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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건, 세상이 망한 이후 만난 사람중에 식당에 있던 여사님만큼 부담스러운 사람이 없었다는 거다.
한시도 쉬지 않고 이사장 욕을 하며 나에게 잘했다고 하는 여사님.
게다가 계속해서 가져다주는 음식들. 왜 자꾸 먹이려고 하는 것인지.
문제는 그 음식들이 너무 맛있다는 거다. 거절할 수 없는 맛이랄까?
뇌가 그만 처먹으라고 신호를 보내는데도 손이 자꾸 음식으로 향하는…. 그런 맛.
식당은 어느새 술판으로 변했다.
술판이라니…. 맙소사. 다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딱 몰살당하기 좋은 상태잖아. 내가 침입자라면 지금 이 꼴을 보고 쾌재를 불렀을 거다.
하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한 연회라고 생각하니 또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
게다가 어차피 술판을 벌이는 건 반장들 위주라 크게 문제는 안 되겠지.
집행부 녀석들은 나름 적당히 자제하고 있는 거 같으니까. 저런 자세는 맘에 드네.
그런 걸 보면 부장이 일을 잘하는 거 같아. 사소한 부분에서도 꼼꼼하게 잘해.
문뜩, 이 식당 안에 앉아있는 나 자신이 너무 신기하다고 느꼈다.
물론 반사도 켜놨고 탐지도 틈틈이 돌리고 있지만….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이런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는 건 평생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반사가 생기기 전까진 물류센터의 승규조차 가까이 못 오게 했던 나였으니까.
물론 지금은 반사도 있고 위험하면 투명화도 쓸 수 있으니 그때랑 다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완벽하게 안전한 것은 아니다.
왠 놈들이 이사장의 복수를 한답시고 갑자기 뛰쳐나와 칼빵이라도 놓을 수 있는 건데.
그런 걸 보면…. 사람은 참 쉽게 바뀐다는 게 이해가 갔다.
근데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걸까? 사람을 믿는 만큼 배신당할 위험이 늘어나는데…. 그건 괜찮은 걸까?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사람을 백정처럼 죽이던 내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걸까?
에이…. 이런 상황에서도 이런 우중충한 생각이나 하고 있네. 에휴.
"무슨 생각 해요?"
채원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약간 취한듯한 그녀. 뭐, 이 여자라면 취할 만하지. 오늘만큼 즐거운 날이 어딨겠어?
"니 생각?"
전문 바람둥이도 안 하는 농담을 하자 채원이가 피식하고 웃는다.
역시 웃는 게 보기 좋아. 게다가 술도 한잔 들어가 있으니 더 없이 이뻐 보인다.
거시기 달린 남자라면 이 여자를 보고 눈길을 주지 않을 수가 없을 거다.
그건 남자라는 종족 상 어쩔 수 없는 일이야.
"한잔할래요?"
소주병을 들고 나에게 물어보는 채원. 소주병을 보면 물류센터에 있는 진영이가 떠오른다.
여기도 분명 소주 생성 같은 스킬을 가진 사람이 있겠지? 진영이가 이런 곳에 있었다면 정말 그 가치가 몇 배는 오르는 건데.
나는 채원이를 보고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미안, 술은 안 마셔서."
"왜요? 이런 날은 한잔 마셔도 되지 않나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서운해한다거나 그러지는 않는 그녀.
가지고 온 잔에 술을 따르려는 걸 내가 빼앗아 따라줬다.
나를 그윽하게 바라보는 채원. 그렇게 보면 유혹하는거 같잖니.
잔이 차자 잔을 들고 그대로 천천히 잔을 비운다.
저게 그렇게 맛있나? 나는 진짜 아무 맛도 못 느끼겠던데.
"꿀꺽…. 하아."
참…. 이쁘게도 마시네. 무슨 소주 광고 보는 줄 알았어.
목 넘기는 소리와 술기운을 뱉어내는 한숨. 그리고 살짝 풀어진 눈.
이런 여자한테 남자들이 홀리는 거야. 이런 상태에서 작정하고 꼬시면 누가 안 넘어가겠냐고.
"그냥….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었어요."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
살짝 흐트러진 모습이지만 똑바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매혹에 걸리면 이런 기분일까?
"그럼 나는 또 다른 데로 가볼게요. 아 참…. 전 10분 정도 뒤에 화장실을 갈 거 같네요."
알 수 없는 말을 하고 자리를 이동하는 채원. 뭐라고? 10분 뒤에 뭐?
자기가 화장실 간다는 소리를 왜 나한테 하고 가는 거야? 희한한 여자야. 정말.
그리고 10분 뒤, 나는 화장실에서 채원의 가슴을 만지며 그녀의 안쪽에 내 물건을 쑤셔 넣고 있었다.
"하아…. 너무 좋아…. 이렇게 좋은 건 처음이야…. 하앙."
사람이 올지도 모르는데 상기된 목소리로 자신의 기분을 마음껏 말하고 있는 채원.
벽을 붙잡고 있는 그녀의 뒤에서 가슴을 만지며 짐승처럼 허리를 움직인다.
잔뜩 민감해졌는지 손과 허리가 움직일 때마다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않는 그녀.
게다가 장소가 장소여서 그런지 상당히 음란해 보이는 모습.
그렇게 계속해서 허리를 흔드는데 화장실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대로 숨을 죽이고 입을 다무는 채원. 그리고 나 역시 움직임을 멈췄다.
바로 옆 칸의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옷을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쪼르르 하는 적나라한 소리. 씨발…. 살다 보니 이런 일도 겪네.
옷을 올리는 소리, 물을 내리는 소리, 문이 열리고 세면대에서 손 씻는 소리.
화장실 바깥으로 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탐지에 기척이 멀어지는 것을 확인하자 나는 다시 물건을 깊게 넣었다.
"아으윽…."
이거 정말 스릴 넘치네. 이런 짜릿함이라니.
물건은 시무룩해지긴커녕 오히려 더 커진 것 같다. 나란 새끼…. 변태 같은 새끼.
아마 옆 칸이 아니고 옆옆 칸 정도만 됐어도 몸을 움직였을 것 같다. 신음이 나오는 걸 참는 채원의 모습을 보고 싶었으니까.
진짜…. 별걸 다 해보네. 정말.
그렇게 다시 한참 허리를 움직이다 채원의 양쪽 가슴을 꽉 움켜잡고 안쪽에 깊게 사정했다.
그녀의 몸에서 나는 은은한 살 냄새와 손에 느껴지는 감촉, 그리고 움찔거리는 그녀의 몸짓.
짧고 강렬한 섹스. 맛있다. 방금 먹고 온 저녁 식사의 디저트로는 완벽했어.
"내일 가면…. 자주…. 올 건가요?"
술기운과 흥분 때문에 야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채원이 나를 바라보며 말한다.
"글쎄. 자주 와야지."
굳이 음식을 받으러 오는 게 아니라도 자주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이곳의 안정을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계속 얼굴을 비춰야 하긴 하니까.
"기다리기 지루하겠네요."
그렇게 말하더니 내 입술에 살며시 입 맞추고 말한다.
"먼저 나갈래요?"
"괜찮아. 어차피 투명화가 있으니까."
"아…. 그렇군요."
투명화를 쓰고 옷매무새를 정리한 채원을 따라 화장실 바깥으로 나왔다.
"가보세요. 자리를 너무 오래 비우면 다들 이상하게 여길 거에요."
"그래. 가볼게."
"네. 다음에 봐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자리를 뜨는 채원.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투명화를 풀고 식당으로 돌아갔다.
한창 좋은 분위긴데 어딜 도망갔다 왔냐고 투덜거리는 반장들.
식당 여사님의 음식 솜씨가 너무 좋아서 더 먹으려고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러니 여사님의 얼굴에 함박웃음이 걸린다.
역시 중년의 여성은 무서워. 저 막무가내의 기질은 정말 이길 수가 없단 말이지.
생활력이라고 해야 하나? 암튼 그런 모습들은 내가 정말 싫어하는 모습이긴 하다.
억척스럽고 말이 안 통하고 약간 질척이는 듯한 모습.
하지만 다르게 말하면 그게 정이고 인심이라는 거겠지.
지금까지는 무작정 거부만 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에도 어느 정도 맞춰 살아야 하잖아?
어쨌든 내가 까다롭게 굴지 않은 덕분인지는 몰라도 식당의 분위기는 제법 괜찮았다.
하지만 이 양반들…. 이대로 있다가는 밤새 술판을 벌일 것 같은데.
여기 붙잡혀 있으면 수명이 줄어들 것 같아서 적당히 핑계를 대고 자리를 나왔다.
뭐, 내가 가겠다는데 누가 말리겠어.
이사장실로 돌아가면서 오랜만에 많은 생각이 들었다.
사람 사는 느낌. 이런걸 느껴본 게 얼마 만인지.
그전에는 이런 자리가 그저 끔찍한 자리일 뿐이었지만, 지금은 왠지 정겨운 느낌이 난다.
세상이 망하고 사람들이 서로를 죽고 죽여도 결국 어울려 살 사람들은 이전에 해왔던 것을 도로 복구해낸다.
참 신기한 일이야. 대단한 거 같아.
어떻게 저렇게 살 수 있을까? 나로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인데.
하지만, 사람들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세상은 이미 끝났다.
엄청나게 줄어버린 인구. 그리고 더는 새로 태어나는 인간이 없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 세상은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다. 더는 좋아질 수가 없어.
저들이 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남은 인간 세상이 보여 줄 수 있는 따듯함의 편린일 뿐이지.
역시…. 사람이 배가 부르니 잡생각이나 잔뜩 하는구나.
이런 복잡한 생각은 뭐 하려 하는지…. 그냥 살 수 있을 때까지 열심히 살면 되는 거지.
이사장실에 거의 다 와서 습관적으로 탐지를 돌려보니 방 안에 사람의 기척이 느껴진다.
지원이랑 지아인가? 근데 왜…. 셋이야? 뭐지?
나를 노리는 놈인가? 기회를 노리고 있던 이사장의 심복?
씨발…. 어떻게 해야 하지? 이 문을 열고 들어가도 되는 거야?
근데 조금 이상하다. 나를 노릴 거였으면 문 뒤에 숨어있거나 바로 습격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한다.
스킬로 나를 노리는 것보단 바로 물리력을 행사하는 게 더 낫잖아? 그럼 이사장실에 숨어있을 필요가 없다.
차라리 식당이라던가 지금같이 오는 길에 덮치는 게 더 나았겠지.
게다가 저들이 있는 곳은 침대 쪽이다. 왜 저기에 있는 거지?
일단…. 문을 열어도 저 안쪽에선 문 쪽이 바로 안 보이니 조심스럽게 들어가 보기로 했다.
투명화를 쓰고 문을 살그머니 열었다.
바닥에 트랩이 있을지도 모르니 광역 스킬 무효화로 바닥을 지우면서 발소리를 죽이고 침대쪽을 바라봤다.
그리고 맥이 풀려서 투명화를 풀었다.
"뭐야?"
지원과 지아. 그리고 정현이.
맥빠진 내 목소리에 여자들이 나를 바라본다.
"아…. 왔네요."
지원이가 말하자 어색하게 웃는 지아와 잔뜩 얼굴을 붉히고 있는 정현.
지원이랑 지아는 이해한다. 내가 아까 더 할 거라고 했으니까. 근데 정현이 쟤는 왜 저기 있는 거야?
"오빠. 정현이 언니가 할 말이 있대요."
"지아야!"
깜짝 놀라서 지아에게 곤란한 표정으로 외치는 정현.
뭐야…. 설마…. 아니겠지?
우물쭈물하는 모습의 정현. 지아가 옆에서 자꾸 쿡쿡 찔렀고 정현이는 어찌할 줄 몰라서 난감한 듯한 얼굴이 되어 있다.
결국, 떠밀리다시피 해서 내 앞으로 나오게 된 정현이는 결국 결심한 듯 내게 말한다.
"저기…. 그…. 으으…. 어휴. 정말. 내가 미쳤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는 정현. 나는 반쯤 체념한 표정으로 말했다.
"편하게 말해. 무슨 말을 해도 다 경청해줄 테니."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던 정현이는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힘겹게 말을 꺼낸다.
"저는 매력이 없나요?"
이건 또 무슨 멍멍이 소리야…. 편두통이 앞뒤로 몰려오는 느낌이다.
"갑자기 뭐라고 하는 거야."
"윤서 언니나 송이 언니도 그렇고…. 지원이 언니랑 지아도 그런데…. 저만…."
미치겠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지원이와 지아를 바라봤다.
내가 바라보자 시선을 피하는 두 여자.
이 여자들은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이런 이야기를 공유하는 거야? 미친 거 아냐?
벌써 그 정도로 친해진 거야? 진짜? 와. 씨발. 친화력 개쩌네.
"하아…. 그러니까, 너랑은 왜 안 하냐?"
"네…."
"그래서 본인이 매력이 없다고 생각했다?"
"네…. 흑…."
아…. 왜 울어. 지금이 울 타이밍이야? 아니…. 나랑 섹스 못했다는 게 울 정도의 일이냐고?
대체 이 여자들에게 나는 뭘까? 뭘 어떻게 했길래 내가 이 정도로 고평가 받는 건데?
"울지마. 우는 건 싫어. 넌 충분히 매력 있어. 있는데…. 우는 여자는 매력 없어."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 일단 나는 여자가 우는 건 절대 보고 싶지 않다.
여자가 울어서 좋은 상황은 없다. 만약 있다고 해도 백 가지 중의 하나나 될까 말까인데.
"웃어야지 왜 우는 거야? 울지마. 울면 그냥 나가라고 할 거야."
내가 단호하게 말하자 바로 울음을 그치는 정현.
하여간…. 즙짜는게 무슨 무기인 줄 알아.
"니가 매력이 없었으면 애초에 니 동료들이 죽을 때 너도 같이 죽었어. 이해해? 아무리 입에 발린 말을 하는 것보단, 이게 가장 확실한 대답이 되겠지?"
그렁그렁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는 정현.
지원과 지아는 그런 나를 보고 약간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
하긴, 누가 여자를 달래는데 이렇게 말을 하겠어. 저들이 인상 쓰는 것도 이해가 가네.
"그러니까 너도 하고 싶다는 이야기지?"
고개를 푹 숙인 정현이가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하아. 이게 무슨 상황이냐. 세상이 망하니까 별꼴을 다 보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