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78화 (178/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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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ter Elf

쫓겨나듯 벙커에서 나왔다.

조금 늦은 거 같은데 내일 가겠다는 말을 했다가 세아에게 발길질 당할 뻔하고 헐레벌떡 밖으로 나왔다.

하…. 춥다. 싸늘한 공기.

정말 이제야 흡연자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지금이 딱 담배를 빼 물 시간이구나.

비흡연자인 나도 알겠네.

저렇게 순순히 허락해 줄지는 몰랐는데. 나는 참 복 많은 놈인가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넙죽넙죽 받아주다니.

분명해. 나는 전생에 거북선 조타수 정도 됐을 거 같아.

날이 어두워지고 있다. 해가 지고 있으니 차를 쓰기가 힘들다.

너무 어두워지면 헤드라이트를 키 고와야 하는데…. 아무리 사람이 없더라도 그렇게 요란하게 다니고 싶진 않으니까.

자동차 엔진음에 헤드라이트라니. 주변에 있는 인간들에게 나 여기 있다고 광고하는 꼴이잖아.

추워도 어쩔 수 없다. 전투 능력이 없는 안나까지 데리고 위험한 짓을 할 수는 없지.

솔직히 아까 날파리녀를 보지 않았다면 그냥 배 째라 하고 차를 끌고 갔을지도 모르겠는데…. 안 되겠다. 너무 위험해.

터덜터덜 걸어서 물류센터에 도착하자 해가 진지 한참 됐다.

뭐가 이렇게 빨리 지냐. 하긴 슬슬 동지가 가까워지니 밤이 가장 길어질 때가 돼가고 있긴 하구나.

"어? 이 시간엔 웬일로요? 아까 왔다 갔던 거 아니에요?"

입구에서 경계를 서고 있는 금속화. 어…. 그러니까 그래! 민준이.

"응. 놓고 간 게 있어서."

"승규형 불러드려요?"

"아냐. 내가 갈게. 어디에 있어?"

"잠시만요."

무전기를 들고 승규의 위치를 물어보는 민준.

금방 대답을 듣더니 나에게 말한다.

"식당에 있대요. 가보세요."

"그래."

안으로 들어가 식당으로 향한다. 슬슬 저녁을 먹은 건가? 식당 쪽으로 가니 맛있는 냄새가 난다.

사람 사는 냄새. 정겨운 저녁 식탁 냄새. 뭔가 아련하고 그리운 냄새다.

나 참. 고작 냄새 하나로 사람이 이렇게 감성적이 되네.

식당 문을 여니 습한 공기가 확 느껴진다.

식탁에 앉아있는 승규, 그 품에 안겨있는 하율이. 그리고 맞은편에 앉아있는 안나.

"자주 보게 된다?"

승규의 인사. 그리고 또 나를 보며 환하게 미소지으며 반가워하는 안나.

하하. 정말. 웃기만 했는데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라니.

"뭐해요?"

"뭐하긴. 한글 공부하지. 하율이랑 안나랑."

보니까 낱말 카드 같은 걸로 둘이 공부하고 있었나 보다.

한글 실력은 거의 막상막하겠네. 말은 하율이가 더 잘할지도?

"아까 다녀가더니 왜 또 왔어?"

나에게 물어보는 승규. 나는 그런 승규 옆에 앉으며 말했다.

"안나 데려가려고요."

"뭐? 바로?"

"네."

"와. 정말 일 처리 속도 하나는 기가 막히구나."

"어차피 데려갈 거면 빨리 데려가야죠. 뭐, 아직 당사자에게 허락도 안 받았지만."

"아…. 그런가? 이미 알고 있지 싶은데?"

"네?"

"유정이가 말했을걸? 모르겠네. 잠시만. 불러볼게. 여보!"

승규가 식당 안쪽 주방으로 소리치자 '응!?' 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러더니 주방에서 유정이 나오면서 나를 보고 놀란다.

"어? 왔어요? 그래서 불렀구나?"

그리고 주방 안쪽에서 '안녕하세요!' 라며 인사하는 소리가 들린다.

안쪽을 보니 여자들 몇명이 더 있었다.

서현이랑, 현정이랑, 자매도 있네. 이번에 내가 구해준 여자들도 있고.

아…. 이러면 다 있는 거 아냐? 아. 지연이랑 미래가 없네. 처음에 구해준 여자애들도 없고.

"아까 다녀가더니. 뭐 놓고 간 거 있어요? 밥은 먹었어요? 우린 이제 막 다 먹고 치웠는데. 차려줄까요?"

안나의 옆에 앉으며 말하는 유정. 나와 승규를 바라보더니 뭔가 낌새가 이상한지 바로 물어본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안나 데려가겠데."

"아…. 그래요? 근데…. 지금?"

"네. 바로 데려가려고요."

"아니, 이렇게 갑작스럽게?"

"그렇게 됐어요."

약간 섭섭한 듯한 유정. 그러더니 안나를 향해 바로 통역해준다.

이야기를 다 듣더니 다시 나를 보고 환하게 웃는 안나. 그러면서 뭐라고뭐라고 말한다.

역시 러시아어는 어렵구나. 뭐라고 하는지 아예 짐작도 안 되네.

"너무 기쁘데요. 바로 준비하냐고 물어보는데요?"

"이미 이야기를 해놓은 거예요?"

"네? 아. 네. 근데 내가 말한 게 아니고 안나가 원한 거였어요. 그리고 성철 씨도 언젠간 데려갈 거 같기도 했고."

내가 그런 낌새를 보였었나? 여자들의 감인가? 모르겠네.

"안나가요? 음…. 형수님?"

"네?"

"제가 하는 말 좀 전달해 주시겠어요? 어…. 좋게 순화할 필요 없이 그대로."

"무슨 말을 하려고…. 알겠어요. 말해봐요."

이러면 내 사정을 승규와 유정도 알게 되지만, 뭐…. 어떠냐. 이들이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어도 상관없겠지.

물론 유정은 나를 조금 경멸할지도 모르겠다. 여자 여럿이랑 사는 남자에게 안나를 내주고 싶지 않을 수도 있겠네.

이런 생각을 전혀 못 했구나. 정말…. 나란 놈은 매번 강박증을 앓는 것처럼 완벽하게 일 처리를 하려고 하면서도 뒤돌아보면 항상 구멍이 숭숭 나 있다.

지금까지 살아온 건 정말 기적이라고 밖에 생각이 안 든다.

"저는 지금 세 명의 여자들과 살고 있고, 그런 곳에 안나를 데려가려고 해요. 제가 안나를 구해줬다고 하지만 저는 그렇게 좋은 놈도 아니고 상당히 나쁜 놈이죠. 사람 죽이는 것을 밥 먹듯이 하는 놈이에요. 그런데도 같이 갈 생각이 있냐고 물어봐 주세요. 안나가 싫다고 하면 여기에 있는 게 훨씬 나을테니."

내 이야기를 들은 유정은 잠시 말이 없었다. 말을 고르는 건가? 아니면 내 사적인 이야기에 실망한 건가?

모르겠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이 별로 기쁘지만은 않다.

어떤 여자가 나 같은 놈이랑 가려고 하겠어? 나는 왜 내가 데려가면 넙죽 갈 거라고 생각을 했을까?

빠르게 러시아어로 안나에게 말을 해주는 유정.

신기하다. 어떻게 저렇게 러시아 말을 잘하지? 똑같은 입에서 나오는 말인데 전혀 못 알아듣겠다.

이야기를 다 들은 안나는 잠시 멈칫하더니 뭔가를 막 물어본다.

표정이 별로 좋지 않다. 역시 그런 걸 반기는 여자가 있을 리가 없지.

"자기는 한국어를 전혀 못 하는데 거기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는데요?"

"어? 그게 다예요?"

"네?"

"아니…. 질문이 그게 다냐고요. 같이 사는 여자들에 대해서나 제가 좋은 놈이 아니거나 그런 거에 대해선 아무런 질문이 없어요?"

"네…. 러시아어에 대한 질문뿐인데요? 잠시만요. 방금 한 말 전달해 줄게요."

유정의 말을 전부 들은 안나가 나를 똑바로 바라본다.

그리고 천천히 나에게 말했다.

"Ты хороший человек. 당신 좋은 사람."

"어? 방금 앞에는 뭐라고 한 거예요?"

"같은 말이에요. '당신은 좋은 사람'이라고 말했어요."

"하아."

정상인 사람이 없다. 그래. 안나도 제정신이 아니다. 어떻게 단지 구해줬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람을 맹목적으로 따르냐고.

"미치겠네. 아니 무슨 근거로 저렇게 말하는 거예요? 나랑 제대로 이야기도 해본 적 없으면서!? 막말로 내가 데리고 가서 지난번보다 더 악독하게 안 좋은 일을 시킬 수도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생각하지?"

오히려 내가 답답해서 한탄하듯 말했다. 대체 왜 저러는 거지? 이러면 설득하러 온 내가 더 황당하잖아.

"그건 내가 대답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네?"

나를 보고 조용히 말하는 유정. 나는 무슨 소린가 싶어 그녀를 바라봤다.

"안나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나밖에 없으니 이것저것 많이 물어봤거든요. 거기에 대해서 대답해줬죠. 여기 있는 사람들이 오게 된 경위 같은 걸 주로 물어봤는데…. 전부 이야기하면 성철 씨 이름이 안 나올 수가 없잖아요? 따지고 보면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성철 씨가 모아놓은 사람들이니까."

아…. 그렇구나. 안나가 착각할만하네.

여기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종합하게 되면…. 나는 무슨 정의의 사도 같은 게 되어버리는구나.

조폭에게 잡힌 두 커플을 구해주고, 친구들을 살해한 나쁜 놈을 죽여주고, 나쁜 놈들에게 남매를 구해주고, 어린아이가 있는 가족을 구해주고…. 구해주고…. 구해주고….

나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나쁜 이야기는 하나도 없고 죄다 좋은 이야기만 잔뜩한 셈이네.

그래. 됐다. 선의로 그런 행동을 한 건 아니지만, 그걸 일일이 변명할 상황이 아니다.

본인이 괜찮다는데 더 골머리 썩일 필요 없지. 그렇게 됐으면 그냥 그렇게 가자.

나중에 말이 통하게 되면 좀 더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알겠어요. 하아. 러시아어는 할 줄 아는 사람 없어요. 가게 되면 안나가 한국어를 빨리 배워야 해요. 그렇게 전해주세요."

유정이 말을 전달하자 안나는 나를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꼭 해내겠다는 듯한 눈빛. 하아…. 뭐가 저렇게 해맑아.

비즈니스 호텔에 잡혀있을 때 그녀의 모습은 감정 없는 안드로이드 같은 모습이었는데.

지금은 생기 넘치는 금발의 미녀다. 보고 있는 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다 큰 어른인데 설마 대화가 안 통하겠어? 안되면 손짓 발짓이라도 해야지.

"지금 바로 갈 거예요. 준비 좀 하라고 해주세요."

"그래요. 알았어요."

유정이 말을 전달했고, 안나는 신나는 표정으로 준비하러 가고 승규는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쉰다.

얼마 뒤에 안나가 단출하게 가방 하나에 외투 하나만 입고 돌아왔다.

안 춥나? 추울 거 같은데. 아…. 러시아 여자라 추위에 강한가?

마치 놀러 가는 것 같이 즐거워하는 안나. 아이고. 이제 어떻게 하나.

"자요. 이거 받아요."

유정은 나에게 쇼핑백 하나를 건네줬다.

"이게 뭐예요?"

"한글 낱말 카드랑 애들 용 한글 공부 책, 뭐 그런 거예요. 하율이건데 안나도 수준은 비슷하니까 도움이 될 거에요."

"아. 감사합니다. 이런 건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근데…."

"네?"

"정말 여자 세 명이랑 살아요? 막 할머니, 엄마, 이모나 고모. 그런 건 아니죠?“

이런 걸 물어봐도 되냐는 듯 조심스럽게 나에게 말하는 유정.

"아. 네. 아니죠."

"능력자였네."

"능력자라뇨. 근데 뭐 혐오스럽거나 역겹다고 생각은 안 해요? 여러 여자랑 사는 건데?"

"글쎄요.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이라면 그런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르죠. 근데 지금은 뭐…. 원시시대랑 다를 게 없잖아요? 능력 있으면 자기 능력대로 하는 거죠. 내가 뭐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게 아니니까."

이야…. 놀라운 마음가짐이다. 아기 엄마라 상당히 보수적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정도로 진보적인 사람일 줄이야.

내가 다 당황스러울 정도네.

"그럼…. 승규 형이 여러 여자랑 산다고 하면요?"

이크…. 선넘는 질문이었나? 아직 그 정도로 친한 것은 아닌데.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유정과 왜 그런 걸 물어보냐는 표정을 짓는 승규.

씨발. 내가 병신이지. 이래서 사회성 부족한 찐따 새끼는 죽어야….

"걱정 마요. 승규 씨는 나밖에 없으니까."

당황스러운 표정은 사라지고 가볍게 웃으며 말하는 유정.

그 표정은 굉장히 굳건하고 신뢰가 담겨있는 얼굴이었다.

그 말에 승규가 약간 감동한 표정이 될 정도로.

아닌가? 헛된 꿈이 박살 나는 표정인가?

"그렇군요. 부럽네요. 이게 결혼의 힘인가?"

"암튼, 우리 이야기는 됐고. 안나나 잘 보살펴줘요. 힘든 일을 겪은 아이니까 잘 보듬어줘야 해요."

"알겠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렇게 말한 유정은 안나와 짧은 인사를 나눴다.

안나는 유정의 손을 잡더니 손등에 입 맞추고 눈물을 약간 글썽이며 뭔가를 말한다.

그렇게 작별의 인사가 끝났고, 나는 안나와 함께 벙커로 걷기 시작했다.

벙커까지 돌아오는 길. 하고 싶은 말은 정말 많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어서 입도 뻥긋 못하는 나.

큰일이다. 어떻게 할 거야 이 어색함은.

모르겠다. 일단 벙커로 가자.

가서 뭐라도 해보자. 설마 한국어 하나 못 가르치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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