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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산
겨울바람을 가르며 전동 휠을 타고 도로를 질주한다.
캠프로 가는 길. 몸이 가볍다.
간밤에 승희와 좋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가? 좀 더 상쾌한 기분?
미나, 세아, 안나도 좋긴 하지만 뭐라고 해야 하나…. 평온함? 안정감? 그런 건 승희가 제일 크다.
조금 더 익숙해서 그렇겠지. 곁에서 자는 걸 허락한 첫 여자라서 그런 것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 덕분에 기분 좋다.
부디 캠프로 갔을 때 이 기분이 잡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한참을 달려 캠프 근처에 도착했다.
과연 넷…. 아니지 동생까지 합쳐서 다섯이 있을까?
투명을 쓰고 워터파크 주차장을 가로지른다.
하나씩 느껴지는 기척. 하나, 둘, 셋…. 넷, 다섯.
오. 다 있네.
의도했던 것들이 변수 없이 깔끔하게 이뤄졌을 때의 안도감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할 수는 없지.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음식점 하나에 한 명씩 있었다.
그리고 지원이만 동생인 듯한 여자애와 함께 있다. 쟤가 말했던 동생인가?
으음…. 언니랑 똑같이 생겼네. 그리고 굉장히 활기차 보인다.
내가 지켜보는 사이에도 쉴 새 없이 언니와 대화하고 있는 모습. 정말 한시도 쉬지 않고 입을 놀리네.
으…. 약간 부담스러운 타입이야. 쉽지 않아.
그렇게 여자들을 한번 훑어보고 워터파크 건물로 가봤다.
제법 불이 꺼졌는지 미약한 연기만 올라오고 열기는 거의 없어졌다.
그 지독한 탄내 역시 거의 나지 않는다.
비가 왔었나? 건물이 좀 젖어있는 것 같네.
그렇게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음식점이 있는 건물로 돌아왔다.
"자! 다들 나와봐!"
크게 소리치자 여자들이 하나둘씩 밖으로 나온다.
반가운 인사까진 아니어도 고개를 까딱이며 내게 인사하는 여자들. 그래. 이정도가 어디야. 관계는 서서히 좋아지는 거지.
마지막으로 나온 지원과 동생. 동생은 나를 보더니 지원에게 뭐라고 속닥거린다.
"잘 지냈지? 동생 데리고 왔네?"
"네."
"안녕하세요. 최지아에요. 며칠 뒤면 스물이에요."
아까 봤던 것처럼 활기차다 못해 발랄한 모습.
역시 쉽지 않은 타입이야.
"그래. 반가워. 언니에게 이야기는 들었나?"
"네. 사람 죽이러 간다면서요?"
지원이가 옆에서 지아의 어깨를 툭 쳤다.
나는 살짝 머리가 지끈거렸지만, 꾹 참고 지아에게 말했다.
"사람을 죽이러 가는 게 목적이 아니야."
"어차피 그게 그거 아니에요? 근데 아저씨는 몇 살이에요?"
"아저씨…."
나도 모르게 눈이 질끈 감긴다.
맙소사. 아저씨라니.
"야. 난 스물다섯이거든? 아저씨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지 않냐?"
"엑? 정말요? 미안해요. 옷을 너무 아저씨처럼 입고 있어서. 음. 그러고 보니 얼굴은 그렇게 아저씨가 아니네? 알겠어요. 그럼 오빠라고 부르면 돼요?"
내 바로 앞까지 다가와 나를 자세히 바라보는 지아.
지원이는 그런 지아를 말리려 했지만, 역부족인 모습이다.
그리고 그런 지아의 모습을 보고 윤서나 송이, 정현이는 쿡쿡 웃는다.
하아….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줘서 좋긴 한데…. 아. 모르겠다. 감당해야지.
어쩌겠어. 내가 데려오라고 한 건데.
"그건 마음대로 하고. 일단…. 다들 코인은 주웠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대답하는 여자들.
"얼마나 나왔어?"
"다 합쳐서 대략 60만 정도 됐어요."
"그래? 그럭저럭 나왔네. 다들 골고루 획득했나?"
"60만이 그럭저럭 이라뇨…. 어쨌든 적당히 비슷하게 획득은 했어요."
윤서가 대답했고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표정들이 괜찮은 거로 봐선 크게 불만은 없나 보다.
"아직 완전히 불은 안 꺼진 거 같던데. 남은 건 없나?"
"저희가 소방호스 꺼내서 물 뿌린 거예요. 주울 수 있을 만한 것은 다 주웠어요."
"아. 그래? 어쩐지 비는 안 왔던 거 같은데 젖어있더라니. 그럼 이제 여기는 미련 없는 거지?"
"네."
"그럼 가자."
"네? 어딜요?"
"어디긴. 동산이지."
동산의 이름이 나오자 다들 약간 긴장하는 표정이 된다.
대체 어떤 곳이길래 다들 이렇게 어려워하는 거야?
나는 그런 여자들의 반응은 무시하고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전동 휠을 타고 갈까 했지만, 다들 걷는데 나만 타고 가면 모양새가 조금 이상할 것 같아서 관뒀다.
뭐, 올 때 가져가면 되겠지.
"걸어갈 거에요? 버스…. 타고 가시죠?"
정현이의 말.
나는 그런 정현이를 보면서 물었다.
"버스? 상관은 없는데. 운전할 수 있는 사람 있어?"
"제가 할 수 있는데요."
"정말? 네가? 버스를?"
"나름 외부조였다고요…."
"아. 그렇지. 그래? 그럼 타고 가자. 이 추운 날 벌벌 떨면서 걸어갈 필요 없지."
그러자 윤서가 나를 보며 약간 걱정되는 표정으로 말한다.
"너무 눈에 띄지 않나요?"
"상관없어. 버스 보고 뛰쳐나오는 놈들이 있으면 오히려 고맙지. 다 죽이면 되니까."
내 말에 대수롭지 않아 하는 여자들.
확실히 이 여자들은 사람 죽이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없다.
게다가 지아 저 여자는 오히려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하아. 진짜 말세야. 말세.
정현이가 버스들을 살피더니 기름이 가장 많이 남은 차를 고르더니 시동을 건다.
부르르릉
육중한 엔진음. 소음이 없는 조용한 세상에서 이정도의 소리는 거의 천둥소리랑 비슷하다.
다들 버스에 올라탔고, 버스의 문이 닫혔다.
"그럼 출발합니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버스.
생각보다 운전이 능숙하다. 크게 이상함을 못 느낄 정도의 운전. 속도가 느려서 그런가?
버스가 워터파크를 벗어나 천천히 속도를 올린다.
"어디로 가요? 바로 동산으로 가는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운전하면서도 무리 없이 말을 하는 정현.
살려놓길 잘했네. 이런 재주가 있을 줄이야.
"일단 베이스캠프 삼을만한 곳으로 가자. 여기 가까운 호텔 같은 게 있나?"
"에에? 호텔요? 그런 게 어딨어요?"
"그런가. 그럼 비즈니스호텔이나 좀 고급스러운 모텔은?"
"아! 부티크 호텔은 아는데."
"그건 또 뭐야."
"말한 대로 고급스러운 모텔요. 호텔인 척하는 모텔."
"아. 그래. 거기로 가자."
"알겠어요."
대답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스를 세우는 정현.
"뭐야? 뭐 문제 있어?"
"네? 아뇨. 다 왔는데요? 여기서 내려서 걸어가요."
"그래? 그래 그럼."
거리로 한 4킬로 왔나? 생각보다 빠르게 왔다.
하긴. 이거 걸어오려면 한 시간 거리니까. 버스 타고 오는 게 낫지.
앞서가는 정현이를 따라가니 금방 모텔이 나왔다.
건물 하나를 통째로 쓰는 나름 고급스러운 외관.
그래. 차라리 이런 데가 낫지. 우리나라 숙박 업체들 평균이 참 높아서 다행이야.
"괜찮네?"
"그쵸? 들어갈까요?"
"어. 다들 들어가서 알아서 원하는 방에다가 짐 풀고 밖으로 나와."
"대장은 안 들어가요?"
"대장?"
"어…. 싫어요? 그럼 다르게 부를까요?"
"아냐. 됐어. 원하는 대로 불러. 뭐라고 부르든 상관없어."
"네."
"나도 들어갈 거야."
"알겠어요. 다들 이리 와요. 키 줄게요."
정현은 외부조였어서 그런지 이런 거에 익숙해 보이는 모습이다.
흠. 확실히 쓸모가 있어. 역시 사람은 이것저것 경험이 많아야 해.
여자들을 따라 들어가니 1층은 마치 호텔처럼 돼 있었다.
모텔 특유의 음침한 카운터가 아닌 밝은 데스크.
테이블에 의자도 있고…. 나름 괜찮은 느낌이다. 임시 아지트로 쓰기엔 딱 좋네.
다들 키를 하나씩 챙겨서 올라갔고, 나는 데스크 안쪽을 살펴봤다.
어디 보자…. 여기도 있을 텐데.
키가 있던 곳 말고 다른 쪽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열려있는 돈 통 안쪽 바닥에서 마스터키라고 적혀있는 카드 한 장을 찾았다.
그래. 없을 리가 없지. 관리 차원에서 무조건 있어야 하니까.
어차피 나는 짐이 없기에 굳이 올라가진 않았다.
그렇게 테이블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잠시 기다리니 여자들이 하나씩 내려온다.
송이를 마지막으로 모두 내려오자 나는 일어서면서 말했다.
"가보자. 일단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부터 봐야지. 정현이 말고 동산을 본 사람은 없는 거잖아?"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들. 나는 그런 그녀들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하아. 이 차가운 공기. 정말…. 좀 따듯할 때 할걸. 왜 이렇게 추운 계절에 지랄 염병을 떨고 있는 건지.
이번 겨울은 유난히 춥다. 이럴 계획이 아니었는데.
이게 다 그 정종철 씹쌔끼 때문이야. 왜 겨울이 끝나질 않니?
"지금부턴 다들 투명을 쓰고 갈 거야.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서로 부딪치는 거 주의하고…. 아. 이런 건 이미 알겠지. 정현이 너는 투명화 쓴 다음에 다리에다가 뭐 하나 묶어. 다들 그거 따라가게."
"아! 네. 알았어요."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풀어야 하니까 너무 꽉 묶지는 말고. 내가 풀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바로 풀어야 해. 알았지?"
"네."
"자. 그럼 다들 투명화 쓰고. 정현이 따라가자."
방금까지 있던 나를 포함한 다섯의 모습이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모두 사라졌다.
참 신기한 광경이다. 그리고 이젠 자연스러운 광경.
발걸음 소리가 들리고 한 명이 데스크 쪽으로 가서 테이프를 들고 오더니 찍 뜯어서 자신의 다리에다가 붙인다.
"이거면 됐나요?"
"어. 됐어. 가자."
허공을 둥실둥실 떠다니는 테이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상당히 이질적이다.
하지만 확실히 눈에는 띈다. 멀리서 봤을 땐 뭔가 싶겠지만 가까이에서 봤을 땐 잘 보이는 테이프.
다들 그걸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이 여자들은 나름 소리를 죽이고 걷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 부분은 참 맘에 든다.
다만 문제는 딱 하나….
"근데. 정말 이 인원으로 동산이란 곳을 무너뜨릴 수 있어요? 와. 언니가 그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었다니. 역시 멋지다니까. 저는 언니가 정말 존경스러워요. 저를 위해서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혼자 살아남기도 힘든데 저를 지금껏 돌봐주기도 하고, 먹을 것도 끊임없이 가져다주기도 하고 게다가 한번은 그런 일이 있었어요. 우리가 예전에 살던 동네에…."
주둥이. 저 주둥이를 막아버리고 싶다.
한 일곱 번 정도 주의를 시켰는데도 저놈의 입은 계속해서 나불거린다.
철이 없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 이 상황이 신난 것인지 잘 모르겠다.
정말…. 힘들다. 괜히 데리고 오라고 했나?
탐지에 걸리는 게 아무도 없어서 일단은 그냥 두고 있는데…. 하아.
"동산에 거의 다 왔어요. 이제부터 눈에 보일 거예요."
"그래서 그때 언니가…."
"지아. 이제부터 정말 입 다물어."
내가 진지하게 이야기하자 그제야 입을 다무는 지아.
진작 무게 잡고 말할걸. 이제야 좀 조용해지네.
"맞이방이라는 곳이 저긴가?"
"네. 저기 보이죠? 휴게소라고 적힌 간판?"
"응."
"저기 안쪽으로 들어가면 있어요."
"생각보다 본격적인데?"
"동산이라고요. 동산. 쉬운 곳이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궁금해요. 저런 곳을 어떻게 함락한다는 건지…."
"지켜봐. 일단 견적은 뽑아 봐야지. 지금부턴 나를 따라와. 소리 절대 내지 말고, 특히 지아. 입 열지 마. 그리고 발걸음 소리도 줄여. 네 언니나 다른 언니들을 보면 걸을 때 아무 소리도 안 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거야. 너도 그렇게 해. 속도 줄이지 말고."
"네. 근데…."
"꼭 필요한 질문 아니면 입 다물어."
"네…."
"그럼. 날 따라와."
정현이의 다리에 붙어있던 테이프를 떼서 내 다리에 붙였다.
아직 접착력이 남아있으니 쉽게 떨어지진 않겠지.
나는 그렇게 앞장서서 천천히 동산의 맞이방이란 곳으로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