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14화 (214/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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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근데 이사장이라는 놈. 대체 무슨 능력이길래 저렇게 다들 쩔쩔매지?

인원 제한없이 쳐죽일 수 있는 스킬이라고 하면 감전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다.

하지만 감전은 반사에 막히고 그마저도 스무 번 쓰면 포션을 먹어야 한다.

우르르 몰려가면 두세 명 맞을 동안 덮치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을 텐데?

몇 명이 죽을지 모른다는 건…. 다른 스킬인가?

얼음 회오리나 번개 파동? 그런 건가? 아니면 바람 칼날?

한꺼번에 여러 명을 죽일 수 있는 스킬은 그런 거밖에 없는데….

솔직히 그런 스킬들은 위협적이긴 하지만 저 인원으로 제압 못 할 정도는 아니다.

저들이 말하는 건 뭔가 근원적으로 두려워하는 듯한….

"하. 씨발. 고놈의 가시나 넷만 없어도."

"무리에요. 이사장 새끼는 그 여자들 없으면 다른 사람 만나지도 않는다고요."

여자들? 친위대 같은 게 있는 건가? 근데 왜 여자들이지?

"거 매혹. 그 씨벌. 어휴. 거 뭐 방법 없나? 하. 거 걸리면 기분 드릅다이."

"없으니까 이러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리고 저도 걸려 봤거든요? 어휴."

반장의 입에서 나온 매혹이라는 단어.

그 단어를 듣자 머릿속에서 번뜩하고 떠올랐다.

여자들. 네 명. 매혹. 이들의 공포심.

이사장 새끼…. 매혹 스킬을 가진 여자 넷이 있구나! 와…. 씨발. 그걸 하는 놈이 있다고?

생각만 했던 거다. 매혹을 가진 남자가 매혹을 가진 여자 넷을 매혹하면 그 네 명의 여자는 열여섯 명의 남자를 매혹할 수 있다.

몇 명이 몰려오든 순식간에 열여섯이 매혹당하면…. 그걸로 끝이다. 바로 옆의 동료가 당장 내 머리를 후려칠 수 있는 거니까.

게다가 매혹 걸린 이를 제압한다고 해도 다른 남자를 매혹해버리면 된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전력.

그렇게 생각만 했던 걸 정말 이룬 새끼가 있다니…. 하. 역시 이런 곳을 만든 새끼는 스케일이 다르구나.

그리고 이제야 정종찬 그 새끼가 캐슬에 정세희 그년을 상납했다는 게 이해됐다.

캐슬을 만든 놈은 여기 동산에 있던 놈이라고 했지. 아마 보고 배운 게 이 이사장 놈이니 당연히 자기도 해보고 싶었을 거다.

하…. 그래. 그렇단 말이지.

물론…. 예전이었다면 이 소리를 듣고 당장 발을 뺐을 거다.

매혹은 위험한 스킬이고 당하면 끝인 스킬.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 정도는 우습다. 그딴 매혹 따위…. 내게는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

"됐고요. 그거 방법도 없는데 이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죠. 성장 이야기나 계속합시다."

부장의 체념이 깃들어 있는 목소리.

어쩌지? 딱 내가 나갈 타이밍이긴 한데 이런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 좋다. 이런 자리는 다시 만들기도 쉽지 않겠지.

근데 이렇게 위험을 무릅쓰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닌….

에라 씨발놈아.

언제까지 그렇게 몸을 사릴 거야?

물론 혼자 살고 거점을 지키는 거라면 몸을 사리는 게 맞다.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곳을 얻으려면 이 정도 패기는 보여줘야 하잖아?

그래야 이 사람들도 나에 대해 신뢰라는 게 생길 거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사실…. 생각해보면 그리 위험할 것도 없다.

쫄지마. 병신아. 여기서 니가 제일 강해.

"그거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겠네."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내자 식당 안에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나를 바라본다.

배낭을 메고 마체테를 든, 누가 봐도 외부인인 듯한 나의 모습.

부장은 물론이고 집행부나 반장들까지 입에서 위장이 튀어나올 정도로 놀란 것 같다.

"뭐…. 뭐야! 당신은!"

그래도 이 중에 가장 강단 있는 건 저 피곤함에 찌든 부장, 저 사람인가보다.

나는 의자를 하나 빼서 앉았다.

거의 스무명 가까이 되는 시선을 받으면서도 여유롭고 태연한 표정으로 부장을 바라봤다.

"누구냐고 물었잖아!"

"니네 이사장 죽이러 온 사람."

"뭐?"

나는 잠시 뜸을 들이며 사람들의 표정을 천천히 둘러봤다.

깜짝 놀랐던 표정이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바뀐 이들.

"원래는 여기 동산에 있는 녀석들 위에 있는 놈들을 다 죽일 생각이었는데…. 마음을 바꿨어."

호기심. 비단 호기심에 약한 건 고양이뿐만이 아니다.

인간 역시 호기심에 상당히 취약한 생물.

말을 하다 말면, 그것만큼 속 터지는 게 없다. 어떻게든 끝까지 듣고 싶은 게 당연한 것.

"너희가 말하는 이사장이란 놈, 처리해주지. 대신 내 조건이 있어. 그걸 들어주면 너희들은 살려주마."

"으디서 이런 미친놈이 나왔니? 으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쌔끼가 말하는 뽄새 봐라!"

몇몇 반장들이 나를 보고 역정을 내며 소리쳤다.

"송 반장님. 김 반장님, 잠시만요."

"엥? 박 부장아. 넌 또 왜 그러냐?"

"뭐꼬? 니 임마가 씨불이는 거 들을라꼬?"

"이 사람이 우릴 죽일 생각이었으면 아까 다 죽었어요."

부장이 말하자 반장들이 입을 다문다.

역시 맘에 드는 아저씨야. 요즘 봤던 부장들은 다들 머리가 잘 돌아가네.

어느새 침착한 표정이 된 부장이 나를 보고 입을 연다.

"당신이 이사장을 처리할 수 있는지 없는지 같은 건 물어보지 않겠습니다. 자신이 있으니까 나섰겠지요. 우리는 당신이 이사장을 죽이든 못 죽이든 상관없습니다. 죽이면 좋고 못 죽여도 그만이에요. 다만, 우리가 궁금한 건 당신의 조건입니다. 조건이 뭔가요?"

"한 달에 한 번 다섯 명분의 한 달 치 식량을 받아가는 것."

"네?"

"그게 내 조건이야."

"장난합니까? 고작 그런 조건으로?"

"아. 아니다. 하나 더 있다. 여자 다섯이 있어. 그 녀석들을 여기 동산의 간부로 넣을 것. 물론 운영은 하던 대로 해. 너희들이 하는 걸 방해할 생각은 없으니까."

"무슨 장난 같은 소리를…."

"이봐. 장난으로 하는 소리 아냐. 원래는 당신을 비롯한 인간들 싹 다 죽이고 내가 감당할 숫자만큼만 남겨놓을 생각이었어. 하지만 며칠간 너희를 보고 나름 느낀 게 많아서 이렇게 조정해준 거라고."

"며칠간…. 이라고요?"

"그래. 한 일주일 됐나."

"맙소사…. 침입자가 일주일이나 안에서 활개 치고 있던 겁니까…."

"보아하니 너희 이사장인지 하는 놈은 여기 생산 활동하는 사람들의 안전에는 크게 관심이 없어 보이던데?"

내가 이사장이라고 말했지만 정확하게 말하면 부장도 포함된다.

그저 지금은 모든 원망의 화살을 이사장에게 돌리기 위해 그렇게 말한 것뿐.

내 말이 효과가 있었는지 부장은 입을 다물었고 반장들은 약간 화난 표정이 됐다.

"너희가 처음 이곳에 왔던 목적을 생각해. 세상이 망하고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삶이 싫어서 이곳으로 온 거 아냐? 굶지 않고 목숨의 위협을 받지 않는 게 목적 아니냐고. 근데 내가 들어온 시점에서 너희의 안전은 이미 깨졌어. 이사장은 계약을 위반했지. 막으려고 노력하다 어쩔 수 없이 뚫린 게 아냐. 아예 관심이 없었다고. 이사장은 너희를 열심히 지킬 생각이 없어. 그건 너희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다른 이들은 모를 수 있어도 부장과 반장들은 알 수밖에 없다.

이 사람들은 오가는 사람들의 숫자를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캠프에서 얼마나 사람이 들어오고 얼마나 사람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선별' 당했는지 아는 사람들.

"어때? 내 조건은 받아들여지나?"

"겨우 그 정도로…. 말이 됩니까?"

"말이 되고 안 되고는 알아서 생각하고. 뭐 넉넉하면 고기나 많이 챙겨 주던가."

"미쳤군요. 내 생각엔 당신은 이사장보다 미친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미친 세상에서는 더없이 정상적이지. 안 그래?"

입을 다무는 부장.

나 참. 조건이 부실하다고 의심하는 건 또 처음 보네.

"아. 뭘 고민해? 어차피 여기 사람들은 손해 볼 거 없잖아? 너희가 보냈다는 소리는 안 할 테니 걱정 마. 어차피 그런 놈 하나 처리 못할 리는 없지만."

"당신의 그 자신감이…. 어디서 나오는지 모르겠군요."

"이사장의 스킬이 몇 개인지 알고 있어?"

"모릅니다. 매혹이 있다는 것 하나만 알고 있습니다."

"나는 스킬을 여섯 개 가지고 있어."

내 말에 식당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여…. 여섯 개?"

"그러니 시간 낭비하지 말고 이사장에게 안내나 해줄래? 이러고 있는 것보단 그 녀석을 빨리 끌어내고 건실한 대화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여섯 개…. 맙소사. 그걸 어떻게 증명을…. 아니. 됐습니다. 그런 건 필요 없죠. 알겠습니다. 바로 가시죠."

"부장. 당신 머리가 잘 돌아가서 맘에 들어. 앞으로도 잘 부탁해."

"젠장. 그런 건 이사장을 끌어내고 말하십시오. 김칫국 마시는 것도 아니고…."

"좋아. 그래. 경솔한 발언은 인제 그만하지. 주둥이로 떠들 게 아니고 직접 보여주는 게 맞지. 가자고."

부장과 내가 일어서자 반장들도 덩달아 일어섰다.

"이렇게 우르르 몰려가도 괜찮나?"

"어차피 이사장은 신경 안 쓸 겁니다. 자신의 매혹 스킬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느끼고 있으니까요."

"그래. 뭐 나야 구경꾼이 많으면 좋지. 가자고."

후우. 잘 먹혔다. 이렇게 잘 먹힐 줄이야.

역시 그렇게 등장한 게 효과가 컸다. 그리고 자신들이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죽을뻔했다는 사실도 상당히 크게 작용했겠지.

어쨌든 이대로 이사장을 보기만 하면 된다.

제 딴엔 대비한다고 하겠지만, 내 존재를 모르는 이상 그 녀석은 나를 막을 수 없다.

부장은 오르막을 올라 본관인 듯한 건물로 들어갔다.

아. 여기는 입구 쪽에서 봤던 건물인 거 같다. 아마 이 뒤쪽에 원래의 정식 입구가 있겠지?

본관의 건물 안쪽은 딱 90년대쯤에는 호화로웠을 내부장식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저 싸구려 모텔에 온 기분이다. 낡고 바랜 장식들이 주는 조악함만 가득한 곳.

"아까 우리가 한 이야기는 다 듣고 있던 겁니까?"

"그래."

"저는 성장팀 때문에 반장들이 항의하러 왔다고 할 겁니다. 이사장 성격에 그냥 돌려보내진 않을 거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건 그렇게 이사장 앞에 당신을 데려다주는 것뿐입니다. 당신이 실패해도 우리는 모르는 사람인 척 할거에요.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

"당연하지. 현명한 판단이야."

호화로운 문짝이 있는 커다란 방 앞. 부장은 문 앞쪽에 있는 책상으로 다가가 인터폰을 눌렀다.

삐리리리

원래는 젊은 아가씨가 앉아있어야 할 자리겠지?

한참을 울리던 인터폰 소리가 멈추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뭐야.]

"박 부장입니다. 성장팀 관련해서 반장들이 할 말이 있다고 이사장님을 뵙길 원합니다."

[뭐? 이 새끼들이…. 기다려!]

나는 투명화를 쓰고 탐지를 돌렸다.

안쪽에서 느껴지는 다섯 개의 기척.

기척 세 개가한 곳에 모여있고 다른 기척 두 개가 붙어있다.

기척 하나가 세 개 쪽으로 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넷이 한꺼번에 움직여 모두 한자리에 뭉쳤고, 기척을 하나가 문 쪽으로 다가왔다.

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인 건 하얀 원피스를 입은 여자.

음. 내 점수는 79점 정도. 굳이 설명하자면 나쁘지 않은 외모지만 굳이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는 않는 수준.

그런 그녀가 안으로 들어갔고 그 안쪽에는 집무실 책상에 한 아저씨가 앉아있다.

4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교주니 이사장이니 해서 배 나온 아저씨일 줄 알았는데…. 그냥 평범한 동네 아저씨가 앉아있다.

참나. 저런 아저씨가 교주니 어쩌니 그런 일을 벌였다고? 참 대단해. 정말로.

그리고 그 뒤에 서 있는 세 여자. 역시 하얀색 원피스를 입고 있는 모습.

81. 83. 89점.

쯧. 이사장 이 새끼 여자 보는 눈 참 없구나? 아니지. 매혹 스킬 때문에 그런 거니 외모를 따질 여력은 없었나?

오히려 이 정도면 잘 모은 건가?

"뭐야? 뭔 말을 하려고 우르르 몰려왔어?"

얼굴을 봤고, 그가 내 범위 안에 들었다.

그럼 뭐 더 고민할 게 있겠어? 바로 광역 스킬 무효화를 갈기고 여자 넷에게 매혹을 걸었다.

"아무나 저 새끼 매혹 걸어."

내가 외치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여자 넷이 동시에 이사장을 바라봤다.

"엑?"

부장과 반장들의 맥빠진 목소리.

게다가 내가 모습을 드러내자 화들짝 놀란다.

"이게 무슨 짓…."

부장의 질식할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나는 그런 그를 무시하고 여자들에게 외쳤다.

“누가 매혹 걸었지?”

“저요.”

89점 여자가 손을 들며 말한다. 음. 다시 보니 조금 이쁘네. 1점 추가. 90점.

"그 새끼 이리 나와서 무릎 꿇으라고 해."

"저쪽으로 나가. 그리고 무릎 꿇어."

여자가 말하자 이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 앞쪽으로 다가왔고 무릎을 꿇었다.

"자. 끝. 됐지?"

어안이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부장과 반장들.

이거 보는 사람이 많으니 으쓱하는 기분이 드는데?

깔끔하고 확실한 마무리. 이 정도면 제법 임펙트 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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