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67화 (16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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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

각자의 이불과 여분의 이불까지 잔뜩 챙긴 우리들.

근데 이걸 어떻게 들고 가지?

일단 여자들이 각자 자기 침구를 들었다.

남은 건 네 개. 일단 들어본다.

들긴 들었는데…. 무게도 무게지만 부피가 너무 크다.

이대로 들고 들어가라면 짜증 나서 중간에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들 거 같다.

"이대론 안 되겠어."

"에? 기껏 골랐는데…. 너무 많아요? 두번 왔다 갔다 해야 하나?"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따라와. 이불 잠시 놓고."

여자들은 나를 졸졸 쫓아온다. 아까 여기 옆쪽에서 봤는데.

"아. 여깄다."

내 말에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여긴 유아용품 파는데 아니에요? 대체 여기를 왜…."

이 세상에서는 더는 필요 없는 가게다.

다시는 아기들을 볼 수 없는 세상이니까.

나는 그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분명 이 정도 크기의 매장이면 제법 있을 텐데….

"찾았다."

"뭘요. 뭔데요. 오!"

승희가 다가와 내가 찾은 물건을 보고 감탄한다.

미나와 세아도 그걸 보더니 그럴듯한데? 라는 표정을 짓는다.

"짠. 이거면 되겠지."

내가 찾은 것은 아기들 용 왜건. 애들 두 명은 누울 수 있을 정도로 큰 물건이다.

"가자."

왜건을 끌고 다시 이불집 앞으로 왔다.

이불들을 차곡차곡 싣고 가게 안에서 비닐 끈을 찾아 둘둘 묶었다.

이러면 끌고 갈 수 있겠지.

"와. 머리 좋다. 근데 왜 이걸로 해요? 그냥 구루마같은거 찾는 게 낫지 않아요?"

승희가 물어봤기에 나는 친절하게 대답해준다.

"리어카가 있으면 제일 좋은데 요즘엔 리어카가 없잖아. 그리고 이거 아기들 왜건이 상당히 좋아. 비싼 건 서스펜션도 달려있다고. 바퀴가 커서 밀기도 편하고 타이어에 바람도 들어가 있어서 조용하지. 제법 쓸만해."

"헤에…. 되게 많이 써본 느낌이네."

"초창기 때 많이 썼어. 짐 옮기고 그럴 때. 캠핑용 왜건이 더 좋긴 한데. 일단 급하니 이거라도 써야지."

"뭐, 편하기만 하면 됐죠. 가요!"

우리는 벙커로 향했다. 그렇게 가는 길에 다이X가 보였다. 싼 생활용품이 잔뜩 있는 천원 샵.

"어…. 저기!"

내가 가리키자 다들 눈이 반짝인다.

"왜건도 있는데 저기 가도 되죠!?"

"저도 가고 싶어요."

"나도 가야 해! 우리 칫솔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잖아."

여자들의 적극적인 요청을 무시할 수는 없지. 어차피 나도 가려고 말한 거니까.

안에 들어간 우리는 각자 흩어져서 필요한 것을 담았다.

이 가게의 문제점은 필요한 게 있을 때 들어오면 안된다는 거다.

눈에 보이는 건 죄다 사고 싶고 그리 필요 없는 것들도 굉장히 필요해 보인다.

"야. 화분을 왜 골라."

"아니…. 이쁘잖아요…."

"최승희 씨? 좋은 말로 할때 도로 가져다 놓으세요."

"히잉."

"야. 윤세아! 너는 그거 뭐야! 나 다 봤어."

"뭐…. 뭘? 내가 어쨌다고."

"너 방금 넣은 거 양초 아냐?"

"맞아…. 제길. 어떻게 봤지?"

"양초가 왜 필요하냐!"

"아잇! 내가 필요하다고! 왜 상관이야!"

"무거워! 안 그래도 내가 밀어야 하는데!"

"이씨…. 그럼 왜건 하나 더 가져가! 내가 밀 거야!"

"오. 정말? 그 말 진짜지?"

"어…. 어? 왜 그래?"

"얘들아! 세아가 왜건 하나 더 민다고 하니까 담고 싶은 거 더 담아도 돼!"

"오오오오!"

소리 지르는 승희와 갑자기 어디론가 냉큼 가는 미나.

세아의 표정이 약간 이상해진다.

"어…. 나 실수 한 거야?"

"응."

"아…. 망할."

"다들 여기서 고르고 있어. 내가 가서 왜건 하나 더 가져올게."

"왜 그렇게 신났는데!"

"룰룰루."

나는 탐지를 돌렸다. 역시 주변엔 아무도 없어.

빠르게 가서 왜건을 하나 더 끌고 왔다.

아차. 수건도 필요한데. 이불집에 있었지?

다시 이불집 까지 가서 수건을 잔뜩 담았다.

유유히 왜건을 밀고 다이X 앞에 대놓고 들어오자 입구 앞에 벌써 큰 봉지가 몇 개가 있다.

"이거…. 뭐야?"

"뭐긴 뭐야! 다들 신나서 고른 거지!"

"맙소사."

별게 다 있었다. 도마, 식칼…. 여기서 식칼도 팔아? 프라이팬, 궁중 팬. 아마도 이건 미나가 고른거 같다.

화분…. 승희 이 녀석 결국 화분을 담았네. 이건 뭐야. 플라스틱 박스? 난리네 정말. 아무튼, 미묘하게 쓸모없어 보이는 물건들이 잔뜩 있는 건 승희의 봉지.

세아도 결국 양초 샀네. 난리다 난리야. 나는 모르겠다. 지가 알아서 하겠지.

그 외에도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것들이 한가득하다.

게다가 옆에 따로 있는 주방세제와 세탁 세제. 샴푸와 린스. 치약, 칫솔….

이것들은 써도 되나? 유통기한이라는 게 있는데…. 쓰고 죽지는 않겠지만….

"세아야."

"응…?"

"이거 다 담고 밀고 갈 수 있겠니?"

"몰라. 반성하고 있어."

아무래도 왜건으로 커버가 될 짐이 아니다. 이 녀석들 가게를 통째로 들고 갈 셈인가.

"적당히 가자. 다음에 또 오자고."

"알겠어요! 이것만 가져갈게요!"

"저도요!"

신나는 목소리의 승희와 미나.

결국, 봉지가 두 개 더 추가됐다.

"장담하는데 이거 다 못 옮길 거 같은데."

"윽…. 너무 많았나."

멋쩍은 듯이 뺨을 긁는 승희와 모른 척하고 다른 곳을 바라보는 미나.

진짜 이 정도면 리어카가 필요하겠는데.

"결국, 두번 왔다 갔다 해야 하나."

"그…. 왜건 더 있었어요?"

"왜건? 어. 있었던 거 같은데. 이 정도 크기는 아니지만."

"그럼 두 개 더 가져오죠. 아무래도 한 개에 다 실을 정도는 아니네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기다려. 가져올 테니까."

다행히 왜건은 더 있었고 결국 각자 하나씩 끌고 가기 시작했다.

도로를 가로지르는 네 개의 왜건. 무슨 기차놀이도 아니고.

그렇게 이제는 벙커에 돌아가나 싶었는데 미나가 어딘가를 가리킨다.

"저기!"

"뭔데…."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뿐인데 이들이 원하는 것을 무시할 수도 없다.

미나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옷가게다.

"저희 입을 옷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그래. 가. 골라.'

내 말에 여자들이 우르르 들어간다.

뭐…. 나도 옷은 있어야 하지.

편해 보이는 옷 위주로 내가 옷을 고른 건 5분 정도밖에 안 걸렸다.

어차피 나야 벙커 안에서는 짧게 입고 있는 데다가 바지 같은 건 항상 작업 바지만 입으니까.

티야 대충 면티 입고.

하지만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

정말 심도있는 고찰과 진지한 간택 끝에 하나씩 골라 담는다.

"그냥 적당히 담으면 안 되는 거야?"

"오빠. 그냥 빠져있는 게 나을 것 같아."

세아가 내게 다가와 조용히 한마디 한다.

그래. 그게 낫겠다. 이게 뭐니…. 정말.

가게 밖으로 나와서 거리를 둘러본다.

슬슬 해가 넘어가고 있다. 이제 곧 어둠이 깔리겠지.

한가한 동네. 맘에 든다.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 곳으로 들어와 살만큼 매력적이지 않다는 것.

그게 가장 큰 장점이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면 위험도 없다.

다만 단점은 사냥을 나가려면 우리도 많이 나가야 한다는 거다.

전동 휠을 필수로 가지고 다녀야겠네. 걸어 다닐 수 있는 거리가 아니야.

한참 뒤 여자들은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나왔다.

"그렇게 골라놓고 표정이 왜 그래?"

"맘에 드는 게 별로 없어요."

"맞아요. 사이즈도 별로 없고."

"내건 거의 없던데."

승희와 미나, 세아가 잔뜩 불만에 찬 말을 내뱉는다.

어휴. 그럴 거면 빨리 나오기라도 하지.

"이제 됐지? 간다?"

다들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벙커로 출발했다.

그리고 5분도 되지 않아 다시 멈추게 됐다.

"저기도…."

"크와아악!"

이번에는 속옷. 그래. 가라 가. 내가 너희를 어떻게 막니.

벙커에 돌아온 건 해가 지고 한참 지난 뒤였다.

오르막길을 왜건을 밀고 올라와 땀범벅이 된 여자들.

나야 별로 힘들지는 않았는데 다들 헉헉대며 힘들어한다.

"너희들 체력 향상이 필수네. 이래서야 원…."

다들 대답할 기운도 없나 보다. 말없이 자신들의 짐을 꺼내 벙커 안으로 들어간다.

"근데…. 하이고. 힘들어. 이거 원래 주인의 짐들은 어쩌죠? 후우."

아직도 숨이 고르지 못한 채로 나에게 물어보는 승희.

"어쩌긴. 다 치워야지. 별로 쓰고 싶지 않잖아?"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찝찝하긴 하지. 굳이 이것들을 써야 할 만큼 급한 것도 아니고.

큰 봉지에다가 전에 살던 사람들의 물건들을 모두 담았다.

그리고 그것들은 바깥의 창고에 처박아 놨다.

나중에 날이 풀리거나 하면 좀 멀리 내다 버리든가 해야지. 소주라도 한 병 부어주고.

아까 수건을 잔뜩 챙겨왔기에 다들 수건을 적셔서 각자의 방을 한 번씩 닦았다.

그리고 큰방도 다 함께 치우고 침대 시트와 이불, 베개 등을 채워 넣는다.

점점 사람 사는 모양이 되어가는 벙커 안.

옹기종기 둘러앉아 식사하고 다시 마저 정리했고 다 끝내니 어느새 시간이 꽤 지났다.

별로 한 게 없는 것 같은데도 시간이 엄청 빨리 지나가네.

"아고고. 좀 쉬자."

이 벙커의 좋은 점은 거실이 있다는 거다.

게다가 소파도 있다. 역시 10인용이라 그런지 널찍널찍해서 좋다.

내가 소파에 앉자 미나와 승희가 내 옆에 찰싹 붙어 앉는다.

한발 늦은 세아가 약간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쿨하게 돌아서며 말한다.

"전 먼저 씻어요. 온몸이 먼지투성이네."

그렇게 휙 화장실로 가버리는 세아.

그러고 보니 나도 몸이 찜찜한 게 느껴진다.

"나도 씻어야겠네."

"조금 이러고 있다가 가요."

"조금만 이러고 있어요."

승희와 미나는 거의 동시에 비슷한 말을 한다.

그러더니 서로 바라보고는 힘없이 웃는다.

지금까지는 계속 이것저것 하면서 정신을 흩어 놨으니 괜찮았겠지만, 가만히 있으면 아마 생각날 거다.

자신들이 낮에 했던 일.

사람을 죽인다는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다.

시체가 남지 않더라도 뇌리에 박히는 충격은 무시할 수 없다.

낯선 무기, 불길한 감각, 내리칠 때의 두려움, 무기가 살에 닿을 때의 파열음, 그 더러운 감촉.

"미안해."

승희와 미나를 양팔로 안아주며 말한다.

다들 말은 안 해도 뭐 때문에 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충분히 알아듣는다.

그저 내 품에 얼굴을 기대고 말없이 있는 두 여자.

잠들기 전에 혼자 마주하고 서글픈 마음이 드는 것보단, 이렇게 내 품에서 먼저 감정 정리를 하는 게 한결 낫겠지.

아마 세아도 그걸 보고 순순히 자리를 비켰을 거다.

겉으로는 툴툴거려도 저 아이 역시 마음이 여린 아이니까.

이 두 명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하겠지. 참, 속이 따듯한 여자다.

세아는 일부러 그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오래 씻었다.

덕분에 두 여자는 눈치 보지 않고 나와 이렇게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세아가 나올 때쯤엔 어느 정도 정리가 됐는지 홀가분하게 둘 다 일어선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똑같이 인사를 하는 승희와 미나.

그리고 둘 다 씻고 나온 세아를 한 번씩 꼭 안아주고 화장실로 간다.

아는지 모르는지 묵묵히 그런 그녀들을 한 번씩 토닥이는 세아.

"나도 씻으러 가야겠다."

"엑? 나는!?"

"어? 그런 거야? 알았어. 일로와."

"이 싸람이…. 공평함 몰라? 공평함!"

"알았어. 이리와."

내 옆에 앉은 세아. 화장실 쪽을 한번 흘낏 보더니 냉큼 내 무릎 위로 올라탄다.

"공평함이라며."

"시끄러워."

그러더니 내 손을 자신의 옷 안으로 가져간다.

이것 봐라…. 이 녀석 노브라잖아?

"공평함은 죽었네."

"쫌. 입 좀…. 으휴."

이렇게 하는데 마다할 남자가 어딨을까.

나를 독식한 채 가슴을 어루만져지는 세아는 말없이 내 품에 파고든다.

"끝."

"어!? 왜!?"

내가 손을 빼자 너무 빠르다는 표정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세아.

"나도 씻어야지."

"우 씨…."

나는 그런 세아의 귀에다가 작게 속삭였다.

"씻고 나서 더 하면 되지."

내 숨결이 간지러운지 부르르 떠는 세아.

무릎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주방 쪽으로 가며 작게 중얼거린다.

"그러던가…."

어휴. 귀여워 죽겠네.

그나저나…. 씻으러 가면서 나도 생각했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겠다.

다들 은근히 준비하는 거 같으니까.

둔하디둔한 나도 알아차릴 정도니 여자들끼리는 이미 다들 눈치를 챘을 거다.

아마도 오늘 밤은…. 아주 길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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