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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Elf
상황이 깔끔하게 정리됐을 때의 안정감이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기분 좋은 일이야.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은.
탐지에 걸리는 기척은 딱 하나. 그 녀석도 나에게 제압당하여 쓰러져있다.
던전을 모두 클리어하고 마지막 보물상자를 앞둔 느낌. 과연, 뭐가 얼마나 나올까?
앞선 녀석들을 보니 그리 코인이 많을 것 같진 않다.
하지만 하나 기대되는 부분이 있었다. 저놈이 여자를 둘이나 데리고 있었다는 것.
여자들이 뱉어낸 코인과 외모를 보니 사냥에 나가는 여자들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결국, 저놈이 혼자서 여자 두 명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긴데…. 그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도 해봐서 안다. 입이 세 배로 늘어버리면 코인을 어느 정도 벌어야 하는지를.
그런 기대감에 아까 있었던 편의점으로 향한다.
이제 보물상자를 깔 시간. 과연 얼마나 대박이 나올까요? 두구두구두구.
콰작
마체테가 휘둘러지며 보물상자가 열렸다. 환한 빚을 내며 안에서 튀어나온 코인 주머니.
설레는 마음으로 빨려 들어오는 코인 주머니를 바라본다.
[89,523 코인을 획득했습니다.]
오오오. 좋아 좋아. 초대박은 아니더라도 이 정도면 대박이다.
포션이 몇 개야. 땡잡았네.
이런 녀석들을 잡은 다음에는 항상 드는 생각이 있다.
내가 죽으면 나를 죽인 놈도 이런 생각을 할까? 하겠지. 이 정도겠냐. 코인이 70만이 넘는데.
게다가 승희나 미나, 세아, 안나와 있을 때 죽어버리면 그건 죽어서도 곱게 못 있을 것 같다.
내 여자들이다.
만약 내가 그녀들의 눈앞에서 죽고 남은 그녀들이 노리개가 되는 꼴을 본다면 이 세계를 이렇게 만든 놈 모가지를 따서라도 다시 돌아올 거다.
물론 그렇게 안 되게 해야겠지만.
어쨌든 이 던전 같은 곳을 무사히 마무리 지었다.
이제 진짜 목적인 사전을 찾으러 가야지.
근데…. 지하는 어떻게 가지?
다시 2층으로 올라가 한참을 헤맸다. 젠장. 이럴 거면 하나 정도는 남겨둘걸.
여자들을 괜히 죽였나? 묶여있기라도 했거나 강제로 잡혀있는 티만 났어도 그렇게 죽이지는 않았을 텐데.
됐어. 이미 죽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하는 게 아니다.
그런 걸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다. 내가 죽인 사람이 한두 명이어야지.
결국,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찾았다. 다른 계단은 다 막아두고 이 계단만 남겨 놓은 거 보면 이게 유일한 통로일 것 같다.
지하 1층에 가니 약간 퀴퀴한 냄새가 난다. 곰팡이 냄새? 그런 느낌인데.
그런 사소한 것들에는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나는 내가 챙기고자 하는 것들만 챙기면 되잖아.
서점. 역시 크다. 예전에 왔을 때보다 더 커진 기분이야. 아무도 없이 나만 있어서 그런가?
이 정도면 사전 정도는 있을 것 같아.
외국어 푯말이 있는 쪽으로 가서 책을 살핀다. 대부분이 영어 관련이다. 영어…. 어휴 지겨워.
구석에서 제2외국어 관련 코너를 찾았다. 러시아…. 러시아…. 여깄다. 그래. 이 좇같은 문자.
키릴 문자라고 하던가? 나는 이걸 아무리 봐도 모르겠다.
어떻게 쓰는지, 어떻게 읽는지. 이게 정말 문자의 기능을 하는지.
하겠지. 하니까 그 많은 러시아와 동유럽 국가들이 쓰겠지. 그래도 나는 이거 배울 자신이 없다.
내가 이걸 배우느니 안나에게 한국어를 더 정성껏 가르치겠어.
러한사전을 찾았다. 그리고 한러사전도 찾았다. 나이스. 됐어. 이 정도면 목적 달성이지.
그리고 그 근처에서 러시아어로 된 한글 공부 책도 찾았다. 이거라면 안나가 쉽게 익힐 수 있겠지?
아동용인 거 같은데…. 안나의 한국어 수준은 애들이랑 마찬가지니 도움이 되겠지.
그렇게 좋아 보이는 책들을 잔뜩 주웠다. 문제는 책이라서 무게가 제법 나간다.
사전 두 개만 해도 그리 가벼운 무게는 아닌데…. 책이란 건 원래 부피가 무거운 법이니까 어쩔 수 없지.
배낭에 꼭꼭 쑤셔 넣고 둘러메자 몸이 뒤로 약간 휘청이는 게 느껴진다.
괜찮겠지? 전동 휠 타는 데는 문제 없겠지?
됐어. 이 정도면 훌륭해. 이제 돌아가자. 시간은? 9시 20분…. 지금이면 다 일어나서 아침도 먹었겠네.
돌아가자. 힘들다. 가서 좀 자야겠어.
밤을 새우는 건 일도 아니지만, 아까 감전 된 거랑 분노 상태로 있던 게 너무 심적 낭비가 컸다.
빨리 가서 뜨듯한 물로 씻고 바로 자고 싶다.
기왕이면 아무나 끌어안고 자고 싶지만…. 그건 힘들겠지. 쩝.
겨울의 햇살을 받으며 벙커로 돌아간다.
두 가지 마음이 안쪽에서 서로 싸운다. 사냥감아 더 나타나라 파와 이대로 나타나지마 파.
누구의 편을 들어주고 싶진 않다. 나타나면 잡아 죽이면 되고 없으면 편하게 집에 가면 되지.
그 승리는 이대로 나타나지마 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벙커 근처에 올 때까지 아무런 기척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전동 휠을 집안에 넣고 충전시키고 벙커문을 열었다.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 후. 좋다. 사람의 냄새, 사람 사는 냄새.
"왔어요!?"
"늦었잖아!"
"걱정했잖아요! 그렇게 밤에 내보내는 게 아니었는데…."
크게 걱정하지 않은 듯한 승희와 오히려 타박하는 세아. 그리고 한껏 걱정한 표정의 미나.
그리고 그 뒤에서 나를 보고 아무 말도 않고 그저 해맑게 웃고 있는 안나.
다들 참…. 각자 특색이 있다. 살면서 절대 심심하지는 않겠어.
"근데…. 모습이 왜 그래요? 괜찮은 거예요?"
미나가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을 살핀다.
"아. 약간의 트러블이 있어서."
감전 때문에 몰골이 조금 이상하긴 할 거다. 아무리 포션을 먹었다고 해도 말이지.
"세상에. 상처도 있네. 괜찮은 거 맞죠?“
”회복 포션 먹었어. 괜찮아.“
너무 걱정하는 미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리고 배낭에서 챙겨온 책들을 하나씩 꺼내서 내놨다.
옹기종기 모여서 그것들을 살피는 여자들.
특히 안나는 익숙한 문자가 보이니 굉장히 기뻐한다. 신나는지 뭐라고 계속 러시아 말을 하는 안나.
다들 아무도 못 알아듣지만, 그래도 그녀가 어떤 기분인지는 느낄 수 있나 보다. 그런 안나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여자들.
"나는 좀 씻고 잘게. 안나 좀 부탁해."
"그래요. 빨리 쉬어요."
"고생했어요. 좀 자요."
미나와 승희가 내 양쪽에 와서 토닥여준다. 캬. 이거 괜찮네. 분수에 넘치는 대접을 받는 느낌이야.
"뭐 안 먹어도 돼요? 배고플 텐데."
"일단 잠부터. 일어나서 먹지 뭐."
먹을 것을 항상 챙겨주려는 미나는 정말 아내 같은 느낌이다. 남을 배려하고 걱정하는 마음이 큰 거겠지.
성정이 착한 여자. 꼼꼼하고 세심한 여자.
따듯한 물로 개운하게 씻고 방에 들어와 누웠다.
아…. 이제야 살 것 같다. 이러고 수면 스킬 없이 스르륵 잠들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무리겠지.
그렇게 나에게 수면 스킬을 쓰려는데 조용히 문이 열리고 세아가 들어왔다.
"왜?"
별다른 말 없이 누워있는 내 옆으로 다가오더니 눕는다.
"뭐야?"
"고생했다고."
"아까 하지. 왜 인제 와서."
"시끄러워. 빨리 자기나 해요."
"근데 너는 왜 누워?"
"아, 잘 때까지 옆에 있어 주려고 왔어. 그러니까 빨리 자요."
"나 불면증이라 수면 스킬 쓰고 잘 건데."
"아…. 맞다. 젠장."
그러더니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그대로 침대를 내려가려고 한다.
나는 그런 세아를 잡아서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익…. 뭐 하는 거예요."
큰소리는 못 내고 조용히 나에게 화내는 세아.
화낸다기보단…. 화내는 척? 뭐 그렇게 보인다.
"기왕 왔으니까 잠깐만 이러고 있자."
누운 상태에서 세아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별다른 저항 없이 순순히 안겨있는 세아.
손이 슬쩍 옷 안으로 들어가 가슴으로 향하니 세아가 내 손등을 친다.
"빼요."
"싫은데? 좀 이러고 있자."
더는 거부하지 않는 세아. 아휴. 귀여운 자식. 꼭 이렇게 한 번씩 튕긴다니까.
아담한 몸과 따듯한 온기, 그리고 손에 느껴지는 가슴의 감촉.
행복하다. 이런 게 행복이지. 뭘 더 바라겠어.
"그만 만지고 빨리 자요. 나갈 거니까."
세아가 스르륵 몸을 일으킨다. 나도 이대로 있다간 몇 시간이고 가슴만 만지고 있을 것 같아 세아를 놔줬다.
게다가 더 만지다 보면 가슴에서 끝낼 자신이 없다. 안 그래도 지금 불끈불끈 한 상태인데.
"자요."
문을 닫는 세아. 벙커는 지하라서 조명이 꺼지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변한다.
나는 그런 어둠 속에서 피식하고 한번 웃고는 수면 스킬을 썼다.
그렇게 닷새가 지났다.
내가 겨울밤 바람을 뚫고 사전을 가져온 덕분에 안나와의 소통은 상당히 개선됐다.
문장으로 능숙하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몇 개의 단어면 의사소통은 할 수 있으니까.
물론, 서로 사전을 찾아가면서 대화해야 하기에 빠르게 대화는 안 됐지만, 아예 대화가 안 되는 것보단 이십삼만 배 정도는 낫다.
승희와 미나, 세아는 안나와 대화 하는 것에 대해 상당히 열정적이었다.
거리감을 두고 서먹하게 지내면 어떻게 하나 내심 걱정했는데, 그럴 걱정은 안 해도 될것 같다.
그리고 안나도 그런 세 명과 허물없이 대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고.
가족의 화목함을 지켜보는 가장의 느낌으로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으면 속으로 흐뭇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이 여자들이 다 내 여자들이라는 생각을 하면 쥬지에 힘이 들어갔다.
이 무슨 행복에 겨운 광경인지. 가슴이 웅장해지는 느낌.
다만, 문제는 안나가 온 이후로 섹스를 못 하고 있다.
다들 아무래도 자제하는 느낌이다. 쫄보인 나는 괜히 눈치 보느라 차마 말도 못 꺼내고 있다.
어쩌겠어. 여자들 사이에서 살려면 눈치는 챙겨야지.
문제는 이 여자들…. 자꾸 브라를 안 입는다.
그러기로 담합한 거야? 아니 물론 눈은 즐겁긴 하다만…. 새로운 종류의 고문인가 보다.
매력적인 여자들이 아무리 위에 옷을 입었다고 해도 노브라인 상태로 돌아다니는 걸 보고 있는 건 혈기 왕성한 남자에겐 고문이나 다름없잖아.
게다가 안나도 그런 운동에 동참했는지 노브라로 다닌다.
하…. 씨 돌겠네. 차라리 밖에 나가고 말지.
우리는 다소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점심까지는 각자 자유시간을 보낸다.
늦잠을 자든 취미 생활을 하든 서로 신경을 쓰지 않는 자유시간.
그리고 점심을 먹은 뒤 안나의 한글 공부를 가르친다. 더디긴 하지만 본인의 열의가 대단해서 착실하게 한국어 실력이 늘어나고 있다.
혼자서 가르쳤다면 쉽게 지쳤겠지만, 선생이 셋이나 있으니 다들 지치지 않고 돌아가면서 각자의 방식대로 가르친다.
그래서 안나가 배우는 게 빠를지도.
저녁을 먹으면 모여서 스킬 숙련을 한다.
아침이나 낮에 해버리면 다들 물약 후유증으로 제정신이 아니기에 일부러 밤에 하기로 했다.
그래야 바로 잠들 수 있으니까.
이건 여자들의 일정이고, 나는 그녀들과 일정이 조금 다르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무조건 밖으로 나갔다. 코인 벌이를 위해서.
아침에 나가서 저녁 먹기 전에는 들어온다. 그래야 스킬 숙련을 다 같이 할 수 있으니까.
내가 없으면 스킬 숙련을 할 수가 없다. 엊그제는 내가 사냥하느라 늦게 와서 스킬 숙련을 못 했다.
닷새 동안 얻은 코인은 7만 정도.
소비되는 거에 비하면 턱도 없이 모자라다. 큰일이네. 이러다간 시간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아.
기왕이면 컴퍼니 놈들이 모이는 곳에 가기 전에 투명화를 얻고 싶다.
아무래도 강한 녀석들이 잔뜩 있을 텐데 맨몸으로 노출하고 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차라리 안 가는 게 나을 정도.
뭔가 조치를 취하긴 해야겠다. 일정을 조금 변경해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