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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12화 (21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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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처음에 두 삽 정도 펐을 때…. 그때 아니다 싶었다고 생각했던 그때.

그때 돌아갔어야 했다.

이건 아니야. 뭐 하고 있는 짓인지 모르겠다.

탐지에 아무도 없기에 삽질을 소리 없이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랄 같다. 얼어붙어 있는 땅은 정말 더럽게 안 파진다.

게다가 돌…. 그놈의 돌. 왜 삽을 박아넣으면 계속 돌이 걸리냐고.

이미 반 정도 팠으니 여기서 돌이킬 수도 없다. 끝까지 파야 해.

이 추운 날씨에 땀을 주룩주룩 흘리며 겨우 땅을 팠다.

이 정도면 나 하나 정도는 넘어갈 수 있겠지. 못 넘어가면…. 땅을 더 파느니 내가 다이어트를 하겠어.

일단 주변의 마른 덩굴들과 풀떼기들을 뜯어왔다.

내가 넘어간 다음 가려놔야 하니까.

배낭과 삽을 펜스 위로 던져서 넘기고 겉옷도 벗어서 잘 뭉친 뒤 던졌다.

땀에 절은 몸이 찬바람을 맞으니 급격하게 식는다. 하….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덩굴을 잘 모아놓은 뒤 구멍 옆에 놓고 구멍을 통과했다.

씨발…. 오갈때마다 이 짓을 해야 한다고? 미치겠다. 그냥 들어온 김에 다 죽이고 끝낼까?

에휴. 헛소리는 그만하자. 여기서 이럴 시간 없어.

구멍을 덩굴로 잘 덮어놓고 이쪽도 주변에서 적당히 끌어모아 덮어놨다.

음…. 이정도면 걸리진 않겠지. 내가 위치를 까먹지 않는 이상 문제는 없을 거야.

배낭을 메고 바로 투명화를 썼다.

삽도 적당히 숨겨놓고 탐지를 돌린다. 아직은 아무도 잡히지 않는 기척.

이 산을 내려가면 바로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가 나오니 이 구간만 걸리지 않으면 이 안에 녀석들은 누군가 침입했다는 것을 절대 모를 거다.

가보자. 설마 탐지를 켜고 있는 놈이 운 좋게 딱 있지는 않겠지.

마음 같아서는 새벽 서너 시까지 기다리고 싶지만…. 그러기엔 여기 서 있는 것도 위험해.

차라리 빠르게 사람들 있는 쪽으로 붙는 게 낫지.

소리를 죽이며 컨테이너 쪽으로 걸었다.

하나둘씩 느껴지는 기척. 그 숫자가 점점 많아진다.

와…. 씨발 너무 많다. 사람 엄청 많네. 이게 다 몇 명이야?

컨테이너들을 여러 개 이어붙인 마치 달기지 같은 모습의 건물들.

어떤 곳은 2층, 3층으로 올려져 있다. 여기 있으면 죽어도 탐지엔 안 걸리겠네.

저녁 식사 시간인지 구수한 냄새가 풍긴다.

냄새를 따라 이동하니 컨테이너가 아닌 건물이 나왔다.

여긴 식당이네. 어휴. 사람 봐라. 겁나 많네.

수많은 사람이 식판을 들고 줄을 서 있다.

표정들은…. 그다지 밝진 않다. 그렇다고 괴롭거나 죽을 것 같은 표정은 아니다.

그냥 생기 잃은 표정들. 아무런 목표도 희망도 없는 모습들.

그들을 보면서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과연 이들은 행복할까? 죽음의 위기를 벗어나 목숨을 보전하고 있지만…. 그걸로 좋은 거야?

식사를 마치고 나가는 사람들.

추운지 옷깃을 여미고 뿔뿔이 흩어진다.

각자의 숙소로 가는 건가? 아마도 그렇겠지?

상당히 열악한 환경. 이들은 이런 걸 생각하고 여기 들어오진 않았을 거다.

모르겠네. 어느 게 더 행복할지.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생각하는 주의긴 한데…. 이건 좀 그렇네.

나라면 죽어도 이런 곳에 갇혀 살진 않을 거다. 이게 뭐야 대체.

전체적으로 만연해있는 패배감, 그리고 피로에 찌든 얼굴.

노동으로 인한 피로는 아닌거 같고…. 그냥 만성적인 피로 같아 보인다. 낙이 없는 삶. 거기에서 나오는 피로.

왠지 여기 계속 있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나도 무력해지는 기분이야.

해가 진 다음에는 자유시간인지 그나마 다들 한가로운 모습이다.

이곳의 분위기는 마치 교도소 같다.

내가 교도소를 가보진 않았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 보던 교도소의 느낌과 상당히 비슷하다.

그나마 여기는 창살이 없고 그나마 자유롭다는 점?

그리고 남자와 여자가 함께 있다는 점?

게다가 전체적으로 연령대가 30대에서 40대가 많았다.

여기서 내가 무슨 정보를 얻을 수 있으려나? 얻어가는 게 있나 모르겠네.

그렇게 그들의 무리 사이에서 이틀을 보냈다.

알아낸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이들은 모든 물건을 식권으로 거래한다는 것, 담배 열 개비가 식권 한 장이라는 것.

이들은 식권을 돈처럼 사용해서 뭐든지 거래를 한다.

가장 거래가 많은 것은 담배와 술. 그리고 섹스.

여자들은 식권을 받고 섹스를 한다. 역시…. 매춘은 어디에도 있구나.

이들의 삶은 상당히 단조롭다.

담배 개피를 걸고 도박을 하거나 식권을 모아서 여자와 섹스한다.

자유시간엔 가만히 누워서 하릴없이 빈둥거리거나 운동을 하고, 가끔 링처럼 만들어진 곳에서 스파링 같은 것도 했다.

그래도 게임기 같은 것도 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야만적이거나 미개해 보이진 않는다.

그냥 무미건조한 삶. 안전을 보장받고 끼니를 거르지 않으며 적당히 시간을 보내는…. 그런 삶.

모르겠다. 이들은 어떻게 여기에서 만족하고 사는 걸까?

내가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은 그거였다. 어째서 이런 삶에 만족하지?

가장 어이가 없는 것은 또 있다.

이곳 동산에서는 자진해서 퇴소할 수 있다는 거였다.

정말로 내 보내주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제로 나간 사람이 있는 것 같다.

그런 사람들은 밖에서 이곳 동산에 필요할 만한 물건들을 구해서 식량과 바꾸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모르겠네. 진짜 모르겠어.

그냥 이해하는 것을 포기했다.

이들은 이게 좋은가 보지. 그냥 그렇게 넘어가기로 했다. 각자 생각하는 게 다르니까. 나랑은 상관없지.

더는 잠을 참기 어려워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미나에게 질병 치료를 받아서 그런가? 불면증이 조금 약해진 거 같기도 하고?

그래. 뭐가 됐든 치료만 돼라. 솔직히 말해선 치료될 수 있다면 치료하고 싶다.

분명 세상이 이렇게 되고 나서 불면증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게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계속 안고 살고 싶진 않다.

귀찮더라도 날마다 제시간에 자고 싶다고. 자력으로.

한번 해봐서 그런지 밖으로 나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틀간 있으면서 알게 된 것은 집행부인지 뭐시긴지 하는 놈들은 이곳에 코빼기도 안 보인다는 것이다.

그건 다행이긴 하지. 귀찮은 일은 덜었으니까.

화원으로 가니 탐지에 한 명이 걸린다.

"누구?"

"어? 왔어요?"

윤서가 모습을 드러냈다. 상당히 편해 보이는 복장을 하고 있는 그녀.

가벼운 티셔츠에 츄리닝 바지.

내가 그녀의 복장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끼곤 약간 쑥스러운지 얼굴을 붉힌다.

"아니…. 복장이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일지는?"

"아…. 여기요."

윤서가 일지를 건네줬다.

딱히 적혀있는 것은 없다. 다만 어제와 오늘 오후 네 시에 검은 세단이 또 들어갔다는 것뿐.

네 시에 들어가서 아홉 시쯤 나온 거로 적혀있는 일지.

"이 차는 뭐 때문에 오가는 걸까?"

"그건 저도 잘…."

"아. 혼잣말이었어. 그럼 고생 좀 해."

"또 어디 나가요?"

"자러."

"설마…. 그때 나가고 아직 안 잔 거예요?"

"어."

"맙소사. 빨리 가요. 아니면 여기서 잘래요? 여기 화원 안쪽에 방 있던데."

윤서의 말에 약간 갈등이 생긴다. 하지만 이내 관뒀다. 아직 그 정도로 이 여자들을 신뢰하지는 않으니까.

"됐어. 그럼 수고해."

"그래요. 알았어요."

화원 밖을 나섰다.

잠이 쏟아질 것 같지만 차가운 공기에 잠이 약간 달아난다.

이대로 누우면 그냥 잠들 수 있는 걸까? 불면증 이 개새끼는 이런 식으로 사람을 졸리게 만들어 놓고 꼭 끝까지 허락은 안 하는데.

그게 미치는 거다. 졸린 데 잠을 잘 수 없다니.

빌어먹을 새끼. 염병할 새끼.

다른 여자들이 있을 모텔. 그쪽으로 가지는 않았다.

이곳으로 오면서 봐뒀던 다른 모텔로 들어간다. 굳이 잠을 거기서 잘 필요는 없잖아.

전형적인 평범한 모텔. 음침한 1층의 카운터 안쪽에 들어가 방 열쇠를 꺼내고 마스터키를 찾아냈다.

높이 올라갈 힘도 없다. 그냥 가까운 2층의 아무 방이나 문을 열고 들어갔다.

퀴퀴한 냄새. 여기는 냄새가 좀 별로네.

그렇다고 크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어차피 나는 잠만 잠시 자고 나갈 거니까.

짐을 내려놓고 뜨거운 물로 몸을 씻었다.

어디서라도 뜨거운 물을 마음껏 쓸 수 있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일이다.

만약 전기도 물도 마음껏 못 쓰는, 말 그대로 문명 이전으로 돌아갔다면…. 정말 끔찍했을 거야.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본다.

과연 이대로 잠을 잘 수 있을까? 잠이 올까?

이틀 동안 추위에 혹사당한 몸은 뜨거운 물에 어느 정도 녹아 노곤해졌다.

지금이라면 그냥 잠들 수 있지 않을까? 한 번쯤은 그래도 되지 않나?

하지만…. 이놈의 불면증은 역시나 쉽게 잠을 허락하지 않는다.

뇌가 빨리 전원을 꺼달라고 비명을 지르지만, 이놈의 전원은 쉽게 내려가지 않는다.

지랄 같네 정말.

결국, 억지로 전원을 내려야겠다.

고작 잠금장치 하나에 의존해서 잠이 들어야 하는 지금이 너무 맘에 안 들지만….

그래도 여기는 동산의 영역이었으니 그나마 안전할 거야.

그런 생각을 하며 나에게 수면을 건다.

부디 내일 아침에도 일어날 수 있기를.

눈을 떴다.

천장이 보이고 팔과 다리가 무사히 움직인다.

"아아."

말도 잘 나온다. 다행히 잠들어있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다.

탐지를 돌렸고 어떠한 기척도 잡히지 않는 것을 확인했다.

좋아. 맘에 드는 아침이야. 이렇게 목숨을 하나 벌었네.

시계를 보니 열두 시간이 지났다.

어쩐지. 드럽게 배가 고프더라니.

배낭에서 MRE 하나를 꺼내 대충 먹었다.

잠도 잤고 배도 찼다.

다시 이틀은 문제없이 움직일 수 있겠지.

배낭을 메고 다시 화원으로 갔다.

탐지에 걸리는 한 명의 기척.

화원 문을 열고 들어가 어제와 똑같이 말했다.

"누구야?"

"어? 어디 갔었어요!"

모습을 드러내는 정현. 나를 보더니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왜? 무슨 일 있어?"

"아니…. 어제 윤서 언니가 대장이 모텔로 갔다고 했는데…. 오지 않아서 걱정했단 말이에요."

"아아. 미안. 너무 졸려서 거기까지 못가고 그냥 아무 데서나 잤어. 괜히 걱정하게 했네."

"그래도 다행이에요. 우리는 어디 이상 한데서 쓰러져 자다가 얼어 죽은 건 아닌가 하고…."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아."

"모르는 일이죠. 대장처럼 똑똑한 사람들이 꼭 이상 한데서 허점투성이니까."

"걱정해줘서 고맙네. 나 말고 다른 문제는 없었지?"

"아…. 그게. 하나 있긴 했어요."

"어?"

"아침에 차 한 대가 여기 맞이방으로 왔었어요. 승합차."

"승합차? 그래서?"

"한 사람이 내려서 뭔가를 잔뜩 들고 들어갔어요. 그리고 다시 뭔가를 잔뜩 들고 나왔고요."

"아아…."

"뭐 아는 거 있어요?"

"어. 그건 나중에 말해줄게. 또?"

"그거 말고는 없어요."

"그래? 알겠어. 그럼 다들 전해줘. 나는 멀쩡하게 살아있다고."

"알겠어요. 또 들어가는 거예요?"

"어. 계속 확인해 봐야지."

"알겠어요. 몸조심해요."

"그래. 너도 조심하고. 다들 조심하라고 전해주고."

"네."

화원을 나와 다시 구멍으로 향한다.

이 짓을 언제까지 반복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은 계속해야지.

너무 조심스러운 게 아닌가 싶지만…. 온전히 동산을 접수하려면 신중해야 한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 몰살시켜야 하는 엔딩은 원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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