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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앉아요."
승희의 말에 나는 얌전히 앉으라는 대로 앉았다.
나를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대게 한 승희는 내 다리를 벌리더니 거기에 자리를 잡고 내 몸에 등을 기댄다.
"이러고 있어요."
"응."
"손은 뭐해요. 안아요."
"어…. 응."
생각해보니 항상 손은 가슴을 만지거나 가슴을 만지려 하고 있거나 가슴을 만지려고 배를 만지거나…. 그랬던 거 같다.
이렇게 얌전히 안고 있던 적은 별로…. 아니 아예 없던 거 같아.
"여자가 늘 섹스를 원하는 건 아니에요. 물론 하면 좋긴 하지만 이렇게 안겨있기만 해도 좋은 거예요. 알겠어요?"
"응."
"세아나 미나 언니나 안나는 어떤지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난 그래요. 그냥 이러고 있기만 해도 좋아요. 꼭 느끼게 해준다거나 기분 좋게 해주거나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요.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아요. 알았죠?"
"그래. 명심할게."
이런 걸 보면, 내가 얼마나 여자에 대해서 모르는지 밑천이 드러나는 기분이다.
남중, 남고, 공대를 나와서 여자에 익숙하지도 않은데 세상이 멸망해버렸다.
내가 여자를 대하는 방법은 따지고 보면 세상이 망하고 나서 배운 것들이다.
조금 비틀어져 있고 기형적인 배움.
제대로 된 데이트, 연애…. 그런 것들은 해본 적이 없다.
그건 승희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쩜 이렇게 나랑 다를까?
이게 남자와 여자의 차이일까? 잘 모르겠다.
"하아. 나가서 고생 많았어요?"
"그럭저럭."
"미안해요. 나가서 고생하고 온 사람한테 오해나 하고."
"괜찮아. 크게 신경 안 써."
사실 질펀하게 놀고 왔으니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은 없다.
아까까진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하진 않았는데 오히려 승희가 이렇게 말하니 이제야 조금 찔리는 기분이다.
뭐, 그렇다 하더라도 밖에서 다른 여자와 하는걸 그만둘 생각 같은 건 없긴 하지만….
"사실 오빠가 밖에서 뭘 해도 우리가 뭐라고 할 수는 없죠. 그냥 다들 투정 부리는 거로 생각해줘요."
"알았어. 괜찮으니까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는 마."
"에휴. 우리가 빨리 제 몫을 해야 할 텐데."
그렇게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그렇게 있었다.
뭔가가 충전되는 시간.
승희 말 따라 굳이 섹스하지 않아도 좋다는 게 어떤 것인지 조금은 알 거 같다.
그렇게 한참을 있던 승희는 몸을 일으켜 밖에 나가더니 내 옷을 주워와 나에게 건네준다.
"자요."
"고마워."
단지 옷을 가져다줘서 고맙다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승희 역시 내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빙긋 웃는다.
"오늘은 어디 나가요?"
"아니. 오늘은 집에서 쉴 거야."
"그래요? 그럼 옷 입고 나와요. 밖에 있을 테니 이야기 좀 해요."
"어…? 뭔데. 그렇게 무게 잡고 말하면 무섭잖아."
"그런 거 아니에요. 나오기나 해요."
"알았어."
승희가 먼저 나가고 나는 주섬주섬 옷을 입은 뒤 밖으로 나갔다.
이미 다 자리에 앉아있는 넷. 뭐야? 심각한 거 아닌거 맞지?
자리에 앉자 승희가 입을 연다.
"오빠."
"응?"
"일단 다시 한번 말할게요. 기분 나빴었을 수도 있지만, 아까는 반 정도는 장난이었어요. 미안해요."
"아니…. 그렇게 심각하게 사과할 필요는 없다니까."
"짚고 넘어갈 건 확실히 해야죠. 괜히 우리 때문에 기분 나쁠 수도 있고."
"아냐. 그런 거 없어. 걱정 마."
"고마워요. 이렇게 앉은 건 다른 게 아니고요…."
꿀꺽
괜히 긴장된다. 대체 뭘 말하려고 저러는 거야.
"우리들 스킬 때문에 그래요."
아…. 스킬.
살짝 긴장하고 있던 게 확 풀렸다.
스킬이라면 뭐 고민하거나 걱정할 게 아니지. 나는 자세가 조금 편해졌고 느긋한 마음이 됐다.
괜히 쫄았잖아. 어휴. 이놈의 쫄보 근성.
"스킬이 왜?"
"우리가 전부 밖에 나가려면 투명화는 기본으로 배우고 나가야 하죠?"
"응. 일단은 그랬으면 좋겠네."
뭐가 어찌 됐건 투명화는 현재 스킬로 봤을 때 그보다 좋은 스킬이 없다.
탐지와 광역 스킬 무효화라는 카운터가 있긴 하지만 그걸 제외하고는 압도적으로 유리한 고지에 설 수 있는 스킬.
"그리고 공격 스킬도 하나씩 있어야 하고요?"
"그건 필수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원거리에서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스킬은 있어야지."
"저랑 세아는 투명이 있지만, 미나 언니랑 안나는 배우려면 한참 멀었잖아요? 게다가 코인도 없고."
"그렇지."
"두 사람이 빠르게 배울 방법은 없을까요?"
"음…. 마스터를 빠르게 할 수는 있지. 알잖아? 회복 물약 포션."
포션 소리를 듣자 승희와 세아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그런 표정 지어도 어쩔 수 없어. 간단하게 이야기해 볼까? 스킬은 온전한 체력일 때 하루에 20번 정도 쓸 수 있어. 너희도 마찬가지지?"
"네…."
"그리고 스킬은 6,000번을 써야 마스터 할 수 있어. 하루에 20번씩 쓰면 단순 계산으로 300일이야. 물론 사람마다 체력 회복이 되는 게 천차만별이니 그보다 더 빠르게 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결국은 아무리 빠르게 줄인다고 해도 200일에서 250일은 걸릴 거야. 시간으로 따지면 반년이네."
"근데 회복 포션은 코인 소모가 너무 심하잖아요."
"시간을 돈 주고 사는 거지. 물론 코인이 돈은 아니지만."
"한두 명이면 모를까 넷이나 회복 포션을 먹으면 감당이 안 되잖아요."
"그렇긴 하지. 그래서 이렇게 열심히 벌고 있는 거잖아?"
"저희가 아직 그렇게 본격적인 외부 활동을 해본 적이 없어서 그런데…. 스킬이 있다고 그렇게 코인을 벌 수 있는 거예요?"
나는 승희의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런 나를 보고 있는 네 여자.
이들에게 굳이 입에 발린 소리를 해줄 필요는 없다.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게 낫지.
"사실 이미 늦었지."
내 말에 모두 '역시 그렇구나.'라는 표정이 된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사실인걸.
캠프에 있던 여자들. 그녀들도 투명에 공격 스킬을 가지고 있지만 나 하나에 몽땅 털렸다.
캠프뿐만이 아니다. 컴퍼니 녀석들. 그 녀석들은 스킬이 세 개씩 있어도 민희 하나 남고 다 죽었다.
이제 와서 스킬을 배운다고 그들보다 나은 상황이 될 수는 없다.
세상에 나 같은 놈들은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
스킬이 네다섯 개씩 있어서 상성에 상성을 갖추지 않는 이상 제압당하는 것은 순식간일 거다.
"물론, 그건 내가 없었을 때의 이야기고."
내 말에 모두 나를 바라본다. 안나 쟤는 무슨 소린지 이해는 하는 거야? 왜 알아듣는 것처럼 쳐다보는데.
"한 사람이 모든 스킬을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어. 우리는 함께 있을 거니 얼마든지 상호 보완해줄 수 있어. 나랑 같이 있으면 너희도 최소한의 스킬로 최대의 효과를 발휘할 수 있지."
자신감이 넘치는 말이지만 그건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캠프의 여자들로 하려는 게 그거다.
승희와 미나, 세아와 안나. 이들을 잃을 수는 없다.
내 실수로 내 여자들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면 나는 나를 용서하지 못할 거다.
그렇게 되지 않게 하려고 시범적으로 캠프의 여자들을 운영해보는 거니까.
상당히 쓰레기 같은 생각이긴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게 나인걸.
"그래도 어쨌든 미나 언니와 안나가 투명화는 배워야 하잖아요?"
"맞아. 그리고 안나랑 말도 어느 정도는 통해야지."
"그건 그렇죠…."
"너무 조급해하지는 마. 너희들을 강하게 만들어줄 준비는 내가 차근차근 하고 있으니까."
"그래도…. 너무 놀고먹고 있는 거 같아서."
"그렇게 생각할 필요 없어. 지금은 안나에게 한국어 잘 가르쳐주는 것만 해도 충분해."
"네…."
"또? 다른 거는?"
내 질문에 미나가 살짝 손든다.
"굳이 손을 들것까지야."
"왠지 손을 들어야 할 거 같아서요. 하하."
"말해봐."
"혹시 우리도 여기에서 농사 같은 걸 지을 생각인가요?"
"농사라…. 지으면 좋겠지? 땅도 넓고 앞에 과수원도 있고…. 근데 솔직히 말하면 난 흙 만지고 싶지 않아."
"와…. 정말 직설적이네요."
"근데. 그게 사실이야. 나는 기본적으로 농사가 싫어. 벌레도 싫고. 세상이 이렇게 됐으니 자급자족의 중요함은 이해하긴 하지만, 내가 그걸 수확하거나 하고 싶지는 않아. 자신도 없고."
"으음…."
"왜? 하고 싶어?"
"어쨌든 우리도 자급자족을 해야 하잖아요."
"그렇긴 한데,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준비하고 있는 게 있어."
"준비요?"
"아직 확정된 건 아니라 말할 것도 없긴 하지만…. 잘 된다면 앞으로 식량 걱정은 안 해도 될 거야."
동산. 거기를 먹고 캠프의 여자들에게 관리를 맡기면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으니까.
"그럼…. 저희가 뭔가를 키우는 건요?"
"그거야 뭐 상관없지. 근데 쉽진 않을 거야."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무거운 걸 들고 움직여야 하고 이것저것 신경도 써야 하고 햇볕에 얼굴은 타겠지. 게다가 들인 노력에 비해 얻는 것도 시원찮을 거야. 도움받을 곳도 없고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되게 부정적이시네요."
"말했잖아. 나는 농사가 싫어."
"너무 부정적이라 더 말하기가 좀 그럴 정도네요."
"너희가 한다면 글쎄…. 힘쓰는 일이나 필요한 걸 구해주는 것을 할 수는 있겠지. 그런 거야 어려운 게 아니니까."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미나가 몸빼바지를 입고 선캡을 쓴 채 수건을 목에 두르고 호미로 땅을 파는 모습…. 별로 보고 싶지 않다.
차라리 성장을 배워서 자급자족하는 방식이면 모를까. 농사는 아니야.
"제가 스마트 팜 한다고 했을 땐 그런 말 없었잖아요?"
승희가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어본다.
"스마트 팜은…. 말 그대로 스마트 하잖아. 수경재배는 흙을 만지는 것도 아니고."
"뭐야. 무슨 기준인지 잘 모르겠네요."
"그냥…. 너희가 고생하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거야."
"어휴…. 정말 이상한 사람이야."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가로젓는 승희.
"암튼, 또 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세아를 바라봤다.
"어? 나?"
"넌 뭐 궁금한 거 없나 해서."
"나…. 음. 별거 없는데. 아. 하나 있긴 있네. 또 언제 나가요?"
"나? 왜?"
"그냥요."
"음. 내일?"
"내일?"
"응."
"약속이라도 있어요?"
"약속…. 이라면 약속이지?"
"그럼 언제 또 들어와요?"
"글쎄. 그건 내일 가봐야 알겠는데."
"흐응…."
쟤가 왜 내 일정을 궁금해하지?
잠시 생각해보니 바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회복 포션 먹기 싫구나?"
"어!? 아니거든! 그 정도는 별거 아니거든! 그것 때문에 그러는 거 아니거든!?"
그런 세아의 반응에 승희와 미나가 쿡쿡 웃는다.
알아듣지도 못하는 안나마저 따라 웃는걸 본 세아가 발끈해서 왜 웃냐고 막 따진다.
근데…. 안나 쟤 못 알아듣는 거 맞지?
"걱정 마. 당분간은 키 맞춤 해야 하니까 미나랑 안나부터 먹일 거야."
내말에 세아의 표정이 활짝 펴지고 미나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정말 알기 쉬운 여자들이라니까.
"됐나? 설마 안나도 할말 있어?"
내가 안나를 바라보자 승희와 미나, 세아도 안나를 바라본다.
갑자기 모두 자신을 바라보자 고개를 갸우뚱하는 안나.
와씨. 그냥 고개만 옆으로 꺾었는데 왜 저리 이쁘냐.
"헤에."
안나가 화사하게 웃자 다들 따라서 헤벌레 하고 웃는다.
역시…. 압도적인 미모 앞에서는 다들 비슷한 반응이네.
하긴 저 얼굴을 보고 따라 웃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럼 더 없지?"
"전 없어요."
"그런 거 같은데요."
"나도 됐어."
모두 대답하는 걸 들은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럼, 좀 쉴게. 내일 나가려면 더 쉬어야 해. 내일까지는 빈둥거릴 테니 말리지 마."
내가 그렇게 선언하자 다들 그러라는 분위기다.
모처럼 휴식이니 진짜 푹 쉬어야지.
내일 나가면 정말 언제 돌아올지 감도 안 잡히니까.
그렇게 방으로 돌아온 나는 정말로 종일 빈둥거렸다.
스킬 생각, 앞으로의 일정, 캠프와 민희…. 다 집어치우고 그냥 누워있었다.
그렇게 밤이 늦을 때까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있다 보니 몸이 근질근질해진다.
미쳤나 봐. 아까 아침에 세 번이나 했는데 또 그런 생각이 난다고?
진짜 짐승 새끼가 되어가고 있어.
그냥 수면을 쓰고 잘까 아니면 뭔가를 해볼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몸을 일으켰다.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같이.
조용히 방문을 열고 나가니 거실엔 아무도 없었다.
아마 다들 각자 방에 들어간 듯 조용한 거실. 탐지를 켜보니 역시 각자 방에 들어가 있다.
살그머니 발걸음을 옮겨 승희의 방 앞으로 간다.
작게 노크하자 문이 열리고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승희.
"어? 자는 거 아니었어요?"
"들어가도 되지?"
"어…. 물론이죠."
방 안으로 들어가자 승희가 조용히 문을 닫았고 나는 그런 승희에게 다가가 지긋이 바라봤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냥 키스하기 전에 보는 거야."
"네? 그게 무슨…."
승희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내가 내 입술로 승희의 입술을 덮어버렸으니까.
깜짝 놀란 승희는 이내 내 품에서 서서히 몸의 힘을 뺀다.
내가 침대로 이끌어 눕히자 작게 투정하듯 앙탈 부리는 승희.
"아이…. 갑자기 들어와서 왜 이래…. 읏."
나는 그런 승희의 가슴에 입을 가져갔다.
"아읏…. 정말."
목소리 귀엽네…. 안 되겠어. 한 번으로 못 끝낼 것 같다.
당분간 야한 생각이 안 들도록 잔뜩 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