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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닝
벙커로 돌아오니 여자들은 아직도 자고 있었다.
탁자 위에 써놨던 종이를 꾸겨서 쓰레기통에 넣고 차에 있는 물건을 하나씩 옮기기 시작했다.
거실에다가 물건들을 거의 다 옮겨 놓을 때쯤, 승희가 흐느적거리며 방에서 나왔다.
"어…. 이거 다 뭐에요. 이거 우리 짐이잖아? 으아. 설마 전에 있던 곳 다녀온 거예요?"
승희를 보니 아까 날파리년 때문에 더러웠던 기분이 말끔하게 사라진다.
내가 말없이 끌어안으니 이 남자가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나를 따듯하게 안아준다.
그래. 이거야. 마음이 안정된다. 더없이 소중한 것, 내가 앞으로 지켜야 할 것.
아직도 몸 상태가 완전히 좋아지진 않았는지 내 품에서 계속해서 흐느적거린다.
자신의 짐이 가장 많기에 한참을 왔다 갔다 하는 승희.
가만히 소파에 앉아서 그런 승희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재밌다.
게임에 있는 자원 채취하는 일꾼 같은 모습.
짐 하나를 들고 슬금슬금 방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서 또 짐을 들고 슬금슬금 들어간다.
웃겨. 정말.
자신의 짐을 다 가져다 놓더니 내게로 다가와 내 무릎 위에 마주 보고 앉더니 나를 끌어안는다.
따듯한 몸과 진한 살 냄새. 뻗어있는 머리카락이 내 얼굴을 간지럽힌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
승희는 모처럼 생긴 둘만의 시간을 즐기고 싶은지 그렇게 나에게 안겨있다.
딱히 뭔가를 하지 않고 그저 안고만 있어도 서로를 충전시켜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이야?
한참을 그렇게 있어도 전혀 떨어지고 싶은 생각이 없다.
그건 승희도 마찬가지인지 내게 바짝 달라붙어 있다. 그렇게 계속 있는데 세아도 흐느적거리며 방에서 나온다.
나와 승희를 보더니 질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는 내 옆에 앉으려 한다.
"네 짐 가져왔으니 챙겨."
"어…?"
저게 왜 여기 있지? 하는 표정. 그러더니 나를 바라본다.
"혼자 다녀온 거야…?"
"어."
"같이 가지. 뭘 또 혼자 갔다 왔데…."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자신의 짐을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그런 세아를 바라보며 생각난 게 있어서 승희에게 말했다.
"아 참. 네 스마트 팜인지 그거는 못 가져왔다. 부피가 너무 커서."
"아…. 괜찮아요. 책만 있으면 돼요…. 거기 있는 건 이미 망한 거라."
"그래 보이더라. 그래서 안 가져왔어. 가져올 자리도 없었고."
"잘했어요. 이제 여기서 다시 해봐야죠…."
내게 안겨 웅얼거리는 승희. 회복 포션 후유증이 이렇게 심해서야…. 괜찮은 거야?
세아의 짐은 애초에 별로 없었기에 금방 가져다 놓은 그녀가 내 옆에 안더니 팔 사이로 비집고 들어온다.
이런 모습을 보면 작은 포유류 동물 같다. 어떻게 하는 행동이 다 귀엽냐.
그건 승희도 마찬가지인지 세아를 귀엽다는 눈으로 바라본다.
쓱쓱 세아의 머리를 쓰다듬는 승희. 어어…. 그러면 화내는데?
근데 세아가 얌전히 있다. 뭐야 이 녀석. 사람 가리는 거야?
그렇게 몸이 뜨끈해질 정도로 두 여자에게 둘러싸여 있는데 미나도 밖으로 나왔다.
나와 승희, 세아를 본 미나 역시 자연스럽게 내 옆으로 오려다가 거실에 놓인 자신의 짐을 발견한다.
방향을 돌려 성큼성큼 그쪽으로 가더니 금방 자신의 방으로 전부 집어넣는다.
그리고 내 옆에 앉은 미나. 내 어깨에 몸을 기대고 팔을 끌어안는다.
팔에 미나의 가슴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얘들 다 위에 속옷을 안 입고 있는 거 같네. 고맙게.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가 되었다.
아까 밖에서 있었던 일 같은 건 이미 기억도 안 난다.
이런 좋은 순간만 기억하는데도 용량이 부족하다. 아까 같은 그딴 기억을 계속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지.
아…. 근데 안나 이야기를 해야 하는구나. 기껏 분위기가 좋은데…. 나중에 말할까?
아니다. 이런 건 바로바로 이야기해야지. 괜히 속에 묻어놓을 필요가 없어.
"할 말이 있는데."
세 여자는 아무런 미동이 없지만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게 느껴진다.
속으로 마음을 굳게 먹고 슬슬 이야기를 꺼낸다.
"사실, 여기 올 여자가 한 명 더 있어."
내심 놀란 거 같지만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대로 있는 승희와 다소 놀란듯한 미나. 인상을 쓰고 나를 짐승처럼 바라보는 세아.
"역시 내가 구해준 여자긴 한데…. 지금은 물류센터에 있고 안나라고 하는데…."
"뭐!? 안나!? 올 사람이 안나야?"
깜짝 놀란 세아가 외치자 승희와 미나가 놀랐다는 듯 세아를 바라본다.
"아. 세아는 알겠구나."
"으아…. 안나라고? 안나를? 진짜로? 너 안나랑도 이런 사이였어!?"
"뭔 이런 사이야. 그런 거 없어. 솔직히 말해서 잘 되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그거야 내 맘대로 되는 건 아니고…. 원래는 크게 기대하거나 하진 않았는데…. 그래서 물류센터에 보낸 거고…. 근데 아까 승규 형이 나한테…."
잔뜩 쭈구리가 된 기분으로 변명하듯 전부 말했다.
아오…. 당당하게 말할 생각이었는데 세아 이 녀석 때문에 이게 뭐야.
이야기를 다 들은 승희와 미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세아. 세아는 혼자서 자꾸 중얼거린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안나는…. 게다가 한국말도 잘 못 하는데…."
그런 세아를 바라보던 승희가 미나와 눈을 마주친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미나. 그러더니 나에게 말한다.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그러더니 벌떡 일어서서 미나와 큰방으로 향한다.
"세아야. 이리와."
그렇게 중얼거리던 세아까지 데리고 들어가자 결국 거실에 혼자 남게 되었다.
에휴.
이게 뭐냐. 당당하든지 뻔뻔하든지 그랬어야지. 이게 무슨 꼴이냐.
혼자 남겨진 나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내가 너무 과욕을 부리는 게 아닐까? 책임지고 산다는 이유로 여자들을 너무 소유물처럼 생각하는 게 아닐까?
사실 내가 강짜를 부려도 저들은 뭐라고 할 말이 없다.
여자를 열 명을 데리고 살든 스무 명을 데리고 살든 사실 할 말이 없지.
그게 싫으면 본인들이 나가는 게 맞으니까.
하지만 나는 그렇게 미움받고 싶지 않은 거다. 지독한 이기심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다.
내 맘대로 하면서 미움받고 싶지도 않다는 건 솔직히 정상은 아니잖아.
감정이란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닌데. 게다가 질투는 더욱 그렇다. 한번 틀어져 버리면 다시는 메울 수 없다.
능력도 없으면서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게 아닌가.
데리고 살고 있으니 이런 것들은 당연히 받아들이라고 하는 게 과연 합당한가.
에휴. 결국은 내가 문제다.
세상이 비정상이라고 나도 비정상적인 일을 당연하게 하려는 게 문제다.
아…. 모르겠다. 계속 이렇게 생각하다 보니 약간 억울한 느낌도 든다.
내 맘대로 살면 좀 어떠냐. 거기에 맞춰줄 수도 있는 거 아냐?
지랄 났네. 진짜.
뭐가 옳은지도 모르겠다. 될 대로 되라지.
조금이러도 미움받거나 아쉬움 없게 모든 걸 잘 해내려고 용쓰는 게 애초에 미친 짓이지.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진다.
그냥 담담하게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저들이 반대해도 안나는 이곳으로 데리고 올 거다.
거기에서 나는 잡음과 불만은 묵인하기로 했다. 심지어 안나에게 제대로 물어보지도 않았지만, 그렇게 할 거다.
이 세상을 살면서 그다지 욕심내는 거 없는 내가 부리는 마지막 욕심이다.
안나를 데려오지 않으면 결국엔 내가 후회할 거 같다. 그렇게 사느니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낫지.
됐어. 안나는 그렇게 할 거다. 결정 끝. 땅땅땅.
여자들이 나올 때까지 스킬 생각이나 하고 있자. 앞으로 9일. 광역 스킬 무효화를 마스터할 방법을 찾아야 해.
앞으로 스킬을 마스터하려면 6천 번가량만 쓰면 된다.
6천 번. 별거 아니네. 포션 300개만 먹으면 되잖아. 하하. 60만 코인 밖에 안 들어. 별거 아니야.
포션 300개. 하루에 25개씩 먹어도 12일이다. 시간이 모자란다. 안돼. 그럴 수는 없어.
아니지. 세아와 미나에게 동시에 쓰니까 반으로 줄잖아? 포션 양은 늘겠지만 내가 먹는 양은 반으로 줄어든다. 그러면 6일. 시간은 충분한데.
좋아…. 더 줄여보자.
물류 센터에 있는 버프형 스킬이 몇 명이 있지? 금속화, 투명화 둘, 보호막 둘, 다섯이네.
다섯 명을 모아놓고 버프를 죄다 꺼버리면 스킬 한 번에 다섯 배의 숙련이 오르겠지?
그럼 내가 포션 먹는 양이 확 줄어든다.
스킬 1.200번. 포션은 60개만 먹으면 되잖아. 사람이 많을수록 내가 먹는 부담이 확 줄어든다.
승희와 세아만 놓고 포션을 먹으면 6,000번 스킬 쓸 동안 내가 150개, 승희와 세아가 각각 150개씩 총 450개.
물류센터에서 하면 내가 60개 다섯 명이 각각 60개씩. 총 360개.
포션도 많이 줄어든다. 좋긴 좋네. 역시 사람이 많을수록 양이 줄어들어.
근데 저 정도 차이면, 그냥 승희와 미나에게 쓰는 게 낫겠다.
내가 숙련도를 신경 써야 하는 건 승희와 미나지 물류센터 사람들이 아니잖아.
게다가 저렇게 하면 승희와 미나도 투명화를 마스터 할 수 있을 거다. 차라리 이게 낫지.
문제는 코인이네.
아까 14만을 얻어서 다시 60만이 되긴 했지만, 포션 450개를 사려면 90만 코인이 든다.
게다가 스킬을 배우려면 코인도 더 필요하잖아. 그리고 미나도 먹어야 하고. 어휴. 한참 모자라네.
일단 자연 회복으로 하루에 20번씩은 쓸 수 있을 테니 포션 비용을 어느 정도는 아낄 수 있겠지만…. 그리 크진 않을 거다.
20번 해봐야 포션 하나. 하루에 2000코인. 찔끔 이네. 에휴.
결국은 포션을 먹으면서 계속 밖에 나가 사냥을 해와야 한다는 소리다.
조금 무리해서라도 밖을 계속 나가야겠다. 어차피 여자들은 숙련 잔뜩 하면 거의 쓰러지기 일보 직전까지 가니까.
오늘 한 것처럼 계속 반복해야겠네.
근데…. 왜 얘들은 왜 안 나오냐. 불안하게.
한참 후에 세 여자가 나왔다.
진지한 표정. 심상치 않은 분위기.
나도 모르게 한껏 벌린 다리를 조금 오므렸다. 허리도 펴고.
"오빠."
승희가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미나가 입을 연다.
승희외 세아는 미나가 이야기하자 내 얼굴을 똑바로 바라본다. 그렇게 셋이서 나를 바라보니 압박감이 생각보다 심하다.
앞으로 이런 상황은 또 없었으면 좋겠네. 죄지은 느낌이잖아.
"저희는 오빠가 하는 일에 반대하지 않아요."
의외의 말. 나는 그런 미나를 바라본다.
"오빠가 한다면 우리는 거절할 이유가 없어요. 다만 아쉽거나 서운할 수도 있겠죠. 그건 우리가 감수해야 할 일이고요."
"그게…."
"끝까지 다 들어줘요."
"알았어."
미나의 박력에 입을 다물었다.
다시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미나.
"안나라고 하는 분은 원하는 대로 하세요. 어차피 방은 하나 더 있으니까. 하지만 오빠가 우리를 생각해준다면 앞으로 더는 사람을 들이지 안아줬으면 좋겠어요. 이게 우리가 내린 결론이에요."
"그래. 알았어."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은 따로 하지 않았다. 굳이 안 해도 될것 같아서.
승희와 세아도 그리 썩 맘에 드는 것은 아닌 것처럼 보여도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분위기다.
어차피…. 나도 더는 생각 없다. 더 욕심낸다면 그건 내가 쓰레기 새끼겠지. 뭐, 이미 쓰레기이긴 하지만.
"근데, 그분. 세아에게 들으니 한국말 잘 못 한다고 하던데요? 그건 어떻게 할 거예요?"
"가르쳐야지. 어쩔 수 없잖아."
"그럼, 안나도 알고 있는 거예요? 우리랑 같이 사는 거?"
세아가 불쑥 끼어들며 말했다.
나는 그런 세아의 말에 뺨을 긁으면서 대답했다.
"아니…. 너희에게 먼저 말하고 이야기하려고…."
"아니 이 사람 이거 제정신인 거야!? 그럼 혼자 김칫국 마시고 있었다는 거네!?"
세아의 일갈. 나는 그런 세아의 말에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긴 하니까.
이렇게 승낙까지 받았는데…. 안나가 오지 않겠다고 하면 그것도 황당한 일이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