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95화 (19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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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캠프의 일이 얼마나 걸릴지 몰라서 벙커에서 일찍 나온 건데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

차라리 캠프에서 더 있다 올 걸 그랬나? 여기에 너무 일찍 온 거 같다.

시간은 꼬박 하루가 남았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차라리 벙커에 들어갔다 올까? 가서 한숨 푹 자고 나올까?

그게 베스트이긴 할 텐데…. 들어가면 나오기 싫어질 것 같다.

차라리 이 근처를 돌면서 사냥을 하는 게 나을지도.

아…. 여기는 캐슬의 영역이지.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럼 뭘 하지? 그냥 여기 죽은 듯이 있어야 하나?

어디론가 움직이기도 싫고…. 그렇다고 그냥 있자니 할 게 없고.

밖이 춥지만 않았어도 그냥 움직일 텐데. 귀찮네…. 점점 게을러지는 거 같아.

안전한 벙커 안에서 침대에 누워 가슴이나 만지고 싶다.

섹스는 귀찮고, 가슴만 만지는 거야.

승희의 말랑말랑한 가슴, 미나의 탄력 있는 가슴, 세아의 보들보들한 가슴, 안나의 풍만한 가슴.

가슴가슴가슴.

만지고 있어도 만지고 싶은 가슴. 가스으으음.

하. 안 되겠다. 너무 미친놈 같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나가서 움직여야겠어.

아무리 생각해도 이러고 있는 건 변태 싸이코 새끼밖에 안 된다.

가뜩이나 상태 안 좋은데 더 안 좋게 될 수는 없지.

나가자. 나가서 뭐라도 하자. 안되면 달천동 벙커라도 가서 한숨 자고 오자.

그렇게 밖으로 나가려는데 탐지에 사람 두 명의 기척이 걸렸다.

뭐지? 왜 사람이 여기에?

멀리 입구로 들어오는 사람의 기척 둘.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이 지겨운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장난감들이 알아서 기어들어 오다니.

쿵쿵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장난감…. 아니 사람이 들어오고 있는 곳으로 향했다.

투명화를 쓰고 있기에 발걸음 소리만 줄이면 된다.

예전 같았으면 오는 방향을 계산해서 적당한 곳에 몸을 숨겼을 텐데.

편해…. 역시 투명화는 최고야.

사람 두 명이 보인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그리고 정장.

그놈들이다. 컴퍼니. 세상이 망했는데 정장을 입고 다니는 놈들은 저놈들밖에 없지.

둘의 모습은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떡 벌어진 어깨에 정장이 터질 것 같은 몸을 가진 남자. 짧은 머리에 선글라스를 끼고 있는 모습이 상당히 위압적이다.

그리고 여자.

흰 블라우스에 정장 재킷, 그리고 치마. 오피스룩의 정석이라고 볼 수 있는 모습.

거기에 코트와 하이힐을 신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게다가 갈색으로 염색한 머리는 구불구불하게 펌이 되어있는 모습.

펌이라니. 저게 가능한 거야? 염색도 펌도 오래전에 한 모습이 아니다.

몇 시간 전에 하고 온 듯한 모습. 저 여자는 시간을 거슬러 온 것 같았다.

보니까 화장도 하고 있네? 진짜 뭐 하는 여자지? 비결을 알고 싶네.

여자의 모습은 무슨 대기업 회장 딸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한 모습 같다.

그 때문에 옆에 있는 남자가 마치 경호원처럼 보일 지경.

나는 신기함 반, 어이없음 반 정도의 마음으로 둘을 바라본다.

보아하니 탐지는 없는 거 같은데…. 그래도 방심할 수 없다.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고 거리를 좁히려는 것일 수 있으니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바로 반응할 수 있게 긴장하며 천천히 거리를 벌렸다.

내가 있던 자리를 지나쳐 계속해서 안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킁킁. 어디서 탄내 안나?"

"모르겠는데?"

걸어가면서 남자가 이상하다는 듯 말했고 여자는 시큰둥하게 대답한다.

아차…. 캠프에서 냄새가 배었나? 남자 놈. 생긴 건 터프하게 생겼는데 생각보다 예민하네.

나는 발소리가 나지 않게 좀 더 주의하며 조심히 둘을 따라갔다.

"분명히 나는데."

"내 속이 타는 냄샌가?"

"왜 또."

"내가 분명히 내일이라고 했지? 근데 왜 우기냐고. 그 때문에 하루나 일찍 왔잖아. 응? 어떻게 할 거야? 내 아까운 시간을?"

"그래서 내가 고기 챙겼잖아. 와인하고."

"그걸로 내 하루를 커버할 수 있다고 생각해? 와인 뭔데?"

"오르넬라이아 마쎄토. 95년산이라고."

"아. 뭐야. 이탈리아 와인이야? 나랑 마실 거였으면 프랑스 와인 가져오라고. 샤또 아니면 에쎄조 같은 걸 챙겨왔어야지."

"어쩔 수 없잖아. 이거 구하기도 얼마나 힘들었는데."

"힘들긴. 어디서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발견했겠지."

미친 연놈들. 아주 지랄을 하네.

저 지랄들을 하는 거 보면 먹고살 만한가 보다. 아주 인생을 즐겁게 살고 계시네.

"근데, 왜 계속 탄내가 나지? 어디 불났나?"

"내 속 터지는 냄새라니까? 네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내 속을 활활 태운다고."

"야야. 걱정 마라. 근사한 스테이크에 와인 들어가면 좀 나아진다. 그래도 안 되면 내가 좋은 곳으로 보내줄게."

그러면서 여자의 허리를 잡고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남자.

"지랄."

여자는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기대하나 보다. 남자의 손을 뿌리치거나 하진 않네.

"근데 어디 가는 거야?"

"음식점 있는 곳? 스테이크 구울 수 있는 곳 정도는 있겠지."

"하아. 많이 걸었더니 힘들어."

"네에네에. 공주님. 쇤네가 빨리 모시겠습니다요. 어이쿠. 엘리베이터가 이쪽에 있네요. 가시죠. 공주님."

참…. 재밌게 산다. 엘리베이터 앞에 멈춰 서서 버튼을 누르는 남자.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지 않기에 조심스럽게 움직여 옆에 있는 층별 안내도를 봤다.

음식점들이 많은 곳은…. 7층.

두 사람이 엘리베이터에 탔고, 나는 계단으로 향했다.

7층에 올라가서 탐지를 돌렸다.

두 사람의 위치를 확인하고 그쪽으로 가니 남자는 정장 재킷을 벗고 주방 안에서 이것저것을 살펴보고 있다.

그리고 여자는 홀의 테이블에 앉아 그런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벗어 앞의 테이블에 올려놓은 여자. 생각보다 이쁘다. 화장해서 그런가?

근데 진짜 화장품은 어디서 난 거야? 이따가 꼭 물어봐야지.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제압할 수 있지만, 무슨 짓을 하나 궁금해서 지켜봤다.

무엇보다 저 남자의 모습이 재밌다.

외향은 굉장히 마초다운데 하는 짓은 상당히 세련되고 꼼꼼하다.

고기를 구우려 하는지 철판을 이리저리 살피는 모습.

"멀었어?"

"조금 기다려 봐. 안 쓴 지 꽤 된 음식점이니 정리는 해야지."

"배고프다고!"

"허기는 가장 훌륭한 향신료라는 말 몰라? 아니면 빨리 먹고 어서 내게 안기고 싶은 거야?"

"미친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다리를 꼬고 앉아있는 여자는 남자에게 시선을 떼지 않는다.

참 특이한 사이다.

능글거리는 남자와 도도한 여자.

근데 제삼자가 보기엔 여자가 남자를 원하는 것 같고 남자는 그저 여자를 엔조이 정도로 보는 느낌이 든다.

웃기는 관계. 심심했던 나에겐 아침드라마보다 재밌는 광경.

한참을 주방에서 북적북적하던 남자는 드디어 뭔가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가져온 가방을 열어 붉은 덩어리를 꺼낸다.

아…. 보기만 해도 알 것 같다. 소고기. 와 씨. 보기만 해도 영롱하네.

남자는 철판 위에 손을 한번 가져다 대더니 잠시 기다린다.

그런 모습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여자.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보이지만, 침을 꿀꺽 삼키는 것이 보였다.

나랑 같네. 소고기는 못 참지.

치이이이익

남자가 철판 위에 뭔가를 뿌리고 기다리더니 소고기를 올렸다.

능숙한 솜씨로 소고기를 굽는 남자. 이리저리 고기를 돌리며 뚝딱뚝딱하더니 준비해둔 그릇에 착하고 올려놓는다.

그렇게 두 접시를 만든 남자는 접시를 들고 여자 앞에 내려놓았다.

"와인 잔은 네가 가지고 있지?"

들고 있었던 짐에서 와인을 꺼내는 남자.

병을 만지며 뭔가를 점검하던 남자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여자에게 말했다.

"인벤토리."

나는 여자의 말에 깜짝 놀랐다.

분명 인벤토리라고 했지? 내가 잘 못 들은 게 아니지?

여자는 허공에 생긴 구멍에 손을 집어넣더니 포도주잔 두 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인벤토리라니…. 그럼 그거 수납이잖아?

수납 스킬은 세 번째 스킬 배울 때 나온 스킬이다. 그럼 저 여자는 적어도 세 개의 스킬을 하고 있다는 소리.

남자는 익숙한 손길로 와인의 코르크 마개를 열고 잔에 따랐다.

"식기가 맘에 안 들지만, 어쩔 수 없지. 은 식기를 가지고 다닐 수도 없으니."

그리고 그건 남자의 마지막 말이 되었다.

광역 스킬 무효화와 수면, 매혹을 빠르게 연거푸 걸었다.

와인잔을 집어 들려던 자세 그대로 잠든 남자.

그리고 그 모습을 무표정하게 바라보고 있는 여자.

투명화를 풀고 모습을 드러낸 나는 그들 가까이 다가갔다.

잠든 남자를 발로 밀었고, 남자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충격이 작진 않아 보이지만, 마스터 수면은 저 정도의 충격으론 깨지 않는다.

아니지, 떨어지는 꿈을 꿀 수도 있으니 잠에서 깨려나?

혹시 몰라서 다시 수면을 걸었다.

그리고 여자의 맞은편에 앉았다.

"뭐해? 고기 식겠다. 먹어."

나는 마치 내가 준비한 것처럼 자연스럽게 말을 하고 나이프와 포크를 들어 고기를 썰었다.

입에 들어가자 오랜만에 맛본 소고기의 황홀한 맛이 입안을 가득 채운다.

아…. 이거지. 씨발. 미쳤네.

와…. 씹…. 뭐지? 아. 말이 나오지 않는다. 소고기 자체도 놀라운데 뭐라 그러지? 양념? 시즈닝? 암튼 기가 막힌다.

"야. 이 남자 뭐냐? 이거 맛이 장난이 아닌데?"

"찰리는 유명한 쉐프에요."

"찰리? 이름이 찰리야? 뭐 이름이 그래?"

우아함과 십만 광년 정도 거리를 둔 나의 칼질과 포크 질.

그딴거에 신경 쓰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일단 이 맛있는 걸 계속해서 입에 넣고 싶을 뿐.

"넌 안 먹어? 뭐해?"

"아. 아니에요."

먹는 것도 잊을 정도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여자.

얘도 약간 위험한 타입인가? 날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네.

내가 말하자 그제야 우아하게 스테이크를 썰어서 입에 넣는 여자.

고기를 삼키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옆에 놓인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을 홀짝인다.

"아. 이것도 있지?"

나도 와인잔을 들고 한 모금 마셨다.

으…. 뭔가 비싼 느낌은 나는데 잘 모르겠다. 그래도 이건 소주처럼 '이딴 걸 왜 처먹지?'라는 생각은 안 드네.

그렇게 고기를 다 먹자 만족감과 동시에 아쉬움이 든다.

왜 고기를 병아리 눈물만큼 먹는 거야? 기왕이면 잔뜩 먹지.

아. 더 없나? 설마 이만큼만 들고 왔나?

찰리인지 나발인지의 가방을 뒤져봤지만, 더 있는 것은 없었다.

아…. 괜히 입맛만 돋웠네. 이러면 배가 허전하잖아.

아직 반 정도밖에 안 먹은 여자의 스테이크를 바라봤다.

매혹이 걸려있으니 달라고 하면 줄 텐데…. 하지만 그건 너무 치졸한 짓 같다.

아무리 막 대해도 된다고는 하지만 맛있게 먹는 고기를 뺏어 먹는 건 너무 없어 보이잖아.

"왜 그렇게 보세요?"

"아니. 먹고 있는 게 이뻐 보여서. 어서 먹어. 물어볼 게 많으니까."

내 말에 살짝 부끄러워하는 여자.

겁나 도도한 척하더니 이쁘다는 말에는 좋아하는 건가? 역시 매혹의 힘이란….

그렇게 스테이크를 다 먹은 여자.

쓰러져있는 찰리를 보더니 눈을 살짝 감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더니 입을 연다.

"물어보실 게 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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