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43화 (24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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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업

바로 눈앞에 떠 있는 그것들 때문에 정말 아무것도 못 하고 굳어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치 촉수처럼 내 쪽으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검은 연기.

내가 겨우 입을 열어 '해제'라고 말할 수 있었던 건 그 누구보다 생존에 대한 갈망이 컸기 때문일 거다.

뿌옇게 보이던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왔고 현실에 다시 던져진 나는 그제야 깊게 한숨을 내뱉을 수 있었다.

"하아…."

온통 땀 범벅이 되어있는 나의 모습.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렇게 땀에 절여진 나의 몸을 급격하게 식힌다.

그 짧은 시간, 아주 잠시 들어갔던 그 시간 동안 얼마나 큰 공포를 느낀 거야?

오줌을 지리지 않은 게 용하다. 정말로. 진심으로.

씨발…. 이제야 욕이 나오네.

미친…. 미친미친. 저게 뭐지? 뭐였지?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내가 죽인 사람들과 관련이 있다는 거다.

아까 전에 보았던 그것 역시 뭔지 알 수 있었다.

정종찬. 그 새끼가 죽인 뭐시기 부장.

왜 컴퍼니 본사 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도 알겠어.

자신을 죽인 자를 바라보는 것.

씨발…. 씨발씨발. 대체 그게 뭔데? 죽은 사람의 영혼이야? 원한? 증오?

다시는 마주치기 싫은 모습이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 시선.

눈도 없는데 나를 바라보고 있다고 느껴지는 그 시선.

게다가…. 그 촉수 같던 연기는 뭐야. 뭐냐고. 대체 닿으면 어떻게 되는 건데.

차가운 공기에 땀이 어느 정도 식자 뜨거워졌던 내 머리도 제법 머리의 기능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페이즈 아웃.

이 세상을 벗어나는 스킬 같다고 생각은 했었다.

이쪽의 물리법칙과 개념이 통하지 않는 곳이잖아. 스킬도 안 써지고.

그럼 그 세상은 뭘까. 영혼의 세상? 그럼 죽은 사람은 전부 그렇게 되는 건가?

그렇다면…. 의문이 든다.

왜 그것밖에 없지? 그것만 있는 것이 말이 안 된다.

내가 죽인 사람들만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정종찬이가 죽인 부장도 그렇게 됐으니까.

이 땅. 이 자리에서 죽은 인간이 비단 그 다섯만 있는 것은 아닐 거다.

만약 자리의 개념으로 생각하면 이 위에서 죽은 인간은 유사 이래로 엄청나게 많을 테니까.

결국은 그것들은 사라진다는 소리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야지. 그래야 다섯만 있는 게 말이 되지.

이렇게 주저앉아 있을 게 아니다.

정보. 정보를 모아야 한다. 이것만으로도 정보를 얻을 기회가 될 수 있어.

비행을 써서 빠르게 본사까지 왔다.

그리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하고 다시 페이즈 아웃을 쓰기로 했다.

아까 정종찬이 죽인 부장의 원혼. 그래 일단은 원혼이라고 부르자.

그 원혼은 움직이지 않고 부장이 죽었던 자리를 지켰다.

그러니 내가 죽인 놈들의 원혼 역시 움직이진 않을 거다. 이 정도 거리면 아까 그 꾸물거리는 촉수도 오는 데 한참 걸리겠지.

세상이 뿌옇게 변했고 다시 한번 오싹하는 기분을 받았다.

저 멀리에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네 개의 원혼.

갑자기 슈욱 하고 다가오는 일은 없었다. 그랬으면 정말 이번엔 오줌을 지렸을 거야.

하지만 그 촉수 같은 것은 내 쪽으로 뻗어지는 것 같았다.

더 가까이 갈 용기는 없다. 여기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참아야 한다. 그리고 지켜봐야 해.

내가 죽인 사람이잖아. 노려보는 것 정도는 감내해야지.

그렇게 한참을 지켜보았다.

어느샌가 정종찬이 죽였던 부장의 원혼이 스르륵 하고 사라지기 시작했다.

시계. 시계를 보니 딱 10시가 됐다.

아까 저 부장이 죽은 건 9시 45분. 그럼…. 15분 정도 있는 거네.

그렇다면 지금 나를 꼴아보고 있는 저 원혼 네 개도 그리 오래 있지는 않겠지?

어차피 사라질 녀석들. 그렇다면 그다지 무섭지 않다.

내가 죽인 녀석들의 원혼이 영원히 이쪽 세계에 남아있었다면, 페이즈 아웃을 함부로 쓸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15분. 그 정도만 기다리면 원혼이 사라진다. 결국, 사람을 쳐 죽이고 15분만 안 쓰면 된다는 소리.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보단 조금 덜 무서워졌다. 물론 가까이 갈 용기는 아직 없지만.

씨발…. 이상한 페널티가 생겼네.

근데…. 저 촉수에 닿으면 어떻게 될까?

궁금증이 들었지만, 닿아보고 싶진 않다.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할 것만 같은 예감.

그렇게 조금 기다리니 내가 죽인 원혼들도 모두 사라졌다.

그것들이 사라지면서 마음에 생겨났던 불안감과 공포도 함께 사라졌다.

하지만 찝찝한 기분은 남아있다. 그리고 욕지기도. 씨발.

페이즈 아웃을 해제하고 다시 본사 안으로 돌아왔다.

이 더러운 기분과 거지 같은 느낌. 이걸 어떻게 해소하지?

하아…. 일단 잘 꾸겨서 마음 한쪽에 처박아두자. 지금은 그런 거에 신경 쓸 때가 아니야.

대회의실. 여기에 있는 놈들을 다 마무리 지어야지.

내가 들어서자 의자에 묶여있는 놈들이 나를 일제히 바라본다.

방금 원혼들의 끔찍한 시선을 당해서 그런가? 녀석들의 시선이 별거 아니라고 느껴졌다.

이놈들도 나에게 죽으면 전부 원혼이 되겠지? 하하…. 씨발. 그래 원혼이 되든 말든 나를 꼬라보는 것밖에 할 수 없잖아?

"종찬아. 오랜만이다. 그치?"

수면에서 깨어난 정종찬이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그런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절대적인 위치. 처해 있는 상황.

웃음이 나오지 않을 수가 없지.

짝!

마체테의 옆면으로 정종찬의 기생오라비 같은 면상을 후려쳤다.

갑자기 처맞은 정종찬의 고개가 픽 하고 돌아갔다가 다시 나를 노려본다.

저…. 저…. 눈깔. 썅놈 새끼. 그대로 찔러버리고 싶네.

"아까워. 그치? 이럴 줄 알았으면 그때 찾아서 죽였어야지. 왜 병신같이 후환을 남기니?"

노려보던 눈빛에 약간의 잡념이 끼는 녀석.

"이제 기억이 나나 보지? 이렇다니까? 가해자 놈들은 항상 금세 까먹더라고."

이런 시시한 대화를 하고 있을 필요가 없다.

일단 정보 추출의 스페셜리스트를 데려오는 게 우선이니까.

먼저 대표이사실로 가서 대표 놈을 질질 끌고 왔다.

가운데 상석에 친히 앉혀주고 테이프로 꼼꼼하게 감은 뒤 다른 인간들도 한 번씩 더 촘촘하게 감았다.

무슨 개지랄을 떨어도 절대로 테이프를 풀 수 없을 정도로 칭칭 동여맨 나는 여자 두 명을 보고 고민했다.

풀어놓고 매혹을 걸어놓은 뒤 감시하는 게 낫겠지?

근데…. 내가 실수로 페이즈 아웃이라도 쓰게 되면 여자 둘은 그대로 매혹이 풀린다.

그럼 테이프를 다 풀어줄 테고…. 그럼 이 새끼들은 지구 끝까지 나를 찾아 죽이려 들겠지.

안돼. 그럴 수는 없다. 그냥 테이프 칠을 해놓자.

다녀오는 동안 심심할 테니 서비스라도 해놔야겠다.

묶여있는 여자들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잡고 뜯어버렸다.

훤히 드러난 가슴. 그렇게 여자 둘을 남자들을 향해 바라보게 해놨다.

음…. 혹시 모르니 일단 매혹은 걸자.

그렇게 매혹까지 다 걸어놓고 슬슬 날아갈 준비를 했다.

어차피 정세희 년을 데려오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테니까.

"아씨…. 침낭 하나 더 있으면 좋았을걸."

그렇게 다시 한번 묶여있는 놈들을 한 번씩 살펴봤다.

혹시 모르니 재워놓고 가야지. 한 명이 남긴 하는데…. 그건 또 방법이 있지.

정종찬을 남기고 남은 네 명을 수면으로 재웠다.

나를 노려보는 종찬이.

밖에 나가서 괜찮은 것들이 있나 살펴봤다.

한쪽 구석에 조리용으로 쓰는 프라이팬을 발견하고 희희낙락하면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손에 든 것을 보고 아찔한 표정을 짓는 녀석.

그대로 두 손으로 잡고 뒤통수를 풀스윙으로 후려쳤다.

"기절했나? 기절했지?"

스킬이 아닌 물리적인 기절.

고개를 축 늘어뜨리는 녀석. 으음…. 이새끼 연기하는 거 아냐?

혹시 몰라서 한대 더 후려쳤다.

으음…. 괜찮겠지? 이 정도로 약한 놈 아니잖아? 그치?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바로 밖으로 나왔다. 여자들이 쓰던 이불 두 개를 둘둘 말아서.

시간이 없어. 시간이. 빨리 가야 해.

침낭에 들어간 다음 독개구리 하이바를 쓰고 미친듯한 속도로 날기 시작했다.

장애물도 가로막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비행.

하늘을 나는 독개구리 번데기가 빠르게 중동을 향해 날아간다.

"어…. 씨발. 빨리 나니까 춥네…."

벙커 안으로 들어가 바로 정세희에게 무효화와 매혹을 썼다.

웃든 말든 이불로 둘둘 말고 테이프로 적당히 감은 뒤 그대로 안았다.

씨발…. 잡기가 조금 힘드네. 그래도 떨어뜨리지만 않으면 되겠지.

그대로 안아 들고 벙커 밖으로 나와 비행을 시작한다.

이대로 떨어뜨리면 세희 년이 바로 코인이 될 테니 높이 날 수는 없다.

도로 위에서 한 1미터 정도 몸을 띄워 최대한 빨리 날았다.

이게 무슨 짓인지. 씨발. 귀찮아죽겠네.

그렇게 빠르게 날면서 한강 근처에 왔을 때쯤 W호텔 근처로 일부러 높게 날았다.

나와 민희가 있었던 호텔. 그 옆을 날면서 탐지를 쓰니 민희의 기척이 잡힌다.

음. 아직 잘 있구나? 그럼 됐지.

바로 한강을 건너 컴퍼니 본사로 날아간다.

드디어 탐지에 잡히는 본사. 그대로 꼼짝없이 있는 기척들.

좋아. 별일 없지? 없으면 됐어. 설마 무슨 일 있겠냐고. 그 짧은 시간에.

본사 앞에 도착하니 정세희는 의식을 잃고 있었다.

어휴. 씨발. 가지가지 하네 진짜.

그거 조금 날았다고 기절을 해? 약해 빠져가지곤.

일단 안으로 들어가 녀석들의 상태를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설마 뭐 있겠어? 문제없겠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정세희를 대충 바닥에 내려놨다.

확실히 신체 능력 증가 스킬이 좋긴 하네. 저 여자를 안고 왔는데도 그렇게 부담이 안 돼.

근데 왜 다른 패시브는 안 생기지? 더 있으면 좋겠는데.

하긴…. 그랬으면 신체 능력 증가1 이었겠지. 숫자가 없다는 건 단발성 패시브란 소리잖아.

아깝고로.

열려있는 문으로 보이는 여자 둘. 머리 위에 떠 있는 시간들.

좋아. 여자들은 뭐 문제없고.

안에 보니 남자들은 잠에서 깬 거 같다. 수면 시간이 20분에 패시브 껴서 26분인데. 벌써 그렇게 됐나?

여자들의 가슴을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모습.

어이구. 씨발. 신사들 나셨네. 지랄 염병.

보아하니 테이프는 멀쩡한 거 같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광역 스킬 무료화를 뿌리고 수면 네 번과 매혹 두번을 리필했다.

됐고…. 정종찬이는? 아직 쓰러져있네.

너무 세게 때렸나? 오랜만에 해후인데…. 기절해 있으면 안 되지.

방 안에 들어가 테이프들을 살펴봤다.

음…. 꼼꼼하게 묶은 보람이 있네. 됐고…. 그럼 이제 세희를 깨워볼까?

"야. 일어나. 야."

에이씨. 왜 이리 안 일어나? 귀찮게. 둘둘 감은 이불을 다 풀자 알몸이 드러난 세희.

사정없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몇 번을 주물거리자 그제야 일어나는 세희.

"일어나. 등신같이 그러고 있지 말고."

"네…."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모습. 여기 사무실 안은 따듯하니 이러고 있어도 별문제는 없겠지.

이제…. 정종찬 새끼를 깨워야겠네. 둘의 감동적인 해후 시간이야.

몇 년 동안 부려먹은 년과 배신하고 복수랍시고 팔아치운 놈의 재회.

캬…. 씨발. 시나리오 나오네. 영화 찍으면 관객이 몇 명이나 보려나.

"종찬아? 종찬아? 학교 가야지. 빨리 일어나!"

머리끄덩이를 잡고 몇 번을 흔들었는데 반응이 없다.

으음…. 너무 세게 때렸나? 조금 미안하네.

어쩔 수 없네. 역시 사람 깨우는 데는 조인트가 최고지.

의자에 앉은 정종찬의 조인트를 매섭게 전투화로 후려 찼다.

역시, 한 번으로는 부족해. 한국인은 삼세번이잖아?

그렇게 세 번을 찼는데도 아직 안 일어나는 녀석. 쯧. 그럼 삼삼칠로 가야겠네. 과연 몇 번째에 일어날까?

아쉽게도 정종찬은 일곱 번째에 정신을 차렸다.

밀려오는 고통과 깨어나도 꿈이 아닌 현실의 상황에 잔뜩 인상 쓰는 녀석.

"짜잔! 종찬아! 이것 봐! 이게 누구게!?"

내가 알몸의 세희를 보여주자 정종찬의 동공이 '확' 하고 커진다.

크…. 리액션 혜자네. 기대했던 반응이야.

"봐봐. 잘 보라고. 네가 사랑하던 세희잖아. 사랑한 거…. 맞지? 근데 왜 팔아치웠어? 응?"

서 있는 세희의 어깨에 팔을 걸며 가슴을 움켜잡았다.

내가 가슴을 만지자 이런 상황에서도 좋아하는 세희.

미친 세상이야. 매혹은 더 미친 스킬이고.

"궁금하지? 왜 이렇게 됐는지? 근데 넌 답을 알 수가 없어요. 이제 너는 멍청이가 될 거니까."

손가락으로 세희의 꼭지를 살짝 움켜잡았다.

약간 느껴지는 듯 짧게 '음'하고 신음을 내자 종찬이의 표정이 엄청나게 복잡해졌다.

"세희야. 자 이제…. 종찬이에게 다시 매혹을 걸어줄래? 예전처럼 말이지."

"읍읍읍읍!!!!"

눈을 부릅뜨고 뭐라고 외치는 종찬. 하지만 그렇다고 세희의 입을 막을 수는 없다.

세희의 입이 열렸고 짧고 무자비한 한 단어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매혹."

커다랗게 눈을 뜨고 통하지 않는 아우성을 지르다가 무표정한 얼굴이 된 종찬.

그러더니 세희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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