리고 잔당 처리까지.
이야기를 다 들은 민희는 조금 생각하더니 나를 보고 말한다.
"캐슬. 나에게 준다고 했죠?"
"응."
"알았어요. 그럼…. 이 일 나에게 맡겨줄래요?"
"응? 너한테?"
"네. 소 부장네 팀원들. 걔들은 나름 순수한 애들이에요. 다른 팀들은 안 그렇지만 그 팀은 소 부장이 제법 엄하게 키운 팀이니까요. 그냥 죽이기엔 너무 아깝죠."
"뭐, 그런 건 내가 모르고."
"아무튼, 일단 나에게 맡겨줘요. 어느 정도는 될 것 같아. 그리고…. 한 일주일 뒤에 캐슬로 와줄래요?"
"일주일?"
"네. 당신 아까 보여준 스킬. 그거면 아무도 모르게 나한테 올 수 있죠?"
"되지. 어려운 게 아니지."
"그럼, 나에게 와줘요. 캐슬에 있을 테니."
"흐음…. 괜찮겠어? 혼자?"
"네. 될 거에요. 문제는 조 상무 그 사람인데…. 사람은 천박해도 일은 잘하는 사람이에요. 능력도 있고. 상무란 직함을 포커로 얻은 건 아니니까."
"감당할 수 있겠어?"
"그래서 일주일이에요. 아. 그러고 보니 조 상무 스킬을 전부 모르는데."
"인사기록카드."
"아. 맞다. 그렇군요. 그럼 제가 본사를 한번 들렀다 가면 되겠네요."
"흐음…."
"너무 걱정 말아요. 안 죽으면 되잖아요."
"그렇지. 안 죽으면 되긴 하지만…. 곤란하거나 안 좋은 일은 안 당했으면 좋겠는데."
"어머. 그렇게 저를 걱정해주는 거예요?"
저 눈매, 손짓, 몸을 비트는 동작.
하나하나에 끼와 유혹하는 몸짓이 담겨있다.
하여간…. 요사스러운 여자야. 무서울 정도라니까.
"당연하지. 이제 어디 가서 함부로 죽으면 안 돼. 내 허락받고 죽어야 해. 물론 허락해주진 않겠지만."
"나 참…. 세상에. 정민희가 연하남에게 휘둘리면서 살게 되다니. 저를 아는 사람들이 봤으면 두 눈으로 봐도 믿지 못하겠네요."
"나이는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그렇게 말하고 일어나 민희의 입술에 키스했다.
담배 맛. 아직 그녀의 입술에선 담배 맛이 났다.
"가려고요?"
"응. 피곤해. 이제 가서 쉬어야지."
"어젯밤에…. 안 잤죠?"
"어."
"무섭네요. 불면증은."
"이젠 익숙해서 문제지."
"그럼, 일주일 뒤에 봐요."
"그래. 캐슬로 여왕님을 찾아가도록 하지."
피식하고 웃는 민희.
나는 아까 벗은 침낭을 두르고 하이바를 썼다.
"그 헬멧이랑 침낭은 어떻게 안 돼요?"
"좋은 방법이 없어."
"재희. 그 애가 입고 있던 거 입으면 될 텐데."
"재희?"
"당신이 제일 먼저 죽인 우리 팀의 여자요."
민희의 그 말에 약간 소름이 돋았다.
혹시…. 아니겠지?
"민희야.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진지하게 물어보는 거야. 나는 너에게 매혹 걸고 물어볼 수 있지만 너를 믿고 그냥 물어보는 거고. 내가 컴퍼니의 모두를 죽이고 너희 팀원들까지 다 죽인 거. 아무 문제 없는 거지? 네 동생이 있었다던가 남자친구가 있었다던가 그런 거 아니지?"
내 질문에 피식하고 웃는 민희.
그러더니 내게 다가와 하이바를 벗기고 키스해준다.
"걱정 마요. 그런 거 없으니까. 며칠을 함께 있었는데 아직도 못 믿는 거예요?"
의심이란 것은 참 무섭다. 한번 심어진 의심의 씨앗은 어떻게든 땅속에서 머물며 싹을 틔울 기회를 노린다.
씨앗을 통째로 퍼내지 않는 이상 의심의 시선은 지워지지 않을 테지.
"아직도 뭐가 남은 거 같은데요? 좋아요. 매혹 해도 돼요. 당신에게 아주 조금이라도 의심을 받느니 나의 결백을 확실하게 주장하는 게 낫지."
"난 정말 쓸 거야."
"물론이죠. 이런 거로 삐지거나 꽁하진 않아요. 그게 나에게도 좋아요. 간단하고 확실하게 당신에게 신뢰받는 방법이니까."
잘 조준해서 무효화를 쓰고 매혹을 걸었다.
나는 하란다면 하는 사람이니까.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민희. 그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민희."
"네."
"나를 원망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나?"
"음…. 아뇨."
"컴퍼니에 아끼거나 소중한 사람이 있었어?"
"아뇨."
"나를 죽이고 싶거나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
"아뇨."
다시 광역 스킬 무효화를 썼다.
매혹이 풀리자 눈을 깜빡이는 민희. 그리고 나를 향해 환하게 웃는 모습.
매혹이 걸렸을 때의 인위적인 웃음이 아닌 자연스러운 미소.
"어때요? 이제 신뢰가 생겼나요?"
"그러네. 이제 니가 삐지지만 않으면 되지."
"흥. 이런 거로 삐질 만큼 속 좁은 여자는 아니라고요."
"속 좁은 여자는 칭찬 아냐?"
"어휴.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드립을 치는 거에요?"
"미안해서."
민희의 허리를 팔로 감았다.
민희의 몸이 나에게 바짝 달라붙자 그 몸매가 모두 고스란히 내게 느껴진다.
"글쎄요. 나는 오히려 홀가분하다고 생각해요. 친자검사. 알죠?"
"어. 뭔지는 알지."
"나는 그런 사람이에요. 남자가 평생을 의심하면서 자기 자식이 맞나 의심하느니 차라리 시원하게 한번 검사해보라고 하는 사람."
"화끈하네."
"스스로 꿀리는 게 없으면 가능한 일이죠."
"그렇네. 고마워."
"고맙긴요. 받은 건 내가 더 많은데."
"그렇게 생각해주면 더 고맙고."
나를 살짝 밀어내는 민희.
"가요. 더 이러고 있다간 하고 싶어질 거 같아."
"윽…. 그러게. 나도 참기 힘들다. 도망가야지."
"후후. 가요. 잊지 말고 일주일 뒤에 오고요."
"알았어. 고생해."
다시 하이바를 쓰고 비행을 써서 몸을 살짝 띄웠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향하며 유리창에 부딪히기 전에 페이즈 아웃을 썼다.
세상이 뿌옇게 변하고 그대로 유리창을 통과한 나는 다시 페이즈 아웃을 해제했고 바로 비행을 써서 하늘 위로 올라간다.
그런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민희.
신기하네. 어떻게 이런 관계가 된 건지.
점점 멀어지는 그녀.
나는 그녀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멀어지자 투명화를 쓰고 빠르게 벙커로 향했다.
벙커로 날아가는 중에 잠시 고민했다.
잠시 물류센터를 들렀다 갈까? 아니면 그냥 벙커로 돌아갈까?
약간 피곤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금 당장 죽을 것 같은 느낌은 아니다.
음…. 그리 돌아가는 것도 아닌데. 들렀다 가자.
어떤지 보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는 게 아니니까. 굳이 만날 필요 없이 쓱 보기만 해도 되잖아.
속도를 최고로 올려서 물류센터로 향했다.
하늘을 날아서 가는 건 처음이라 약간 헤매긴 했지만 익숙한 길이라 그런지 금방 길을 찾을 수 있었다.
드디어 저 멀리 보이는 물류센터. 근데…. 모습이 이상하다.
내가 잘못 본 거야? 아니지?
가까이 다가가니 외곽에 울타리처럼 빽빽하게 심어놓은 나무들이 군데군데 그을려있었고 잔뜩 젖어있다.
뭐야? 이건 무슨 상황이야?
다급한 마음에 탐지를 키고 안으로 바로 들어갔다.
비닐하우스 안에 있는 사람. 가까이 가보니 승규였다. 내가 그대로 페이즈 아웃을 쓴 다음 비닐을 통과해 땅에 착지하고 해제하자 깜짝 놀라는 모습.
"승규 형?"
"으악!!"
"어어! 저예요! 나!"
아차. 하이바를 안 벗었구나.
하마터면 감전에 맞을 뻔한 나는 빠르게 하이바를 벗었고, 그제야 승규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다.
"으아. 내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면 바로 감전을 날렸을 거야."
"그러게요. 내가 부주의했네요. 근데…. 분위기 왜 이래요? 뭔가 심상치 않은데?"
"그래. 잘 왔어. 빨리 와달라고 기도한 보람이 있구나."
"뭐에요? 무슨 일이에요?"
"하아…. 말하자면 긴데, 우리는 공격 받고 있어."
"네? 공격이요? 어떤 미친놈들이?"
"일단 앉아라. 지금은 물러났으니까."
"아니, 그냥 말해봐요. 빠르고 간단하게."
"일주일 전부터 중국인들에게 공격받고 있어."
"짱깨!?"
"어. 그래. 짱깨 새끼들이지. 다행히 나무로 벽을 해놔서 침입까진 당하지 않고 있어."
"다치거나 죽은 사람은요?"
"다행히 없어. 부상이 있긴 있었는데 현정이의 힐이 있어서…."
"어딨어요? 이 씨발 새끼들은?"
"아까 아침에 공격 왔다가 다시 돌아갔어. 지금은 소강상태."
"하여간 이 씨발….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잡놈 새끼들. 있어 봐요. 다 죽이고 올 테니까."
"성철아! 잠깐!"
"왜요!?"
"숫자가 많아. 조심해야 해."
"짱개 새끼들의 유구한 전통이죠. 물량으로 밀어붙이는 거. 몇이나 되는데요?"
"적어도 30은 돼."
"씨발. 많이도 쳐왔네. 어느 쪽에서 왔는지 알아요?"
"어. 카메라 있는 쪽. 카메라는 망가졌지만."
"알겠어요. 다들 준비하고 있어요. 내가 부르면 언제든지 올 수 있게."
"어?"
"코인 먹을 준비하라고요. 준비해요!"
그대로 비닐하우스를 나가서 투명화와 비행을 썼다.
개 씨발 새끼들 감히 내 나와바리를 넘봐? 하여간 이 짱개 새끼들은 살면서 도움을 주는 게 하나도 없어.
전속력으로 하늘을 날아가며 탐지를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느껴지는 기척들.
초등학교 강당에 모여 있는 짱개 새끼들. 씨발. 바글바글하네! 이 바퀴벌레 같은 버러지들.
승규는 30마리라고 했는데 훨씬 더 많아 보인다. 한 50마리? 존나 많이도 왔네. 개 썅놈 새끼들. 어디 죽어봐라.
탐지가 있든 말든 바로 가까이 붙었다. 어차피 반사가 있으니 탐지 있는 놈이 공격 스킬을 써도 지가 당할 뿐이다.
다행히 전부 남자가 아니었다. 몇 명 여자가 껴있는 게 보인다.
바로 광역 스킬 무효화를 뿌리고 여자 넷에게 매혹을 건다. 그리고 외쳤다.
"주변에 있는 놈들! 다 죽여!"
내 말을 들은 여자들이 주변의 짱개들을 공격하기 시작……. 해야 하는데…. 아무 반응이 없다.
아. 씨발. 짱개 새끼들이지!?
웅성거리는 짱개들. 어디서 난 목소린지 깜짝 놀라 혼란스러운 모습.
씨발. 씨발. 씨발. 짱개어로 다죽여가 뭐지? 아 병신 새끼들 왜 말같지도 않은 언어를 써서…. 씨발.
"다 죽여! 올 킬! 킬! 킬 뎀 올!"
그제야 네 명 중 세 명이 주변의 짱개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씨발 그래도 영어 알아듣는 짱개가 있어서 다행이다. 씨발놈들. 아닌가 짧게 말해서 그런가?
"죽여! 죽여! 죽이라고!"
오. 씨발. 드디어 남은 여자 하나도 주변에 스킬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하긴 썅놈들. 우리나라에 와서 살았으면 한국어를 아주 못하진 않겠지. 내가 너무 길게 말했었나.
어쨌든 난리 부르스가 된 체육관.
나는 공중에서 빠르게 계속 움직이며 마체테를 들고 빠르게 하강하면서 한 놈씩 찍고 다시 떠올랐다.
정신없이 번쩍거리는 체육관. 짱개가 빠른 속도로 줄어든다.
여자 짱개 두 명이 쓰러졌지만 나는 다른 여자에게 매혹을 걸고 죽이라고 외쳤고 그렇게 하다보니 어느새 짱개 새끼들은 거의 반의반도 남지 않았다.
씨발…. 나도 광역 공격이 하나 있긴 있어야겠어. 이게 무슨 귀찮은 짓이야.
결국 여자들이 모두 쓰러졌다. 체육관 안쪽에 남은 건 짱개 열 명 정도.
무효화와 수면을 걸고 하나씩 찍어 죽인다.
탐지가 있는 놈이 없는지 우왕좌왕하면서 허둥대는 녀석들.
짱개가 네 명이 남았을 때, 나는 전부 다 재워버렸다.
후. 씨발 새끼들. 좆같은 새끼들. 염병할 놈들.
탐지를 돌려본다. 주변에 느껴지는 기척은 없다.
병신 같은 것들. 지들이 우세하다고 망보는 인원 같은 것도 안 세워 놓은 거야?
뭐, 세워 놨어도 아무 의미 없지만.
그대로 다시 물류센터로 돌아갔다.
내가 모습을 드러내고 땅으로 서서히 착륙하자 비닐하우스 안쪽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나를 보고 깜짝 놀라며 밖으로 나온다.
"으악. 날아다닌다고!?"
"대체 무슨…."
"성철씨?"
"와…."
각양각색의 반응. 나는 그들을 보면서 찬찬히 얼굴을 하나하나 바라봤다.
"후우. 일단…. 자기 스킬 마스터 한 사람? 손들어봐요."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진영이가 나를 보고 물었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진영이 너 소주 생성 마스터지?"
"네."
"너 따라오고. 다음? 스킬 마스터 한사람? 승규 형. 마스터 했죠?"
"어."
"형도 나오고요. 또 없어요?"
"저…. 저요."
"저도요."
“나도요….”
"저도…."
"저 마스터 했어요."
맨 처음에 마트에 있었던 여자. 이름이 뭐였지. 암튼 성장녀.
그리고 자매 중에 동생. 쟤도 성장이지. 자매 중에 언니. 쟤는 식물 조종이고.
그리고 민준이랑 동현이. 금속화랑 투명화. 쟤들도 마트 초반 애들.
"성장 둘은 일단 나중에. 성장 쓰는데도 바쁠 테니까. 언니 쪽도 마찬가지. 거기 남자 네 명. 나 따라와요."
내가 그대로 스윽 밖으로 나가자 승규가 나를 보고 외친다.
"어디가!? 지금 공격하러 가는 거야?"
"짱개는 다 죽었어요. 그냥 따라와요."
내 말에 깜짝 놀라는 승규. 그리고 그건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들의 놀라는 표정을 뒤로하고 나는 바깥을 향해 나갔고, 승규는 남은 사람들에게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한 뒤 진영이, 민준이, 동현이와 함께 부랴부랴 나를 따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