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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오랜만에 화장한 여자를 보니까 느낌이 새롭다.
설렌다고 해야 하나? 약간 두근거리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인공적인 아름다움이 가미된 얼굴이 주는 만족감 같은 것? 어쨌든 남자들은 그런 아름다움을 보면서 자라왔으니까.
"물어볼 거…. 많지. 음…."
붉은 입술. 저 입술이 문제다.
그저 립스틱 하나 발랐을 뿐인데 매력이 두 배는 오르는 것 같은 기분이란 말이지.
그렇게 붉은 입술을 벌려 포크로 찍은 스테이크를 입안으로 가져가는 모습은 상당히 관능적이다.
미쳤나? 그냥 고기를 입에 넣는 건데 왜 그게 야하지?
마음 같아서는 일단 먼저 덮쳐버리고 싶다.
일단 느긋하게 한 발 빼고 난 다음 천천히 질문하는 거야. 그리고…. 어휴. 짐승 새끼. 작작하자. 진정하고.
"화장품. 쓸 수 있는 거야? 화장품에도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을 텐데?"
내 첫 질문이 화장품인 게 약간 의외였나 보다. 여자의 표정이 흥미롭다는 표정이 된다.
"화장품에 관심이 많으세요?"
매력적인 웃음. 이 여자는 남자를 홀리는 방법을 안다.
몸에서 풍기는 분위기나 행동거지. 몸짓 하나까지 고급스러운 느낌이 나는 여자.
"글쎄. 관심이 많은 건 아닌데 신기해서. 지금 이 세상에선 화장품 같은 것은 사치품이잖아? 아니, 사치품 수준이 아니지. 쓸 수가 있는 거야?"
"그렇긴 하죠. 유통기한은 당연히 있죠. 예전에 만들어진 화장품 같은 건 지금 쓸 수 없어요. 제가 쓰는 건 당연히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것들이죠."
"만들어졌다고? 화장품을? 대체 누가?"
"'팩토리'라는 곳이 있어요. 식량을 가져다주면 공산품을 만들어 주는 곳."
"공산품을 만들어준다고? 어떻게?"
"그건 저도 자세히 몰라요. 뭔가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겠죠? 거기 가면 만들 수 있는 리스트가 있고 거기에 맞는 식량을 주면 나중에 받을 수 있어요. 조금 바가지가 있긴 하지만, 물건을 구할 수 있으니 그 정도는 감수해야죠."
"샴푸나 그런 것들 말하는 건가?"
"네. 주로 그런 소모품들이 많죠. 세제. 샴푸. 비누, 치약…. 없어도 살 수 있긴 하지만 상당히 불편한 물품들요."
누군지 몰라도 재밌는 놈이다. 아니 팩토리라고 했으니 한두 명은 아닐 거다. 팩토리면 공장이잖아?
누군가 공장을 돌린다는 거다.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절대 망할 일은 없겠네.
"신기하네. 그럼 그 팩토리는 어디 있는 데?"
"청주요."
"직접 가봤나?"
"네."
"청주라. 가깝진 않네. 치약을 구하러 청주까지 가야 한다니…. 이것 참."
하지만 이렇게 말해도 상당히 유용한 정보다.
안 그래도 지금 쓰고 있는 세제나 치약이나 이런 것들은 이미 만들어진 지 오래된 물품들이다.
쓰면서도 '이걸 계속 써도 되나?' 싶은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아직까진 별 탈이 없어서 그냥 쓰고 있긴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찝찝한 건 사실이니까.
"그래…. 그럼 그렇다고 하고. 이름이 뭐지? 나이는?"
"보통 그것부터 물어보는 거 아닌가요? 재밌는 분이네."
매혹에 당한 게 맞는지 모르겠다.
분명 머리 위에 시간이 떠 있으니 매혹에 걸린 것은 맞는데 차분하고 고혹적인 모습이 전혀 매혹에 걸린 사람 같지 않아 보인다.
침착하고 우아한 여자. 이런 여자도 남자 밑에 깔려있으면 신음을 내겠지?
"정민희에요. 나이는 비밀인데…."
"맘대로 해."
"재미있다는 말은 취소. 서른둘이에요."
"서른둘? 정말? 스물일곱은 안 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또래라고 생각했다고."
"흐음. 나이로 립서비스 하는 건 너무 구식이지 않나요? 물론 그런 뻔한 소리에도 내심 기뻐하는 게 여자이긴 하지만."
"립서비스 같은 소리 하네. 내가 너한테 뭐 잘 보일 게 있다고 립서비스 하냐? 립서비스는 니가 나한테 해야지."
내 말을 들은 여자가 잠깐 생각하더니 쿡 하고 웃었다.
"립서비스가 필요하세요?"
그러면서 혀로 자신의 입술을 살짝 핥는다. 내가 말한 뜻을 정확하게 알아들은 여자.
나는 나도 모르게 '응'이라고 대답할뻔했다. 어우. 위험한 여자야 아주.
"좋아 민희. 가진 스킬은?"
"기절이랑 반사, 수납요."
"용케 스킬을 세 개나 찍었네?"
"그러는 그쪽은…. 대체 스킬이 몇 개죠? 짐작도 안 되는데."
"글쎄. 그런 건 능력껏 알아내야지? 근데 기절이랑 반사. 그리고 수납이라. 수납은 왜 골랐지? 투명화는 왜 안 고르고?"
"기껏 화장까지 하고 다니는데 몸을 숨기고 다니면 의미가 있나요?"
"그것참 말 같지 않은 이유네."
"반사가 있으니 투명화는 그리 크게 필요하다는 생각을 못 해서요."
"나랑 생각이 다르네. 뭐 그거야 그렇다 치고. 수납은?"
"좋잖아요? 짐 같은거 무겁게 안 들고 다녀도 되니까?"
"참 편하게 사는구나. 수납 스킬 숙련도는?"
"배운지 얼마 안 돼서 아직 하급이에요."
"들어가는 양은 얼마나 되지? 항상 궁금했던 거라서."
"흐음…. 글쎄요. 저도 완전히 꽉 채워 본 적은 없어서."
"보통 그런거부터 확인하지 않나? 공간은 제법 큰가?"
"생각보다 커요. 그 배낭 정도는 두 세 개는 거뜬히 들어갈걸요?"
하급인데 그 정도라니…. 제법 좋은데?
숙련도가 올라서 중급이나 고급, 마스터가 되면 당연히 공간이 늘어나겠지? 그거 말고는 등급을 올렸을 때 변할만한 게 없잖아.
예상보다 좋은 스킬이었네. 역시 언젠간은 꼭 찍어야겠어.
"거기 음식을 넣으면 어떻게 되나? 안에 넣어놓은 건 시간이 흐르나?"
"아뇨. 안 흘러요. 그건 배우자마자 테스트해봤어요. 얼음으로 테스트해봤는데, 안 녹았으니까요."
와 씨…. 그렇다면 예상보다 좋은 스킬 수준이 아니네. 최고잖아? 넣어놓는 순간 유통기한 걱정은 안 해도 된다니. 정말 맙소사네.
그렇게 수납 스킬에 대해서 감탄하고 있는데 민희가 나에게 말했다.
"근데…. 한가지 물어볼 게 있는데 해도 되나요?"
"해봐."
"저 지금…. 매혹에 걸린 거죠?"
깜짝 놀랐다.
자신이 매혹에 걸린 걸 인지하다니.
보통은 매혹에 걸렸다는 걸 알아채는 것은 한참 뒤에나 가능하다.
그것도 매혹 건 사람이 무리하게, 혹은 급격하게 뭔가를 요구했을 때 나중에 그걸 곱씹으면서 깨닫게 되는 정도?
게다가 그걸 눈치채려면 매혹이라는 스킬을 잘 알고 있을 때나 가능한 일이다.
매혹에 대해 제대로 모르면 아예 의심도 하지 않게 되니까.
근데 그걸 자력으로 알아채다니, 그것도 걸려있는 도중에. 이 여자 대체 뭐지?
"어떻게 알지? 보통은 못 알아채는데?"
"매혹에…. 오래 당했거든요. 그래서 매혹에 대해선 제법 알죠. 그래서 지금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네요."
"그랬군. 별로 좋은 꼴은 못 봤겠네."
"하아…. 생각나게 하지 마세요."
굉장히 귀한 경험이다.
자신이 매혹에 걸렸는지 아는 사람과의 대화.
이런 좋은 기회를 함부로 버릴 수는 없지.
"기분이 별로 좋지 않더라도 질문에 대답해주겠어? 협조해주면 바로 풀어주지."
"후우. 제가 선택권이 있긴 한가요?"
"지금은 없지. 하지만 하는 거 봐서 생길 수도 있지."
"그래요. 어쩔 수 없죠."
나는 잠시 말을 하지 않고 여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지금 내 목표는 일단 컴퍼니 녀석들을 다 잡는 것.
그리고 캐슬에 대한 정보. 그리고…. 이 여자를 포섭하는 것.
함부로 죽이기 아까운 여자다.
큰일이네. 요즘 들어서 죽이기 아까운 여자가 많아지고 있어.
내가 느슨해진 건가? 자꾸 사람 욕심을 내네.
"내일 모이는 컴퍼니 녀석들은 총 몇 명이지? 그리고 거기에 탐지 스킬 있는 녀석이 있나?"
"아홉 명요. 탐지 스킬이라면 주변 인간 탐지 스킬 말하는 거죠?"
"맞아."
"그거라면 세 명요."
세 명이라. 생각보다 많네.
역시 스킬을 두 개 이상 배운 놈들은 탐지의 중요성에 대해서 잘 알겠지.
"거기에 죽이면 안 되는 사람이 있나?"
"네?"
"난 컴퍼니 녀석들을 다 죽일 생각으로 왔어. 근데 너는 안 죽일까 해서.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혹시 죽이면 안 되는 사람이 더 있냐고."
"음…. 딱히요. 아. 찰리도 죽이는 건가요?"
"찰리? 이 남자?"
나는 발로 남자를 툭 쳤다. 잠에 빠진 남자. 어쩌면 다시는 깨어나지 못할 남자.
"네. 그는 요리 솜씨가 꽤 좋거든요. 그리고 가끔 이렇게 이쁜 짓도 하고."
와인잔을 들어 다시 한 모금 하는 민희.
역시 그 행동 하나하나에 남자들을 홀릴만한 무언가가 스며들어 있다.
미나와 안나같은 여자들과 함께 있으면서 면역력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나도 헬렐레했을지도 모를 정도.
"아쉽게도, 나는 남자는 살려두지 않는 주의라."
"그래요? 안타깝네요. 그래도…. 크게 상관은 없겠네요. 없어요. 죽이지 말아야 할 사람 같은 건."
"그래? 생각보다 동료의식이 없네."
"그런 게 어딨겠어요. 다들 필요 때문에 모인 건데."
"너는 뭐 때문에 이런 일을 하는 거지? 혼자서도 충분히 잘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요."
"찾고 싶은 사람? 혹시 매혹을 걸었던 녀석?"
"역시…. 바로 눈치를 채는군요. 제가 그렇게 티를 많이 냈나요?"
"그렇기도 하고…. 나도 그렇거든. 매혹 스킬을 가지고 있던 여자를 찾고 있어서."
"이름이?"
"왜? 들으면 아나?"
"혹시 모르죠. 제가 컴퍼니에 들어간 이유는 정보를 얻기 위해서예요. 다른 이유는 없어요."
"정보? 하긴. 여기저기 듣는 게 많은 건가?"
"그럼요. 혼자 다닐 때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많이 알게 되죠."
"그래? 하긴...그렇긴 하겠네. 그럼 정세희라고 아나? 나이는 스물다섯. 곧 스물여섯이 되겠지."
"정세희? 마녀?"
"어?"
깜짝 놀랐다. 오늘 여러 번 놀라네.
마녀라는 이름이 이 여자 입에서 나올 줄이야.
"알아? 어떻게 알지?"
"하하…. 이거 신기하네요. 찾고 있던 게 그 마녀라니."
내가 말없이 바라보고 있자 민희는 목을 가다듬더니 계속 이야기한다.
"정종찬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알고 있다. 컴퍼니의 차장이지?"
"알고 있어요? 그럼 이야기가 더 빠르겠네요. 그 사람이 마녀 정세희를 캐슬에 상납했어요."
"캐슬에? 상납?"
"네."
"하. 그래? 뭐하러?"
"그건 자세히 몰라요."
캐슬을 박살 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네. 그나저나 상납이라니. 그년이 이쁘장하긴 해도 상납씩이나 할 정도인가?
아니지. 그 정도 외모에 매혹 스킬을 가졌다면 어지간히 쓸모는 있겠지. 다룰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하하. 좋은 정보들을 많이 얻었네. 좋아. 매혹은 풀어주지."
나는 찰리와 내가 범위에 안 들어가게 잘 가늠해서 민희만 광역 스킬 무효화를 걸었다.
그녀의 머리 위에서 매혹 시간이 사라졌고, 자신의 변화를 눈치챈 민희는 나를 바라봤다.
"의외네요? 순순히 풀어주다니?"
"그렇다고 공격할 생각은 하지 마. 네가 당할 테니."
"흐음. 반사가 있나요?"
"글쎄?"
"그리고…. 매혹을 어떻게 풀었죠? 매혹은 걸려있는 시간이 다 끝나야 풀리는 건데?"
"글쎄?"
"이거 손해가 막심하네요. 나는 이것저것 많이 알려줬는데 내가 알아내는 건 하나도 없네요."
"대신 목숨을 건졌잖아."
내 말에 민희는 피식하고 웃는다.
"하하. 그렇네요. 목숨을 건졌으니 손해는 아니네요. 그래서…. 저를 살려주는 이유가 뭐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