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34화 (23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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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뷰

민희와 만나기 한 시간 전.

침대에서 나가기 싫다.

아아…. 진짜 나가기 싫다.

이놈의 추위. 씨발 겨울.

왜 약속을 잡았을까? 진짜 귀찮네. 아 귀찮아.

그렇게 10분 정도를 더 침대에서 고민한 나는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에휴. 나가야지. 스마트폰도 안되는 시대인데. 약속을 펑크내면 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지 기약도 없잖아.

게다가 민희, 그 여자를 생각하니 약간 마음이 움직이긴 했다.

좋은 향기, 화장한 얼굴, 나이에 비해 매력적인 몸매, 눈물점. 그리고 애널.

애널. 그때의 조임…. 그래. 그게 있었지.

그걸 생각하니 의욕이 조금 더 났다.

흐음…. 생각해보니 나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아.

몸을 깨끗하게 씻고 세희 년이 있는 방을 봤다.

방안에 울리는 진동 소리. 지독한 년. 저걸 버티네.

무효화와 매혹, 수면을 걸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프를 떼주고 바이브레이터와 딜도를 치운 뒤 MRE 몇개를 방안에 놨다. 이러면 혹시나 며칠 동안 못 들어와도 뒤지진 않겠지.

문을 닫고 자물쇠를 한 번 더 점검한 뒤 혹시나 몰라서 움직일 수 있는 가구들을 문 앞에 쌓아놨다.

다른 여자들이 안에 있었을 때는 이 정도까진 안 했는데…. 이년은 무섭단 말야.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됐고…. 이제 슬슬 나가볼까?

아…. 젠장. 추위. 나도 그 날파리년이 입고 다녔던 그런 것 좀 구해야겠는데.

어휴. 씨발. 빌어먹을 추위.

어쩔 수 없지. 또 독개구리 변신이다.

하늘을 나는 독개구리 번데기가 빠르게 천호동으로 날아간다.

지금 비행은 고급 82퍼센트. 앞으로 남은 900번. 포션 스무 개만 먹으면 되는데…. 어제 너무 힘들었어.

어떻게든 오늘 올려야 한다. 그래야 내일 컴퍼니 놈들을 조지지.

그러니 일단 오늘 민희를 만나서 빨리 볼일을 보고…. 다시 돌아와야 해.

근데 정세희 그년을 어떻게 하지? 내일 컴퍼니 놈들을 다 잡아 놓고 데려와야 하나? 아니면 먼저 데려온 다음에 조져야 하나?

끄응…. 정말 귀찮네. 그래도 비행이 고급이라 다행이지.

비행이 고급이 되니 속도도 엄청 빨라지고 높이도 거의 제한이 없어졌다.

아직 무서우니 너무 높게는 날지 않으니 고도제한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되겠지.

속도는 거의 30킬로 정도 되는 거 같다. 네비게이션이라도 되면 속도 측정을 한번 해볼 텐데.

어쨌든 이 정도 속도면 수도권 근교는 어디든 금방 갈 수 있는 수준.

역시….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아. 이럴 때 쓰는 속담이 아니지.

암튼간.

하늘에서 보는 한강은 참 느낌이 다르다.

어디 보자…. 저 끝에 있는 다리가 천호 대교겠지? 그럼 그 앞이 천호동이고?

목적지를 확실히 알 수 있으니 좋네. 역시 비행은 캐사기였어.

단독으로 비행을 쓴다면 할 수 있는 게 확 줄어들긴 하겠지만 다른 스킬과 병행하면 역시 이보다 좋은 게 없다.

비행 스킬 가진 애들이 많이 없는 게 의외네.

투명화와 비행은 인간이 기본적으로 가진 욕망일 텐데?

역시 날파리년이 말했던 것처럼 비행의 단점 때문인가? 누구한테 죽는 게 아니고 자기 실수로 죽는?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윙슈트가 생각났다.

부상자가 없는 스포츠.

그거랑 비슷한 느낌이겠지. 지금 나도 30미터 정도는 올라온 거 같은데…. 여기서 까딱 실수하면 그냥 뒤지는 거니까.

흐음…. 한번 해보고 싶긴 하다.

오를 수 있을 만큼 하늘 위로 올라가서 비행을 끄는 거야.

그럼 자유낙하를 하겠지?

그러다가 땅이 가까워지면 다시 비행을 쓰는 거지. 캬…. 심장이 쫄깃해질 것 같은데.

한번 해봐? 아니야. 참자. 그런 건 나중에 삶이 무료해서 자살하고 싶어질 때 해보자.

지금은 죽기에 너무 아깝잖아. 뭐…. 그거 한다고 바로 죽는 건 아니겠지만.

천호 대교 위를 건너며 계속 날다 보니 저 멀리에 커다란 건물이 하나 보였다.

흐음…. 저건가? 가보면 알겠지?

가까이 가보니 백화점이라고 쓰여 있는 게 보인다. 역시 맞았네. 그럼 여기가 천호역 일 거고…. 대각선 저기. 저 건물이 컴퍼니 본사야?

옥상에 커다란 광고판이 있는 건물. 생각보다 작다.

하긴 컴퍼니라고 했지 대기업은 아니니까.

대기업 본사 건물 같은 걸 생각했던 나는 약간 실망했긴 했지만, 오히려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으면 좋지. 잡아 죽이기 편하잖아.

어디…. 한번 안에 얼마나 있는지 보고 갈까?

나는 공중으로 높게 떠올랐다.

이 정도 높게 올라가 있으면 밑에 탐지 있는 놈이 있어도 내 기척을 느끼기 힘들 거다.

게다가 보통 기척은 자신의 주변을 살피지 머리 위쪽까지는 잘 안 살피니까.

높은 위치에서 서서히 하강하자 아래쪽에서 서서히 기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래…. 생각보다 없네? 다섯 명? 본사에 상주하는 인원은 얼마 없는 건가?

뭐야…. 좇소기업이었네. 의외로 영세한 곳이었어.

하긴 생각해보면 그럴만하다. 본사에 사람이 많을 이유가 별로 없지.

얘들 하는 짓은 사람을 모아서 캐슬에 보내는 거니까. 다들 죄 돌아다니느라 바쁘겠지.

됐다. 이 정도면 됐어. 더 볼 건 없지.

어차피 하이라이트는 내일이니까. 저 녀석들의 목숨은 하루 더 연장해주자.

다시 하늘로 올라가 백화점 쪽으로 갔다.

근데 의외로 컴퍼니 본사와 백화점 사이가 가깝다.

천호사거리라고 쓰여 있는 사거리만 건너면 바로 백화점이네? 이거 백화점 입구에서 컴퍼니 본사까지 탐지가 닿겠는데?

아닌가? 어디 해보자.

오…. 아슬아슬하게 닿네. 흐음…. 어차피 안에 들어가면 닿진 않을 테니까 상관없겠지.

그건 그렇고…. 백화점 안에서 기척이 하나 느껴진다.

민희인가? 일찍 왔네?

투명화를 쓰고 공중을 날고 있기에 나의 움직임에는 소리가 나질 않는다.

발걸음 소리가 없어진 것도 상당히 좋은 일이야.

지금 나의 모습은 누가 보면 무슨 유령처럼 이동하고 있는 모습일 거다.

실내에서도 비행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까.

백화점 1층. 옛날이라면 향수 냄새와 화장품 냄새가 진동했을 그곳에 민희가 서 있었다.

본 지 얼마 안된 것 같은데 상당히 오랜만에 만나는 느낌이 든다.

화장품 매장 한쪽에서 이것저것 구경하고 있는 모습.

이미 못 쓰는 화장품들을 하나하나 들고 보다가 내려놓는 모습이 뭔가 슬픈 느낌이 든다.

그런 민희에게 다가가 투명화를 풀었다.

"어머!!"

그리고 기절해버리는 민희.

아차. 내가 독개구리 번데기라는 상태를 까먹었었다.

아마 깜짝 놀란 민희가 기절을 썼고 내 반사에 튕겼나 보다.

에고 미안해라.

나는 하이바를 벗고 범위를 잘 조절해서 광역 스킬 무효화를 걸어줬다.

기절 효과가 풀리자 부스스 일어나는 민희.

"깜짝 놀랐잖아요!"

"미안미안. 놀라게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나는 공중에 뜬 상태로 침낭을 벗어 둘둘 말아 배낭에 매달았다.

그런 나를 보며 신기한 듯 바라보는 민희.

"비행…. 스킬도 배운 거예요?"

"어."

공중에 한 10센치 정도 떠 있는 나를 어이없다는 얼굴로 바라보는 민희.

"그럼 스킬이 일곱 개?"

"응."

뭐…. 패시브도 여러 개 있긴 하지만.

"진짜….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단하네요.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하죠?"

"어떻게 가능하긴. 미친 듯이 사람을 잡아 죽이면 되는 거지."

"아니…. 사람을 죽이는 거랑 조금 다르잖아요. 스킬의 숙련을 어떻게…."

"전에 말하지 않았나? 말 안 했나? 회복 포션 먹으면서 숙련하는데?"

"아…. 그걸 하는군요…. 그러면 이해가 가죠."

"다들 안 하나? 좋은 게 있으면 해야지."

"그 정도로 코인이 넘치는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니 사람들을 쳐 죽여야지."

"으…. 당신이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 머리가 이상해지는 거 같아요. 같은 인간이라는 생각이 안 드네."

"이 정도는 해야 이 미친 세상에서 살아남지. 내가 너보고 불안해하는 이유를 알겠지?"

"보통 다른 사람이 그런 말 하면…. 일단 기절을 날리고 보는데, 당신이 말하니 할 말이 없네요."

"기절 함부로 날리지 마. 방금처럼 반사 당하면 어떻게 하려고."

"방금 같은 상황은 반사 당할 걸 생각하는 것보다 공격당하는 게 더 위험하니까요."

"아…. 그러네. 하긴, 너한테는 그게 최선이겠구나."

"진짜…. 당신을 만나고 뭔가 세상이 무서워진 거 알아요? 그전까지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그러니까 더 강해지란 말이지. 난 너를 오래 보고 싶거든."

"흐응…. 나같이 나이 많은 여자를 뭐하러?"

"나이에 컴플렉스가 있는 거야? 너처럼 이쁘면 나이가 대수겠어?"

그러면서 은근슬쩍 다가가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다지 싫어하지 않는 민희. 이쁘다는 소리가 은근히 맘에 드는 모양이다.

"그래서…. 8일 정오. 백화점에 왔고 당신을 만났어요. 이제 뭘 할 거죠?"

마치 '오늘 데이트는 어디로 갈 거죠?'라고 물어보는 듯한 느낌이다.

나는 웃으면서 가방을 뒤적여 종이를 꺼냈다.

"짜잔. 이게 뭘까요."

내가 종이를 들고 팔랑거리자 의아한 얼굴이 된 민희.

"나한테 보내는 러브레터?"

"크. 유머 감각 좋아. 하지만 그것보다 더 달콤한 거지."

나는 민희에게 종이를 건넸다.

주소가 적혀있는 종이를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리는 민희.

그러더니 앞의 주소가 분당인 걸 보고 설마 하는 표정으로 변한다.

"이거 혹시?"

"고영준 그놈의 위치는 아니지만, 매혹을 쓰고 의사인 놈들의 모임이 있다네? 그놈들과 연관이 있는 곳의 위치야."

"맙소사…. 당신은 어떻게 그런 걸 이렇게 빨리…. 내가 2년을 찾아 헤매도 못 찾았던 건데!"

"뭐, 나름대로 방법이 있지."

"진짜…. 알면 알수록 놀라운 사람이네요."

"흐음. 어때? 맘에 드나?"

"맘에 드냐고요? 당연하죠! 정말…. 당신 못하는 게 뭔가요?"

"글쎄. 많지. 하고 싶은 것도 많고."

내가 은근하게 바라보자 민희는 눈을 살짝 가늘게 뜨고 옅게 미소짓는다.

표정 참…. 여우 같은 표정이네. 앙큼한 표정이야.

"너무 노골적인 거 아니에요?"

"왜? 싫어?“

그러면서 허리를 바짝 당기자 민희의 얼굴이 내게 더 가까이 다가온다.

"흐응…. 이런 걸 줬으니 거절하질 못하겠네."

"뭐, 이럴 목적으로 그걸 준건 아니지만."

"좋아요. 나도 당신이랑 하는 건 좋으니까. 근데…. 여기서 할 생각은 아니죠?"

"당연하지. 나도 백화점 1층에서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그럼 어디로?"

"내가 오다가 봤는데…. 이 근처에 좋은 곳이 있더라고."

"좋은 곳?"

"가볼래?"

"어딘데요?"

"가보면 알아. 그럼…. 잠시만."

나는 가방에 매달았던 침낭을 다시 풀었고 지퍼를 끝까지 열고 민희를 보고 말했다.

"타시죠."

"네에? 뭐가 '타시죠'에요?"

"타보면 알아."

어이없는 표정으로 침낭을 바라보는 민희.

그러더니 결국 침낭 안에 발을 들였다.

서 있는 상태에서 침낭을 잘 오므려 지퍼를 끝까지 올리고 얼굴까지 잘 덮어주자 민희는 질색인 표정으로 말한다.

"아이참…. 대체 이게 뭐예요?"

"자…. 그럼 꽉 잡아?"

나는 하이바를 쓰고 민희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서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갑자기 움직이자 깜짝 놀라는 민희.

"꺅! 뭐해요!?"

"걱정 마. 꽉 잡고 있으니까."

그렇게 백화점 문을 열고 바로 공중으로 날아오르자 민희의 눈이 급격하게 커지기 시작했다.

"히익…."

놀라서 비명도 나오지 않는 민희.

침낭을 안 입어서 몸이 싸늘하긴 했지만, 어차피 거리가 가까우니 조금만 참으면 되겠지.

나는 그렇게 민희를 안고 한강을 건너 W호텔로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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