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63화 (163/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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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크닉

넷이서 한곳에 모여 살기 시작한 첫날 밤.

기묘한 분위기에서 서로 잘 자라고 인사를 한다.

상당히 어색하고 이상한 기분. 이것 참…. 뻘쭘하네.

"내일은 이사할 곳을 보러 갈 거야. 그러니 다들 푹 자둬. 나도 바로 잘 거니까."

혹시나 기대하는 사람이 있을까 봐 미리 못 박았다.

함께 산지 첫날부터 발정 난 개처럼 굴고 싶진 않았기에 오늘은 그냥 푹 잘 생각이다.

혹시 기대를 하는 사람이 있었을까? 하…. 이거 생각보다 신경 많이 쓰이네.

함께 모여 살자고 확정지인지 한 시간도 안돼서 후회가 밀려오면 어쩌자는 거야.

그래도 후회는 잠시만 번뜩이고 지나갔고 안정감과 편안함이 더 크게 자리 잡는다.

특히 미나. 혼자서 아파트에 뒀던 게 내심 찜찜했는데 이제야 마음이 편하다.

물가에 내놨던 아이가 집으로 들어온 기분.

침대에 누워 나에게 수면을 건다. 자자. 자고 일어나자. 그럼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뜨겠지.

벙커라서 해 뜨는 건 못 보겠지만.

누군가 나를 흔들며 깨우는 느낌에 잠에서 깬다.

정말 익숙하지 않은 감각이다. 누군가 나를 깨우다니.

내가 몇 번 화들짝 놀라면서 일어난 뒤로는 승희도 나를 깨우진 않는다.

승희는 아닐 거 같고. 누구지? 일단 끌어안아 보자.

"꺅!"

아. 이 감촉은 미나구나. 좋네. 일어나자마자 미나를 끌어안을 수 있다니.

내가 침대로 끌어당겨 안자 미나는 외마디 비명을 질렀지만, 그리 싫은 표정은 아니다.

단순히 놀라서 지른 비명이었기에 안고 있는 내 품에서 작게 속삭인다.

"놀랐잖아요. 깜짝이야."

아…. 진짜 좋네. 앞으로 이런 아침이 날마다 온다는 거지?

"뭐야? 무슨 일이야!?"

헐레벌떡 세아가 내 방문 앞으로 왔다가 미나를 끌어안고 있는 나를 보고 얼굴을 살짝 굳힌다.

"아. 미안. 시작하는 거야? 나가 있을게."

"아! 무슨 소리야!"

"아니에요!"

애한테 애정행각을 들킨 부모 같은 반응을 보이며 나와 미나가 화들짝 일어났다.

"뭐…. 해도 상관없잖아…? 문 닫아줄까?"

"아냐. 일어날 거야. 일어난다고."

"맞아. 깨우러 왔을 뿐이야. 그런 거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변명하는 나와 미나가 너무 웃기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변명하고 있는지.

간단히 요기하고 각자 준비를 마친 뒤 밖으로 나갔다.

시린 겨울. 차가운 아침 공기.

전동 휠을 타고 갈까 하다가 관뒀다. 시작부터 편안함에 물들면 안 되지.

일단은 걷게 만든다. 스킬 만능 시대지만 기본적인 체력은 필수다.

"특히 승희."

"네? 헉. 헉."

몸은 가벼운 아이지만, 원체 밖에 안 나갔었고, 나와 함께 산 이후로도 거의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에 이 중에서 가장 체력이 부족하다.

"힘들어?"

"아뇨. 하아. 걸을 만해요."

"짐도 없는데 고작 이만큼 걸었다고 힘들어하면 안 돼."

"알아요. 아는데. 아유. 나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너무 집에서 뒹굴뒹굴하긴 했어. 넌 체력을 좀 길러야 해. 미나야."

"네?"

"너 날마다 스트레칭 하지? 요가랑?"

"네."

"가끔 춤 연습도 하던데."

"어…. 조깅을 못하니까요. 러닝머신 같은 것도 없고."

"그거 날마다 승희랑 세아도 같이해."

"엑?"

"나는 왜?"

"세아 너는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살았으니 기본 체력은 있지만, 더 있어야 해. 잔말 말고 셋 다 함께해."

"으…. 네."

"아오. 나보고 그…. 걸그룹 춤 그런 걸 추라고?"

"아니. 춤 연습을 하라는 게 아니고 체력 훈련을 하라고. 아무래도 미나가 그런 건 기본 이상은 알 테니까. 가능하지?"

"네. 해볼게요."

우릴 따라오느라 정신없는 승희와 투덜거리는 세아. 그리고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하는 미나.

보고 있자니 참 재밌다. 다양한 성격의 여자들. 과연 함께 살면서 문제가 없을까?

"아. 그리고. 승희."

"왜 또 나에요."

"너. 힐 마스터 했다 그랬지? 아직 그 이야기를 못 했네."

"아…. 그러게요. 네. 했어요."

"두번째 스킬. 고를 수 있지?"

"네."

"투명화. 골라. 코인은 넉넉하지?"

"네. 34만 정도."

"34만??"

"34만이라고?"

미나와 세아가 깜짝 놀라 승희를 바라본다.

승희는 변명하듯 그날 밤의 이야기를 해준다. 내가 불러서 나갔더니 코인 주머니가 있고 그걸 먹었더니 코인을 그만큼 얻었다는 이야기.

이야기를 다 마치자 나를 바라보는 두 여자.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니 그것만 들어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금방 유추할 수 있을 거다.

"왜? 실망했어?"

"아뇨…. 아니요."

"실망은 무슨."

"실망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잔인하다고 생각은 하겠지?"

"네…. 조금요."

"심하긴…. 하네."

미나와 세아의 반응은 명확하다. 하지만 따로 마음을 숨기거나 하는 모습은 아니니 다행이다. 솔직히 속으로 질리는 것보단 저렇게 표현하는 게 차라리 낫지.

"나랑 다니면 그런 모습 얼마든지 보게 될 거야. 무슨 모습을 봐도 실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으음…."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요?"

"말했잖아. 나는 내 주변의 소수를 위해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죽일 각오가 돼 있다고. 방식과 과정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 코인을 얻기 쉽게 하려고 누군가를 끌고 와서 죽인 게 잔인하다고 생각해? 어차피 죽음은 똑같아. 죽으면 끝이야. 아름답고 깔끔한 죽음은 없어."

끌고 와서 죽였다고 했지만…. 그건 매혹을 설명할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다.

물론 매혹으로 데려와서 죽였다고 하면 더 실망하겠지.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 이건 아마도 내가 죽음까지 가지고 가야 할 비밀.

"알겠어요."

"독하네요. 그러니까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가. 그렇게 능력도 갖추면서."

"너희도 가야 할 길이야. 피할 수는 없어."

미나와 세아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진다.

당연한 반응이다. 사람의 탈을 벗어야 한다는데 흔쾌히 할 사람은 그다지 없겠지.

"찍었어요. 투명화. 써봐도 되죠?"

"물론. 그런데 그건 알지? 스킬 쓰면 체력 떨어지는 거?"

"아…. 그러네. 이런…."

"써봐."

"네? 그래도…. 괜히 지금도 겨우 따라가고 있는데…."

"써."

"네…. 투명."

승희의 몸이 사라졌다. 세아는 자신도 투명화가 있으니 덤덤하지만, 미나는 그 모습을 보고 상당히 놀란다.

"우와! 없어졌어!? 진짜로?"

4년간 감금당해있던 여자라 이런 것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마냥 모든 게 신나 보이는 모습.

"풀어봐."

"네? 어떻게요?"

"해제라고 해봐."

"해제."

다시 모습이 나타났고 미나는 신기한 듯 승희를 만져본다.

세아가 미나를 툭툭 치자 미나가 돌아봤고, 세아도 투명화를 썼다.

"와! 세아도? 진짜 신기해! 어떻게 이러지?"

나는 승희에게 내가 한 모금 마신 회복 포션을 건네줬다.

말없이 받아 한입에 털어 넣는 승희.

그제야 조금 살 것 같다는 표정이 된다.

"나도 이거 배울 수 있어요?"

미나가 나에게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도 질병 해제를 마스터 하면 바로 투명화부터 배울 거야."

"왜 다들 투명화부터예요?"

미나의 물음에 승희도 궁금한 듯 나를 바라본다.

이렇게 대화하면서도 계속 걷고 있는 우리들.

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졸지에 스킬 강의가 되겠지만, 잘 들어둬. 투명화는 가장 큰 생존 스킬이야. 그리고 가장 좋은 공격 수단이고."

묵묵히 걸으며 얌전히 이야기를 듣는 승희와 미나. 세아는 한번 들었던 내용이라 그런지 그렇게 주의 깊게 듣고 있진 않은 모습.

"스킬 리스트는 다들 봤지?"

고개를 끄덕이는 세 여자.

"대부분의 단일 타겟 스킬은 상대방을 '지정' 해야 해. 하지만 투명화는 보이지 않으니 지정할 수 없어. 그것만으로도 생존율이 급격히 올라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여자들.

"공격도 마찬가지. 소리와 기척만 조심하면 상대에게 접근하기 쉽지. 무엇보다 상대의 의표를 찌를 수 있어. 더없이 좋은 공격 수단이지. 굳이 다른 공격 스킬이 없더라도 몰래 쓱싹 해치울 수 있으니까. 게다가 봐봐. 이런 걸 들고 있다면 어떨까?"

나는 내 배낭에 매달린 석궁을 가리켰다.

다들 그걸 보더니 '아' 하며 뭔가 깨달은 듯한 표정을 짓는다.

"다가갈 필요도 없어. 석궁 활시위 소리가 들렸을 때는 이미 볼트가 박힌 다음이겠지. 물론 명중한다는 가정하에. 그만큼 투명화는 압도적으로 사기야. 파훼법이나 대안도 거의 없지."

"그럼 총은요? 석궁보단 총이 더 좋지 않아요?"

미나가 말하자 다들 '그러게?'라는 표정을 짓는다.

나는 그런 그녀들을 향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니. 총은 없어."

"네?"

"내가 이 세계가 이 꼴이 난 뒤로 가장 먼저 한 시도 한 것이 총을 구하는 거였어. 스킬? 그딴 게 뭐가 필요 있어? 총 한 방이면 뭐든 끝인데. 아무리 우리나라가 총기 보급이 힘든 나라라고 하더라도 총이 전혀 없는 건 아냐. 사냥용 엽총도 있고 경찰들이 들고 있는 권총도 있지. 그리고 우리나라에는 총을 잔뜩 들고 있는 단체가 있잖아?"

"아. 군대!"

"그래. 군대. 총이 가장 확실한 살상 병기라는 건 굳이 강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지. 나는 군대를 다녀오진 않았지만, 소총 같은 걸 쏘지 못할 거란 생각은 안 했어. 그래서 구하러 가봤지. 근처에 있는 군부대로. 근데 아무도 없었어. 총도 군인도 아무도."

"네? 그래요? 왜요?"

다들 처음 듣는 이야기 인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모르지. 나도 몰라. 군부대는 정말 말 그대로 텅텅 비어있었어. 살고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어디론가 사라진 것처럼."

"거기만 그랬던 거 아니에요?"

"아니. 그렇지 않아. 다른 곳도 마찬가지였어. 군부대만 그런 게 아냐. 총포상, 경찰서, 조폭 사무실, 뭐 하여간 있을 만한 곳은 다 뒤져봤지. 결론은 그거야. 화약 무기는 존재하지 않게 됐어."

"어? 그래요? 총만 아니라 전부다?"

"그래. 수류탄, 기관총, 탱크 뭐 아무튼, 우리가 알고 있는 대량 학살 무기는 하나도 없어. 그리고 왜 그렇게 됐는지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고."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모르지 나야. 하지만 유추해볼 수 있지. 다들 기억나나? 이 세상이 멸망하게 된 그 첫날?"

"아…."

"으…."

"으음."

다들 다채로운 신음을 내며 입을 다문다.

다채로운 신음이라고 하니 뭔가 야하네. 아니…. 야한 건 내 마음인가.

"70세 이상의 플레이어는 모두 삭제 처리됩니다. 더는 신규 플레이어의 유입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할 수 있지. 자. 생각해보자고. 어떤 놈들이 있을 거야. 저런 짓을 태연하게 저지를 수 있는 놈들. 모든 사람을 순식간에 사라지게 할 수 있지만, 조건을 걸어놓은 놈들. 그놈들의 목적은 뭘까?"

아무 대답이 없는 세 여자.

"내가 생각하기엔, 이놈들은 우리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면서 팝콘이나 씹고 있다고 봐. 이게 오랫동안 생각해온 내 결론이야. 그런 놈들이 제일 재미 없는 상황이 뭘까? 화약 무기지. 두두두두 피융 펑. 그리고 핵미사일이 쾅. 세계는 멸망했습니다. 재밌을까?"

이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나? 다들 신선한 반응들이네.

"사람을 삭제하는 걸 아주 간단하게 하는 놈들이지. 그리고 이런 말도 안 되는 능력들을 줄 수 있는 놈들이고. 세계에 있는 화약 무기들을 전부 없애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내 추측은 그거야. 그리고 지금까지 생각했을 때 반박의 여지는 없어. 이게 맞다고 봐."

"그렇군요…."

미나의 대답. 왠지 목소리에 힘이 없다.

"뭐, 나름 나쁘지 않지. 총이 있으면 정말 더럽게 끔찍했겠지. 다들 이렇게 나올 엄두도 못 냈을 테니까. 언제 어디서 저격당할지 알고 밖을 나와? 그러니 총은 생각하지 않아도 될것 같아. 다른 방법을 찾아야지."

"다른 방법이요?"

"그래. 어차피 가는 동안 할 것도 없으니 내가 생각하는 것들을 좀 더 이야기해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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