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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식사 안 하십니까?"
"아. 일행들 오면 먹어야죠."
"아하. 맞다. 아까 일행분 있었죠. 그럼 오면 같이 먹죠."
"그러시죠. 어차피 소개도 해드려야 하니까."
내가 존대를 하자 부장의 태도가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역시 상호존중이 있어야 분위기가 좋아지지.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곱다.
오늘도 옛 성현들의 말씀에 다시 한번 감복합니다. 네이.
집무실에 있는 소파에 앉자 부장도 따라 앉는다.
약간 어색한 분위기. 뭐라도 말을 꺼내야 할까?
"저기…."
다행히 부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정말 믿기지 않아서 그런데 진짜 조건이 그게 다입니까? 다른걸 원하는 건 없습니까?"
그의 말에 나는 빙긋 웃었다.
하긴, 내가 부장이었다고 해도 못 믿는 게 당연하겠지.
"원래 맨 처음 계획은 캠프와 동산에 있는 사람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죠."
내 말에 눈이 살짝 가늘어지는 부장.
"근데 캠프를 밀어버리고 보니 죽이기 아까운 이들이 몇 명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계획을 조정했죠. 동산의 윗대가리들을 쳐내고 그들을 관리자로 둔 뒤 그렇게 내가 동산을 먹기로."
"그 사람들이 지금 기다리고 있는 그 여자들입니까?"
"네. 맞습니다."
"여자들인 이유는…. 매혹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도 맞아요.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이사장 놈 밑에서 지금껏 있었으니까요."
"아하. 그렇죠. 아무튼, 그렇게 생각하고 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당신들을 지켜봤죠. 죽이기 아깝더라고요. 내가 생각했던 것과 많이 달랐어요."
"어떤 점이 달랐습니까?"
"저는 동산이 알량하게 공격 스킬 가지고 있는 이들이 쓸모없는 스킬들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부려먹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보호를 빌미 삼아 노동력을 착취하며 놀고먹는 느낌…. 대충 무슨 그림인지 아시죠?"
"하하. 보통은 그렇게 되는 게 맞죠. 여기도 처음엔 그랬으니까요."
"그런데 막상 와보니 다르더군요. 아마 이사장 저놈이 쓰레기가 아니고 부장 당신의 반 정도만 했어도 나는 혼란스러웠을 거예요. 다행히 이사장이 쓰레기여서 망정이지."
"이사장 저 인간도 처음엔 저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나름 사이비 교주였다고요. 방향을 잘못 잡았을 뿐 능력은 있는 남자였습니다."
"그래 보여요. 왜 저렇게 된 겁니까?"
"아까 보셨던 그 로얄클럽인지 뭐시기 때문이죠.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가 다리가 찢어진 거죠."
"적당히 주제 파악하고 살았으면 이 지경까지는 안됐을 텐데 말이죠?"
"그렇죠. 과한 욕심에 사람이 변해서 문제죠. 하긴 변하기 전에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뭐, 어찌 됐건 그런 겁니다. 나는 당신들을 죽일 마음이 없어졌고, 내가 필요한 건 안정적인 식량 공급이면 충분하니까요. 사실 코인이 더 좋긴 하지만…. 당신들 전부 죽여봐야 코인은 얼마 나오지 않겠죠."
"그건 그럴 겁니다. 살상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모인 곳이니까요."
"그게 끝입니다. 충분히 이해가 되셨는지?"
"이해했습니다. 열심히 산 보람이 있군요."
잠깐의 정적. 환청같이 저 안쪽에서 읍읍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아니, 진짜 들리는 건가? 이사장 놈이 내는 소리인가? 저렇게 힘 빼면 본인만 힘들 텐데.
"부장님은 왜 이곳에 남아있었습니까? 시작 스킬을 기절로 가지고 있었으면 밖이 더 편했을 텐데요."
"공격 스킬을 가지고 있다고 모두가 살인을 좋아하는 건 아니니까요. 아마 밖이었으면 이 좋은 스킬을 들고도 어리바리하다가 금방 죽었을 거예요. 여기 안에 있었으니 부장님이니 이런 소리도 들어가며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거죠."
확실히 내가 생각하고 있던 세상과 많이 다르다.
그렇게 세상을 봐오면서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현실은 생각과 괴리율이 크다.
머리 좋고 좋은 스킬도 가지고 있는데 사람을 못 죽인다는 건 내 상식선에서는 이해가 안 가는 일이니까.
역시 내가 뭔가 대가리에서 나사가 몇 개 잘못 조여진 게 틀림없어.
똑똑
잠시 그렇게 또 말없이 있는데 타이밍 좋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들어와!"
내가 소리치자 문이 빼꼼 열리고 아까 입구에 있었던 경비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익숙한 얼굴들.
윤서, 지원, 지아, 송이, 정현이까지. 빠짐없이 다 왔네.
경비가 인사를 꾸벅하고 다시 나갔고, 여자들은 집무실 안을 두리번거리다 나를 바라본다.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가는 표정들.
나는 그녀들에게 있었던 일을 간단히 설명해줬다.
이야기를 다 듣자 역시 나를 바라보는 표정이 조금 달라졌다.
아마 매혹 스킬에 대해서 들어서 그렇겠지.
예상했던 일이긴 하지만, 역시 마음이 좋진 않네.
이렇다니까. 매혹 스킬은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의심하게 만든다.
쩝. 어쩌겠어. 내가 이 여자들에게 진정한 사랑을 바란 것도 아닌데.
"이제 식사하러 가시죠?"
뭐, 여자들의 반응은 어쨌든 예상했던 범주기에 어쩔 수 없다.
애초에 이 여자들에겐 큰 기대를 하진 않았으니까.
실망이나 덜 하면 좋겠네.
"네, 가시죠. 안내하겠습니다."
그렇게 약간 서먹한 상태로 여자들을 이끌고 부장을 따라 식당으로 간 나는 음식을 보고 깜짝 놀랐다.
흰밥, 소고기 뭇국, 제육볶음, 닭튀김, 계란말이, 깻잎, 깍두기, 김치.
맙소사. 이게 뭐지? 꿈인가?
세상이 망하기 전이라면 함바집이나 기사식당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음식들.
하지만 세상이 망했다는 게 중요하다. 이 식당만 망하는 걸 피해간 걸까?
"왜 그러십니까? 안 드세요? 맘에 안 드세요?"
식판을 들고 음식을 푸려던 부장이 가만히 있는 나를 보고 의아한 듯 물어본다.
"아니…. 이런 음식들을 다시 보게 돼서…. 감격스러워서요."
"네? 아아…. 밖에서 오셨으니 그럴 수 있겠군요. 여기서는 이게 가장 기본인데."
"여기 오길 잘했네요."
어색해진 분위기 때문인지 조금 오바해서 한바탕 주접을 떤 뒤 식판 가득히 음식을 담아 먹기 시작했다.
여자들은 캠프에서도 이 정도는 먹었었는지 나 정도로 감흥은 없는 것 같다.
분위기도 아직 별로고.
에휴. 내가 왜 이렇게 이 여자들의 눈치를 봐야 하는지.
오랜만에 배가 터질 정도로 포식을 하고 집무실로 돌아와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눈치고 분위기고 알게 뭐람. 이렇게 맛있게 밥을 먹었으면 됐지.
하…. 이거 어떻게 벙커로 좀 못 싸가나? 아냐. 못 싸갈 건 없지. 꼭 챙겨달라고 해야지.
안 싸준다고 하면 식당을 털어서라도 꼭 가져가고 말 테다.
그렇게 여자들을 신경 안 쓰고 세시까지 뒹굴 거리다 부장을 따라 대회의실로 향했다.
내가 도착하니 이미 도착해있는 반장들.
그리고 나를 보며 살짝 경계하는 사람들. 아마 저들이 집행부겠지?
부장이 나를 가장 중앙자리에 안내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앉았다.
여자들이 내 옆 빈자리에 앉자 모두가 나를 바라본다.
아...이거 생각보다 시선이 따갑네. 부담스럽게.
"반갑습니다. 이사장이란 놈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권성철이라고 합니다. 오늘부로 이사장이라는 자리는 없습니다. 그 권한과 자격은 여기 정 부장님에게 위임됐습니다. 다들 박수."
내가 손뼉을 치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손뼉을 친다.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린가 싶으실 텐데요. 뭐 어려운 말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해오던 거 그대로 하시면 됩니다. 반장님들은 생산 감독 잘해주시고 자세한 상황 보고는 정 부장님에게 해주시면 됩니다. 어려울 거 없죠?"
"그럼 그쪽은 하는 게 뭡니까?"
반장 중의 한 명이 나에게 물어본다.
다들 눈치만 보고 아무 말도 못 하다가 반장이 말을 하니 속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저요? 저는 여기 없을 겁니다. 제 역할은 여기에서 거들먹거리는 게 아니고 주변에 있을 적들을 치우는 일 이거든요. 여러분들이 생산 활동에 전념하고 먹고 사는 데 불편함 없도록요. 이번에 침입한 저 같은 놈이 또 생기지 않게 미리 막는 거죠."
"그럼 그 옆에 온 아가씨들은?"
"아. 이들은 모두 투명화 스킬을 가진 이들로 사람 죽이는데 프로입니다. 외부의 탐색을 맡으며 주변에서 얼쩡거릴 수 있는 적들을 미리 작살내는 역할을 맡았죠."
지아가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애써 무시했다. 제길. 지아 생각을 안 했네. 누가 봐도 쟤는 초본데.
"그럼 저희 역할은 뭡니까?"
집행부의 일원인 듯한 남자 하나가 나를 보며 물어본다.
"본인 소개부터 부탁드려도 될까요?"
"집행부 소속 김명철입니다."
"아. 집행부. 집행부는 하던 일을 계속하면 됩니다. 내부의 치안을 맡으면 되죠. 한 가지 달라지는 건…. 혹시 주변 인간 탐지 스킬 가지고 있는 분? 손 한 번 들어볼까요?"
하나 둘 셋 넷…. 네 명. 마침 딱 인원도 맞네.
"거기 네 분. 네 분은 오늘부터 외부조로 편성될 거에요. 여기 여자분들과 조를 이뤄서 바깥을 탐색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내 말에 수군거리는 집행부 인원들.
하지만 딱히 불만은 없는 표정이다. 본인들이 하던 일을 하는 거고 내가 한 말들은 다 타당한 내용이니까.
그리고 저들은 사실 입이 있어도 할 말이 없다.
내 존재 자체가 저들의 무능을 설명해주는 거니까.
만약 저들이 이 자리에서 조금 더 공격적으로 나왔다면 그런 부분들을 신랄하게 까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그러진 않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중요한 일이라는 말에 웅성거림이 멈추고 다시 나에게 시선이 집중된다.
"동산이라는 이름. 바꿔야 해요. 오늘부로 동산은 없어졌습니다. 새로운 이름을 정하죠."
내 말에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사람들.
"더는 옛 사이비 교단의 냄새가 나는 그런 이름을 계속 쓸 필요가 없어요. 새로운 이름으로 새롭게 다시 시작하자고요. 좋은 이름이 있으면 마음껏 말해보세요."
다시 수군거림으로 가득 찬 회의실.
하지만 별다른 의견은 나오지 않는다.
음…. 뭘로 하지? 조금 시간을 둬야 하나?
"고향 어떻습니꺼."
반장 중의 하나가 말했고 옆에 앉아있던 반장이 '빙신이가?'라고 면박을 준다.
"아. 너무 뭐라고 하지 마십시오. 후보로 나온 것들을 모두 적어서 나중에 거수로 뽑죠."
"낙원요."
집행부의 한 남자가 말했고, 옆에 있던 또 다른 집행부인듯한 여자가 한숨을 푹 내쉰다.
그 여자에게 '뭐 어때?'라고 작게 투덜거리는 남자. 어이구. 잘들 논다.
"일단 적어놓겠습니다. 또요?"
그렇게 몇 개의 이름들이 나왔다.
고향, 낙원, 쉘터, 씨티, 정부, 농장, 하우스…. 하우스 이름 낸 새끼는 내가 얼굴 봐뒀다. 이 새끼는 안 되겠어.
여러가지가 나왔지만 마땅하게 딱 달라붙는 이름은 없다.
어휴. 이 사람들 감각은 나랑 크게 다른 바가 없구나.
"더 없나요? 없으면 마감합니다?"
"펜스."
부장이 말하자 다들 그를 바라본다.
펜스라. 왠지 맘에 드는데? 입에 짝 달라붙는 느낌이야. 상징성도 있고.
"그럼 펜스를 끝으로 마감하겠습니다. 각자 한 번씩만 거수할 수 있고 상위 동률이면 동률인 것들만 다시 하겠습니다. 그럼 먼저…. 펜스부터 하죠."
내가 말을 마치자 하나둘씩 손을 들기 시작했다.
딱 봐도 이미 절반을 넘어서 한 70퍼센트는 되는 거 같다.
"더 할 필요도 없겠네요. 펜스로 결정 났습니다. 앞으로 이곳의 공식 명칭은 펜스로 하겠습니다. 이의 없으시죠?"
"고향 안 좋나?"
아까 고향을 말했던 반장이 다시 말하자 옆에 있던 반장이 그를 후려치려고 했고, 그걸 말리느라 잠시 소란이 있었다.
다시 진정을 시키고 회의실을 둘러보자 아까보다는 훨씬 분위기가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름 정하는 것에 몰두해서 그런가? 어쨌든 좋은 일이지.
"가장 중요한 걸 정했으니 오늘은 이만 마칩니다. 네 시에 잡아 죽여야 할 놈들이 올 거라 준비를 조금 해야 하거든요. 여러분들은 그냥 늘 하던 대로 하시면 됩니다. 크게 변하는 건 없을 거예요. 아. 그리고 반장님들 뭐하나만 물어봅시다. 혹시 여기 주민 중에 철근 생성 스킬 있는 사람 있어요?"
"철근? 와? 그걸 왜 찾는데? 내 아는 아 하나 있긴 한데."
"나도 그 스킬 있는 사람 알고 있어요."
내 말에 대답하는 반장 둘.
"두 명? 음. 더 있으면 좋겠는데. 다름이 아니고 여러분들 사는 곳이 컨테이너잖아요. 번듯한 집 만들 수 있지 않나 해서."
내 말을 듣자 반장 몇 명의 눈이 빛나는 게 느껴졌다.
"집? 집이라고 캤소?"
"집이 그리 뚝딱 만들어지는 게 아인데."
"그러니까 물어보는 거죠. 식량 생산에 차질이 없는 선에서 건축 토목 쪽 나온 분들이랑 철근 생성 스킬 있는 분들이 모여서 집 한번 만들어 보세요. 콘크리트 같은 거야 밖에 돌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잖아요? 사람이 이렇게 모여있으면 집 만드는 전문가들이 꽤 있으실 거 같은데."
"아. 하지. 그거 뭐 어렵다고 못 하나?"
"그쵸. 시간이 없어서 못 했지 집이야…. 그거 뭐 만드는 게 어렵겠어요?"
반장 중에 그쪽에 일했던 사람들이 몇 있나 보다. 눈을 반짝이며 목소리를 높이는 게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그럼 부장님? 한번 담당자들 모아서 시도 한번 해보시죠."
"하아…. 이렇게 일거리를 얹어주는 겁니까? 괜히 한가하다고 말한 거 같네요. 뭐…. 좋습니다. 저도 컨테이너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팠던 건 사실이니까요. 해보죠."
"그래요. 부장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니 모여서 계획 한번 짜보세요. 시간이 됐으니 이제 회의는 끝내겠습니다. 앞으로 이렇게 자주 보자고요."
본의 아니게 집 만드는 이야기로 몇몇 반장들을 흥분상태로 만든 나는 서둘러 회의를 끝냈다.
3시 40분. 일지를 봐도 최 원장인지 뭔지는 정확하게 4시에 맞춰서 이곳으로 왔으니 나름대로 맞이 준비를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