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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동생이 있어요."
"동생?"
"네. 음식을 주고 와야 할 때가 돼서…. 다녀와야해요."
흥미로운 이야기다. 동생이라니.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높게 쳐주는 사람들이 가족을 챙기는 사람들이다.
수라장 같은 이 세상에서 책임을 지고 누군가를 부양하면서 산다는 건 남들에 비해 몇 배는 어려운 일이니까.
그래서 나는 부양자가 있는 사람들은 죽인 적이 없다.
아니…. 모르지. 사정을 듣지 못하고 냅다 죽인 사람 중에는 부양자가 있는 사람이 있었을지도.
하지만 사정을 알았는데 죽인 적은 없다. 그게 내 얼마 안 되는 기준 중의 하나.
"왜 함께 다니지 않고?"
"아직 어리니까요."
"어리다고? 몇 살인데."
"열아홉…."
"남자? 여자?"
"여자요."
"그럼 혼자 사는 건가?"
"네. 안전한 곳에서 잘 숨어 살고 있어요."
"그래…. 마음대로 해. 대신 조건이 있어."
"네?"
"코인을 주우러 갈 때는 꼭 넷이서 같이 갈 것. 획득하는 양을 서로에게 밝히고 될 수 있으면 균등하게 획득할 것."
내 이야기를 듣자 남은 여자들도 놀란 표정을 짓는다.
"코인을…. 저희가 획득하라고요?"
윤서가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본다.
"왜. 싫어?"
"아니…. 왜 코인을 우리에게? 그럼 저번에 가져간 건 왜죠?"
"그때는 급하게 필요했으니까. 가져간 게 있으면 돌려줘야 할 거 아냐. 내가 착취만 하면 너희들이 나를 따르겠어? 적절한 보상이 있어야지."
"으음…. 의외네요."
"나는 너희를 불합리하게 부려먹을 생각은 없어. 말했잖아? 너희에게 동산을 준다고."
"그렇긴 했지만…. 그래서 그쪽이 얻는 이득은 뭐죠? 왜 이런 번거로운 일을 하는 건가요?"
"글쎄. 내가 운영하고 싶진 않고, 정기적으로 식량을 공급받고 싶어서? 건물 사두고 월세 받는 개념이라고 생각해."
상대방에게 믿음을 얻고 싶을 때는 합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알고 있다. 그래야 상대가 수상하게 생각하질 않지.
아무리 신용이 사라진 세상이라고 해도 지킬 건 지켜야 한다.
그래야 상대가 지키지 않았을 때 정당하게 사적 제재를 가하지.
"아. 그리고."
"네?"
내가 바라보고 말하자 지원이 깜짝 놀란 듯 대답한다.
내가 흔쾌히 허락한 데다가 코인까지 마음껏 가져가라고 해서 그런지 나를 대하는 태도는 상당히 부드러워졌다.
"동생 스킬은 뭐지?"
"동생도 투명화요."
"둘 다 첫 스킬을 투명화를 고른 건가?"
"네."
"현명하네. 직접 골랐어? 아니면 누가 알려줬어?"
"직접 골랐어요."
"그래. 아무튼, 웬만해선 동생도 데려와. 설마 미성년자라서 손에 피를 묻히게 하고 싶진 않다…. 뭐 그런 소리를 하고 싶은 건 아니지?"
"그게…. 네. 알겠어요."
"어차피 곧 스무 살이잖아? 이제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잖아? 그럼 이제 성인이 되는 건데 계속해서 동생의 뒷바라지를 할 건 아니잖아? 동생도 동생의 삶을 살아야지? 지금까진 미성년자라 그랬다 치더라도 말이지."
"맞아요…."
그렇게 말하긴 하지만 표정은 아니다.
하긴, 언니가 보기엔 동생은 언제나 어린아이일 뿐이겠지.
게다가 그런 동생을 사람을 죽이는 일에 끌어들인다는 것이 탐탁지는 않을 것이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생각한다 하더라도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언제까지 아이로 살 수 없는 거잖아. 지금 세상은 네버랜드가 아니다.
결국, 어른이 돼야 한다.
솔직히 지금 미성년자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들도 상당히 배부른 소리잖아?
미성년자는 죽음이 피해가나? 그런 게 아닌데 말이지.
"암튼. 그렇게 하도록 해. 다 같이 코인을 먹을 것. 그리고 지원이 너는 동생을 데려올 것. 아. 혹시 또 가족 있는 사람 있나?"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고,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없나? 그럼 뭐 됐고. 아. 동생 데려갈 때는 윤서랑 정현이도 데리고 가."
"네?"
"저요?"
"나도요?"
"너를 못 믿어서가 아냐. 안전을 위해서라고 생각해."
"근데, 저는 왜요? 저는 아무런 공격 스킬도 없는데…."
정현이가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에게 물어본다.
나는 그런 정현이를 보고 말했다.
"그 여자애나 너나 크게 다른 바가 없잖아? 둘 다 스킬은 투명화고 공격 스킬이 없지. 비슷한 처지니까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잘 이야기 해줘. 뭐 다들 투명으로 시작했으면 경험이야 비슷하긴 하겠지만."
"네…. 알았어요."
"그럼 갈 테니까 잘들 해봐. 사흘 뒤에 보자고."
아직 잘 가라는 인사를 들을 정도로 친한 사이는 아니기에 별다른 인사는 없었다.
뭐, 나도 그런 걸 기대하진 않았다. 그런 걸 받는 건 저들에게 확실한 보상을 안겨준 뒤다.
지금 그런 대접을 받기엔 조금 이르지.
어쨌든 이정도만 해도 솔직히 성공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당장 공격받지 않은 게 어디야. 물론 공격하는 낌새가 있었으면 바로 다 죽였을 테지만.
저들도 머리가 있고 생각이 있으면 멍청한 짓을 하진 않을 것이다.
뭐…. 내가 저 여자들을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전동 휠을 타고 투명화를 썼다.
이제는 컴퍼니 녀석들을 조지러 가야 할 시간.
녀석들이 모이는 것은 내일이라고 했지만, 미리 가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그러고 보니 장소랑 시간만 들었고 몇 명인지와 스킬 같은 게 뭐가 있는지를 못 들었네.
하. 날파리년. 그 씨발년. 왜 덤벼들어가지고….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으으. 생각만 했는데도 진저리가 처지네.
지워버리자. 이미 죽어버린 년을 뭐하러 계속 생각해.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아마 어느 여자에게든 매혹을 걸 때마다 그년 생각이 나겠지.
그때 그 광기에 절여진 눈. 절대 못 잊을 거다.
다른 생각을 하자. 뭐가 있을까.
그래. 동생. 지원이의 여동생.
투명화라고? 그건 참 다행이다. 이상한 생성 스킬이었으면 짜증 났을 거다. 그건 짐밖에 안 되니까.
어쨌든 투명화라는 좋은 선택을 했으니 충분히 기회를 줄 만하다.
어찌 됐든 살아야지. 빌어먹을 세상이라도 살아야 한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고 하잖아.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는 이상 살 만큼 살아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당장 전력으로 쓸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어찌 됐든 투명화는 유용하다.
극한의 카운터인 탐지만 없다면 뭘 하든 우위에 설 수 있는 스킬.
내가 기를 쓰고 내 여자들에게 투명화를 배우게 하려는 이유기도 하다.
그나저나…. 이쁘장했으면 좋겠네.
물류 센터의 자매들을 못 먹은 게 나름 아쉬웠는데.
인제 와서 그녀들을 뭐 어떻게 하기는 조금 늦었다.
아니, 이제는 자매뿐만 아니라 물류 센터의 여자들은 손대기가 쉽지 않다.
어장으로 만들었는데…. 독자적인 생태계가 되어버려서 손을 못 댄다니.
실패한 양식장이네. 제길.
괜찮다. 그래도 여러가지로 의미 있는 곳이니까. 괜히 망치는 것보단 그냥 놔두는 게 낫지.
어장을 만들려면 역시 아예 완전히 분리하는 게 좋아.
이번에 동산을 잘 정리한다면 확실하게 해야겠다. 역시 이런 짓도 할수록 느는 거지.
아울렛. 이제 아울렛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아울렛에 모인다는 컴퍼니 놈들은 남양주의 캐슬과 관련 있는 놈들이다.
결국, 이녀석들이 캐슬 공략의 열쇠가 된다는 소리.
정보를 최대한 얻어야 한다. 동산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캐슬도 그리 만만한 곳은 아닐 거 같다.
어쨌든 필요한 노하우는 다 배워서 나왔을 테니까.
근데 진짜 뭐 하는 놈들이지?
세상이 이렇게 된 건 고작 4년밖에 안 지났다. 햇수로 이제 5년이 된 시점.
겨우 그 기간 동안 이런 독자적인 시스템을 구축해서 그걸 수도권 주변에 분점까지 낸다니.
정말 대단한 놈들이 아닐 수 없다. 그 능력은 진짜 인정해줘야 한다.
동산. 아무리 봐도 거기 놈들이 알짜배기야.
이전에 사이비였다 그랬지? 아마 그 노하우는 거기서 나왔을 거다.
법과 도덕이 실존하던 시절에도 그런 것들을 만들어서 유지하던 놈들인데…. 오히려 놈들에겐 더 좋은 세상이 된 거다.
그동안 사회적 제약에 가로막혀서 할 수 없던 짓들을 마음껏 하는 셈이랄까?
그렇게 생각하면 4년은 충분하겠네. 놀라워 진짜.
그걸 어떻게 박살 내느냐가 관건인데.
분명 방법은 있을 거다. 덩치가 커질수록 빈틈은 많이 생길 수밖에 없다.
거길 운영하는 놈들이 어느 정도 능력을 갖췄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사람인 이상 빈틈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 빈틈을 어떻게 찌를 수 있느냐가 문제다.
체급 차이가 크면 이쪽이 빈틈을 암만 찔러도 저쪽에선 꿈쩍도 안 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내가 원하는 건 동산을 박살 내는 게 아니다.
그대로 유지하면서 대가리만 바꾸는 게 목표다.
사실 그냥 박살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것 같다.
지금부터 투명화 숙련을 열심히 해서 마스터 한다음에 눈보라나 메테오나 우뢰폭풍 같은 거 찍고 그냥 내다 꼽으면 끝이잖아.
그것들이 어느 정도 위력을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런 거창한 이름을 가졌다면 아쉬운 위력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하나 정도는 찍어보고 싶네. 언제쯤 찍어볼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전동 휠을 달린다.
캠프가 있는 곳에서 외곽순환도로를 타고 달리기만 하면 돼서 길은 참 쉽다.
적어도 길을 잃을 염려는 없잖아? 직진만 하면 되니까.
게다가 거리도 전동 휠로 한 시간 정도라 그리 멀진 않다.
투명화가 생겼으니 더 빠른 교통수단을 써도 될것 같은데…. 아무래도 내연기관을 쓰는 이동수단은 꺼려진단 말이지.
전기차. 전기차가 좋긴 한데. 문제는 이동의 제약이 조금 있다는 것?
무조건 차도로 다니기만 해야 하니까…. 역시 위험해도 오토바이 같은걸 타야 하나?
아…. 아니다. 비행이 있지? 비행을 배우는 게 낫지.
원할 때 언제든지 쓸 수 있고 전동 휠처럼 따로 챙기거나 할 필요도 없다.
갈 수 없는 곳도 없고…. 뭐 아무튼 다 좋다. 기동력을 생각하면 비행만큼 좋은 게 없지.
아니면 가속화라던가.
가속화도 한번 자세히 알아봐야 하는데.
세아가 투명화를 마스터하면 바로 배우게 해야겠다. 그래야 스킬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알 수 있지.
적어도 지금까지 봐온 바로는 스킬이 똥망은 아닐 거다.
배울만한 스킬이긴 하니까 후회는 안 하겠지.
잠깐…. 비행에 가속화를 배우면 어떻게 되지? 더 빨리 날 수 있나?
가속화가 비행에 적용이 되려나? 그럼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질 텐데?
궁금해지네…. 사람이 막 전투기 수준의 속도로 날게 되는 거 아닌가 몰라.
근데 그럼 괜찮은 거야? 몸이 막 공기에 찢기는 거 아냐?
히어로 영화처럼 슈트라도 입고 날아야 하나?
구리 IC에서 빠져나와 북부간선도로로 내려오니 아울렛 가는 길이라는 간판이 보이기 시작했다.
역시 이래서 유명한 곳이 좋아. 적어도 길 못 찾아서 헤맬 일은 없으니까.
문제는 이곳이 드럽게 크다는 거다.
정중앙에서 탐지를 써도 한 번에 다 안 들어올 정도로 큰 곳.
뭐…. 투명화도 있고 탐지도 있으니까.
숨어있다 보면 내일 알아서 이쪽으로 오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