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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통통통
아침.
굉장히 낯선 소리다.
이 소리는 마치 도마에 무언가를 놓고 칼로 자르는 소리 같은데.
이런 소리에 잠이 깨다니. 아직도 꿈인가? 꿈은 아닌데?
몸을 일으켜 세우고 몸 상태를 살폈다. 정말…. 더없이 깔끔하게 잠을 잤다.
정신도 맑고 몸도 개운하다. 이렇게 상쾌한 아침이라니…. 새로 태어난 기분이네.
고소한 냄새가 난다. 이건 밥 짓는 냄새.
홀린 듯 일어나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부엌에서 들리는 칼질 소리. 그곳으로 가니 미나가 파를 썰고 있었다.
헐렁한 면티에 짧은 반바지, 그리고 앞치마를 하고 있는 미나.
"일어났어요? 금방 준비되니까 먹고 나가요."
말없이 다가가 뒤에서 미나를 끌어안았다.
가느다란 허리. 자연스럽게 손이 가슴으로 올라간다.
면티 안으로 만져지는 맨가슴. 아. 좋다. 아침부터 이런 사치라니.
파 썰던 것을 멈추는 미나.
"저 칼 들고 있는데."
움찔하고 슬그머니 손을 뺐다. 그런 내 모습이 재밌는지 가볍게 웃은 미나는 다시 파를 썬다.
"자도 되는데 웬 아침이야."
머쓱한 표정으로 물어보자 미나가 대답한다.
"든든하게 먹고 가라고요. 해줄 수 있는 것도 없는데 이런 거라도 해줘야죠."
끓고 있는 냄비에 파를 넣는 미나. 그러더니 나를 보고 한마디를 더 한다.
"그리고…. 겸사겸사 잠깐이나마 독점하고."
그 말에 다시 미나를 끌어안았다. 슬며시 칼을 놓더니 몸을 돌려 내게 키스해주는 미나.
전기밥솥에서 나는 고소한 냄새와 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는 소리.
그것들이 가득한 부엌에서 나와 미나는 짧지만 깊은 키스를 나눴다.
"이제 씻고 와요. 거의 다 됐으니까."
고작 키스뿐인데 부끄러운 듯 몸을 돌리는 미나.
행복에 겨운 모습이다. 괜히 눈물이 나려고 하네.
"울어요?"
"아니…. 눈이 맵네. 양파 썰었나?"
"아…. 맞다. 네. 아까 양파 썰었죠. 하긴. 눈 매울 수도 있겠다."
나는 적당히 머리를 감고 나왔다.
밥과 고추장찌개, 통조림 햄과 달걀. 그리고 물류 센터에서 유정에게 받아온 밑반찬 두 개.
이렇게 차려 먹을 때면 매번 메뉴가 같을 수밖에 없다.
음식 재료는 한정적이고 이것보다 사치를 부리려면 고기라도 받아와야 하니까.
그래도 나는 맛있게 먹는다. 솔직히 매 끼니 이렇게 먹으라고 해도 잘 먹을 수 있다.
이런 식탁이면 진수성찬이지. 왜 매번 메뉴가 같냐고 투정 비슷한 거라도 한다면 그건 귀싸대기를 맞아도 할 말이 없다.
"다른 반찬들을 개발해야 하는데…. 매번 똑같은 식탁이라 미안해요."
내 앞에 앉아 내가 맛있게 먹고 있는 것을 구경하던 미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한다.
"무슨 그런 소리를. 그런 사치스러운 생각은 안 해."
밥을 잔뜩 떠서 입에 넣으며 말하자 빙긋 웃는 미나.
"고마워요."
"근데."
"네?"
"어젯밤. 안나에게 바람 넣은 게 너지?"
"헤헤. 들켰나요."
"끄응. 괜찮은 거야?"
모르겠다. 이런걸 물어보는 게 병신같을 수 있지만, 그래도 알고 싶다.
미나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랑하는 사람에게 다른 여자를 보내면서 좋은 밤을 보내게 하는 마음. 가늠이 안 된다.
아무리 굳게 마음을 먹어도 마음이 찢어질 것 같은데.
"그렇게…. 살기로 한 거니까요. 괜찮아요. 대신 그만큼 더 저한테도 사랑해줘요."
살포시 웃는 미나. 애써 밝은 척하지만, 그 웃음 뒤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씁쓸함은 완전히 지우질 못한다.
하아.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미나 말대로 부족함 없이 사랑해주는 수밖에.
그렇게 든든하게 아침을 다 먹고 밖에 나가기 위해 전투화를 신었다.
"조심히 다녀와요."
여전히 신혼부부 새댁 같은 느낌인 미나의 배웅을 받으며 벙커 밖으로 나왔다.
따듯한 아침을 먹고 나와서 그런지 겨울의 아침이 그다지 춥지가 않다.
몸에 활력이 넘치는 기분.
이 기세로 사람들을 아주 많이 죽여보자! 자! 힘내자!
뭔가…. 조금 이상한 거 같긴 하네. 뭐 어쩌겠어. 미친 세상인데.
내가 갈 곳은 캠프.
위치는 서울의 북쪽 경계 살짝 넘는 곳.
지금 벙커가 있는 곳에서는 수도권 외곽 순환 도로를 타면 갈 수 있다. 한 10킬로 정도만 가면 되겠네.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다. 망설일 필요 없으니 바로 출발했다.
차가 없는 한산한 4차선 도로를 전동 휠을 타고 달린다.
차를 가져올 걸 그랬나? 차 탔으면 정말 금방일 텐데.
아니다. 그냥 가자. 걸어가지 않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지.
길 자체는 그리 어려운 게 없어서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들이닥치기보단 정보를 먼저 얻어야 하니 조금 떨어진 곳 아파트 15층에 올라가 쌍안경을 들고 목표로 하는 곳을 살펴본다.
캠프는 워터파크가 있던 자리에 있다.
그때…. 누구였지 이름이? 아. 그래 현주. 그 여자가 말했던 곳.
얼마나 많은 인원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최소 열다섯이라고 하니 여기 하나만 털어도 나름 코인이 짭짤하겠지.
게다가 인원이 많으면 나도 나름 쓸 수 있는 전략이 많다.
일단 매혹을 풀로 쓸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공략이 수월해진다.
처음 여자를 어떻게 구하느냐가 문제인데.
워터파크의 부지는 상당히 컸다.
하지만 사람이 있을 만한 곳은 커다란 건물 한군데밖에 없기에 그리 어려울 것 같진 않다.
건물에 딱 붙으면 탐지 한 번에 건물 안에 있는 이들이 거의 다 잡힐 것 같은 정도.
저 안에 몇 명이나 있으려나? 그리 사람이 많아 보이진 않는데.
의아한 건 주변에 논밭이 없다는 거다.
어떻게든 자급자족을 해야 할 텐데? 저기 있는 놈들은 뭘 먹고 살지?
둘러보니 밭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저만큼 길러봐야 수확량이 얼마 안 될 것 같다.
비닐하우스가 잔뜩 있는 것도 아니고, 닭장이나 축사가 있는 것도 아니다.
뭐지? 여기서 안 보이는 뒤편에 있나? 그럴만한 곳은 없는데? 식량 조달하는 곳이 따로 멀리 있나?
뭐, 그거야 천천히 알아보면 되는 거고…. 저길 어떻게 들어가야 하나.
진입할 루트가 생각보다 없다. 경계를 삼엄하게 하는 것은 아니고 사방이 막혀있는 것도 아니지만 생각보다 까다롭다.
일단 앞은 큰 육 차선 도로. 그리고 그 옆은 중랑천이다. 너무 탁 트였다. 걸어가기엔 너무 눈에 띈다.
그리고 양옆은 주차장. 몸을 숨길 곳이 없다. 역시 너무 많이 노출된다.
결국, 뒷쪽의 산밖에 없다는 뜻인데.
산을 넘어서 가까이 가야 하네. 번거롭게.
워터파크였던 건물이니 입구가 한두 개만 있는 것도 아닐 테니까 건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 같다.
결국은 건물에 붙는 게 문제구나.
근데 대체 왜 저런 곳에서 사는 거지? 아무리 봐도 그리 좋은 지역이 아닌데.
당장이라도 가고 싶지만 일단 조금 더 살펴봤다.
사람이라도 나오면 일이 쉬워지니까. 조금이라도 힘을 빼고 들어가는 게 낫지. 여자가 있으면 더 좋고.
그렇게 한참을 보고 있는데 저 멀리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버스.
미니 버스가 한 대 다가오고 있었다. 뭐지? 웬 버스? 당연히 버스가 운행하는 것은 아닐 거고.
버스는 워터파크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거기에서 내리는 사람들.
하나, 둘, 셋…. 와우. 많이도 내리네. 열네 명이 내렸다.
먼저 내린 세 명이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을 한데 모아 건물 안으로 들어갔고 그중에서 두 명은 빠져서 다른 건물로 향했다.
뭐야….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저 버스는 뭐고 내린 사람들은 또 뭐야.
설마 안에 워터파크를 아직도 운영하는 건 아니겠지? 뭐…. 물도 전기도 무제한이니 돌리면 돌릴 수 있겠지만.
일단 세 명을 따라간 다른 사람들은 놀러 온 분위기는 아니었다.
다들 짐가방이나 캐리어 같은 것들을 들고 있는 것으로 봐선 마치 긴 여행을 가는 사람들처럼 보였으니까.
아…. 궁금하네. 뭘까? 역시 직접 가서 보는 게 가장 빠르겠지?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데 아까 사람들을 이끌고 갔던 세 명이 다시 돌아왔다. 그리고 다른 건물로 갔었던 한 명도 돌아왔다.
그러더니 다시 버스에 탔고, 버스는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왔던 방향으로 다시 가는 버스. 저기는 서울 쪽인데.
으음…. 서울쪽에서 사람들을 실어다가 데리고 온다고? 생각 나는 게 한 가지밖에 없다.
캐슬. 사람들을 모아서 스킬 없는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생활하게 해준다는 곳.
그런데 여기도 그런 곳이라고 하기엔 뭔가 안 맞는다.
일단 여기는 일할만한 곳이 없어 보이잖아? 적어도 여기는 캐슬 같은 곳이 아니라는 거다.
그럼 뭘까? 왜 사람들을 데리고 왔지? 그리고 저 사람들은 왜 저렇게 순순히 말을 따르는 거지?
역시 가봐야겠어.
일단 아무 여자라도 하나 잡아서 속 시원하게 물어봐야지.
아는 게 없으니까 답답해 디지겠네.
쌍안경을 배낭 안에 넣고 아파트 밑으로 내려갔다.
보자…. 뒷쪽의 산 쪽으로 진입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밑으로 조금 내려가서 다리로 중랑천을 건넌 뒤 철도차량기지를 가로질러야 한다.
그리고 그다음에야 산 쪽으로 올라갈 수 있다. 아오…. 씨발 드럽게 빙빙 도네.
그냥 밤을 틈타서 정면으로 갈까? 짜증 나네 진짜.
투명화가 있으면 당당하게 걸어 들어갈 텐데. 씨이이발. 아오. 이번만 참자. 어쩌겠어. 언제는 뭐 투명화 쓰고 다녔나.
걸어서 다리 쪽으로 갔다. 중랑천을 건너려면 이 근처에는 이 다리밖에 없다. 근데…. 이거 너무 탁 트였는데?
아니 뭐 가면 가겠는데…. 조금 꺼림칙하다. 심리적인 거부감. 이렇게 탁 트인 곳을 걸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한 짓이다. 게다가 아직 오전 10시밖에 안 됐는데 밤까지 기다리는 것도 우습고…. 골 때리네.
투명화의 필요성이 이렇게 절실할 줄이야. 하…. 어쩐다.
그래. 밤에 가자. 낮은 너무 환하다.
저기는 일단 밤에 가고, 이 근처를 돌아보자. 이 동네도 전형적인 베드타운인데 사람은 꽤 있겠지.
이 근처를 돌면서 사냥감을 찾다가 밤이 되면 가보자. 저기를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