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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의
멀티에 도착하니 이제 겨우 네 시.
들어가기엔 조금 애매한 시간이다. 밖에서 시간을 조금 보내고 들어가야 하나?
아. 왜 이리 눈치가 보이냐. 무슨 죄인도 아니고.
아니다. 죄인 맞지.
따지고 보면 죄인 맞다. 물론 그 죄를 물을 사람들이 없어졌지만.
법도 도덕도 신도 아무도 나의 죄를 사하거나 벌할 수 없다.
그런 세상이잖아? 지금 세상은.
들어가는 시간을 조금 미루면, 나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미룰 수 있겠지.
그래서야 무슨 의미가 있나?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인데.
피할 수는 없다.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다.
그래도…. 그래도 조금 밖에서 서성거려본다.
5시. 5시에 들어가자. 그럼 되겠지. 딱 좋을 것 같아.
탐지에 느껴지는 세 명의 기척. 셋 다 움직인다. 다행이다.
적어도 누구 하나가 열 받아서 남은 두 명을 다 죽인 건 아니라는 소리잖아.
아니면 누구 하나가 다른 두 명을 제압해놓고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고.
아…. 생각이 왜 이리 부정적이냐. 그만큼 자신 없다는 건가?
세상에 나 같은 고민을 두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있겠지. 내가 상상하는 건 어디선가 이미 현실로 이뤄져 있을 테니까.
세 명이 뭐야. 한 열 명씩 거느리고 사는 새끼도 있겠지.
그 새끼 불알…. 괜찮긴 하냐? 정액이 남아있질 않겠는데.
탐지 끝에 세 명의 기척이 들어가게끔 유지하며 주변을 돌아본다.
고요한 도시. 침묵의 도시.
사람은 없다. 흔적도 없다. 내가 다 쓸어버렸다.
이곳은 살인도 강간도 약탈도 없는 청정 구역. 사람이 없으니까 범죄도 없다.
범죄…. 범죄가 아니지. 이제는 생존이다.
범죄란 말은 법을 어기고 사회와 질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행위다.
법도 없고 사회도 없고 질서도 없으면 그 행위는 범죄라고 할 수 없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잡생각이 많아지는 거 보니 쫄리긴 한가보다.
어휴. 씨발. 답답하다 진짜.
평소 같으면 최악의 상황을 미리 가정하고 거기에 따른 대안을 전부 마련해 놓을 텐데.
지금은 머리가 안 돌아간다.
막말로 지금 들어갔더니 승희와 미나, 세아가 안돼요. 안 해요. 이래 버리면 내가 할 말이 없다.
그저 입맛만 다실 뿐이겠지. 그리고 앞으로 그녀들과 다시 원래대로 돌아가긴 힘들 거다.
하아…. 세상이 멸망했을 때보다 더 착잡한 거 같다.
돌아버리겠네. 정말로 돌아버리겠어.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없을까?
딱 들어갔더니 세 명이 전부 알몸으로 있는 거야.
그리고 나에게 말하는 거지.
왔어요, 오빠? 이리 와요. 이러면서 셋이 나에게 안기는 거야.
그리고 알몸의 세 여자는 내 옷을 벗기고 내 온몸을 입으로 핥으며…. 에라이 씨발.
지랄 염병을 하네. 말이 되냐 그게.
만약 저렇게 한다면 무서워서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야? 셋 다 정상이 아니라는 건데.
모르겠다. 시간은 왜 이리 안가냐. 이제 겨우 20분 지났네.
담배. 이럴 때 담배를 피우는 거구나.
이제야 알 것 같다. 담배 피우는 놈들의 심리를.
담배를 배워놨으면 지금 도움이 됐을까? 아니, 한번 피워볼까? 어차피 편의점에 가면 담배는 널렸을 텐데.
마침 근처에 보이는 편의점 하나.
들어가 봤는데 담배가 없다. 이미 누군가 다 털어갔다.
널린 게 아니었구나. 담배 피우는 놈들은 지금 다 어떻게 살고 있지?
아. 담배 생성 스킬이 있지. 그놈들은 행복하겠네.
적어도 폐암으로 뒤지진 않을 거 아냐. 아. 질병 해제 스킬로 폐암도 없앨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보니 흡연자에겐 천국과 같은 곳이네. 건강 생각 않고 미친 듯이 피워대도 되잖아.
그건 술도 마찬가지네. 음…. 이제야 쓰레기 같다고 생각했던 생성 스킬들이 조금 이해가 간다.
건강 악화 없이 무제한으로 즐길 수 있다니…. 생각보다 좋잖아?
음식만 해결할 수 있고 생명의 위협만 없다면 그 누구보다 이 세상을 즐기고 있겠는데?
천국이 따로 없네. 여기가 천국이잖아?
잡생각을 하는 건 효과가 좋았다. 시간이 제법 빨리 지나갔다.
4시 52분. 벙커로 가자. 이젠 들어가도 되겠지.
벙커에 가까워질수록 걸음이 조금씩 더뎌진다.
어휴 병신 새끼. 쫄보 등신 머저리.
당당하게 가자. 씨발. 남자답게 굴자고.
셋이 거부하면 그냥 내 맘대로 하자. 뭐, 언제부터 사랑받고 살았다고. 씨발.
벙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가장 먼저 맡은 냄새는 고소한 밥의 냄새였다.
지금 막 지은 밥 냄새. 그러고 보니…. 내가 점심을 뭘 먹었지?
"왔어요? 적당히 맞춰서 왔네요. 살짝 이르긴 하지만. 일단 씻어요. 씻고 나와요."
밝은 표정의 승희, 그리고 주방에서 나를 바라보는 미나. 거실에서 상을 닦는 세아.
뭐야. 뭐지? 이 평화로운 광경은? 내가 꿈을 꾸는 건가?
배낭을 내려놓고 옷을 벗을 때도 약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평소에 승희랑 있을 때였다면 그냥 훌렁훌렁 벗고 맨몸으로 씻으러 갔을 텐데, 지금은 왠지 그러기가 민망했다.
옷을 손에 들고 화장실로 갔다.
적당한 온도의 물이 머리에 쏟아지자 현실인 게 확실하게 느껴진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고 그저 기계적으로 씻기 시작한다.
머리를 감고 몸을 씻고 이를 닦는다.
아. 밥 먹을 건데 이는 왜 닦았대.
수건으로 머리를 닦고 몸의 물기를 적당히 훔치고 가지고 들어간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오니 벙커 안이 약간 훈훈한 느낌이다.
주방에서 요리를 하고 있어서 그런가? 평소의 건조하고 살짝 냉랭한 느낌이 아니다.
습습하고 온기가 느껴지는 벙커.
그리고 단지 습기와 열기만 가득 차 있는 게 아니다.
복잡한 감정과 어색함, 그리고 기묘한 친밀감.
"앉아요."
세아가 나에게 말한다. 나는 얼떨결에 상에 앉았다.
식탁용으로 종종 쓰는 탁자는 그리 크지 않다. 그 앞에 앉아있자 세아와 승희가 이것저것을 옮긴다.
밥, 수저, 계란후라이, 통조림 햄 구운 것, 물류센터에서 받은 파김치, 계란말이. 양파 장아찌.
그리고 미나가 들고 오는 찌개.
미나가 해줬던 밥상의 업그레이드 버전인가.
승희와 미나, 세아가 각자 상에 한쪽을 차지하고 앉았다.
맞은편에 앉은 승희, 왼쪽에 미나, 오른쪽에 세아.
"먹죠."
미나가 말하고 승희와 세아가 바로 대답한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너무나 자연스러운 모습. 나도 얼떨결에 수저를 든다.
"잘 먹을게."
오자마자 밥을 먹게 될 줄 몰랐다.
뭔가 이야기를 한 다음 먹을 줄 알았는데.
어쨌든 열심히 차린 거 같으니 먹는다. 어휴. 차려져 있으니 먹는다는 건 너무 건방지잖아.
감사합니다! 하고 코를 박고 먹어도 시원찮은데.
밥은…. 왜이렇게 맛있지.
처음 수저를 뜰 때만 해도 이런 상황에서 밥이 넘어가겠냐?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느껴지기나 하겠냐? 했는데 너무 맛있어서 밥 먹는 데 열중해 버렸다.
"밥…. 더 있나?"
"네. 더 줘요?"
"응. 반 그릇만 더."
미나가 밥그릇을 받아서 가져가더니 도로 가져온다.
하. 씨. 미치겠네. 이렇게 우적우적 처먹고 있을 때가 아닌데…. 너무 맛있잖아.
승희와 세아도 정말 맛있게 밥을 먹는다. 그런 그녀들을 바라보는 미나는 왠지 엄마 미소를 짓고 있다.
우아하고 세련된 엄마와 약간 덜렁거리는 큰딸 승희, 까칠하지만 속은 따듯한 막내딸 세아 같은 느낌.
"큭."
밥 먹다 말고 내가 웃으니 세 여자가 나를 동시에 쳐다본다.
"왜요? 뭐 이상해요?"
혹시 음식에 문제가 있나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물어보는 미나.
"아니. 아니야."
이런 소리를 하면 다들 어이없어하겠지. 그냥 속으로만 생각하자. 속으로만.
밥을 다 먹고 빈 그릇들이 치워진다.
상을 깨끗하게 치우고 빈 상을 세아가 치운다.
승희와 미나가 설거지를 하러 가고 세아도 그쪽으로 갔다.
혼자 남겨진 나는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얌전히 있었다.
뻘쭘하고 어색하고 약간 불편한 기분.
가시방석이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건가?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았어. 이 정도면 굉장히 좋은 거 아냐?
근데 다들 아무 말이 없다. 그게 불안하다. 아오…. 걱정이 끊이질 않네.
좋게 생각하자. 좋게. 이게 마지막 만찬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의연하게, 태연하게 있자고. 당당하게. 구차하지 않게.
설거지를 마친 세 여자가 주방에서 나왔다.
그리고 내 앞에 앉았다.
1 대 3. 윽. 쪽수로 밀린다.
그래도 침착하자. 어차피 내가 다 감당해야 할 일이잖아.
나를 바라보고 나란히 앉은 세 여자.
드디어…. 시작인가?
"밥은 맛있게 먹었어요?"
미나의 질문.
"어. 맛있었어. 고마워."
"반찬은 둘이 도와줬어요. 셋이 같이 만든 거예요."
"응. 다들 고생 많았네."
씨발…. 맞선도 이 정도로 어색하진 않겠다. 이게 뭐야 대체.
세아가 승희를 바라보고 미나가 세아의 옆구리를 살짝 찌른다.
아주 자연스럽고 친근해 보이는 분위기.
고작…. 하루만에 저렇게 되는 게 가능한가?
"크흠. 대표로 제가 이야기할게요."
승희의 말에 나는 약간 구부정했던 허리를 폈다.
나도 모르게 자세를 바로 하게 되네. 이것 참….
"먼저 결론부터 말할게요. 저희 셋은 함께 사는 것에 모두 동의했어요."
승희의 말에 잔뜩 안개가 껴있던 머릿속이 확 하고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게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세 여자는 나를 보고 피식하고 웃었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에요?"
"당연히 좋아해야지. 설마 슬프겠어?"
"암튼, 고작 하루밖에 이야기하진 못했지만, 나름 많은 것들을 서로 이야기했어요. 셋 다 따로 살아온 시간이 길고 겪은 일들이 다르긴 하지만 그래도 서로 괜찮다고 생각을 했고 그렇게 결정했어요. 단."
왜 끝에 저렇게 사족을 다는지…. 그냥 좋게좋게 이야기하지.
"함께 살면 뭔가 서로 맘에 안 드는 부분이 생기겠죠. 각자 자유롭게 살다가 모여서 살게 되면 분명 부딪치는 것들이 있을 테니까. 그래서 서로 절충하고 결정하는 것들이 있을 거예요. 오빠는 거기에 맞춰 줘요. 물론 저희도 오빠의 의견을 수용할 테니까."
"어…. 그건 당연하지."
큰 잡음 없이 함께 사는 것에 동의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에겐 아무런 걱정이 없어졌다.
일어나서 춤을 추고 싶은 기분이지만 아무도 내 춤 같은 건 보고 싶어서 하지 않을 테니 당연히 참는다.
그럴 분위기도 아니고.
아직 세 여자는 뭔가 할 말이 많아 보인다.
왠지…. 긴 저녁이 될것 같다. 그래도 그리 걱정은 되지 않는다.
나에게 터무니없는 것을 말하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