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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지…. 진짜로 끝난 겁니까?"
이사장이 무릎 꿇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아직 믿기지 않는지 나를 향해 물어보는 부장.
"뭐, 아직 안 죽였으니 완전히 끝난 건 아니지. 이것저것 물어볼 게 있어서 조금 있다가 죽일 건데. 괜찮지?"
"그거야 상관은 없는데…. 하. 이거 참.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원래 세상일은 다 이런 거야. 착실히 대비하지 않으면 이런 꼴이 난다고. 아무튼, 이제 뒷정리할 거야. 부장?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모여서 이야기할 수 있는 곳이 있나?"
"있습니다…. 대회의실이면 충분할 거에요."
"그래? 그럼 점심 먹고 느긋하게 세시쯤에 모두 대회의실에서 모이도록 하자. 이것저것 할 말이 많으니까."
"아…. 네. 알겠습니다."
"반장들. 당신들 중에서 대표 3명 뽑아. 대표 임기는 1년, 연임은 불가능. 대표자리는 힘과 권력이 있는 자리가 아니고 고생하는 자리가 될 거야. 알아서 뽑아. 지금 가서 대표 뽑고, 그 대표는 세시에 회의 참석하도록 해. 아니다. 오늘은 당신들 다 참석해."
반장들은 의외라는 듯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더니 알겠다고 하고 자리를 떠났다.
저들이 착취당하는 쪽이 아닌 공생 관계인 걸 안 이상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 불만이 없을 거다.
물론 불만이라는 건 아무리 들어줘도 계속해서 생기는 법이지만…. 어쨌든 기본 이상은 대우를 해줘야 나중에 개소리 할 때도 반박할 여지가 있는 법이니까.
"부장."
"네?"
"넌 스킬 뭐냐?"
"아…. 전 기절입니다."
"하나야?"
"네."
"그래. 나름 괜찮은 스킬이네. 뭐 하나만 물어보자. 저 여자들에 대한 평가는 어떻지? 아무리 이사장이 매혹으로 부려먹은 거라고 하지만 반감이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은데."
"글쎄요. 제가 모두의 평가를 대변할 수는 없지만…. 제 생각에는 그녀들을 원망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저들도 피해자니까요."
"그래? 그래도 다들 아직 이성은 남아있나 보네. 광기로 넘어가진 않았나 봐."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나도 그러길 바라."
배낭에서 테이프를 꺼냈다.
그런 나를 보고 '이 미친놈이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라는 표정을 짓는 부장.
나는 테이프를 들고 이사장에게 다가가 90점 여자에게 말했다.
"이놈 스킬이 뭐가 있는지 물어봐."
"스킬이 뭐가 있는지 말씀드려."
"저는…. 매혹과 반사가 있습니다."
음…. 역시 다들 생각하는 건 비슷비슷하네. 하긴 매혹이 있는 남자가 매혹이 있는 여자를 다루려면 반사나 투명화는 꼭 있어야지. 안 그러면 자기가 당하니까.
테이프를 뜯어 이사장의 눈과 입을 가리고 몸을 묶었다.
현란한 내 테이프 솜씨에 다들 '대체 이 새끼는 대체 뭐 하는 놈일까?'라는 표정을 짓는다.
"여자들. 다 이쪽으로 모여봐."
이사장 근처로 모인 여자들.
나는 그들에게 광역 스킬 무효화를 썼다.
내가 걸었던 매혹이 풀리자 별다른 고민 없이 덤덤했던 여자들의 표정이 복잡한 모습으로 변해간다.
"자. 지금부터 함부로 매혹을 걸면, 그 자리에서 죽어."
내 말에 두려운 표정으로 나를 보는 여자들.
"지금까지 너희가 이용당했던 걸 참작해서 죄를 묻거나 하지는 않을 거야. 말 그대로 너희는 자유가 된 거지. 하지만 그렇다고 너희가 가진 스킬이 위협적이지 않은 건 아냐. 매혹은 상당히 위험한 스킬이고 순식간에 모든 걸 엉망으로 만들 수 있는 스킬이야. 그러니 너희는 어쩔 수 없이 제한적인 삶을 살아야 할 수도 있어. 알겠어?"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들. 아마 쓸데없는 짓은 하지 않을 거다.
본인들에게 끔찍한 상황을 해결해 줬는데 여기에서 뭔가 쓸데없는 짓을 하려 한다면…. 그건 조류 정도의 지능이잖아?
게다가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이 여자들은 어떻게 보면 병기다.
나만 쓸 수 있는 병기. 물론 매혹을 가진 다른 놈이 넘볼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이 여자들의 존재를 알았을 때의 일이고.
"일단 가서 쉬어. 너희가 이사장에게 무슨 짓을 당했든 앞으로는 그럴 일 없을 거야. 그러니 좀 편한 마음으로 가서 쉬어. 쉴 곳 정도는 있겠지?"
"네."
여자들이 대답했고, 나는 가보라는 손짓을 했다.
홀가분한 표정의 그녀들. 나는 그녀들에게 시선을 거두고 부장을 바라봤다.
"하…. 할 게 많네. 일단…. 정보를 뽑아내기 전에 나랑 잠시 어디 좀 가자."
"네?"
"잠깐 따라와 봐. 내가 직접 안 가면 안 믿을 테니까 내가 가야 해."
"무슨 소립니까?"
"가보면 알아. 정문으로 나가려면 이쪽인가?"
"아니. 이사장 이놈을 여기 이렇게 두고 어딜 간다는 겁니까?"
"집행부 두고 가잖아. 설마 쟤들이 이사장 풀어주고 배신할 사람들은 아니지?"
"당연히 그렇기야 하지만…. 정문은 왜요?"
"일단 가자. 질문은 나중에 하고."
부장은 집행부 네 명에게 이사장을 잘 지키라고 단단히 이르고 나를 쫓아온다.
"정문이면 이쪽입니다."
나와 부장은 건물에서 나왔다.
산 쪽에서 봤었던 정문을 이렇게 안쪽에서 바라보는 건 즐거운 기분이다.
이곳을 무사히 손에 넣었으니 앞으로는 숨어다니거나 펜스 밑의 개구멍을 통과할 일 없이 당당하게 정문으로 다닐 수 있다는 뜻이니까.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가 나를 보고 깜짝 놀랐지만 옆에 부장이 있으니 별다른 행동을 하진 않았다.
나는 그런 그를 지나쳐 입구에 있는 문밖으로 나갔다.
"나다! 나와!"
내가 소리치는 걸 보고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짓는 부장과 경비.
그리고 조금 뒤에 정현이가 나타나자 더욱더 어이없는 표정이 됐다.
"엑? 대장?"
"추운데 고생이 많았네."
"아니…. 왜 거기서 나와요?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고….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래."
"동산은 접수했어. 그러니 가서 애들 다 데리고 와."
"네??"
"짐이랑 모두 다 챙겨서 와. 들어올 때는 이쪽으로 들어오고. 거기. 이 여자랑 다른 여자 넷이 이쪽으로 올 거니까 알아둬."
내가 경비를 보고 말하자 부장의 눈치를 살피는 경비.
부장이 고개를 끄덕였고 경비도 알았다고 대답한다.
"와. 조금 당혹스럽네요."
"원래 그런 거야. 시간 낭비 하지 말고 가서 데리고 오기나 해."
"알겠어요. 와. 이거."
자리를 뜨면서도 계속해서 고개를 갸웃거리는 정현.
그녀의 심정이 어떨지 이해한다. 자기들은 뭔가 하지도 않았는데 일이 끝나버렸으니 당황스럽긴 하겠지.
"하아. 우린 대체 언제부터 위험에 빠져있던 겁니까?"
부장 역시 어이없다는 말투로 나에게 물어본다.
"글쎄. 동산이 만들어질 때부터?"
"죽기 위해 태어난다는 선문답 같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습니다."
"예리하네. 뭐,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캠프를 박살 냈을 때부터?"
"캠프…. 예상은 했지만 역시 그것도 당신이 한 거군요."
"그래. 이 주변에 그런 미친 짓을 할 사람이 또 누가 있겠어."
"캠프…. 거기도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은 아니었을 텐데요. 하긴 거기도 김 사장 죽고 나서 점점 맛이 가긴 했지만."
"김 사장?"
"아.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처음 캠프 만든 사람이요."
"아아."
어차피 망해버린 곳에 대해서 굳이 더 이야기할 필요는 없지.
앞으로 해야 할 일이랑 신경 쓸게 천지인데 말야.
"아. 그리고."
"응?"
"네 시에 올 녀석들도 대비해야 합니다."
"네 시? 아. 검은 세단?"
"그것도 아는 겁니까? 이거 참…. 하긴 여기 정문 앞에도 저렇게 감시 인원을 둔 거 보면 모를 수가 없겠군요."
"뭐 하는 놈들인지는 몰라. 뭔데?"
"그냥 이사장의 추잡한 짓거리입니다. 서로 가진 여자들을 데리고 와 자랑하며…. 더 설명 안 해도 되겠지요?"
"아아. 죽여도 되는 놈들이라는 거네."
"사고관이 굉장히 단순하시군요."
"심플 이즈 베스트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걱정 마. 어차피 매혹 있는 여자들도 있겠다…. 정보 캐내는 건 일도 아니니까. 고구마를 캤으면 줄기를 따라서 마저 싹 캐야지."
"아…. 그게 또 그렇게 되네요.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해 보이는군요?"
"뭐, 나름 익숙하다면 익숙하지. 일단 들어가자. 춥다."
부장 이 사람…. 내가 계속 반말을 찍찍해도 별로 기분 나빠하지도 않고 머리도 잘 돌아가고…. 역시 맘에 든다.
하긴 이정도 되는 사람이니 이런 커다란 곳을 알아서 운영했겠지.
꼴을 보아하니 이사장 그 새끼가 만들긴 했어도 실제로 운영을 한 건 아닌거 같은데.
사이비 교주 할 실력은 있었어도 이런 공동체를 만드는 실력은 없었나 보다.
뭐, 두 개가 아예 성격이 다르니 당연한 일인가.
다시 이사장의 집무실로 돌아온 나는 바닥에서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이사장을 보며 생각했다.
일단 제일 먼저 해야 할 것은 이놈이 알고 있는 것을 모두 끄집어 내는 것.
여기 동산의 운영은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는 것이 많을 테니까 그걸 캐내는 게 급선무다.
"부장. 바빠?"
"아뇨…. 아까까진 바빴는데 지금은 안 바빠졌습니다. 성장팀의 일정을 바꿀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요."
"아. 그래. 성장. 좋은 스킬이지. 아마 식량난을 구원할 수 있는 가장 핵심 스킬일 거야."
"맞습니다. 성장이 있고 없고에 따라 생산량 자체가 다르긴 하죠."
"그럼 한가하다는 이야기네? 이제부터 이사장 이놈에게서 정보 빼낼 건데, 같이 들을래?"
"아. 그래도 되면 당연히 들어야지요."
"그래. 웬만하면 들어둬. 앞으로 나 없이도 여기 운영하려면 같이 알아두는 게 좋아."
"아까부터 의문이 들었던 건데…. 여기 머무를 생각이 아닙니까?"
"어."
"대체 그럼 왜 이사장을 친 겁니까? 그렇게 기껏 이사장을 꼬꾸라뜨려 놓고 그 자리엔 앉지 않는다니…. 이해가 안 가는군요."
"아까 말했잖아. 난 지속해서 식량을 얻을 곳이 필요했다고."
"그거…. 농담이 아니었습니까?"
"농담 같은 소리 하네. 난 내가 농사짓고 식량 자급자족할 자신이 없어서 이런 짓을 한 거야. 다섯 명 분량의 식량만 끊임없이 받을 수 있으면 이런 자리 같은 거 필요 없어."
"하…. 당신은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네요."
"이 세상에 먹고 사는 것 말고 중요한 게 있겠어? 그리고 나는 이런 자리 싫어. 이런 데 있으면 사람이 변하거든."
"그건…. 맞죠. 이사장 이놈도 처음엔 이렇지 않았으니."
"그래? 그건 잘 믿기지 않네. 아무튼…. 슬슬 시작해보자."
바닥에 쓰러져있는 이사장의 귀는 막혀있지 않다.
내가 시작해보자는 말을 하자 막힌 입에서 짐승 같은 울음소리가 들린다.
원 짜식이….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지랄하고 있네.
나는 이사장에게 다가가 그의 조인트를 발로 찼다.
고통에 비명을 지르는 이사장.
역시 전투화로 조인트 까는 것만큼 효과 좋은 게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