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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Elf
"헉."
"으헉…."
안나를 처음 본 승희와 미나의 반응이다.
뭐…. 저러는게 이해가 간다. 안나의 외모는 조금 현실성이 없다.
아마 외국인이라서 더 그런 거 같다. 한국 사람이라면 이쁘다고 하더라도 '와….' 이정도로 감탄하고 끝났을 텐데.
안나는 아예 다른 종류의 아름다움이잖아. 그래. 익숙하지 않은 아름다움.
이미 안나를 본 세아는 승희나 미나처럼 놀라지는 않았지만, 약간 불안해하는 눈치다.
설마 안나 때문에 자신의 입지가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나?
그 정도로 속이 좁은 여자는 아닌데…. 근데 뭐라고 자꾸 중얼거리는 거야?
"어…. 안녕하세요가 저기 말로 뭐지…? 아오씨. 영어도 잘 모르는데 무슨 러시아야. 어…. 으으. 전혀 모르겠다."
내가 옆에 오는지도 모르고 혼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세아.
"뭐라는 거야?"
"으아악! 깜짝이야!"
세아가 소리 지르자 다들 그녀를 바라본다.
시선이 모이자 잔뜩 부끄러워하는 세아.
아이고. 누가 안 귀엽다고 할까 봐 저러는 거야? 나 참. 오해한 내가 바보 멍청이 같네.
"자. 일단 앉자. 어…. 싯다운. 아. 이건 영어지. 미치겠네."
다들 앉으면서 안나에게 손동작으로 앉으라고 하니 안나도 파카를 벗으며 눈치껏 앉는다.
파카를 벗자 드러나는 몸매. 승희와 미나는 계속해서 힐끔힐끔 안나를 바라본다.
아이고. 그냥 당당하게 보던가. 나처럼. 그게 뭐냐? 으휴.
"자. 소개할게. 여기는 승희."
"아…. 안녕하세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안나.
"이름. 이름이 승희라고. 승희. 네임."
"아! 씅히?"
"어…. 비슷하긴 한데. 승희. 승. 희."
"씅. 히."
"무리겠지?"
"네…. 저걸로 만족할게요."
자신의 이름이 발음하기 어려운 걸 인정하는 승희는 졸지에 씅히가 되었다.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고 그저 천진난만한 안나. 그녀는 이 상황이 즐거운가 보다.
"이쪽은 미나."
"반가워요."
"미나! !%#@$&$&@$& 미나."
당연히 뒷말은 못 알아들었다. 다만 나름 좋다고 자부하는 눈치로 예상해보건대 대충 '쉬운 이름이다'라는 뜻인 거 같다.
아님 말고.
"이쪽은 세아."
"세아! !%#@$&$&@$& 세아. @%&^%. 씅히, 미나, 세아."
"오. 맞아. 승희. 미나. 세아. 그리고 나는 성철."
"썽철."
"그래. 썽철. 러시아 말은 그냥 시옷 발음을 못하나 봐. 아니면 우리가 잘못 말하고 있나?"
내 말에 다들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 말도 못 한다.
뭐 다들 아는 게 있어야 대답을 하겠지.
“그리고 여기는 안나. 러시아 말을 쓰지만 어느나라 사람인지는 정확하게 모르겠어.”
서로 꾸벅 인사를 하는 여자들. 그렇게 이름을 소개하고 인사를 했지만, 그걸로 끝이다.
더는 할 말도 할것도 없다. 하고 싶어도 의사소통을 할 자신이 없어.
아오…. 일찍 데려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게 무슨 고생이야. 딱 반년만 더 뒀어도…. 이게 다 승규 그 사람 때문이야.
"어. 아오. 답답해. 나이가 몇이지? 이거 어떻게 물어봐야 하냐. 갑갑하다 정말."
잠깐 나는 머리를 쥐어짜다가 종이와 펜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25라고 적은 종이를 나에게, 22라고 적힌 종이를 미나에게, 승희와 세아에겐 각각 21과 20을 적어서 줬다.
"나이. 오케이?"
"아! 나이. 나이."
그러더니 나에게 종이와 펜을 가져가서 23이라고 적었다.
"스물셋. 오케이. 스물셋. 아니. 이러면 몰라 듣나? 이십삼. 아. 이것도 모르겠네. 트웬티 쓰리. 아오. 이건 영어잖아."
아주 나 혼자 모노드라마를 찍고 앉아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모습을 보며 웃는 안나.
승희와 미나, 세아는 대체 어느 부분이 웃긴 것인지 몰라서 어리둥절 하는 모습이다.
어떻게 나이까진 알았지만, 이젠 진짜 정말로 할 말이 없다.
나만 그런 게 아니고 다들 마찬가지라 꿀 먹은 벙어리가 돼 있는 상황.
판타지 세상에서 공용어를 모르는 엘프를 만났을 때 이런 느낌일까?
북방에서 살고 있는 금발 머리의 엘프.
그리고 그런 엘프를 바라보며 답답해하는 힐러 승희, 힐러 미나, 씨프 세아. 나는? 뭐가 있지? 마법사?
암튼, 어쩔 수 없이 이제 국제공용어를 쓸 때다.
안나를 비어있는 작은 방에 안내해주고 안나의 방이라고 열심히 손짓 발짓을 해서 결국 이해시켰다.
본인도 상당히 답답할 테지만, 그래도 나름 열심히 우리와 소통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그나마 다행이야. 안나가 좀 조용한 성격이거나 침울해져 있는 상태였으면 지금 보다 배는 더 힘들었겠지.
제법 늦은 시간까지 벙커 내부를 구경시켜주고 열심히 노력한 끝에 몇 개의 단어를 알려줄 수 있었다.
화장실, 부엌이라던가 밥, 잠, 그런 간단한 단어들.
합법적으로 잠을 자도 되는 시간이 되자 안나에게 자라고 하고 방으로 들여보낼 수 있었다.
안나가 들어가자 넷 다 소리는 내지 않고 큰 한숨을 내쉰다.
"으아…."
"답답해."
"어쩌죠? 계속 이래야 해요?"
승희, 세아, 미나가 각각 조용히 한마디씩 한다. 나라고 뭐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 빌어먹을 러시아. 어떻게 이렇게 아예 듣도 보도 못한 언어로 말하냐….
"번역기라도 되면 좋겠다만."
"아! 스마트폰 어플!"
"이미 해봤어. 러시아어는 인터넷이 연결돼야 하더라. 근데 지금은 인터넷이 안 되잖아? 우린 안될 거야 아마."
"으으…. 뭐 받아온 건 없어요?"
"어…. 애들용 한글 단어 카드?"
"일단 그거라도 줘봐요."
승희의 닦달에 나는 유정에게 받은 물건을 건네줬다.
안을 살펴본 승희는 뭔가 크게 도움이 되는 물건이 없자 실망하고는 마지못해 단어 카드라도 만지작거렸다.
그림이 그려져 있는 단어 카드라서 손으로 짚으면 뭔지 뜻은 알 수 있는 카드.
일단 저걸로라도 가능한 대화를 해야겠네.
"아!"
갑자기 탄성을 지르는 미나.
"왜?"
"영한사전! 아니, 러시아어니까 러한사전!?"
"인터넷 안되니까 그것도 없죠."
세아의 힘 빠진 목소리. 하지만 나는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책?"
"네. 책으로 된 러한사전! 책방이든 어디든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네! 와…. 미나 완전 똑똑해! 대박!"
나는 미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하지만 승희와 세아가 싸늘한 눈초리로 바라보기에 스르르 안고 있던 손을 풀었다.
"암튼…. 날 밝으면 바로 가지러 가봐야겠네."
"지금 가요."
"어? 지금?"
세아의 말에 나는 약간 당황하며 되물었다.
"네. 안나 일어나기 전에 다녀와요. 일어났는데 서로 아무 대화 못 하고 있으면 답답해서 죽을지도 몰라."
"어…. 그러네. 그래. 그럼 지금 다녀올게. 그래. 그게 낫겠다."
승희와 미나도 별로 말리는 분위기가 아니다. 이거 꼼짝없이 나가야 할 판.
뭐, 나도 차라리 그게 속 편하다.
아까처럼 보디랭귀지로 또 쑈를 하느니 사전을 펼쳐놓고 서로 뜨문뜨문 단어로 대화를 하는 게 낫지.
"그럼 다녀올게. 오래 걸릴지도 모르니 피곤하면 먼저 자."
"네. 다녀와요."
"조심히 다녀와! 꼭 가지고 돌아와야 해!"
"몸조심해요!"
세 여자의 열렬한 전송을 받으며 나는 나갈 준비를 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스킬 연습해야 하는데…. 졸지에 이 밤중에 사전을 찾아 모험을 떠나게 생겼다.
아니지. 겸사겸사라고 생각하자. 어차피 나가게 되면 사람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코인 벌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러한사전이 얼마나 흔한지 모르기에 일단 전동 휠을 탔다.
이 동네 책방에 있으면 좋겠는데, 아니 책방이 있으면 좋겠는데. 요즘엔 동네 책방을 찾는 것도 힘들다.
그렇기에 차라리 서울로 들어갈 생각이다. 모르는 곳에서 찾아 헤매느니 서울에 있는 커다란 서점을 가는 게 확실하니까.
대형 서점이면 적어도 있겠지. 아무리 종이로 된 사전이 인터넷에 밀려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을 수는 없으니까.
근데…. 대형 서점이 어딨지?
생각을 해보자. 분명 아는 데가 있었는데…. 서울 동쪽에 어딘가 있었는데…. 어디였지?
언제 갔었더라…. 거기가…. 아! 그래 상봉.
그래. 거기 대형 서점 하나 있다. 기억났어.
일단 그쪽으로 향해 간다. 상봉이면 여기서 30분이면 갈 수 있을 거다.
엄한 데서 헤매느니 확실하게 있을 법한 곳으로 가자. 차라리 그게 시간이 절약될 거야.
전동 휠을 타고 겨울밤 바람을 가르며 달려간다.
물론, 10분쯤 지나자 밖에 나온 것 자체를 끔찍하게 후회했지만, 어쩔 수 없다.
밤에 차를 타고 나올 수도 없으니까. 참자. 이게 최선이야.
탐지를 돌린다.
아무 기척도 잡히지 않는 평온한 밤거리.
지금은 그리 번화한 곳이 아니니 기척이 안 잡히는 게 당연하다. 이런 곳에는 머무르는 이점이 하나도 없다.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모이거나, 아니면 아예 자생하기 위해 흩어지거나.
지금 어중간하게 남아있는 녀석들은 아직 행보를 확실하게 정하지 못한 녀석들.
그런 녀석들이 다 멸종되기 전에 잡아먹어야 한다.
코인은 두면 둘수록 사라질 수밖에 없으니까.
음식으로 소모되고 스킬 비용으로 사라지고 어딘가 객사해서 방치되고…. 아무튼 더는 늘어날 수 없다.
지구 인구가 몇이었지? 70억?
그럼 코인은 3조5,000억이다. 매우 많은 숫자지만 오히려 엄청 적다고 볼 수 있다.
지난 4년 동안 사람들이 먹어대면서 없앤 코인도 엄청날 텐데, 게다가 저건 전 세계 기준이다.
저 중에 반은 중국이랑 인도고 또 나머지는 미국 유럽 아프리카 같은 곳이 많을 거고….
대한민국은 남한만 친다면 5천만 명, 코인이라고 해봐야 250억밖에 안된다.
그중 얼마나 사라졌을까? 남은 코인은 얼마나 될까?
신규 유입이 없으니 더는 늘어날 수 없는 재화.
그리고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자연 소비가 준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꾸준하게 감소할 것이다.
결국, 나중에는 스킬을 마스터 해도 배울 코인이 없어서 못 배우는 상황이 올 수 있다.
흩어져서 숨어있으면 찾기가 어려우니까. 결국은 그렇게 되기 전에 미리 잔뜩 모아놔야 한다.
그것도 죽지 않고.
그런 잡생각을 하면서 10분을 더 달렸다.
슬슬 아파트 단지가 보인다. 저기는 태릉인가? 맞네.
저기를 지나면 서울이다. 과연 얼마나 사람이 있을까?
기왕이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밖에.
아니면 침투할 수 있는 곳이라던가.
아파트 같은데 처박혀 있으면 지금은 잡을 방법이 없다. 세아가 있으면 모를까.
이 계절 이 시간에 밖에 나다니는 놈들은 거의 없겠지.
결국, 대형 서점 근처까지 왔지만, 사람의 기척은 없었다.
끄응. 싱겁네. 진짜 이정도로 없을 줄이야.
남양주랑 가까워서 그런가? 여기도 컴퍼니 그 새끼들이 한번 죄 털었나?
귀찮은 놈들이야. 빨리 죽여야 하는데.
그놈들은 코인도 많이 있겠지? 스킬 배우려면 모아야 하니까?
암튼 그 녀석들은 나중에 생각하고 서점을 찾자.
여기 어디였는데…. 아. 이쪽인가 보다. 와본 기억이 난다.
기깔나게 생긴 아파트. 그리고 그 앞에 있는 커다란 상가 건물.
그렇게 건물로 다가가는데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