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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13화 (21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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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 안 개구리

그렇게 몇 번을 더 들락날락하면서 안쪽의 상황을 확인했고 그러면서 많은 것을 알게 됐다.

일단 동산의 지배구조.

정말 간단한 구조다. 예전에는 '교주'였지만, 지금은 이사장이라고 부르는 남자.

세계가 멸망하기 전부터 사이비 종교를 만들고 이 동산을 만든 녀석.

그리고 그 밑에 있는 관리부.

실질적인 관리를 하는 곳. 사람들의 유입과 인원수 관리, 수확물의 생산 등 이곳 동산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들을 관리한다.

이게 끝.

정말 심플한 구조가 아닐 수 없다.

이걸 보고 나름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 이런 규모의 조직이라면 하는 일 없이 빌붙어서 어깨에 힘주고 엣헴엣헴 거리는 놈들이 넘치기 마련인데.

여기는 그런 게 없다. 딱 필요한 관리인원만 존재하는 깔끔한 구조.

아. 한 개가 더 있네. 집행부라는 조직. 뭐, 어차피 여기도 관리부의 소속이니까.

탐지 스킬을 가진 이곳의 무력을 담당하는 곳. 정말 이게 끝이다.

이렇게 해봐야 인원은 서른이 안 넘는 거 같은데 대단하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

숫자는 400명 정도. 정확한 인원은 이들도 모르는 것 같다. 하긴…. 새로 유입되고 빠져나가는 게 많으면 그럴 수 있지.

이들의 일상은 단순하다.

아침에 일어나서 각자 배정된 작업장으로 가서 일한다.

대부분이 비닐하우스 작업이고 양계장이나 양돈장, 아니면 소 축사로 가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 별도로 불려가서 특별 작업을 하는 사람 그 외에도 여러가지 일들을 '자발적'으로 한다.

그게 놀라운 부분이었다. 강압적이고 통제된 분위기가 아니라는 것.

일하고 싶으면 일하고 일을 하지 않는다고 뭐라고 하진 않았다. 단지, 일하지 않으면 식권을 받지 못했다.

상당히 조악하면서도 밸런스가 맞는 시스템.

돈이 없는 세상에서 고작 식권 같은 거로 사람들을 통제할 수 있다니. 참 신기하네.

눈여겨봐야 할 사람들이 몇 있었다.

통칭 '반장'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관리부의 지시를 받아 작업을 관리 감독하는 이들. 그들이 나름 핵심인 거 같다.

결국엔 저 위에 놈들을 다 때려잡게 된다면 저 반장들을 휘어잡아야 한다는 소린데…. 그게 될까?

밖에서 온 어중이떠중이가 위에 놈들을 다 싹 죽이고 '이제부터 우리가 보호해줄 테니 우리말 들으쇼.' 이래 봐야…. 씨알이나 먹히려나.

아오. 머리 아파.

이런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다. 여기 있는 사람들을 쳐 죽이라면 그 누구보다 잘 죽일 수 있는데.

힘들다. 힘들어.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건 어렵다고. 정말 피곤해.

어쨌든 그렇게 정보 수집을 하다 보니 결국 결론이 하나로 이어졌다.

부장.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 이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항상 나오는 이름이다. 부장이…. 부장님이…. 부장이 하라 그랬어….

착취하는 윗선과 그에 고통받으며 마지못해 살아가는 불만 많은 노동자를 생각하고 있던 내게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들은 적대관계가 아니었다. 오히려 공생 관계지.

이런 걸 보면 역시 나도 세상을 제대로 모르는 철부지 애새끼야.

모든 세상이 대립과 경쟁으로만 이뤄진다고 생각하는 단순한 생각만 하고 있으니까.

세상이 이렇게 망했더라도 사람들은 각자 맞는 방법을 찾아 살아간다.

내가 생각한 생존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고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게 오만이고 치기 어린 생각이었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니 이들의 생활이 더는 우중충해 보이거나 우울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분명 이들도 이 삶에 불만이 있을 수 있겠지. 하지만 감당 가능한 범위라는 거다.

감안하고 감수할 수 있기에 받아들인 삶. 그걸 틀렸다거나 잘못됐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장이라는 놈을 한번 보고 싶다. 대체 어떤 놈이길래 이런 곳을 이렇게 문제없이 굴리고 있을까?

그리고 그 기회가 마침 찾아왔다.

집행부로 보이는 인원 네 명을 데리고 반장들을 만나러 온 부장.

오. 집행부에 여자도 하나 껴있네. 이건 쓸만하겠어.

암튼 부장이라는 자는 생각보다 젊은 남자였다. 해봐야 40대 초반? 아니다. 머리숱이 조금 없어서 그렇지 30대 후반 정도는 돼 보이네.

이곳에서 본 그 누구보다 잔뜩 찡그려져 있고 찌들어있는 얼굴을 한 남자.

그런 그가 오자 반장 한 명이 그에게 다가가서 말했다.

"아이고. 바쁜 양반이 만다꼬 내려왔데?"

"하아. 김 반장님. 반장님들 다들 모아주실래요?"

"와? 뭐 할 말 있나?"

"네. 좀 부탁드립니다."

"엄마야. 부장이 이리 내려와가 반장들 모으면 좋은 소리 한 적이 없었는데."

"일단 모아주세요. 모이면 이야기하죠."

김 반장은 자기 옆에 있던 젊은 청년 하나에게 말했고, 청년은 재빨리 뛰어갔다.

"와? 또 이사장 금마가 귀찮게 구나?"

"아휴. 말도 마세요. 정말. 때려치우든가 해야지."

"아이고. 여길 나간다고? 니 나가면 여기 개판 날낀데?"

"그거야 내가 알 바 아니죠. 진짜 더러워서. 어휴. 뭐 하는 것도 없는 양반이 왜 자꾸 이것저것 벌리기만 벌려대."

"뭔데? 말 좀 해봐라."

"다 오시면 말하죠. 지금 말하면 이따가 똑같은 소리 또 해야 하잖아요. 아으. 추워. 일단 어디 들어가서 앉죠."

"그래. 드가자."

부장과 집행부 넷, 그리고 김 반장은 바로 옆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갔다.

아…. 들어가고 싶은데. 저 집행부 놈들이 탐지가 있을 거 같아서 망설여진다.

여기 사람들 모여있는 곳을 벗어나면 바로 들키는 거 아냐?

무슨 이야기일지 궁금한데…. 어떻게 방법 없나?

조금 뒤 한 무리의 사람들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아까 그 젊은 청년이 있는 거 보니 저 사람들이 반장들인가 보다.

인원은 열하나? 많네?

저기 휩쓸려서 한번 들어가 볼까? 음…. 한번 가보자. 만약 문제가 생겨도 집행부 녀석들 전부 재워버리면 되니까.

반장이란 사람들은 아마 공격 스킬이 없을 테니…. 크게 위협적이진 않을 거다.

지금까지 몸을 사린 게 아깝긴 하지만 이런 기회가 다시 오긴 힘들 거 같다.

사람도 많고 집행부 저놈들도 이런 곳에서 뜬금없이 탐지를 돌리진 않을 테니 크게 문제는 없겠지.

돌린다 하더라도 사람이 여럿이니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고.

결정했으면 바로 해야지.

식당 안으로 들어가는 반장들 무리를 뒤따라 슬쩍 들어갔다.

마지막 놈이 문을 안 닫아서 다행이야.

내가 들어가고 다른 사람이 투덜거리면서 식당 유리문을 닫았으니까.

반장들이 전부 자리에 앉자 내가 있을 곳이 애매해졌다.

이런…. 이제와서 다시 나갈 수도 없고.

일단 최대한 벽에 붙어있기로 했다. 이 정도 거리감이면 벽 뒤에 있는 거로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다 오셨죠?"

"뭔 일이 있길래 우리를 다 부르고 그래? 이라면 밑에 놈들이 일 안 하고 땡땡이치고 다닌다고 한소리 한단 말여."

"홍 반장님 속으론 좋으면서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요. 언제는 일 열심히 한 것처럼 말하시네."

"야야. 여서 나만큼 일 많이 하는 사람이 어딨냐? 씨알도 안맥히는 소리하고 있어."

의외로 분위기가 나쁘지 않다.

정말…. 내가 잘못 생각해도 한참 잘못 생각한 거 같다.

이들은 나름 자신들만의 세상을 구축해서 사는 거였다. 그걸 가지고 내가 우울해 보이니 어쩌니 한 건가?

나도 참…. 우물 안 개구리네.

"자자. 조용히들 해주시고. 이렇게 모인 건 다름이 아니고. 당분간 성장팀을 소 축사에 몰아야 할 것 같아요."

"무슨 소리야? 지금 성장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 그걸 소에다 써?"

"그러게. 성장팀 일정 이미 꽉 찬 거 아냐? 그걸 인제 와서 바꾸겠다고?"

"아니. 소 그거 숫자 불려놔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되는데 뭐 한다고 소로 돌려? 왜? 식권 할인이라도 해줄 거야?"

방금까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던 걸 바로 취소해야 할 만큼 다들 언성을 높이며 한마디씩 하는 반장들.

그런 반장들의 말을 듣는 부장은 골치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꾹꾹 누른다.

"저도 이게 얼마나 병신같은 일인인지는 알아요. 근데 이사장 그 새끼가 하라잖아요. 아. 정말. 미치겠네! 진짜."

이사장의 이야기가 나오자 다들 하던 말을 멈추고 부장의 눈치를 살핀다.

약간 분위기가 달라졌는데? 대충 공포와 짜증을 반반 섞어 놓은 느낌?

"하아. 그 양반은 생산은 그냥 부장한테 맡기고 신경 끄지. 왜 또 그런 소리를…."

반장 중에 하나가 주변에 다 들리게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리고 다들 그 말에 공감이 되는지 동조하는 분위기.

"하아. 그래서 돼요. 안 돼요? 일정 조절되겠어요?"

"할라면 하지. 시벌. 우리가 무슨 힘이 있냐. 그래서 얼마나?"

"한 달요."

"한 달? 미친 거 아이가? 그동안 성장을 전부 소에 몰겠다고?"

"네."

"안돼. 안돼. 일주일만 빠져도 생산력 뚝 떨어질 텐데. 한 달이라니. 미친 소리야. 식물들은 뭐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다른 데는 안돼. 돼지나 닭은 지금도 빠듯하다고. 기껏 균형 맞춰 놨는데 한 달이라니. 안돼. 못해."

"하아. 제가 그 소리를 안 한 거 같아요?"

"그러니 뭐래?"

"뭐라긴요. 입이 많아서 골치 아프면 '선별'하라던데요."

선별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단어만 봐도 뭔지 알 것 같다. 인원을 줄이라는 소리지. 이사장이라는 놈. 문제의 해결을 참 간단하게 하네. 하하. 미친 새끼.

"미친 거 아냐? 그렇게 쳐내고도 또 선별 소리를 해?"

"게다가 캠프에 문제 생겼다며? 앞으로 새로운 사람들 받기도 힘들다며? 근데 그런 소리를 해?"

"어우. 그건 또 어디서 들었어요. 대체 누가 흘린 거야?"

"여서 부장 당신만 귀가 있는 줄 알아? 우리도 알건 다 알아."

"미치겠네요. 정말. 무슨 일들이 이렇게 한 번에 몰아 터지냐고요. 나 좀 그만 괴롭혔으면 좋겠어요."

부장 저 사람은 윗사람이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에게 푸념하는 청년회장 같은 모습이다.

막걸리 한잔하면서 '이장 새끼가 미친 거 같아요.'라고 찡얼거리는 모습이랄까? 거참 되게 인간적이네.

"그냥 자네가 여기 대가리 하면 안 되나?"

나이가 약간 있는 반장 하나가 입을 열었다.

뭐야? 지금 반란이라도 생각하는 거야? 그 정도로 이사장이란 놈의 평판이 안 좋나?

"또. 또. 그 소리 하시네. 그게 됐으면 내가 예전에 재꼈죠. 안돼요. 안돼. 이사장 그 인간 얼마나 교활한데. 더럽고 치사해도 힘으로는 못 이겨요. 차라리 복상사하기를 기다리는 게 낫지."

씨발…. 그냥 일상이었구나. 괜히 기대했네.

그래도 이사장의 평판이 안 좋은 건 맞나보다. 저런 농담을 스스럼없이 하는 거 보면.

"정말 못 재끼나? 어떻게 다들 힘을 모아서 죄 쳐들어가면…."

"안돼요. 몇 명이 죽을지 몰라요. 이사장 새끼가 여러분들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 뻔히 알잖아요. 나는 여러분들 그렇게 개죽음당하는 꼴 못 봐요. 뾰족한 방법 없으면 그런 소리 하지도 마요."

이거 상황이 참 재밌다. 의외로 쉽게 여기를 접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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