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211화 (21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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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송이와 지원, 지아가 온 건 한참 뒤였다.

윤서랑 정현이가 가벼운 느낌으로 다녀왔던 것과 다르게 들어오자마자 상당히 힘들어하는 지아.

송이와 지원이는 그런 지아의 보조를 맞춰서 오느라 그런지 상당히 여유 있는 모습.

"아휴. 너무 힘들어요. 허억. 허억. 다들 왜 이렇게 잘 가. 허억."

"고생했네. 얘 데리고 다녀오느라."

지아가 아니라 송이와 지원이에게 말하자 지아가 억울하단 말투로 나에게 말한다.

"고생은…. 허억. 내가 했는데!"

나는 약간 한심한 표정으로 지아를 바라보고 말했다.

"체력이 부족해서 도망도 못 치고 죽으면, 그때 가서도 징징거릴 거야?"

조금 매몰찬 말이지만, 저 가스나에겐 현실을 조금 일깨워 줄 필요가 있다.

할 말이 없는지 입을 삐죽 내밀고 나를 흘겨보는 지아.

그래서? 뭐 어쩔 거야? 그게 사실인데.

"자. 앉아봐. 이야기 좀 하자. 다 앉으면 투명화 쓰고."

강박적이기까지 한 나의 투명화 요구에 다들 익숙해졌는지 투명화 쓰는 게 자연스러워진다.

그래. 습관적으로 써야 해. 굳이 모습을 노출 시킬 필요가 하나도 없어.

투명화라는 좋은 스킬이 있는데 안 쓰는 건 사치지.

"먼저…. 일단 송이. 말해봐. 뭐 특별히 보고 온 거 있어?"

"일단 펜스 위에 철조망 말인데요. 전부 전기가 흐르는 건 아닌거 같아요?"

"어떻게 알지?"

"철조망에 새를 던져봤거든요."

"새? 어떻게?"

"그냥…. 눈앞에 새가 있길래 발화로 날개 좀 태워서 못날 게하고…. 주워서 던져봤죠."

"아하. 잘했네. 그래서? 전기가 안 통해?"

"설마 전기가 사람에겐 통하는데 새한테는 안 통하거나 그렇진 않겠죠?"

"그렇진 않겠지. 음…. 좋은 정보네? 모든 곳이 다 전기가 통하는 것은 아니다?"

"저기…. 말하는데 죄송하지만…. 안 불쌍한가요? 새를 그렇게 막 날개를 태우고…. 철조망에 던지고…."

지아의 말에 잠깐 조용해지는 화원.

나는 한숨을 한번 푹 쉬고 말했다.

"지아야."

"네…?"

"우리는 사람을 죽여."

"아…."

확실히 신선한 반응이다. 그런 거지. 아직 살육에 절여지지 않은 정상적인 사고방식.

물론 저게 정상이다. 세상이 비정상이라서 문제지.

"네 마음은 이해하지만, 빨리 적응하는 게 좋을 거야. 네 손으로 사람도 죽여야 해. 슬픈 일이지만 그게 현실이란다."

"아…. 네. 죄송해요."

"죄송할 건 없고. 아무튼, 전기가 전부 통하는 것은 아니다?"

"네. 다른 동물들이 더 있었으면 몇 군데 더 해보겠는데 아쉽게 없었네요."

아쉬운 듯한 송이. 그러게. 겨울이라 동물들도 없지. 다른 계절이었으면 곤충이라도 있었을 텐데.

"또?"

"아. 그리고 그 입구 있죠? 철문 있는."

"어."

"거기에 차가 한 대 들어가더라고요? 고급 세단이?"

"차? 고급 세단?"

"네. 당당하게 들어가던데요?"

"그건 또 뭐야. 안에 누가 타고 있거나 그런 건 못 봤지?"

"네. 선팅이 너무 짙어서."

"으음. 그래? 아쉽네. 또 다른 건?"

"그거 말고는 없어요."

"지원이는 뭐 없어?"

"저요? 특별한 건 없고…. 그 펜스 있죠?"

"응."

"제 스킬로 자를 수 있어요."

"아? 그래? 아. 광선으로 그런 거 자를 수 있다고 그랬지?"

"네. 그 정도 철망은 얼마든지 자를 수 있어요. 깔끔하게."

"그건 좋네. 얼마나 걸리나?"

"자르는데요?"

"응."

"글쎄요? 몇 초?"

"그 정도야?"

"그럼요."

"오케이…. 그럼 너희에게도 아까 했던 이야기를 해주면…."

윤서와 정현이랑 했던 이야기를 모두 해줬다.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간간이 나오는 추임새로 봐선 충분히 이해한 것 같다.

"그럼, 펜스를 열고 쓱 들어가서 수뇌부만 다 죽이면 되는 거예요?"

과격한 송이의 말. 뭐, 과격한 것도 아니지. 저거 말고는 답이 없긴 해.

"간단하게 보면 그렇지? 근데 안에 어떤 대비를 하고 있는지 모르니까."

"흐음…. 그렇군요."

"그래서 말인데, 질문하나 하지. 투명화의 가장 큰 카운터가 탐지야. 탐지는 투명화고 나발이고 다 볼 수 있어. 그리고 탐지에 공격 스킬이 있는 사람은 투명화를 하고 있는 사람에게도 스킬을 쓸 수 있어. 기절이나 마비, 감전, 이런 공격 스킬들 말이지."

다들 이건 전번에 말해줬으니까 알 테고.

"그럼 투명화를 쓴 사람이 탐지를 피하는 방법은 뭐가 있을까?"

"범위 밖으로 피하는 것밖에 없지 않나요?"

윤서의 대답. 모범적인 대답이긴 하다.

"근데 그 탐지를 쓰는 사람도 투명화를 하고 있으면? 만약 너희 주변에 투명화와 탐지, 공격 스킬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너희는 그냥 끝이야."

"그런 사람이 있어요?"

지아의 질문. 아. 쟤는 모르겠구나.

"나."

"엑?"

"나라고."

"아아…. 어쩐지…."

"저쪽에 나 같은 놈이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어. 나는 탐지가 있으니 그 녀석을 감지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나도 확실하진 않아. 그럼 너희는? 없어. 방법 같은 건 없어. 그냥 걸리면 죽어. 안 죽으면…. 뭐 험한 꼴을 보겠지. 강간당하거나 감금당해서 성 노리개가 되거나…."

"으…."

역시 이런 거에 면역이 없는 지아가 대놓고 싫은 표정을 짓는다.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겠지만, 굳이 입 밖으로 표현을 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것은 마찬가지겠지.

"그러니 나는 너희를 저 안에 함부로 밀어 넣을 수는 없어. 근데 만약 너희가 저 안에 있고 나 같은 놈이 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윤서 말대로 범위 밖으로 도망가면 좋겠지만…. 그게 쉽지 않다면?"

침묵. 아무도 대답이 없다.

하긴 이들은 탐지에 대해서 잘 모른다. 이건 써본 사람이 없으면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지.

"정답은 '사람들 사이로 숨는다'야."

"아…."

윤서는 뭔가 감을 잡았는지 알았다는 탄성을 지른다.

"그래. 너희가 탐지를 써봤으면 알겠지만 그러려면 멀었으니 설명해주지. 탐지는 자신의 스킬 레벨에 맞는 반경 안에 있는 사람들의 기척을 모두 느끼게 해줘. 그리고 그 기척에 이름표 같은 건 없어. 투명화를 쓴 건지 아닌지도 몰라. 그러니 맨눈으로 일일이 확인하는 수밖에 없지. 그래서 그런 거야. 사람들 사이에 숨는 것. 게다가 사람이 몇십 명을 넘어가면 탐지 스킬 한 번에 그 기척들을 전부 파악하기도 힘들어. 이해했어?"

모두가 '네'라고 짧게 대답한다.

여자들의 대답을 다 들은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또 방법이 있지. 뭐가 있을까? 상상력을 발휘해봐."

아무 말이 없는 여자들.

"저기…."

지원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말해봐."

"탐지의 지속시간은 그리 오래 안되죠?"

"마스터 하면 20초."

"기네요."

"그렇지. 길면 길고 짧으면 짧지."

"필사적으로 도망치는 수밖에 없네요. 상대가 계속해서 탐지를 쓰도록."

"그래. 정답. 물론 그건 제일 좋은 대처방법은 아냐. 체력 회복 포션이 있으니까. 하지만 멀뚱멀뚱 당하는 것보단 도망치는 게 낫지. 상대는 20초마다 한 번씩 탐지를 써야 하니까. 쓰면 쓸수록 너희를 쫓아오는 속도가 줄어들 거야. 알다시피 스킬은 체력을 소모하는 거니까."

"하지만 말한 대로 체력 회복 포션을 먹으면 끝이잖아요."

"보통 푹 자고 일어나면 스킬은 연속으로 스무 번 정도 쓸 수 있어. 그건 알지?"

그렇다고 대답하는 여자들.

"체력 회복 포션은 2,000코인이야. 절대 싸지 않지. 그럼 너희라면 언제 포션을 먹고 싶을까?"

"스킬 스무 번을 다 쓰면?"

윤서의 대답. 역시, 저 여자는 똑똑해.

"그래. 맞아. 스킬을 쓸 만큼 쓰고 힘들어서 뒤질 것 같을 때 체력 회복 포션을 마시지. 근데 너희를 쫓고 있다고 생각해봐. 스무 번까지 쓸 수 있겠어?"

"쓸수록 체력이 줄어드니 쫓기가 힘들겠군요."

"맞아. 너희가 그런 경험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실전에서는 스무 번을 꽉 채우는 경우는 그렇게 없지. 결국, 너희는 그냥 뛰기만 하면 되지만 상대는 너희를 잡기 위해 미친 듯이 코인을 써야 한다는 거야.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힘들겠네요."

"그래. 그래서 체력이 중요한 거야. 알았어? 지아?"

"네!? 저요?"

"그래. 살기 위해서 체력을 길러야 한다고."

"아…. 네. 알겠어요."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다시 말을 꺼냈다.

"그래서 결론적으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게 오히려 안전할 수 있어. 그리고 외딴곳에서 나 같은 놈을 만나면…. 답이 없지. 그냥 죽는 수밖에 없어.“

”너무 가혹한데요…?“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탐지를 배우거나 탐지가 있는 사람과 함께 있어야지.“

”갑자기 돌아다니는 게 너무 무서워지네요.“

”그렇지? 너희 주변에 나 같은 놈이 또 없었다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 거야. 그래도 다행인 건 그렇게 스킬이 세 개 있는 사람이 아주 많지는 않을 거라는 것? 사람들이 탐지의 중요성을 아직 잘 모르니까. 암튼 그래서 나는 저 안에 들어갈 거야."

"네?? 갑자기 왜 이야기가 그렇게 돼요?"

어이없어하는 윤서. 다른 여자들도 마찬가지인 듯 수군거린다.

"저 안에 들어가서 생산 활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정보를 모을 거야. 거기에선 투명화를 쓰고 있으면 절대 걸릴 리 없으니까."

"그럼 저희도…."

"아냐. 안돼. 너희는 할 일이 있어."

"할 일요?"

"그래. 여기 화원을 거점 삼아 최소 한 명은 밤새 맞이방을 지켜봐야 해. 그리고 정문 쪽도 지켜봐야 하고."

"아…."

"한 명이 오래 있을 수 없으니 교대로 움직여. 교대는 알아서 짜. 남은 사람들은 모텔에서 푹 쉬고."

"알겠어요. 그럼 언제부터?"

"뭘 언제부터야. 지금부터지."

"네? 그럼 당신은…."

"나? 당연히 지금 가야지. 아. 너희들은 가서 준비 단단히 하고 와서 시작해. 여기 맞이방에서 지켜보는 건 그렇게 어렵진 않겠지만 정문에서 찬바람 맞으면서 지켜보는 건 죽을 맛일 거야. 가서 옷가게를 털든 캠핑 물품 가게를 털든 하여간 단단히 준비하고 가. 침낭 같은 거 만진 상태에서 투명화 쓰면 같이 투명해지는 거 알지? 잘 활용해서 써. 바람막이든 일인용 텐트든 하여간 걸리지만 않게 잘해봐."

"알겠어요."

"그리고 항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록해놔. 그건 일지 같은 걸 하나 만들어서 꼼꼼하게 기록해. 더 질문?"

아무 말도 없는 여자들. 나는 화원에 있는 삽을 하나 들고 투명화를 풀었다가 다시 썼다.

"삽은 왜요?"

"개구멍 파려고. 아무튼, 나는 바로 갈 테니까 잘해봐. 다 큰 어른들인데 설마 더 설명해야 하는 거 아니지?"

"잘 해볼게요."

"걱정 마요. 그쪽이나 몸조심해요."

"저…. 잘 다녀와요."

"조심해요."

각자 한마디씩 하는 여자들. 마지막으로 윤서가 나에게 말한다.

"언제 나올 거에요?"

"글쎄. 충분한 정보를 얻으면?"

"그렇군요…. 일단 알았어요."

더 말할 게 없으니 나는 밖으로 나갔다.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그래도 이젠 인사라도 해주네.

해는 아직 떨어지려면 시간이 조금 남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가서 개구멍을 뚫어야 하니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얼어붙은 땅바닥을 과연 삽 하나로 제시간에 팔 수 있을까 모르겠네.

하아…. 페이즈아웃. 그걸 쓰면 벽도 통과한다고 했지?

차라리 투명화 숙련을 바짝 올려서 그걸 배울 걸 그랬나? 아니면 비행이나.

지금 투명화 숙련도는 중급 40퍼. 대충 5600번만 쓰면 되는데.

회복 포션 280번만 먹으면 되잖아? 코인도 56만이면 되네. 씨발…. 존나 많이 남았네.

회복 포션 280번이라니…. 먹다가 뒤지겠네. 그래도 한 일주일 정도면 가능할 거 같기도 하고.

1월 8일에 천호역에 가야 하니 그때까진 뭐라도 스킬 하나를 더 배우고 싶긴 한데…. 모르겠다.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하자.

적당히 사람들이 있는 컨테이너와 가까운 쪽의 펜스로 다가갔다.

가깝다 하더라도 거리는 꽤 된다. 너무 가까우면 삽질하는 소리가 들릴테니까.

일단 구멍을 파고 안으로 들어가서 저 컨테이너 근처까지만 가면 녀석들의 탐지는 신경 안 써도 되겠지.

펜스 밑의 땅에 삽을 한번 박아 넣어 봤다.

씨발. 역시 안 들어가네.

좇됐다. 정말. 이걸 씨발 언제 파고 있냐.

그냥 지원이랑 같이 와서 펜스 따버릴 걸 그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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