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20화 (22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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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스

"고영준…. 모르겠습니다."

"에이씨. 왜 몰라. 의사끼리는 다 알고 지내야 하는 거 아냐?"

누가 들으면 미친놈이라고 할만한 개소리를 하는 나.

공통분모가 많아서 혹시나 했는데…. 쳇.

"뭐 아는 거 없냐? 걔도 의사에 원장이고 매혹이라고. 너희들끼리 커넥션 같은 거 없어?"

"커넥션…. 있습니다."

"엥?"

이런…. 역시 질문을 잘해야 하는구나. 내가 질문 하는 게 이상했어.

"말해봐. 혹시 알고 있을 만한 사람 있어?"

"용인에 그런 모임이 있긴 있습니다. 저는 권유 받긴 했지만, 굳이 가진 않았던…."

"용인…? 그래? 근데 거기 뭐가 있나?"

"연구소가 있습니다."

"연구소?"

"네. 생산 연구소."

"그건 또 뭐야?'

"말 그대로 약물 같은 것을 생산하는 연구소입니다."

"아아…. 결국 너랑 비슷한 짓을 하는구나?"

"조금 다릅니다. 저는 영업에 가깝습니다. 그들에게 물건을 받아 로얄클럽에서 쓰니까요."

"그래? 그렇군…. 이해했어. 거기 위치는 아나?"

"위치는 정확하게 모릅니다."

"그럼 넌 어떻게 물건을 구하는데?"

"구매하는 곳은 따로 있습니다."

"거긴 또 어디야? 아오. 귀찮네. 정말."

"분당에…."

분당? 민희의 입에서도 분당이 언급됐었지. 뭔가 연관이 있으려나?

"주소 적어."

종이와 펜을 던져주고 미연이를 바라봤다.

타오르는 눈으로 가만히 원장을 바라보는 그녀.

"미안. 금방 끝낼게."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원장이 다 적자 나는 종이를 한번 쓱 확인하고 품에 넣었다.

됐고…. 이젠 진짜 없겠지?

원장의 눈과 입을 막았다. 그리고 미연이를 향해 마체테를 내밀었다.

"자."

말없이 마체테를 잡는 미연.

"그대로 후려치면 되나요?"

"뒤에 여자들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잖아? 죽일 정도는 아니고 피가 철철 날 정도로 베면 돼."

"저 친구들은…. 괜찮다고 했어요."

"그래? 신기하네. 그럼 네가 죽일 테야?"

"네…. 할 수 있으면요."

"한 번에? 아니면 천천히 고통스럽게?"

내 말을 듣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한다.

"당연히 천천히 고통스럽게요."

"그럼 과다출혈로 가자. 한 번에 죽이는 건 사실 성에 안 차지."

나는 원장의 몸을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허벅지. 여기를 베면 피가 많이 나오지. 손목도 좋지만 지금 묶여있어서 힘들고. 목은 너무 빨리 죽어. 그러니 허벅지가 가장 나아. 그냥 푹 찔러."

미연은 양손으로 마체테를 잡더니 망설임 없이 그대로 허벅지에 힘껏 내리찍었다.

"으으으으읍!"

원장의 비명. 쯧쯧. 그러게 원한 살 짓 하지 말았어야지. 아니면 나처럼 역전당하지 말던가.

"몇 번 더 찔러. 이정도로는 분에 안 차잖아? 피 걱정은 하지 마. 어차피 죽으면 다 사라져."

내 말에 미연이가 몇 번의 칼질을 더 했다.

이런 장면은 제법 봤지만…. 정말 당한 게 많았나 보다. 상당히 침착하게 찌르네.

피비린내가 가득한 집무실. 그 한가운데서 죽어가고 있는 한 남자.

그리고 얼굴에 피가 튀어 약간 섬뜩한 분위기를 내는 미연.

바닥에 피가 웅덩이지며 다른 두 여자가 그 장면을 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린 지 한참 됐을 때쯤, 원장이 빛으로 변해버렸다.

순식간에 사라진 피와 피 냄새.

미연은 그제야 깊은숨을 내쉰다. 증오와 원한이 어느 정도는 저 숨과 함께 사라졌을까?

"고생했어. 코인은…. 이런. 셋으로 나눠야 하는데."

"괜찮아요. 코인은 그쪽이 가지세요."

"내가?"

"저희를 구해주셨잖아요. 당연히 그쪽 거죠."

"고통당한 건 너희잖아?"

"가지세요.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으니까. 아니, 제가 필요하시면 말하세요. 몸으로라도…."

"이제 막 자유가 된 사람이 그렇게 할 것까진 없어. 기왕 뭔가를 하고 싶다면 여기 머물면서 여기 사람들이 문제없도록 도와."

"네. 알겠어요."

그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그리고 이게 서로에게 좋은 거다. 갈 곳 없는 사람들과 전력이 필요한 사람들. 서로 윈윈이지.

[111,425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코인은 생각보다 적네. 왜 운전기사보다 적은 거야?

그래도 11만이 어디냐. 감사하게 받아야지.

"부장님? 부탁 좀 드릴게요."

부장이 고개를 끄덕이고 미연이와 여자 둘을 데리고 나갔다.

이제…. 이사장 차례인가?

빨리빨리 처리해야지. 질질 끌고 있을 필요 없지.

화장실로 가니 이사장은 욕조 안에서 죽은 듯 누워있었다.

어차피 죽으면 사라지는 세상이라 굳이 확인 안 해도 안 죽은 걸 알 수 있다는 건 좋네.

오줌을 지렸는지 지린내가 조금 난다. 어휴 씨발. 더러워서 원.

샤워기를 틀어 잔뜩 물을 뿌리고 나니 끌고 나오기가 애매해졌다.

별수 없지. 여기서 해야겠네.

여자들의 방에 가서 채원이를 불렀다.

"가자. 이사장 놈 죽이러."

내 말에 채원이와 다른 여자들이 우르르 나를 따라온다.

화장실이 제법 커서 다행이다. 여자 넷과 내가 있어도 전혀 좁지 않은 크기.

하지만 채원이는 화장실에 오니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뇨. 별로 좋은 기억이 없는 곳이라."

"아…. 그렇네. 내가 섬세함이 부족했네."

"괜찮아요. 이제 그런 기억들은 다 날려버릴 수 있을 테니까요."

역시, 여자가 한을 품으면 무섭다. 왜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고 하는지 알 거 같아.

싸늘한 분위기. 이사장 이 새끼를 저체온증으로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미연이도 그렇고 채원이도 그렇고. 이 새끼들은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이렇게 원한을 산 거야?

적당한 설명과 함께 건넨 마체테.

채원이가 먼저 마체테로 이사장의 배를 찔렀다.

와…. 씨. 허벅지가 아니고 배를 찌른다고?

그 한방에 다른 여자들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속이 안 좋다는 표정을 짓는다.

채원이가 다른 여자에게 마체테를 건네자 손사래를 치는 여자. 다른 여자들에게도 건네지만 모두 같은 반응이다.

흐음…. 나약하네. 저렇게 약한 애들은 필요 없는데.

그렇다고 굳이 강요하고 싶진 않다. 설득하고 싶지도 않고.

내 여자도 아닌데 뭐. 알아서 하라 그래.

결국, 채원이가 몇 군데를 더 찔렀고 피보다 비릿한 표정으로 이사장을 내려다본다.

죽어가는 모습을 똑똑하게 지켜보겠다는 의지가 엿보일 정도. 으음…. 이런 말 하는 건 약간 우습지만,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원흉을 똑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용기. 그건 쉽지 않다.

물론 팔다리가 묶인 채 욕조 안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저런 용기가 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사장이 빛으로 사라지자 화장실 안의 피비린내와 채원이의 표정도 모두 사라졌다.

여자들이 우르르 밖으로 나갔고 채원이도 천천히 몸을 돌려 나간다.

"코인은?"

"이사장 그 새끼 몸에서 나온 거라고 생각하니 만지고 싶지도 않아요."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내가 주웠다.

[24,423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거지네. 한심한 새끼.

어쨌든, 이제야 모든 게 다 끝났다.

비로소 동산의 잔재를 모두 씻어내고 새로 출발할 수 있게 됐어.

안정적인 식량 보급처에 코인도 많이 얻었고, 정보도 상당히 많이 얻었다.

역시 매혹 스킬 가진 여자만큼 좋은 게 없어.

가진 정보를 송두리째 뽑아낼 수 있다는 것.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지.

그만큼 위험한 스킬이기도 하고.

만약 나같이 매혹 스킬을 가진 남자가 이곳에 침투하게 되면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이것에 대한 대비를 무조건 해야 한다. 근데…. 이들이 방비할 수 있을까?

밖으로 나오자 부장이 다시 와있었다.

"아. 이사장은 죽었습니까?"

"네. 동산은 이제 완전히 끝났어요."

"하아. 속이 시원하군요. 씁쓸하기도 하고요."

"그와 오래 알고 지냈어요?"

"글쎄요. 오래됐다면 오래죠. 뭐 이제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다지 말하고 싶지 않나 보다. 그래. 뭐 그런 것까지 굳이 알 필요는 없지.

"이제 부장님만 바쁘시겠네요."

"이런 일로 바쁜 건 얼마든지 환영이죠. 쓸데없는 일로 골머리 썩이는 것보단 훨씬 낫습니다."

"그런가요.“

잠시 침묵. 분위기가 약간 어색하네.

나는 환기시킬겸 가벼운 말투로 부장에게 물었다.

”그럼 전 오늘 어디서 자나요?"

"아. 맞다. 음…. 그냥 여기서 자는 건 어떻습니까? 이사장실이라 조금 찝찝하실 수도 있겠지만, 시트나 이런 건 다 매일 가는 거라…."

"뭐, 전 신경 안 씁니다. 어차피 천장만 있고 찬바람만 안 들어오면 어디든 상관없죠."

"그래요. 어차피 여기는 앞으로 계속 비워둘 생각이니 이곳에 들리면 그냥 여기를 본인 방처럼 쓰세요."

"알겠어요. 그렇게 하죠."

"그럼 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이따 저녁때 식사나 같이하시죠. 식당 여사님이 자꾸 봐두고 싶다고 해서."

"그래요. 그렇게 하죠."

부장이 나갔고, 이사장실에는 나 혼자 남게 됐다.

저녁까진 아직 시간에 여유가 있다. 뭘 해야 할까?

방안을 훑어보다가 창밖의 풍경에 눈이 갔다.

아직 환한 바깥, 그리고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들.

이사장 이놈은 여기서 저 사람들을 이렇게 바라보고 있던 걸까?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았을까? 저들을 보며 우매하다고 생각하고 살았을까?

모르겠다. 그딴 놈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았는지.

내가 여기에서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

이곳엔 아이들이 있었다.

세상이 망한 이후 상당히 보기 힘들어진 게 아이들과 노인이다.

노인이야 70살 이상이 다 한순간에 사라져서 그렇다고는 하지만 아이들은 다르다.

갓난아이, 유아, 미취학 아동, 어린이, 청소년.

세상이 각박해지면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본 약자들.

사람 죽이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는 나라도 아이들을 죽이는 것은 꺼려졌다.

이유…. 그런건 명확하게 없다. 그냥 몸이 거부한다고 해야 하나?

웃기는 일이지. 살인, 강간, 약탈에 납치와 고문, 파렴치한 짓까지 다 하면서도 어린아이들은 못 죽인다니.

하지만 아이들은 죄가 없다.

물론 어른들 역시 죄가 없지만, 자신이 선택하고 책임이라도 질 수 있잖아.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것도 없었다. 아직 세상을 전부 알지도 못했는데.

모르겠다. 그냥 위선일 수도 있지. 벗어나지 못한 과거 세상의 잔재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나에게 남은 마지막 인간성일 수도 있고.

똑똑

누구지? 부장 말고는 나를 찾아올 사람이 없을 텐데?

"들어와."

집무실 안으로 정말 의외의 사람이 들어왔다.

"지아? 무슨 일이야?"

약간 어정쩡한 자세로 쭈뼛거리며 들어오는 지아.

"어…. 저기."

"문은 닫고."

"아…. 네."

다시 우물쭈물하며 문으로 돌아가 닫는다.

평소의 활발한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 뭐 실수라도 했나? 오자마자 거나한 사고라도 하나 친 거야?

"무슨 일 있어?"

내가 가까이 다가가 물어보자 지아는 머뭇거리며 말을 못 한다.

뭐지? 아픈가?

"저기…. 가는 게 내일로 미뤄졌다면서요?"

"어. 그렇게 됐어."

"그럼 지금 바로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치. 오늘 하루는 느긋하게 여기를 둘러보려고."

"네…. 그렇죠. 그러시겠죠."

뭐야? 얘 왜 이래? 상태가 조금 이상한데?

"뭔데? 무슨 할 말이 있길래 그렇게 뜸을 들이는데?"

잠깐 말이 없는 지아. 결국, 결심한 듯 나를 보고 말한다.

"오빠 정말 매혹 스킬 있는 거 맞죠?"

아…. 매혹. 그 이야긴가.

쩝. 입맛이 쓰네. 뭐…. 언젠간 나올 이야기이긴 했지. 근데 왜 지아가?

"맞아. 난 매혹 스킬이 있어."

"그럼…. 저에게도 쓰셨나요?"

"너?"

어…. 있나? 아닌데. 얘한텐 쓴 기억이 없다.

"너한텐 쓴 적 없는데?"

"정말요?"

"근데 정말이라고 말해도 믿을 수는 있는 거야?"

"어…. 그게…. 믿어야 하지 않을까요?"

"뭐 대답이 그래?"

"어…. 그럼…. 다른 언니들에겐 매혹을 걸었었나요?"

"어. 처음 만난 날. 그날은 걸었지. 나를 믿게 할 자신이 없어서 스킬의 도움을 빌렸지. 근데 그걸 네가 왜 물어봐?"

"아니…. 그게. 음. 에이!"

갑자기 화를 벌컥 내는 지아.

그러더니 나를 보고 다짜고짜 말한다.

"혹시…. 제 처음을 가져가 주실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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