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65화 (165/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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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

끔찍하고 잔혹한 바깥세상이지만, 나와 세 여자의 이동은 마치 소풍을 나온 듯한 기분이다.

긴장감을 별로 느끼지 않고 있는 승희와 세아. 미나만 약간 호기심 반 두려움 반으로 세상을 둘러보고 있다.

나를 믿고 저러는 거겠지만 좀 더 세상을 무서워 해야 하는데…. 경각심을 가질 필요가 있어.

그러기엔 너무나 평화롭다. 하긴 모든 원흉은 사람이니 사람이 없으면 평화로울 수밖에 없지.

사람이 너무 없다.

나온 김에 미나도 경험을 했으면 좋겠는데…. 동네가 너무 조용하네.

이이리로 넘어가면 더 조용할 텐데. 뭐, 어쩔 수 없나? 없는 사람을 내가 만들어 낼 수도 없고.

동천동에서 이이리로 가는 도로를 따라 걷는다.

그래도 서울 주변이라 주변은 상당히 번화하다. 탐지를 쓰지 않고는 그냥 지나가기 상당히 찝찝한 곳.

지난번엔 아무도 없었지만, 그때 없었다고 지금도 없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탐지는 게을리할 수 없는 필수 스킬. 그렇다고 여럿이서 가지고 있을 필요는 없는데…. 하나 정도는 더 있어야겠지?

그렇게 탐지를 유지하며 걷는데 드디어 사람의 기척이 잡혔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곧 죽여버릴 사람을 발견했는데 이렇게 기쁘다니…. 미쳤어. 아주.

"쉿."

내가 손을 올리고 입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말하자 세 여자가 순식간에 긴장한다.

"앞쪽에 사람이 있어. 기척은 셋. 승희랑 세아는 투명화 쓰고, 미나는 내 뒤를 잘 따라와."

확실히 혼자일 때보다 상당히 불편하긴 하다.

소리. 가장 큰 문제는 소리다. 소리를 내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는 게 전혀 훈련되어있지 않으니까.

소란스럽거나 느리거나. 둘 중의 하나를 피할 순 없다. 지금은 거리가 꽤 있으니 소음을 무시하고 거리를 좁힌다.

움직이지 않는 세 기척. 주변의 건물을 보아하니 아파트 같은 곳은 아닌데…. 뭐 하려고 이런데 있는 거지?

거리가 가까워졌기에 접근하는 속도를 확 줄였다.

왈왈왈왈왈왈!!

개소리? 하. 유행에 뒤처지는 놈들인가보다. 개를 끌고 다니다니.

초창기엔 많이 보이던 모습이었다. 개는 유능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유능했다.

특히 덩치 큰 개들. 위협적인 모습과 훌륭한 공격력. 잘 발달한 후각과 청각은 사람의 접근을 쉽게 알아챈다. 개들에겐 투명화도 의미가 없다.

냄새는 지울 수 없으니까. 보이지 않으니 공격까지는 못해도 존재는 확실히 알 수 있다.

그리고 유능한 개 주인이라면 그런 개의 반응에 충분히 경각심을 가질 거다.

"세아. 전에 나에게 썼던 그 호신용품. 더 있지?"

"응."

하지만 개의 단점은 명확하다. 후각. 너무 민감한 나머지 작은 자극에도 크게 고통받는다.

게다가 덩치 큰 개는 먹는 양이 어마어마하다. 유지비가 생각보다 많이 든다는 뜻.

날고기 같은 걸 줄 수 있기에 동물 같은 걸 잡아서 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덩치 큰 개를 유지하는 건 사람 하나를 데리고 다니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게 지금은 사람들이 개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이유.

아무리 유능해도 개는 개니까.

"투명화가 있으니 너를 함부로 공격하진 못해. 개들은 똑똑하지만, 생각보다 멍청해. 근처까지 가서 개에게 던져."

"알았어."

보이지 않는 세아가 대답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났다.

으휴. 저놈의 소리. 전신 타이츠라도 입혀야 하나.

오. 생각보다 괜찮은데? 전신 타이츠라니. 맘에 드네.

한번 해볼 만한 가치는 있어….

깨갱깨갱깨갱

죽겠다고 앓는 소리를 내는 개. 말그대로 개소리.

간단히 무력화된 개를 향해 주인인 놈이 튀어나온다.

근육질의 남자. 개를 살펴보다가 코를 감싸 쥐고는 주변을 살피더니 소리친다.

"야! 아오. 씨발. 밖으로 나와봐!"

남자가 소리치자 일행 두 명이 뛰쳐나온다. 전부 남자. 그것도 근육질들.

뭐야. 헬창들이야? 그런데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주변을 돌아보지만 숨어있는 나와 미나를 발견할 수는 없다.

탐지가 없는 건 확실하다. 탐지가 있다면 개를 데리고 다니지 않겠지.

계속 죽어가는 소리를 내는 개 때문에 세 남자는 정신이 없는 모습이었다.

저것도 문제다. 아무리 유능해도 개는 개일 수밖에 없어. 쉽게 제어가 안 되거든.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 남자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개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간다.

계속 시끄럽게 구는 개 때문에 어느 정도 소음이 묻힌다.

나는 탐지로 놈들을 살피며 가까이 다가갔다.

스킬이 닿는 거리는 됐지만,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가게 안쪽만 볼 수 있으면 되는데….

바로 문 쪽으로 향하는 건 바보짓이지.

미나를 데리고 가게를 돌았다. 뭐 하는 가겐데 이렇게 너저분하지?

세워져 있는 간판이 있다. 모종. 농약. 살충제. 아. 종묘상이구나. 농약이라도 가지러 왔나?

가게 뒷문이 있다. 소리를 죽이고 가까이 가니 안쪽이 들여다보였다.

시끄러운 개와 남자 셋의 모습이 전부 보인다.

보이면 끝이지. 무효화와 수면이 들어갔다. 개까지.

이것으로 상황 종료. 위협이 사라졌다. 크게 어려울 것도 없고 무난한 진행이었지만, 미나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흐아."

다리가 풀려 쓰러질 뻔한 걸 잡아줬고 미나는 내 품에 안겼다.

"아침부터 자꾸 둘이 너무 붙는 거 아니에요?"

우리 앞에 나타난 세아.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한다.

"그러게. 자꾸 기회를 노리는데 누가 자꾸 방해해서 쉽지 않네."

내가 능글스럽게 대답하자 재미없다는 듯 실망한 표정을 짓는 세아.

재밌는 아이야.

승희도 투명화를 풀고 내 옆에 나타났다. 이제, 정리할 시간.

나는 셋을 데리고 종묘상 안으로 들어갔다.

"미나. 괜찮아?"

"네…. 괜찮아요. 어휴. 엄청 긴장했네."

"아직 긴장 풀지 마. 이제 시작이니까."

의미심장한 내 말에 그제야 쓰러져있는 세 남자를 떠올린 듯 표정이 약간 굳는다.

"처음이라 실수할 수도 있으니 일단 팔다리는 묶어줄게."

근육질 남자 셋의 팔과 다리를 테이프로 묶어 놓는다.

당연히 입도 막았다. 이러면 괴력 같은 스킬도 못 쓸 테고 테이프를 끊을 수는 없을 거다.

순수 힘으로 끊을 수 있나? 에이. 그럴 리가. 아니...헬창이면 가능한가?

"제가…. 마무리하라는 거죠?"

"가혹하게 느껴지겠지만, 맞아."

나는 마체테를 건네줬다. 엉겁결에 받긴 했지만 쥐는 자세부터 글러 먹었다.

과연 할 수 있을까?

"후우…."

그래도 못하겠다 소리는 하지 않네.

"줘봐."

"네?"

"마체테. 줘봐."

다시 마체테를 나에게 돌려주는 미나.

나는 그걸 꽉 쥐고 미나에게 보여줬다.

"어설프게 하면 네 손만 아프고 저놈들도 고통스러워져. 차라리 한 번에 처치하는 게 고통이 덜해. 웃기지? 죽이겠다는 놈이 이런 거나 신경 쓰고? 근데 그건 저놈들을 위한 게 아냐. 너를 위한 거지. 고통에 몸부림치는 모습 같은 건 기억에 오래 남으니까. 그러니 너를 위해서라도 깔끔하게 해봐. 아니면 다른 무기로 줄까?"

고개를 가로젓는 미나. 나는 그런 미나를 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요리 할 때는 칼 잘 쓴 거 같던데. 크게 다를 게 없어. 그냥 두꺼운 고기를 단번에 썰어낸다는 생각을 하면 돼. 이렇게."

마체테를 휘둘러 나무로 된 탁자 끝을 내리쳤다.

팍하고 모서리가 잘렸다. 마체테는 애초에 나뭇가지를 쳐내는 용도의 정글도라 이 정도는 문제없이 잘라낼 수 있다.

"사람의 목도 마찬가지야. 목뼈를 잘라내는 것은 어렵지만 목에 지나는 대동맥만 썰어버리면 알아서 죽어. 그러니 제대로 노리고 전력으로 내리치기만 하면 돼. 해봐."

마체테를 다시 미나에게 건네줬다.

부엌칼 이야기를 해서 그런가 칼 잡는 게 조금 자연스러워졌다.

그래. 다를 거 없지. 부엌칼이나 마체테나. 고기나 사람 목이나.

"오빠."

승희가 나를 부른다.

"왜?"

"나도…. 죽여본 적 없는데."

"어? 있지 않았나? 아…. 없구나."

빠르게 생각해보니 없다. 이런 착각 했네.

"대체 어떤 여자랑 헷갈린 거예요."

"미안. 그런 건 아니고. 내가 착각한 거였어."

"쳇."

"그럼 사과의 의미로 한 명은 네가 처리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에요? 완전 이상하네."

"당연히 이상하지. 여기 안이상한 사람들이 어딨니?"

나와 승희의 대화 때문에 아직도 마체테를 들고 실행 못 하고 있는 미나.

에휴. 빨리 끝냈어야 하는데. 고민할 시간을 줬으면 안됐는데.

내가 실수한게 크지. 왜 그런걸 헷갈렸지.

"자꾸 줬다 뺐어서 미안해. 다시 줘볼래?"

마체테를 돌려받고 미나와 승희에게 쥐는 법을 보여줬다.

그리고 남자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그대로 목을 내려쳤다.

단번에 빛이 되어 사라지는 남자.

내려치자마자 뒤로 물러났기에 코인은 내게 빨려 들어오지 않는다.

"자. 진짜 미나 네 차례. 일단 코인부터 먹어."

"네."

마체테를 꽉 쥐고 남자에게 다가간 미나.

코인이 그녀에게 빨려 들어간다.

잠깐 놀라는 표정을 짓지만, 다시 마음을 다잡고 칼을 고쳐잡는 그녀.

살인을 종용하는 남자와 그걸 아무런 저항 없이 실행하는 여자. 그리고 그걸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는 두 명.

정상이 아니야. 정상이.

"익!"

이상한 기합 소리와 함께 미나가 마체테를 휘둘렀다.

정확하게 목에 박힌 마체테. 남자가 빛으로 변했다.

코인주머니가 미나에게 빨려 들어갔고, 그녀는 나를 바라본다.

"잘했어."

울 것 같은 표정의 미나였지만, 내 칭찬에 복잡한 표정으로 변한다.

살인하고 칭찬받는 세상에 온걸 환영한다. 미나야.

"다음 승희."

미나에게 마체테를 건네받은 승희. 굳은 표정으로 마지막 남은 남자의 옆으로 선다.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바로 마체테를 휘두른다.

"핫!"

역시 한 번에 성공하는 그녀. 눈을 감고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후…."

"이리와. 잘했어 승희도."

내게 마체테를 돌려주며 곁으로 오는 승희. 이런 어린 여자들에게 몹쓸 짓을 시키는 내가 제일 나쁜 거 같다. 아. 나쁜 거 맞구나.

근데…. 죽음은 어린 여자라고 피해 가지 않잖아. 저승사자 새끼가 밝히는 새끼면 모를까.

아…. 밝히면 더 데려가려고 그러나? 암튼.

"이 녀석은 어떻게 해요?"

세아가 개를 보며 말한다.

자고 있으면서도 아까 승희의 최루탄의 효과가 남았는지 불편하게 킁킁거린다.

"당연히 죽여야지."

"그래요? 불쌍하네."

"방금 사람 셋이 죽었는데 개가 죽는 건 불쌍하다고 하면 안 되지."

"쳇…. 그러네."

그래도 세상을 돌아다녔던 세아는 어느 정도 무뎌진 게 확실하다.

일반인의 감성이 아니잖아. 이미 이쪽 세상 사람이라고.

나는 망설임 없이 개를 찍어 죽였다.

개는 죽어도 시체가 사라지지 않는다.

다들 예상치 못한 개의 사체를 보고 깜짝 놀란다.

그래. 이게 웃긴 거다. 시체는 끔찍하다. 사람을 죽였을 때 시체가 남지 않는다는 게 얼마나 축복인지 이들도 알았겠지.

"가자."

내가 밖으로 나가자 세 여자가 나를 따른다.

나는 일부러 가게의 문을 열어놓고 나갔다.

이러면 추위 때문에 벌레는 안 생기겠지.

종묘상에 벌레라니. 그것도 약간 웃기네. 살충제가 득시글한 곳에 벌레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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