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62화 (162/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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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먼저. 오빠한테는 이미 말했었죠. 저희 셋 다 공평하게 대해줘야 해요. 자로 잰 것처럼 정확하게는 아니더라도 누구 하나가 아쉬움을 느낄 정도로 소홀해진다던가 누구 하나를 편애해서 다른 두 명이 질투하게 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래. 그건 나도 이해해."

"고마워요. 그리고 비밀 만들지 말아줘요. 다른 둘에게 말하지 못하는 말이면 남은 하나에 말하지 마요. 셋 다 모르거나 셋 다 알아야 해요. 그게 공평이니까. 저희는 비록 만난지 하루밖에 안 되긴 했지만 서로 이야기 할 건 다 이야기했어요. 물론 미처 아직 다 못한 말도 있겠지만 그건 시간이 해결해 줄 거에요. 그러니 오빠도 그렇게 해줘요."

"그래. 그것도 문제없지."

"그리고 우리는…. 오빠의 트로피가 아니에요. 전리품이 아니라고요. 살아있는 사람이고 감정과 존엄성이 있는 인간이에요. 섹스 파트너나 장난감이 아니라고요. 아시겠어요?"

"그래. 뭐 그렇게 생각하진 않으니까."

"고마워요. 그런데 앞에 말한 것들은 저희가 제대로 한사람분의 역할을 할 때의 이야기에요. 저희끼리 이야기해서 결론 낸 이야기지만, 저희는 아직 제 역할을 못 하고 있어요. 그러니 방금 말했던 것들은 아직 저희가 주장할 수 없는 것들이죠. 그러니 지금은 심한 말로 오빠에게 기생하고 있는 짐이나 마찬가지예요. 식량만 축내고 있는 더부살이 식객이죠."

"왜 그렇게 생각하지? 조금 과하게 생각하는 거 같은데? 내가 그렇게 생각 안 하는걸?"

"아니요. 오빠가 어떻든 간 저희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러니 저희가 각자 제 역할을 할 수 있을 때까진 저희에게 아무런 권리가 없어요."

"하아. 왜 내가 괜찮다는데 너희가 난리야. 미나랑 세아도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미나와 세아.

나 참…. 골치 아픈 아가씨들이네.

"그래…. 그럼 뭐 하나만 물어보자. 너희가 생각하는 한 사람분의 역할이란 건 뭔데?"

"지금 당장 쫓겨나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을 만큼의 능력요."

"너무 막연한 거 아냐? 나도 지금 나가서 바로 죽을 수 있는 게 이 빌어먹을 세상인데?"

"확률이 낮잖아요. 저희는 이대로 나간다면 금방 죽을 확률이 몹시 높고요."

"그러니 막연하다는 이야기지. 기준이 없잖아."

"그 기준은 오빠가 정해야죠."

"내 기준은 너무 높을 텐데? 그리고 전적으로 내 기준에 따르는 거야? 불만 없이?"

"네."

"하…. 좋아. 무슨 말인지 알았어. 근데 먼저 말해둘 게 있어."

"네?"

"일단, 나는 너희들을 내 짐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애초에 전제부터 틀렸어. 너희들은 섹스 파트너나 내가 원할 때 성욕을 풀기 위해 곁에 두는 게 아니야. 물론, 그런 이유도 있긴 있겠지. 없다고 하면 내가 사내새끼가 아닌거지.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냐. 그러니 아까 말했던 권리는 지켜주겠어. 그 정도는 나도 생각하고 일을 꾸민 거니까."

"하지만…."

"하지만이고 뭐고 싫어. 너희들이 착각하는 게 있는데. 나는 너희를 얼마든지 내 마음대로 다룰 수 있었어. 승희는 겪어봤을 텐데? 처음에 나에게 당했던 짓들?"

승희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고 미나와 세아도 이야기를 들었는지 내 시선을 피한다.

바이브레이터와 함께 했던 즐거운 시간들. 승희를 야한 여자로 만들어 줬던 보람찬 시간들.

씨발 이렇게 말하니 진짜 변태 새끼네. 물론 변태 새끼가 맞긴 하지만.

"나는 세상이 이렇게 되기 전에 제대로 된 사랑을 해본 적 없어. 사랑은 고사하고 연애도 못 해봤지. 그러니 정상적인 사랑과 연애라는 건 몰라. 그래서 참고할 만한 것들도 없어. 내게 사랑과 연애는 글과 영상으로만 봤던 판타지일 뿐이니까."

잠시 말을 멈춘다. 물이라도 한잔 마시고 싶은데. 보통 이런 이야기 할 때는 마실 거 정도는 앞에 두고 이야기 해야 하는 거 아냐?

어차피 마실 거라고 해봐야 수돗물밖에 없지만.

"게다가 어차피 세상은 망해버렸어. 그러니 이전 시대의 연애와 사랑은 내게 아무런 의미가 없어. 나는 내 맘대로 할 거야. 나는 밖에 나가서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이고 어떨 땐 여자들을 강간하고 죽여. 하지만 돌아와서는 너희들에게 따듯하게 대하지. 어차피 정상은 아냐. 아니 정상이란 기준이 없어졌지. 말을 너무 자극적으로 한 건 미안하지만 너희도 알아야 해. 내가 그런 사람이고 어떻게 보면 미친놈 같아 보이지만 적어도 너희에겐 이전 시대에서 통용되던 정상적인 관계를 적용하고 싶어. 무슨 말인지 이해해?"

아무 말이 없는 세 여자.

그래. 오히려 단박에 대답했으면 내가 못 믿었을 거다.

"나는 흔히 말하는 내로남불의 끝이라고 볼 수 있지. 아니면 이율배반적일 수도 있고. 뭐. 그렇게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 그냥 간단하게 생각하면 돼. 나는 소수의 몇 명을 위해서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세상 모두를 죽일 수 있어. 그리고 너희는 그런 소수에 속해있고. 그러니 쓸데없이 자신들을 비하하지 않아도 돼."

역시 아무 말 없는 여자들.

하…. 참 복잡하게 사네.

"말이 너무 길었지? 간단해. 편하게 대해. 나도 편하게 대할 할 거니까. 복잡하게 살 필요는 없어. 나는 너희들과 함께 있으면서 심오하게 머리 굴리며 살고 싶지 않아."

"네."

"네."

"알았어요."

"더 할말 있어?"

"그게…. 있긴 한데."

우물쭈물하는 승희. 뭔 말을 하려고 여태까지 당당하게 말하던 애가 저렇게 뜸을 들여?

"그…."

"아오. 답답해. 당당하게 말해야지! 인제 와서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오빠. 자는 건 어떻게 할 거예요?"

답답했는지 세아가 화끈하게 말한다.

방금까지 섹스 파트너 어쩌구 그랬으면서 인제 와서 부끄러워하는 승희나 잠자코 있으면서 얼굴을 붉히는 미나는 그런 세아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바라본다.

"어…. 잠자는 거 말고 섹스 말하는 거지?"

"네. 생각한 게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러게. 어떻게 하지?"

"그걸 저희한테 물어보면 어떻게 해요!?"

"음…. 깊게 생각한 적은 없는데."

"아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이렇게 모아 놓고 살 생각을 했을 때 그것부터 생각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너무나 당돌한 세아의 기세에 나마저 위축되는 느낌이다.

근데 세아의 말은 일리가 있다. 그리고 상당히 중요한 것이기도 하고.

"공평하게라고 했으니…. 돌아가면서 해야 하나?"

"이 문제는 우리끼리 정하질 못했어요. 어쨌든 남자는 오빠 하나뿐이니까. 그러니 확실히 정해요. 미나 언니랑 승희도! 누군 많이 했네! 누군 못했네! 나는 왜 이리 적게 하냐! 그러면서 나중에 투덜거리지 말고."

벙커 안은 처음 느껴보는 당혹감으로 물들었다.

다같이 모여서 섹스 일정을 짜야하는 현실이라니. 이게 진정한 판타지네. 행복한 고민이야.

"3일간 돌아가면서 자고 일요일은 쉬고…. 그러나?"

내가 조심스럽게 말하자 미나가 입을 연다.

"그…. 꼭 그럼 정해진 날에만 해야 하는 거예요? 갑자기 너무 하고 싶으면요…?"

얌전한 느낌의 미나가 저렇게 말하자 승희랑 세아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본다.

아…. 겉보기랑 좀 다를 수 있구나…. 라고 생각되는 표정?

말한 미나도 말해놓고 부끄러운지 다시 수줍은 모습이 되었다.

이것 참…. 골치아프네.

"근데…. 그렇게 날짜를 정해놓고 하는 건 너무 좀 그렇지 않나요? 미나 언니 말도 일리가 있는데…. 막 하고 싶은 날이 있을 거 아니에요. 게다가 오빠가 날마다 집에 있는 것도 아니고."

승희의 말에 다들 생각하는 모습이 되었다.

맞는 말이다. 내가 하루 넘겨서 원정 다녀오는 게 적은 것도 아니고.

"그럼, 하고 싶을 때 하고 제일 적게 한 사람이 우선권이 있는 거로?"

세아의 말에 이번엔 미나가 중얼거린다.

"그럼…. 매번 했다는걸 어디에다가 표시해놔야 하는 거야?"

"윽. 그건 좀 그런가."

"근데…. 그렇게 세지 않으면 공평한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잖아?"

승희의 말에 또다시 다들 입을 다문다.

침묵. 다들 말이 없다.

어디서 이런 광경을 보기라도 했으면 참고라도 할 텐데. 다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니 뾰족한 방법이 없다.

그렇게 아무 말이 없자 내가 결국 한마디 했다.

"그냥. 다들 섭섭함 못 느끼게 내가 잔뜩 해주면 되잖아?"

"와…. 패기 봐."

놀란 표정의 승희.

"대단한 자신감이네요."

존경스럽다는 표정의 미나.

"짐승. 변태."

약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하는 세아.

"뭐라고 하든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중요한 문제긴 한데 이런 걸 막 정해놓고 한다는 것 자체가 조금 웃긴 거 같아."

"네."

"그래요."

"잘 할 수 있겠어요? 약간 못 미더운데."

각양각색의 반응. 나는 이제 이런 여자들과 함께 살게 되는 건가.

좋네. 아주 좋아.

"그건 그렇고. 내가 말할 게 더 있는데."

내 말에 다들 나를 집중해서 바라본다.

세 여자가 나를 보는 모습이…. 너무 사랑스럽다.

일은 잘 풀렸다. 이보다 더 좋게 풀리기도 힘들지.

그런 것을 자축하는 의미로 이대로 다들 알몸으로 만들고 뒹굴고 싶지만…. 좀 참자. 그건 아직 일러.

"두 가지 정도 되는데. 먼저 이사에 관한 이야기야."

고개를 끄덕거리는 세 여자.

"어제랑 오늘 해서 함께 살만한 곳들을 확인하고 왔어. 일단 봐둔 곳은 두 군데. 거기가 최종 종착지는 아니겠지만 지금 여기보단 훨씬 넓지. 나는 너희들이 직접 보고 둘 중 한 군데를 결정했으면 좋겠어."

"멀어요?"

승희가 물어봤고 나는 지도를 가져와서 펼쳐놓고 보여줬다.

"이쯤. 여기가 지금 위치. 여기가 물류센터. 여기 달천동이라고 돼 있는 곳. 여기랑 이이리. 여기."

다들 머리를 맞대고 모여 지도를 본다.

사실, 지도를 본다고 뭐 알게 되는 건 없다. 그냥 아…. 여기쯤이구나…. 그 정도지.

"그래서 이른 시일 안에 다들 같이 가서 봤으면 좋겠어."

"그래요."

"알았어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그래. 빠를수록 좋지. 그럼 그건 그렇게 하고, 두번째는…. 스킬."

"아."

다들 조용한 가운데 승희가 나지막하게 감탄을 낸다.

자기가 소리를 내놓고 뻘쭘해서 바로 입을 다무는 승희.

"너희가 말했지? 한사람 분의 제 역할을 하고 싶다고. 그럼 너희들은 스킬을 빨리 배워야 할 필요가 있어. 지금은 힘없는 여자일 뿐이니까. 그러니 스킬을 조금 빠르게 올려야 할 거 같아. 다소 무리해서라도 말이지."

셋 다 고개를 끄덕인다.

아마 이건 자신들도 통감하고 있겠지. 이미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거다. 자신들의 힘이 미약하다는 것.

실력도 각오도 노력도 부족하다는 것을.

"이사와는 별개로 지금부터 강도 높게 스킬을 숙련할 거야. 그리고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익숙해져야 해. 승희와 세아는 이미 해봤지만, 미나는 아직 못했지. 앞으로는 셋 모두 예외 없어. 비인간적이고 존엄성을 해치게 될지도 모르지만…. 익숙해져야 해.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벙커 안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는다.

사람 죽이는 것을 익숙해지라고 말하는 남자와 그것에 대해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동의하는 세 여자.

그리고 그들은 한 집에 모여 산다.

정말 빌어먹을 세상이 만들어준 어처구니없는 모습이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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