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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물류센터로 걸어가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가장 먼저 느껴지는 것은 홀가분함.
경험도 능력도 없는 내가 갑자기 여러 집 살림을 하면서 제법 부담이 있던 게 사실이다.
항상 신경 써야 하고 쫓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으니까.
게다가 어느 한쪽에 집중하지 못하는 게 너무 찝찝했다.
승희와 있으면서도 미나를 걱정하고, 미나를 만나면서 세아도 신경 쓰고, 세아와 함께하면서 승희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계속 해야 하는 건 상당히 스트레스가 됐었단 말이지.
하지만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게다가 승희가 저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주는 게 너무 고맙다.
그게 가장 큰 거 같다.
도움받을 수 있다는 것. 나 혼자 좌충우돌하며 해결할 필요가 없다는 것.
누군가에게 도움 받는 게 익숙하지 않은 나에겐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황송한 일이다.
저녁의 물류센터는 상당히 멋지다.
나무의 요새 같은 느낌. 이제 봄이 되고 주변에 나무를 더 많이 심게 되면 숲의 요새가 되겠지?
입구에 있는 저 컨테이너만 어떻게 하면 좀 나을 텐데. 위장 페인트라도 발라야 하나.
"오셨어요."
"니가…. 동현이지? 투명화?"
"네. 맞아요. 드디어 외우셨네요."
"그러게. 내가 남자 이름을 또 외워버렸어."
"하하. 영광이네요. 형한테 이름도 외워지고. 누굴 찾아온 것인지 몰라서 아직 안쪽에 무전 안 했는데. 누구 불러드려요?"
"음. 아냐. 안으로 들어갈게. 리더 어딨지?"
"승규 형이요? 잠깐만요."
동현이는 무전기로 안에다 물어보더니 나에게 대답해준다.
"비닐하우스에 있데요."
"알았어. 고생해라."
"네."
비닐하우스로 가니 승규가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어. 왔어?"
하율이와 함께 작물을 돌보고 있는 승규,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유정과 안나.
안나가 나를 보더니 환한 표정으로 다가와 내 손을 덥석 잡는다.
"고마워. 정말 고마워. 구해줘서 고마워."
"어?"
"안나가 성철씨 오면 꼭 말해주고 싶다고 제일 먼저 배운 한국말이에요."
옆에서 유정이 거든다.
아. 그렇구나. 깜짝 놀랐네. 한국말을 너무 유창하게 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안나는 유정에게 빠르게 뭐라고뭐라고 말했고 유정은 그 말을 해석하는 듯 잠시 듣고 있다가 나에게 말한다.
"혹시 안나를 잡았던 사람들 필요한 정보나 물어볼 게 있으면 자기한테 물어보라고 하네요. 알고 있는 것들은 다 대답해준다고."
"아. 괜찮다고 전해줘요. 어차피 다 죽였으니까."
내 말을 들은 유정은 살짝 흠칫했지만 그대로 안나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안나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뭐라고 말한다.
"그 백마촌 말고 호텔로 찾아왔던 놈들에 대한 거라는데요? 표현이 조금 거칠어서 좀 순화해서 전달했어요."
"아…. 리스트에 있던 그놈들인가."
"네?"
"아니에요. 잠시만요."
나는 배낭에서 서류 뭉치를 꺼냈다.
세아가 열어준 백마촌 보스의 금고. 거기에서 나온 리스트들.
딱 봐도 스케쥴 표 같은 거다. 그리고 장부 같은 것들.
거기에 적혀있는 이름들. 단체들. 다 잡아 죽이면 코인이 될 놈들이지만 이름만 보고는 어디에 사는 어떤 놈인지 알 수 없는 놈들.
"이런 녀석들 말하는 거 같은데. 이 여자 한글 아직 못 읽죠?"
"네. 말하고 듣는 거랑 읽고 쓰는 거는 난이도가 다르니…."
"그럼 혹시 여기 이거 보고 한번 물어봐 줄래요? 이거 일일이 통역을 부탁하려니 상당히 죄송하네요."
"아니에요. 이 정도로 뭘. 저도 전문적인 통역은 아니라서 어설픈걸요."
"그래도 형수님 없었으면 아예 의사소통이 안 됐겠죠. 고마워요."
내 말에 유정이 씨익 웃는다. 나는 그런 유정에게 말했다.
"러시아 어 할 줄 아는 사람이 형수님밖에 없으니 번거로우시더라도 부탁 좀 해야겠어요. 안나에게 이거 보여주고 여기 적혀있는 녀석들에 대해서 좀 알아봐 주세요. 아는 게 거의 없을 테지만 그래도 본인이 저렇게 말하는 거 보면 뭔가 아는 게 있긴 한 거 같으니까요. 안 그래도 물류센터 살림 도맡아서 하시는데 바쁘시겠지만 부탁 좀 드릴게요."
"걱정 마요. 나도 도움이 될 수 있다면 이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죠."
"아. 그리고."
"네?"
"혹시 안나가 한국말로 무난하게 의사소통할 수 있으려면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사람에 따라 달라서…. 뭐라고 확답하기는 힘드네요."
"하긴 그렇겠죠. 알겠어요. 아무튼, 부탁드릴게요."
부탁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는거야.
아무튼, 유정과 대화하는데 안나는 나를 향해 계속 환하게 웃으며 무슨 대화를 하는지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이다.
비현실적으로 이쁘게 생긴 여자가 나를 향해 계속 호감을 보인다는 건 역시 즐거운 일이다.
이걸 마다할 남자가 과연 있을까? 없지.
"아 참. 그리고 중요한 게 하나 있는데."
"네?"
"여보. 그거 말해봐요. 스킬."
"아. 스킬!"
승규가 내 쪽으로 오더니 말한다.
"맞아. 그 이야기를 해야지. 안나 스킬에 대해서."
"네? 아. 그러고 보니 안나 스킬도 모르네. 말이 안 통하니 물어볼 생각도 못 했네."
생각해보니 상당히 위험했다.
백마촌 놈들이 안나에게 별다른 구속을 하지 않아서 위험하지 않은 스킬이라고 생각하고 안심하긴 했지만, 아직 무슨 스킬인지도 모르잖아.
"그게. 안나는 스킬이 없는 거 같아."
"네? 그게 말이 돼요?"
"아니. 스킬은 고를 수 있는데 스킬이 한글로 돼 있어서 못 골랐나 봐. 그래서 스킬 칸이 공석으로 되어있데."
"어? 진짜요? 아직 스킬을 안 골랐다고요? 근데…. 한글로 나온다고요? 뭐지? 러시아 사람이면 러시아 어로 나와야 하는 거 아닌가?"
"글쎄 나도 모르겠어. 아무튼, 자기는 스킬이 한글로 나온 데. 그래서 뭔지 몰라서 그대로 뒀다고 하더라고."
"와. 대박. 완전 대박이네.“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한국어로 스킬이 나왔을 리는 없다. 아마 안나에게만 뭔가 문제가 있어서 저렇게 된 거겠지?
말이 되나 싶지만, 스킬 만들어 놓은 놈들 일 처리를 보면 이런 일은 충분히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뭐가 됐든 나이스네.
"그래서 스킬 고르기 전에 너한테 물어보려고 한 거야. 아무래도 네가 이런 건 잘 알 테니까."
"주변 인간 탐지."
"어?"
"주변 인간 탐지 고르라고 해요. 무조건 그거밖에 없죠."
"아하. 그게 그거지? 주변 반경 안에 사람 기척 느낀다는? 그래. 그게 있으면 좋겠네."
승규에겐 탐지에 대해서 말해준 적이 있어서 그런지 바로 이해하네. 역시 리더감이야.
"어차피 그 스킬은 물류센터에 있는 사람들이면 누구나 배워야 할 스킬이긴 해요. 쉽지는 않겠지만. 일단 안나가 먼저 배워 놓으면 상당히 안심되겠죠."
"그래. 그렇게 하자. 여보. 전달 좀 해줘."
"응."
나는 탐지에 대해서 내가 알고 있는 것을 상세하게 알려줬다.
고개를 끄덕이며 내 이야기를 듣는 승규와 유정. 안나와 하율이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면서 내 이야기를 열심히 듣는다.
그렇게 전부 이야기하자 유정과 하율, 안나는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 승규가 둘만 남게 되자 나는 슬슬 본론을 꺼냈다.
"아. 그리고."
"그래. 여기 온 목적이 있을 텐데 다른 이야기만 실컷 한 것 같네. 오늘 온 이유는 뭐야?"
"아. 그게. 세아 데려가려고요."
"세아랑 나가는데 나한테 말할 필요가 있나? 그냥 같이 나가면 되잖아?"
"아니. 완전히 데리고 가려고요."
"완전히? 여기 밖으로?"
"네."
"그래? 음. 아깝네. 우리 자물쇠 따줄 사람이 없어지겠어."
"아주 안 오는 건 아니니까요."
"그렇다 해도…. 흠. 너 여기 온 거 지금 누가 알지?"
"나요? 입구에 동현이랑 방금 본 사람들?"
"그럼. 지금 바로 나가라. 세아는 내가 말해서 내 보내줄게. 한 30분 있다가?"
"왜요?"
"으휴. 여기 있는 사람들 생각도 해야지. 특히 여자들 생각도 해줘."
"네?"
"일단 나가자. 여기 있다가 너 온 거 알면 조금 귀찮아져."
나와 승규는 입구의 컨테이너로 갔다.
"동현아. 너 교대 몇 시지?"
"저 이제 30분 정도 남았죠?"
"그래? 그럼 들어가 쉬어. 내가 다음 사람 올 때까지 있을게. 다음에 누구지?"
"민준이요."
"그래. 알았어. 가시 쉬어."
"진짜요? 왜요? 무슨 일 있어요?"
"별거 아냐. 성철이랑 여기서 뭐좀 테스트해보려고."
"아. 그래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민준이한테 늦지 말고 내려오라고 하고."
"네."
동현이가 안으로 들어갔고, 승규가 나를 바라본다.
"왜 이렇게 번거롭게?"
"성철아."
"말해요."
"여기 여자들. 다 좋은 사람들이야. 그치?"
"그거야 전 모르죠."
"암튼. 좋은 사람들이야. 그리고 공통점들은 어쨌든 너한테 어떻게든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런데요?"
"너는 잘 모르겠지만, 다들 너한테 알게 모르게 호감이 있어. 그건 아니?"
"약간은 알죠. 근데 그건 남자에 대한 호감보단 그냥 고마움의 호감이잖아요? 몇몇은 아니긴 하겠지만."
"감정이란 더럽게 복잡하면서도 어떨 때는 참 단순해. 고마움의 호감이 남성으로의 호감이랑 명확하게 구분이 된다고 생각해?"
"글쎄요…. 그런 건 잘 몰라서."
"그리고 알다시피 여기는 상당히 폐쇄적인 곳이야. 그리고 내가 이런 말을 하긴 조금 웃기긴 하지만…. 여기 몇몇 여자들은 상당히 금욕적으로 살고 있어. 강제로."
"그건 무슨 말인지 알겠네요."
나도 생각해본 일이긴 하다. 자매라던가 지연이라던가, 암튼 짝이 있으면 모르겠지만 짝이 없다면 물류센터는 그녀들에겐 수도원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것들은 어디 내색하기도 힘들다. 그저 속으로 끌어안고 끙끙거릴 수밖에 없는 문제.
구성원들의 성욕을 신경 써야 하는 것도 참…. 할 짓이 못되겠어.
"그런 그녀들이 네가 세아를 데리고 나가서 산다고 하면…. 분위기는 썩 좋지 않을 거야. 여길 맡은 입장으로 그건 그다지 달가운 상황은 아니지."
"이해해요. 그러니 자연스럽게 세아를 내보내겠다?"
"그래. 안 그래도 투명화 배웠다고 신나 하는 아이고 원래부터 밖에 나다니는 걸 좋아했던 거 같으니 크게 문제는 없겠지. 그러니 자연스럽게 내보내 줄게. 너 따라 나간 게 아니고 외부 활동이 길어지게 되는 거로."
"알겠어요. 근데."
내 말에 나를 의아하게 바라보는 승규.
"그냥 자유롭게 하시죠? 발칙한 말일 수도 있지만…. 형도 그냥 자유롭게 여자들 안고 싶지 않아요?"
내 말에 승규는 쓴 미소를 짓는다.
"남자끼리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지만…. 당연히 나도 그러면 좋기야 하겠지. 근데 나는 남자이기 전에 아빠고 남편이야. 그러기는 쉽지 않지."
"세상이 망했는데 아빠고 남편인 게 그리 중요한가요?"
이야. 누가 보면 나는 건실한 무리의 리더를 시험하는 사탄 마귀처럼 보이겠네.
유혹과 타락의 악마쯤 돼 보이려나?
"그 생각을 안 해본 게 아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지키려고. 내가 그렇게 여자에 환장한 것도 아니고. 아마 너도 30대에 접어들면 내 마음을 이해할 거다."
"몇 살이 돼도 여자는 좋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조금 달라. 여자를 안으면서 느끼는 쾌락보단 거기에 들어가는 책임이 더 귀찮아지는 순간이 오거든."
"책임지기 귀찮아서 쾌락을 포기한다?"
"지극히 계산적인 행동이지. 특히 지금의 나 같은 경우는 득보다 실이 더 크니까."
"모르겠네요. 암튼 뭐 그렇다면 저도 존중은 해드려야죠. 그럼 쓸만한 남자 놈들이라도 잡아 와야 하나?"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 승주랑 중현이가 빨리 컸으면 좋겠는데."
"걔들도 지금은 충분히 남자 구실은 하잖아요? 아. 이거 대화가 조금 이상하네. 애들을 생체 딜도로 쓰라는 말 같잖아. 굶주린 여자들에게 던져주라는 느낌이네."
"하겠지. 그 나이면 혈기 왕성하지. 근데 그런 건 내 맘대로 되는 게 아니니까."
"에휴. 고생이 많네요. 이런 것도 신경 써야 하고."
"그러게. 연애하든 서로 눈이 맞든 그런 건 알아서 할 테지만 그래도 조건은 맞춰 줘야지. 그래야 불만이 나오지 않지."
"남자놈들은 살려두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쩝. 진영이 정도 되는 놈들이면 그래도 살려줄 생각은 있지만."
"진영이는 훌륭하지. 근데 걔는 서현이한테 푹 빠져있으니까."
"으휴. 암튼 알겠어요. 그럼 밖에서 기다리라고요?"
"어. 카메라 있는데 근처쯤에서 기다려. 그쪽으로 준비하고 나가라고 할게."
"알겠어요."
"조심히 가라."
"네. 갈게요."
물류센터 밖으로 나왔다.
참…. 쉬운일이 아니다. 구성원들의 성욕까지 신경 써야 한다니.
내 일이 아니라서 쉽게 생각하는 건가? 그냥 자유롭게 살지. 번거롭게.
하긴. 또 너무 문란하면 그것도 문제가 되겠지. 뭐든 급진적일 필요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