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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
"섹스."
"뭐야. 갑자기 섹무새야?"
"아아뇨! 무슨 소리에요!"
"아니 깜짝놀랐잖아. 갑자기 섹스라 그래서."
"그게 아니고 섹스할 때 눈치챘다고요!"
"응? 이해가 잘 안 가는데."
"쳇. 이런걸 내 입으로 말해야 한다니. 조금 슬프네요."
승희의 말에 약간 불안해진다. 섹스? 내가 뭘 잘못했지?
실수한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나를 흘겨본 승희는 천천히 말을 꺼낸다.
"오빠는 다른 데선 거의 티가 안 났어요. 한가지 빼고. 그건 이따가 이야기하고. 암튼 밖에 오래 나갔다 오는 건 흔한 일이고 와서 씻고 자고 먹고 다시 나가는 일이 다반사였으니까. 근데 섹스는 달랐어요."
자꾸 승희가 섹스섹스 거리니까 조금 기분이 야릇하다.
미나랑 잔뜩 하고 오지 않았으면 그대로 덮쳤을 것 같다.
"분명 오빠는 섹스가 단조로웠거든요? 가슴 빨고, 핥고, 꼬집고, 비틀고, 그러면서 애무해주고, 거의 정상위, 가끔 뒤로."
"어우. 말하는 건 넌데 왜 내가 부끄러워지냐. 너무 표현이 적나라한데."
"뭘. 자기가 매번 하는 거면서 부끄러워하기는…. 섹스가 부끄러워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조금 민망하긴 하지."
"그런 사람이 나한테 장난감으로 그렇게 장난을 쳤어요?"
"미안…. 그건 내가 할 말이 없네."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암튼 오빠가 변태적인 건 알고 있었는데 섹스 자체는 굉장히 단조로웠단 말이에요. 저도 체위를 다양하게 한다고 더 좋고 그런 건 아니니까 상관은 없었죠. 근데 어느 순간부터 한 번도 안 해본 것들을 자연스럽게 했다고요. 아주 익숙하게."
"아…."
"아…. 는 무슨. 생각도 못 했죠? 그런 것들은?"
"그러게. 그 정도까지 신경 쓸 정도로 똑똑하진 않아서…. 생활이나 행동 같은 건 익숙하니까 상관없는데. 섹스는…. 그럴 만하네."
"와. 변명도 안 하네."
"변명할 거리가 있나. 사실인걸."
"그래서? 좋았어요? 다른 여자랑 새로운 걸 마구 연습하고 와서?"
"으음. 이거 굉장히 새로운 힐난인데. 이런 문책을 당하는 사람이 있을까."
"이상하게 어려운 말 쓰지 말고요. 힐난? 문책? 뭐 의금부에서 조사받아요?"
"미안."
"아무튼. 그래요. 그리고 또 있어요. 아까 말했던 거. 이건 오빠가 너무 방심한 거 같던데."
"어?"
"함께 있고 싶다는 여자중에 한 명. 이름이 세아 맞죠? 잠금 해제 스킬 있는?"
"어? 어떻게?"
"무전기. 까먹고 있었죠?"
"아…."
"그래서 나는 그 여자 하나인 줄 알았는데. 둘이라니. 충격이야. 아무튼, 그랬다고요. 근데 그렇게 알고 있더라도 내가 뭐라고 할 수 없죠. 내가 부인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그냥 얹혀사는 주제에."
"아냐. 그렇게 생각하지 마. 넌 나한테 소중해."
"그래서? 셋 중에 누가 제일 소중한데요?"
나는 바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누구라고 대답한들 정답이 아닌거 같았다. 승희라고 대답한다고 승희가 기뻐할까?
눈앞에 있으니 립서비스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오…. 그래도 정답을 맞추셨네? 아니면 대답 못하고 어영부영하다가 졸지에 얻어 걸린 거예요?"
"어?"
"에이. 후자네. 봐요. 조금 전 대답. 정답은 그거에요. 침묵."
"그래. 그럴 거 같다고는 생각은 했어."
"분명히 말할게요. 그 다른 두 명이 와도 또 이야기할 거라고요. 여자 여럿과 살고 싶으면 적어도 똑같이 공평하게 대해줘야 해요. 오빠가 누구 하나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순간 그날로 그 생활은 수라장이 될 거라고요. 무슨 소린지 알아요?"
"응…."
"하…. 참. 이런 걸 말하고 있는 나도 너무 웃기네. 오빠. 내가 이런 걸 왜 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 하는 줄 알아요?"
"모르지. 나야."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는 승희.
"혼자 벙커 안에 있으면 온갖 잡생각이 다 들어요. 지금은 오빠가 가져다준 게 많아서 머리를 비우고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들이 많지만 예전에는 안 그랬잖아요. 저 방 안에 있을 때."
자물쇠가 담긴 방을 가리키는 승희.
그랬지. 지금이야 이렇게 자유롭게 다니지만, 승희는 내게 감금당했던 여자다.
아니 본인이 원하기도 했지만.
"할 수 있는 건 회상과 망상밖에 없었어요. 과거로 매몰되거나 있지 않은 일들을 만들어내거나. 그때 생각했던 거에요. 이런 상황도 전부."
"어떻게 이런 상황까지 생각한 거야…. 대체."
"오빠가 남자니까요. 그리 어렵지는 않죠. 오빠도 저 안에 있어 볼래요?"
"아냐. 미안."
"그 사과 좀 그만하고요. 별 효과도 없으면서."
몰랐는데 승희는 여장부 기질이 있다.
이렇게 박력 있고 똑 부러지는 줄은 몰랐네. 그냥 나가기 싫어하는 특이한 여자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무튼, 본인이 짊어지기로 한 짐이면 절대 중간에 내던질 생각 하지 말고 끝까지 가요. 이미 말도 다 꺼냈으니 이젠 돌이킬 수 없어요. 어설프게 하거나 어리바리하게 할 생각 하지 말고 확실하게 하란 말이에요. 그게 오빠의 책임이에요. 알겠어요?"
"알았어."
지금 내게 딱 필요한 말이고 꼭 명심해야 하는 말이다.
어째서 이 여자는 이렇게 명확한 걸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만 대충 가늠하고 있던 나에게 환한 길을 비춰주는 기분이다.
빛. 그래. 승희는 나에게 빛이다. 그런 여자다.
"그래서. 살 곳은요?"
"그건 아직 정해지지 않았어. 좀 더 크고 안전한 곳을 구할 거야. 아직은 없어."
"생각하고 있는 곳은 있어요?"
"응. 일단은…."
"아니다. 이건 나만 들을 내용이 아니네. 오빠. 다른 한 명 사는 곳. 멀어요?"
"아니. 그리 멀진 않아."
"데려와요. 지금 바로."
"바로? 아니 아까는 미리 만나본다면서."
"지금 해요. 딱히 정해져 있는 건 없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럼 이리로 오라고 해요. 아니면 내가 가요? 더 안전한 곳으로 해요."
"안전하기는 여기가 제일 안전하긴 하지."
"그 사람도 벙커에요?"
"아니. 아파트."
"아파트…. 안전한 거 맞아요?"
"여기보단 덜하지만, 그래도 일반적인 보안은 되지."
"그 사람은 스킬이 뭔데요?"
"질병 해제."
"질병 해제…. 힐이랑 질병 해제면 아파서 죽을 일은 없겠네."
"그러고 보니 그렇네."
"그럼 공격 스킬도 아니고 여자 혼자 있는데 아파트에 있다고요? 진짜 괜찮은 거예요?"
"일단 주변은 다 정리해 놨으니 갑자기 위험한 상황이 되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이쪽으로 오라고 해요. 못 오는 상황이 아니라면."
갑자기 적극적으로 변한 승희.
그런 그녀가 낯설지만 고마운 느낌이 든다.
내가 너무 서두르거나 너무 주저하면 그것 나름대로 신경 쓰이게 될까 봐 아예 자신이 나서는 거겠지.
착한 여자야. 정말로.
"알았어. 다녀올게."
"그리고 그 세아란 사람도 데려와요. 할 거면 바로 다 하는 게 낫지."
"그래. 그렇게 할게."
적어도 지금은 승희의 말을 듣는 게 나을 것 같다.
승희가 말했듯 여자들의 일은 여자들이 조정하는 게 맞으니까.
아무리 모두 동의를 했다고 해도 세심한 것들은 본인들이 스스로 맞춰나가는 게 맞겠지.
밖으로 쫓겨나듯 나오게 된 나는 미나에게 향했다.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다시 돌아가는 길.
바닥은 이미 비 때문에 잔뜩 찰박찰박하는 상태다. 미나가 우산이 있나?
아파트에 도착할 때쯤 비가 완전히 그쳤다.
우산 같은 걸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네. 다행이야.
노크하고 카드로 아파트 문을 열고 들어가니 미나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본다.
"뭐 놓고 간 거 있어요?"
"어. 너."
"네?"
나는 당황해 하는 미나에게 간단히 설명을 해줬다.
병신같이 '승희가 데려오랬어요.'라고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나는 완전 쓰레기 새끼지.
그저 같이 살기 전에 미리 만나보는 게 좋겠다고, 그리고 여기는 그리 안전하지 않으니 아예 옮기는 게 낫지 않겠냐고.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미나는 그리 거부감이 들지는 않는 거 같았다.
평온한 모습의 그녀. 오히려 다른 것들을 걱정한다.
"가져갈 짐이…. 조금 많을 텐데."
"일단 생활에 필요한 것들만 챙겨. 필요한 것들은 내가 천천히 옮길게."
"그럼…. 필요한 것만 먼저 챙길게요."
"기왕이면 가져가야 할 것들을 다 말해줘. 문 앞에 빼놓게. 다시 물건 챙기러 너까지 왔다 갔다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래요? 그럼…. 일단 이리 와보겠어요?"
미나와 함께 짐들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봐야 그리 많지도 않았다.
옷들, 내가 준 노트북, 털실과 책들. 기타 등등.
차로 한 번만 쓱 오면 끝나겠네.
"지금은 그럼 생활에 필요한 것만 챙겨."
짐을 다 챙긴 미나와 아파트를 나섰다.
자꾸 주변을 둘러보는 미나.
"왜 그렇게 봐?"
"그냥요. 내가 어디에 살고 있었는지 제대로 알지도 못했던 거 같아서."
하긴, 미나가 이곳에 오고 나온 건 저번에 백화점 말고는 없다.
바깥이 낯설긴 당연하지. 다 녹긴 했지만, 눈이 왔던 흔적 때문에 더 새로울 거고.
벙커가 있는 동네로 오자 미나는 신기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이런 데서 살고 있는 거예요?"
"아니. 따라와 보면 알아."
벙커의 입구 앞에서자 미나는 굉장히 놀라더니 눈을 반짝인다.
"와. 지하 벙커? 말로만 들어봤는데."
그렇게 놀라다가도 다시 표정이 굳는다.
아마 승희와 만나게 되는 자리니 긴장이 될 만도 하지.
벙커문이 열리고 미나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와 달리 제대로 옷을 입고 있는 승희. 벙커도 조금 치웠나? 그 짧은 사이에?
"어!?"
미나를 보고 놀라는 승희. 뭐지? 아는 사인가?
"페어리나인! 송미나!?"
아. 맞다. 미나는 아이돌이지. 승희가 아는 게 당연할 수도 있겠구나.
"헐…. 이 오빠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길래 걸그룹 아이돌을…. 와. 대박. 이리 와요.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마치 자기가 벙커의 주인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미나를 데려간다.
그러더니 따라 들어오는 나를 보고 말한다.
"한명 더 데리고 와요. 우리는 이야기 하고 있을게."
마치 납치당한 표정의 미나. 그리고 이 상황이 신나 보이는 듯한 승희.
아이고. 나는 모르겠다.
"조금 걸릴 거야. 전동 휠을 못 타니까."
"알겠어요. 조심히 다녀와요."
"다녀…. 오세요."
그렇게 활기차 보이는 승희와 약간 당황스러워하는 미나를 두고 나는 자리를 피하듯이 벙커를 나왔다.
이거…. 괜찮은거 맞지?