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멸망한 세상의 수면술사-157화 (157/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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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멍하니 앉아서 세아가 오기를 기다린다.

이게 맞겠지?

물꼬는 내가 텄지만 나도 모르는 흐름이 생겨 어쩌다 보니 급류에 휩쓸리고 있는 기분이다.

게다가 이미 돌이킬 수도 없다.

승희랑 미나가 만나버린 이상 이 상황은 끝까지 가야 하는 거다.

중간에 탈출하거나 돌이킬 수 없는 상황.

이제 와서 고민해봐야 이미 내가 뭘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잖아.

물살에 파묻히지 않게 뭐라도 꽉 잡고 정신 차리는 수밖에 없어.

기척에 사람이 잡힌다.

물류센터에서 나오는 거 보니 세아가 분명하다.

기척이 다가오지만 보이는 것은 없다.

이 녀석 투명화 쓰고 오는가 보네.

걸음 소리는 하나도 나지 않는다. 여기는 눈이 오지 않았는지 발자국도 남지 않는다.

음. 지금까지는 100점짜리 접근이야. 어디, 가까이 와서도 기척을 잘 숨기나 볼까?

사람은 생각보다 많은 기척을 남긴다.

숨소리, 옷깃 스치는 소리, 발소리, 하다못해 걸을 때 몸에서 두둑 거리는 소리까지.

정말 별거 아닌 소리가 엄청나게 크게 들릴 때가 있다.

그런 것까지 고려해서 조심스럽게 걸어오고 있는 세아.

내 앞까지 다가왔다.

올…. 대단한데? 내가 탐지가 없었으면 절대 못 알아챘을 거다.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

나는 그대로 벌떡 일어나 세아를 끌어안았다.

"꺅! 뭐야! 어떻게 알았어!"

차가운 패딩의 감촉. 그리고 그 푹신함 안에 느껴지는 세아의 가는 허리.

촉감은 느껴지지만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제."

투명화를 푼 세아. 찬바람에 빨개진 볼. 귀여운 녀석.

"춥지?"

"뭐야. 어떻게 알았냐니까요?"

"말했잖아. 탐지 있다고."

"탐지를 항상 써요?"

"틈 날 때마다. 심심하면. 습관적으로. 내킬 때마다."

"진짜 변태네."

"준비는 다 하고 왔어?"

"아니.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여요. 여길 나오라니. 승규 아저씨가 제대로 전달한 거 맞아요?"

"어. 오늘부터는 같이 살자."

"같이…. 살자고? 나랑 단둘이 산다는 소리는 아니죠? 그…. 전에 말한 그 여자들이랑 같이 산다는 거죠?"

"맞아."

"미치겠네. 무슨 그런 걸 이렇게 갑자기…."

"두 명은 아까 처음 만났고 이제 너만 가면 돼."

"아니…. 두 명이 이미 만났다고요? 그 두 명도 그 이야기에 동의한 거예요?

"어."

사실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이 어그러질 것 같지는 않다.

내가 너무 낙관적인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인제 와서 일이 어긋나거나 잘못될 것 같진 않다.

어떻게든 될 거다. 다만 그 완성도의 차이일 뿐.

"다들 미쳤어. 미쳤다고. 세상에 미친년은 나밖에 없는 줄 알았는데."

"그만하고 가자. 춥잖아. 짐 줘. 내가 들어줄게."

"됐어요! 내 짐인데 내가 들어야지. 뭐 별로 무겁지도 않은데."

이 거지 같은 세상에서 4년간 혼자 살아온 여자다.

물론 그다지 안 좋은 일도 있었지만, 혼자서 살아남은 것 자체가 대단한 여자.

그러면서도 한없이 귀여운 여자.

세아가 짊어지고 있는 짐을 날름 가져가 내 어깨에 멨다.

나를 바라보더니 '하.' 하고 짧게 한숨을 내쉬었고 나는 그런 세아의 손을 잡아서 내 주머니에 넣었다.

다시 한번 나를 바라보지만, 손을 빼거나 하진 않는다.

오히려 주머니 안에서 깍지를 끼는 세아.

일상이 츤데레야 아주.

느긋하게 도로의 중앙선을 가운데 두고 나란히 걷는 나와 세아.

인간의 관리 없이 네 번의 겨울을 맞는 도로는 치열하게 자연과 싸우고 있다.

군데군데 금이 가 있고 아스팔트가 들려있는 부분이 보인다.

그래도 인간이 이룬 문명의 흔적은 생각보다 강하다.

아직까지는 잘 버티고 있는 모습.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인간이 만든 것 중 나약하게 버티지 못하고 사라진 것들은 많다.

이념, 사상, 도덕, 윤리, 가치관.

영원할 것 같던, 그리고 많은 사람을 서로 싸우게 했던 그런 것들은 생존 앞에 모두 말끔하게 사라졌다.

역시 사람은 배가 부르면 저런 쓸데없는 것을 만든다니까.

배고프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들.

인간의 삶은 어떻게 배를 불리냐의 싸움이다.

생각보다 간단하고 별거 없다.

"어휴. 얼마나 더 가야 해요?"

"이제 반 정도."

"머네. 30분은 걸은 거 같은데."

"늘 나랑 다니던 거리랑 비슷한데."

"도살장으로 기어들어 가는 소의 기분이라 그래요."

"니가 왜? 소는 나지."

"오빠는 사형수고."

"윽. 그런가."

"아…. 싫다. 진짜. 내가 왜 그런 말을 했지."

"미안."

"아! 사과하지 말라고요! 일은 다 저질러 놓고 사과하면 끝이야!?"

"미안."

"아오. 말 진짜 못 알아들어. 정말!"

세아도 생각이 복잡해 보인다.

미나는 오히려 차분했던 거 같은데. 그런 거 보면 겉으로 가장 강한 척 하는 세아가 사실 속은 제일 여린 게 아닐까?

가장 여려 보이는 미나가 속은 가장 강한가? 아니면 당당하게 이 상황을 주도하고 있는 승희인가?

모르겠다. 머리가 복잡해서 그런 거에 신경 쓸 여력이 없다.

벙커 근처까지 오자 기척이 둘 느껴진다.

승희와 미나. 다행히 기척이 하나만 있거나 둘 다 없거나 하는 일은 없다.

일단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럴 처지가 아니지.

가까워지는 벙커.

입구로 가자 세아 역시 미나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지하 비밀 벙커!? 와. 이런 멋진 곳에서 살았단 말야?"

뭐지. 다들 왜 이리 지하 벙커에 대해 이렇게 열광하지?

남자라면 이해가 가는데…. 남자들은 이런 거에 환장하거든. 지하 벙커라니. 이름만 들어도 설레잖아.

"아. 세아야. 이거 잠금 해제해봐."

"해제."

철컥.

자연스럽게 벙커 입구 잠금장치가 풀린다.

역시. 저것도 사기 스킬중에 하나야.

안으로 들어가자 승희와 미나가 벙커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맞이한다.

뭐지? 왜 이리 사이가 좋아 보이지? 아니…. 좋아 보이는 건 좋은 거지.

근데 갑자기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약간 경멸의 눈빛으로 바뀌었다.

"이…. 변태가…."

승희가 어이없다는 말투, 그리고 황당한듯한 미나의 표정.

아…. 설마. 세아를 보고 오해하는 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얘는 스무 살이야. 실례되는 생각 하지 않았으면 해."

"에…?"

"스무 살요?"

승희와 미나가 놀란다. 역시 그것 때문에 나를 그런 식으로 바라본 거야? 아무리 그래도 설마 내가 미성년자를 데리고 왔을 리가 있겠어?

그렇게 생각하는데 세아도 미나를 보더니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어…!? 티비에서 봤는데!? 아니…. 티비 맞나? 어디서 봤지?"

"페어리나인. 송미나."

"아! 맞아. 걸그룹! 에에에엑!?"

역시 미나를 보고 놀라는 건 마찬가지구나.

하긴 누구나 저런 반응을 하는게 당연하겠지.

아직 나를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승희.

그리고 약간 민망해하는 미나.

신기한 듯 미나를 바라보다가 나를 보며 '뭐지 이 사람은?'이라는 표정을 짓는 세아.

결국, 세 여자가 만나게 됐다.

과연…. 내 운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오빠."

단호한 승희의 목소리.

"응."

"밖에서 할 거 있어요?"

"어?"

"하루 정도만 어디 밖에 있다 와봐요. 여자들끼리 이야기 좀 하게."

"어어???"

승희의 말에 미나가 별말 안 하는 거 보면 그사이에 둘이 그런 합의를 한 건가?

세아 역시 승희의 말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는지 나를 바라본다.

뭐지. 왠지 벌써 세 명한테 합공 당하는 느낌인데.

"알았어."

"내일 저녁 먹기 전에 들어와요."

"그래."

"조심히 다녀와요."

뭔가…. 내집인데 축객령을 당한 느낌이다.

그대로 밖으로 나가다가 뒤를 돌아보니 세 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어…. 이거 괜찮은 거 맞지? 그렇지?“

내가 나가자마자 셋이 머리끄덩이 잡고 싸우는 건 아니겠지?

밖으로 나왔고, 벙커문을 닫았다.

차가운 겨울 공기가 코로 스며든다.

이제야 조금 살 것 같은 기분.

내가 방금 살 것 같다고 생각한 건가?

벙커 안이…. 불편하다고 생각한 거야?

맙소사. 나는….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른 게 아닐까?

하루.

길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다.

뭘 하면 좋을까.

내가 지켜야 할 세 여자가 여기 다 있으니 마음 같아서는 이 바깥에서 기다리고 싶지만, 마땅히 있을 곳이 없다.

본진으로 갈까. 그래 일단 본진으로 가자. 본진도 밀린 확인은 해야 하니까.

멀티에서 본진은 그리 멀지 않기에 금방 도착했다.

간단하게 음식을 준비해서 모니터 룸으로 들어간다.

밀린 카메라를 빠른 배속으로 틀어놓고 음식을 입안에 쑤셔 넣는다.

살기 위해 먹는 음식. 맛은 그리 중요하지 않지.

카메라 안에서 조용한 거리가 128배속의 속도로 흘러간다.

그렇다 해도 밀린 걸 보려면 한참 걸린다. 보면서 때려치울까 하다가 계속해서 본다.

128배속은 눈만 잠깐 깜빡해도 화면이 순식간에 지나가니까.

결국은 별거 없다.

주변을 다 털어놨고, 겨울이기도 하니 사람이 없다고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지.

됐고. 이제 뭘 하지?

잘까? 푹 자는 거 만큼 좋은 게 없는데.

아니면 백마촌으로 가서 먹이를 기다릴까?

점점 오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하지만, 그래도 같은 시간에 밖을 헤매는 것보단 훨씬 더 먹잇감 구하는 게 쉽고 빠르다.

쩝. 됐다. 백마촌은 인제 그만 놔주자.

차라리 다음 계획을 세우는 게 낫지.

내가 죽여버린 현주. 그 여자가 알려준 캠프.

그녀가 적어놨었던 종이를 꺼내서 훑어봤다.

위치는 여기서 걸어서 두 시간 정도. 전동휠을 타면? 40분? 그 안쪽.

인원은…. 본것만 열다섯. 그 이상이란 소린데.

어차피 지금의 나에겐 그리 두려울 건 없다. 인원이 몇이든 보이는 족족 처리할 수 있으니까.

공격 스킬을 가진 여자가 있으면 일은 더 편해진다. 시간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겠지.

갈까? 지금?

아니다. 거긴 다음에 가자. 괜히 갔다가 시간 안에 못 돌아오면 걱정할 테니까.

그래. 벙커.

벙커를 찾아야 해.

사람이 늘었으니 지금 저 작은 벙커로는 조금 좁다.

애초에 4인용 벙커긴 하지만 정말 네 명이 들어가면 꽉 차는 느낌이라 그리 쾌적하진 않을 거다.

큰 벙커. 어디서 구하지.

일단 배낭에 있는 종이를 꺼냈다.

벙커 제작 회사에서 가져온 고객 명단.

그걸 꺼내서 찬찬히 살펴봤다.

예전에는 이 근처를 기준으로 삼고 가까운 곳에 있는 벙커만 살펴봤다.

지금은 약간 거리가 있어도 사이즈가 큰 것들을 찾아봐야 한다.

사이즈가 큰 것만 보자. 어디 보자. 10인용. C타입. 50인용 D타입? 50인용이 있어?

뭐지? 50명이 들어갈 자리면 상당히 큰 거 아닌가?

종이에 적힌 곳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펴봤다. 서울 안에는…. 당연히 없네. 하나 정도는 있을 법한데.

결국은 교외로 나가야 하는 건가? 물류센터랑 너무 멀어지면 안 되는데. 왔다 갔다 하기 귀찮아져.

잘나가는 회사였었는지 고객 명단이 생각보다 많아서 꼼꼼하게 보니 시간이 꽤 걸린다.

그래도 수확은 있었다. 일단 두 군데.

둘 다 10인용 벙커. 한숨 자고 여기나 한번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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