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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희
캐슬.
왜 캐슬이란 이름을 지었는지 알 것 같다.
주변을 빙 둘러서 쌓은 컨테이너. 그 모습이 마치 성벽같이 생겼다.
캬…. 멋있네. 저건 좀 멋있어. 왠지 맘에 든다.
펜스도 주변에 세워져 있는 전기 철조망이랑 펜스 다 뽑아버리고 저렇게 컨테이너로 쌓으라고 할까?
암튼 상당히 맘에 드는 곳이야. 박성채라고 했나? 미적 감각은 맘에 드네. 어차피 살려둘 생각은 없지만.
채원이 강간하려 한 새끼를 살려둘 생각은 없지. 음…. 내가 이런 말 하니까 존나 웃기네.
탐지거리도 10미터 더 늘어난 데다 비행이 생겨서 탐색하기가 상당히 편해졌다.
좆같은 삽질을 안 해도 되잖아. 어휴. 그때 얼어있는 땅 팠던 거 생각하면…. 아직도 손바닥이 저리네.
어차피 여기는 비행이 없었으면 들어가지도 못했을 것 같다. 컨테이너가 3단으로 쌓여있는데…. 저길 어떻게 들어가.
게다가 벽돌식으로 쌓아놔서 아예 빈틈이 없다. 컨테이너 높이가 2.6미터로 알고 있는데…. 저러면 높이만 해도 거의 8미터야.
먼저 안으로 침투해보기로 했다. 안에 분위기를 봐야지.
여기에도 부장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잖아? 진흙탕에서도 연꽃은 피는 법이니까.
내가 원하는 건 코인이지 학살이 아니다.
어차피 코인도 안되는 사람들까지 죽일 필요는 없지.
마치 내성처럼 가운데 있는 커다란 건물.
그리고 그것을 둘러싼 수많은 비닐하우스와 축사들.
박성채 이놈이 예전 동산에서 나와 만든 거라 그런지 전체적으로 구조는 비슷했다.
다만 넓은 부지의 펜스와는 다르게 여긴 그렇게 넓지는 않다. 하긴 펜스는 안 쓰는 땅이 너무 많아.
그 덕분에 침투하기는 쉬웠다.
침투하자마자 수많은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기에 바로 인파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으니까.
이 정도면 저쪽의 탐지에 내가 걸릴 염려는 안 해도 되겠어.
탐지만 조심하면 뭐, 투명화를 막을 방법은 없잖아?
그렇게 이틀 동안 안쪽에 숨어서 분위기를 파악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결론은 여기 녀석들은 한 80퍼센트는 죽여도 되는 놈들이라는 거였다.
하…. 정말. 어떻게 이런 곳이 있지?
이 미친 새끼들은 컨셉이 확실했다.
지들이 캐슬에 살고 있다고 봉건주의를 그대로 적용할 줄이야.
성주. 그러니까 박성채 그 새끼를 여기서는 성주라 부른다.
그리고 그 밑에 있는 기사들.
그 밑에 자유민, 그 밑에 농노.
진짜 어이없네. 컴퍼니 새끼들도 그렇고 왜 이리 컨셉질을 하는 거냐고.
하긴…. 그러니까 서로 끼리끼리 잘 어울렸나 보다. 봉건주의랑 관료제는 일맥상통하는 게 있긴 하지.
어쨌든 이놈들은 정말 망한 세상에 딱 어울리는 놈들이었다.
아래로 갈수록 미친 듯이 수탈하는 구조.
기사라고 부르는 무력집단. 즉, 공격 스킬을 가지고 외부의 방어를 책임지는 놈들.
일단 이놈들이 가관이었다. 하는 짓들 하나하나가 선을 안 넘는 게 없어.
기사라는 놈 하나가 일하고 있던 여자를 그대로 끌고 가서 강간하는 건 예사고 농노 계급에 있는 사람을 즉결처형도 했다.
웃긴 건 당하는 여자도, 주변에 있던 녀석들 그 누구도 그것에 대해서 반발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긴,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데 거기에 뭘 어떻게 항의하겠어….
뭐…. 세상이 망하면서 익숙해진 장면이긴 하다…. 내가 뭐라고 할 자격도 없고.
하지만 펜스처럼 하하호호 하면서 잘살고 있는 걸 생각하고 있던 나를 반성하게 만드는 모습이었다.
과격하게 현실로 끄집어냈다고나 할까?
펜스가 비정상인 거였어. 부장 그 사람이 대단한 거였다고.
거기 반장들도 사람들이 걸걸해서 그렇지 인간성이 남아있는 따듯한 사람들이었어.
여기를 보다 보니 펜스는 정말 꿈의 동산이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동산…. 이름을 잘 지은 곳이었다니. 맙소사.
더 웃긴 건 자유민이라고 부르는 녀석들이었다.
쓰레기 스킬들을 들고 있는 사람들.
그렇게 똑같이 스킬이 쓸모없으면 결국 체력적으로 우위에 있는 놈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놈들이 자유민이었고 그 녀석들 역시 농노라고 불리는 녀석들을 착취하고 있었다.
구타, 폭력, 집단 린치, 따돌림에 배척, 약탈과 갈취. 그리고 마지막엔 살인까지.
똑같이 8시간씩 일해야 한다면, 자신들이 한 시간 일하고 농노에게 15시간을 일하게 하는 놈들.
부려먹고 가지고 놀다가 망가지면 죽이는…. 그런 녀석들.
그런 짓을 기사도 하지만 자유민이라는 놈들도 버젓이 하고 있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아주 인간이 할 수 있는 저열한 짓거리만 골라서 한다.
이놈들은 기본적으로 사고방식이 글러 먹었어.
왜 그런 게 가능한가 했더니…. 결론은 컴퍼니였다.
컴퍼니에서 캐슬에 유입시키는 인간들이 제법 많다.
정말…. 많다. 어디서 이렇게 인간들을 끌고 오는지 모를 정도로.
내가 보고 있던 이틀 사이에도 몇 명의 컴퍼니 녀석들이 사람들을 우르르 데리고 이곳으로 왔다.
캐슬의 모습을 보고 희망에 찬 사람들.
그리고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속았다는 표정으로 바뀌는 모습.
어쨌든 종합적인 평가 결과가 나왔다.
이곳은 남아있을 가치가 없어. 그냥 다 죽여야지.
당하는 농노들은 죄가 없겠지만, 뭐 힘이 없는 게 죄지. 그래도 기회를 줘볼까?
세상이 망하지 않았다면 고등학생 정도 됐을 남자애 하나.
이 아이가 맘에든 것은 기둥에 묶여있기 때문이었다.
어제, 그러니까 내가 침투한 날에 여자를 강간하려 하던 자유민 남자에게 맞서 싸우다가 잔뜩 얻어터진 녀석.
죽기 직전까지 뚜드려맞고 본보기 삼아 기둥에 묶여있는 아이.
이대로 두면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을 것 같다.
이 아이가 보였던 작은 용기도 무의미 없이 목숨과 함께 사그라지겠지.
마침 모두가 잠든 새벽. 나는 그 아이에게 다가갔다.
"입 열지 말고 들어. 나는 너를 구해줄 거야. 내 말이 들렸으면 눈을 두번 깜빡거려봐."
남자애는 눈을 두번 깜빡였다. 음. 아직 의식은 있네. 그렇게 맞고도 제법 튼튼하네.
회복 포션 소를 하나 사서 녀석의 몸에 천천히 부었다.
완전히 치료될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어느 정도 치료는 되겠지.
"내가 너를 풀어주면, 너는 그대로 가서 몸을 숨겨. 대신 너만 몸을 숨기는 게 아니고 이 안에서 니가 살리고 싶은 사람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숨어. 살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을 데리고 가. 곧 이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죽을 거야. 재주껏 살아남아."
어느 정도 회복이 됐는지 눈이 커지는 녀석. 나는 마체테로 녀석을 묶고 있던 끈을 끊었다.
"가. 시간 없어. 최대한 빨리 숨어."
녀석은 자신의 몸이 자유로워지자 재빨리 뛰었다.
그러다가 내 쪽을 보더니 한번 꾸벅 인사를 하고 다시 뛰어간다.
내가 어디 있는지 보이지도 않으면서 인사까지 하고 가네. 기특한 놈.
자. 이제 공성전을 시작해볼까?
어중이떠중이들을 암만 모아놓아 봐야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곳을 온전히 놔두고 먹으려면 천천히 신중하게 공격해야겠지만, 완전히 다 때려 부수는 거라면 그리 어렵진 않을 것 같다.
분명 나보다 대단한 놈들이 있을 거 같은데 왜 이런 곳을 남겨두는지 모르겠어.
아마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
이런 건 시시하니 건들지 않는 것과 나만큼 대단한 놈이 없는 것.
근데…. 둘다 말이 안 되긴 해. 나도 정확하게 이유를 모르겠다. 어쨌든 먼저 먹는 놈이 임자지.
내가 미리 봐둔 기사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젊은 여자. 조건은 단지 그것뿐이면 충분하다.
아까 들었던 바로는 오늘 외곽 경비라고 들었는데…. 아. 저깄다.
계단을 타고 컨테이너 위로 걸어 올라가는 여자.
솔직히 이쁜 편은 아니다. 그냥 평범한 젊은 여자일 뿐.
옷을 벗고 달려든다고 해도 거절할 수 있을 만한 외모. 그래도 그나마 이 여자가 가장 거부감이 없어서 고른 거다.
그쪽으로 날아가 바로 무효화를 쓰고 매혹을 걸었다.
가까운 곳에는 아무도 없다. 이미 탐지로 다 확인했으니까.
나는 투명화를 유지한 채로 여자에게 다가가 말했다.
"멈춰봐."
"네."
내가 보이지 않지만, 충실하게 내 말을 듣고 걸음을 멈추는 여자.
"정세희라고 아나?"
"네. 알고 있습니다."
"그년에게 안내해."
"네."
여자는 바로 몸을 돌려 계단을 내려간다.
그리고 곧장 건물 쪽으로 다가갔고, 입구 앞에 있던 기사 하나가 여자를 보고 말을 건다.
"어? 오늘 외곽 경비 아냐? 여긴 왜?"
바로 재우고 마체테로 후려쳤다.
일을 시작한 이상 거리낄 건 없다. 굳이 살려둘 이유가 없지.
빛이 되어 사라진 남자. 바로 코인을 회수한다.
[131,442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역시, 코인이 꽤 되네. 맘에 들어.
"계속 가."
건물 안에는 기척이 제법 느껴졌다. 이런 곳에서는 저 녀석들이 탐지가 있어도 아무 쓸모가 없기에 투명화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지.
하지만 방심하지 않고 계속 탐지를 유지한다. 나에겐 어차피 다 죽여야 할 놈들이니까.
방어자 입장에서야 탐지에 이름표가 없으니 누가 누군지 구별이 안 되지만, 나야 모두 다 적이잖아?
계단을 걸어 올라가 문 앞에 다가가자 옆쪽 방 같은 곳에 여자 두 명이 모습을 드러낸다.
"세미 씨? 오늘 외곽 경비 아니에요? 여기서 뭐 해요?"
약간 경계하는 눈으로 내가 현혹한 여자를 바라보는 여자 둘.
여자 둘이라니. 나이스 하네. 둘 다 무효화를 걸고 바로 매혹을 걸었다.
여자가 지키는 곳이라니…. 대충 뭔지 알겠네.
"여기가 성채 놈의 여자들이 있는 곳이야?"
"네. 그렇습니다."
내가 물어보자 방금 매혹당한 여자 하나가 대답한다.
"너희 둘 말고 오늘 여기 지키는 사람이 또 있나?"
"아니오. 저희 둘 뿐입니다."
"그래? 너희가 지키는 여자는 총 몇 명이지?"
"여섯 명입니다."
"여섯 명? 혹시 전부 매혹 스킬?"
"아니오. 매혹 스킬이 있는 여자는 넷 뿐입니다."
역시…. 성채 이새끼…. 결국 다 모았구나?
짜식. 고맙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믿고 있었다고! 젠장!
네가 모은 여자들은 내가 잘 써주마.
"이 안으로 들어가면 있나? 정세희도?"
"네."
"문은? 잠겨있고? 잠겨있으면 열쇠 좀 줘봐."
"네. 알겠습니다."
방 안으로 들어가 카드를 가지고 나오는 여자. 음…. 됐지? 그럼 얘들은 더는 볼일 없잖아?
셋 다 모두 재웠다. 일단 재워 놓고 처리는 이따가 하자고.
아. 두근두근하네. 이게 얼마 만이야?
드디어 정세희 그년을 만날 수 있는 거잖아?
마치 첫사랑을 다시 보는 소년의 마음이다.
물론 그렇게 순수하지만은 않지만.
후…. 그럼 이제 가보실까? 과거를 청산해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